본문 바로가기

백두대간

그리움으로 걷는 백두대간-36구간<미시령-황철봉-마등령>

 

                                미시령-황철봉-저항령-마등령-금강굴-비선대(2006.10.22)

 

 

오늘은 서울 자유인8기의 배슈맑 아우,보라돌이 님과 설악의 북주릉인 미시령~황철봉~마등령 구간을 종주하기로 한 뜻 깊은 날.그래서 쾌청한 날씨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일요일 오후에는 폭우가 쏟아진다 하니 한가닥 불안감이 고개를 든다.원래는 한계령에서 점봉을 거쳐 조침령까지 22km를 끊어탈 요량이었으나 10월 말부터 설악산이 예년보다 일찍 출입금지된다는 정보에 따라 코스를 바꾼 것이다.


부산을 떠난 지 5시간이 지나 우리를 실은 기묵 아우의 봉고는 속초 시내로 들어섰다.옛날의 속초는 양양도호부를 따르는 작은 갯마을이었지만 일제시대 속초항이 개발되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명산 설악을 등에 업고 푸른 동해를 더불었으니 아쉬울 게 없고,아래위로 청초와 영랑같은 호수까지 거느렸으니 더 부러울 게 없는 곳이다.속초는 경주,김천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으례 차례를 다툰다고 택리지는 말한다.


속초의 모든 길은 미시령으로 통한다.속초 시내에서 차머리를 울산바위 쪽으로 돌려 미시령 길로 들어서면 금세 노학동의 학사평과 고성군 토성면의 원암리로 나뉜다.원암(元岩)은 조선시대 원암역(元岩驛)에 뿌리를 두었으니 아마 울산바위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지금의 원암은 설악의 콘도마을이 돼버렸다.콘도 역시 나그네가 잠시 묵어가는 곳이니 고개 아래 원암 땅은 예나 지금이나 그런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들머리 미시령으로 오른다.새로 개통된 미시령터널 오른쪽 길로  오르는 구불텅 56번 지방도로엔 어둠이 가득 내리고 새벽 안개가 자욱하다.백담사를 지났다는 배슈맑 아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미시령 고갯마루엔 24시간 출입을 막고 있으니 미시령 너머 도적폭포로 가기 전 왼쪽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며 그리로 내려오라는 주문이었다.그런데 미시령에 거의 다다를 즈음,다시 슈맑 아우의 다급한 전갈이 온다.들머리가 미시령 고개 아래 200미터 모롱이로 바뀌었으니 전조등을 끄고 그곳에서 기다려 달란다.

 

 

  [미시령에서 텅스텐모드로 찍은 속초-영랑호와 청초호에 푸른 이내가 잠겼다.]

 

예전에 소로길이었던 미시령(彌矢嶺)에 고갯길이 열린 것은 조선 성종24년(1493년)무렵이었다.그전에는 한양에서 관동으로 넘는 나라의 고갯길은 대관령과 소동라령(지금의 한계령)이었다.소동라령(所東羅嶺)이 좁고 험해 미시파령(彌時坡嶺)을 열어 양양,간성의 역로로 삼았다,그 미시파령의 간성 쪽 들머리가 원암역으로 지금의 원암리였다.그러다가 미시파령은 1632년부터는 이미 나랏길의 쓰임새를 잃고 다시 풀섶에 파묻혔다고 기록에 전한다.


그렇게 잊혀졌던 미시령에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길이 뚫린 것은 1960년이었다.그러나 워낙 험준한 탓에 미시령 찻길은 이내 망가져 방치되다가 1989년에 들어 다시 열렸다.미시령길은 한계령이나 진부령과는 달리 폭이 좁고 경시가 심하여 지금도 폭설이 내리는 겨울철에는 으레 서너 차례씩 길이 끊겼으니 예전에는 오죽했으랴.그러던 미시령 길도 지난해 터널이 뚫리면서 이제는 대간꾼이나 이따금 찾아드는 한갓진 옛길로 밀려나게 되었다.길의 부침도 우리네 사람살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미시령만큼 다양한 이름의고개도 드물 것이다.조선 시대,나랏길인 관로(官路)였을 적에는 미시파령(彌時坡嶺),또는 미시령(彌時嶺)으로 불리다가 영조때에는 지금의 이름인 미시령(彌矢嶺)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그렇지만 세간에서는 미시령보다 연수파령(延壽坡嶺,대동여지도),연수파령(連水坡嶺,증보문헌비고),여수파령(麗水坡嶺,증보문헌비고)또는 연수령(延壽嶺,택리지)으로 더 많이 불렸다.


속초에서 미시령으로 오르는 길은 내내 울산바위와 함께 오른다.먼 옛날 조화옹이 금강산을 빚을 적에 울산에서 금강산으로 가다 그만 설악에서 멈추었다는 울산바위.옛이름이 천후산(天喉山)이니 이름 그대로“하늘이 우는 산”이다.울타리를 두른 듯하여 울산(鬱山)이라고도 하지만 여름철이면 벼락과 천둥이 쳐 마치 하늘이 우는 듯 산이 울기 때문에 울산이라 하였다는 설이 옳을 성싶다.


미시령(770m)에 올라보지도 못한 채 그 아래 모롱이에서 자유인8기의 버스를 기다린다.봉고에서 나와 장비를 챙기고 고개를 드니 뜻밖에도 하늘엔 별이 초롱초롱 빛난다.오늘 산행을 걱정하던 우려가 말끔히 사라진다.잠시 뒤,대형버스가 다가오더니 자유인8기 회원들이 쏟아져나온다.어둠을 뚫고 슈맑 아우가 성큼섬큼 걸어와 내 손을 덥썩 잡고 반가워한다.“선배님,반갑습니다.도적폭포 쪽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선발대가 들머리를 이쪽으로 바꿨죠.”자유인8기 33명과 우리 7명 모두 40명이 가파른 비탈로 오를려는 찰나 또 한 대의 대형버스가 멈춰서더니 한 무리의 대간꾼을 토해낸다.슈맑 아우는“어찌 알았는지 우릴 따라 오네요.”서울의 고산마루 대간꾼들이었다.이리하여 미시령 옆으로 해서 대간마루로 오를 종주꾼들은 70명이 넘었다.


2시 35분,자유인8기를 따라 우리가 오르고 맨 뒤에 고산마루 대간팀이 뒤따른다.선두가 헤치며 오른 까꿀막진 산비알을 따라 줄지어 선 대간꾼들.일렬로 선 행렬 탓에 걸음은 느려지고 나뭇가지는 배낭을 끌어당기고...개척산행이나 다름없는 산길을 톺아올라 30분이 지났을까 미시령에서 오르는 대간마루와 만났다.뒤돌아보니 장사진을 친 랜턴의 행렬은 하나의 끄나풀에 이끌리는 집어등처럼 깊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낸다.저 아래 미시령 감시소의 서치라이트가 번쩍이며 하늘을 가르니 이제 안심해도 좋을 만큼 미시령을 벗어났나보다.


설악의 소슬바람이 분다.차겁지는 않아도 돌개바람이다.저 건너편 울산바위 너머 하늘바람이 불어온다.심호흡을 하며 그 바람을 들이킨다.누항에서 찌들리고 닫혔던 세포들이 살아난다.귀는 밝아지고 눈은 크게 열린다.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인다.갇혀 있던 내 안의 어리석음이 슬슬 풀려나간다.


부드러운 등산로를 따라가다 대간 길은 숲속으로 빨려든다.출발한 지 45분이 지나자 쉼터가 나오고 그곳에서 슈맑 아우를 다시 만났다.블로그에서 눈에 익은 빨간색 상의를 입은 보라돌이 님과 상견례를 했다.보라돌이 님은 너무 뜻밖이어서인지 할 말을 잇지 못하는 듯했다.나중에 정식으로 보기로 하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어두워 울산바위로 빠지는 갈림봉(1,060m)을 확인할 수가 없어 아쉬웠다.그저 허정허정 발품을 팔 뿐이었다.

 

[황철봉으로 오르는 거대한 너덜겅]

 

3시 50분,드디어 나라 안에서 가장 크고 힘들다는 3번 째 너덜겅가운데 그 첫 번 째 너덜이 나타났다.가는 비가 내려서인지 바위는 미끄러웠다.발 디딜 곳이 어중간했다.큰 바위가 서로 걸쳐 있기도 하고 포개져 있어 아차 발을 잘못 디디거나 몸 중심을 잃으면 바위 틈새로 빠져 다치기 십상이다.어둡기 때문에 오로지 너덜을 디딜 곳과 다음 동작에만 집중할 뿐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조금 큰 너덜은 바위턱을 잡고 몸을 밀어올려야 했고 요리조리 몸을 틀고 건너 뛰기도 했다.땀이 흐르고 숨길이 거칠다.그런데 얼마 전 다친 허리가 묵직해오더니 기어코 오른쪽 복숭씨 위가 결린다.이제 시작인데 초장부터 통증이 오면 큰 일인데...이를 악문다.눈 앞에 보이는 거대한 너덜겅이 내 앞을 가로막아서는 것만이 아니다.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숨어 있는 너덜은 이리도 힘이 드는가 보다.내 몸이 허락치 않는 게 아니라 이미 내 자신을 허락치 않으니 이다지도 난감하구나.

 

[길 없는 너덜겅을 헤집고 오르는 종주팀] 

[설악산을 대표하는 꽃이자 산악인의 상징-늦봄의 솜다리(에델바이스)/출처:달무리]

 

현기도 허리가 안 좋고,원경이는 3개월이나 산을 타지 못했다고 하소연한다.뿐만 아니라 재화는 무릎에 이상이 생겨 늘 고통스러워했는데 나까지 성치 못하니 걱정스럽다.두 발과 두 손을 써서 엉금엉금 너덜을 기어오르다시피 하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힘이 쭉 빠진다.게다가 등산화의 바이브람 창은 왜 그리 미끄러운지 릿지화를 가져오지 않음을 후회했다.후미를 독려하던 자유인8기 강지영 산행대장도 바이브람 등산화를 신고 온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바위를 즐기던 그녀도 창이 미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으니...

 

[너덜겅 꼭대기에 올라 가쁜 숨을 고르며] 

 

6시 3분,너널겅 정상(1,318.3m)에 올라섰다.친구들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우리는 잠시 다리를 풀고 사과 한 조각씩 베어물고 물을 들이킨다.그나마 기환이와 익수가 괜찮아 보이지만 오랜만에 대간을 타서인지 피로해보였다.완급 조절이 문제였다.

 

   [황철 남봉에서 건너다본 진대봉 아래 너덜지대]

 

이제부터 대간은 바위와 숲길이 어울린 길이어서 그런대로 걸을 만했다.그렇지만 아직도 사위가 어두워 설악의 진면목을 보기에는 일렀다.하염없이 마루금을 따라간다.지난 여름의 화려했던 꽃들도 스러지고 우리 앞에 다가서는 것은 바람과 암릉,그리고 고사목이었다.황철봉(1,391m)을 어떻게 지나쳤는지 모르겠다.드디어 활철봉 남봉 (1,360m)에 이르니 사나브로 어둠이 몰려가며 희부윰해진다.황철봉 남릉의 바위를 이리저리 돌아내려서니 저항령 앞쪽의 진대봉 산마루가 하늘금을 그으며 나타나기 시작한다.저항령에서 진대봉(1,270m)까지도 너덜겅이 사면을 덮고 있었다.

 

[저항령의 해돋이] 

 

6시 50분,저항령(1,100m)에 도착하니 텐트 한 동이 쳐져 있고 고산마루의 선두가 해돋이를 보며 사진을 찍는다.비에 축축히 젖은 저항령에서는 어디 앉아 있을 만한 자리마저 없었다.후미의 현기와 재화가 도착했다.이 저항령에서 왼쪽 저항령계곡을 따라내려가면 신흥사 앞 무명용사촌으로 가고,오른+쪽 길골을 따라 내려가면 백담사대피소로 빠지게 된다.재화는 이곳에서 탈출할 요량으로 내 의중을 떠본다.그러나 들머리가 희미한데다 초행 길에는 더 어려울 수 있고 조난의 위험이 있기에 은근히 거절했다.

 

[저항령에서 재화와 기환] 

 

저항령(低項嶺)은 북주능선(北主綾線)에 있는 고개 중의 하나이다.동쪽으로는 정고평(丁庫坪)에 이르고,서쪽으로는 길골(路洞)을 거쳐 백담사(百潭寺)에 이른다.늘목령이라고도 하는데,길게 늘어진 고개라는 뜻의 늘으목,늘목에서 유래하였다.늘목령은 늘목에 다시 고개 령(嶺)자를 붙여 늘목령이 되었고,저항령(低項嶺)은 늘목이 노루목으로 변하고,이것을 한자로 장항(獐項)이라고 표기했다.거기에 다시 고개 령(嶺)자를 붙여 장항령(獐項嶺)이라고 하던 것이,발음상 저항령(低項嶺)으로 변하고,이것을 고개의 의미와 무관하게 저항령(低項嶺)으로 표기한 것으로 짐작된다.이것으로 볼 때 저항령(低項嶺)도 마등령(馬登嶺)과 같이 옛날부터 이용된 길인 것을 알 수 있다. 

 

    [저항령에서 진대봉(1,270m)에 깔린 너덜겅 오르기] 

 

저항령에서 일출을 보며 또 다시 너덜겅을 오른다.이곳의 너덜은 황철봉으로 오르는 너덜보다는 크기는 작은 편이었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그렇지만 날이 밝아서인지 훨씬 수월했다.너덜이 끝나가자 왼편 능선으로 고사목과 같은 나무가 햇빛의 역광을 받아서인지 어슴프레하고 그 너머로 헌걸찬 암릉군이 즐비하다.저 암릉군을 다 통과하면 마등령 아래 잘룩이에 이를 것이다.힘겹게 너덜이 끝나고 진대봉(1,270m)에 올라서서 황철 남봉을 뒤돌아보니 문바위골로 거침없이 아침 안개가 몰려든다.

 

                                                                              [저항령~진대봉 사이의 너덜겅-정수리가 지척이다.] 

                                                                       [너덜겅에서 바라본 해돋이-외설악에 짙은 구름이 드리웠다.]

                                                                [진대봉 정수리에 거의 다다른 친구들-힘들지만 애써 웃음을 지어보인다.] 

                                                                                  [눈잣나무와 고사목 사이로 해는 떠오르고]

                                                                                 [진대봉 정수리에 올라 내려다본 너덜겅]

                                                                         [진대봉에서 뒤돌아본 황철 남봉과 황철봉,그리고 암릉들]

                                                                        [노도처럼 황철 남봉의 문바위골로 밀려드는 안개의 파도]

                                                             [진대봉(1,270m)에서 바라본 저항령 왼쪽 골짜기인 길골-백담사로 이어진다.]

                                                               [진대봉~마등령 능선 위의 암봉들...등산로는 거의 오른쪽으로 우회한다.]

 

눈부신 여명을 받으며 너덜 꼭대기,진대봉에 오르자 마등령으로 이어지는 암봉이 삼엄하다.설악의 날씨는 변화무쌍하여 종잡을 수가 없지만 눈 앞에 드리운 안개를 보니 오후에는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현실로 다가올 듯했다.저 멀리 공룡능선 너머로 대청봉이 구름에 가려 보이질 않고 발 아래에는 구름이 끊임없이 깔리고 있었다.갑자기 찬 바람이 불어와 반팔을 입은 내 몸에 한기가 스며들어온다.얇은 긴팔 티를 꺼내 입었다.  

 

                                                                      [진대봉 정수리에 치솟은 거대한 암봉-오른쪽으로 돌아내려선다.]

[첫번째 암봉을 내려서면 다시 오른편 바위 사이 비탈로 치올라야 한다.]  

 

눈 앞에 나타난 거대한 암봉 오르편으로 돌아내려간다.바위 아래로 난 등산로를 따르던 등산로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뾰족한 바위 사이의 가파른 돌길로 올라서야 한다.오른쪽 발을 내대딜 때마다 허리와 복숭씨 위 힘줄이 동시에 땡긴다.그러니 자연 걸음짓이 불안하다.그러다 보니 왼쪽 발에 힘이 들어가고 오른쪽 발은 그저 땅을 딛는 형국이라 누가 뒤에서 본다면 절뚝거리는 절름발이를 닮았다고 할 것이다.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발품을 판다.바윗길을 오르내리다 보니 이마에 땀이 나고 온 몸이 더워지면서 껴입었던 긴팔 티를 벗어버렸다.

 

                                                                         [한 뿌리의 바위벽에 치솟은 두 기암이 눈길을 사로잡는.]

                                                               [설악의 눈잣나무와 어울린 거대한 암봉-머잖아 은산철벽으로 바뀌겠지...]

 

다시 바윗길을 내려와 큰 암봉을 오른편으로 돌아든다.바위를 돌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이내 바람은 잦아들면서 반팔 티를 입었는데도 덥다.그 암봉 아랫자락을 돌며서 뒤돌아보니 거대한 바위벽에 두 개의 뾰족한 바위가 한 몸처럼 붙어 있었다.이 바위벽을 빠져나와 뒤돌아보니 늘 푸른 눈잣나무와 어울린 자태가 자못 위압적이다.

 

                                                               [바윗길이 끝난 지점에서 바라본 마등령,그 앞쪽에 세 암봉이 장관을 이룬다.] 

 

이제 암릉길은 끝나고 시야가 열리면서 비로소 헌걸찬 마등령이 모습을 드러내니 내 몸의 아픔마저 잠시 잊어본다.하지만 마등령은 온통 안개가 가려 그 실루엣만 보일 뿐 실체는 보여주지 않는다.다만 마등령 앞쪽으로 세 개의 암봉이 나란히 치솟아 장관을 이룬다.눈잣나무 산비알을 지나 첫번 째 암봉은 1,249봉,그 다음 두리뭉실한 형상의 암봉은 1,150봉,세번 째 암봉이 1,178봉이다.등산로는 모두 이들 암봉을 돌아가야 한다.

 

무엇 때문에 이 고통을 참으며 발품을 파는 것일까? 이 산행을 통해 내가 이루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어떻게 걸어야 하는 것인지...프랑스의 작가 발자크가 던진 해묵은 명제가 느닷없이 떠오른다.사람이 자유롭게 걸음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축복이요.행복이다.

 

걷기의 역사는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하면서였다.두 손과 두 발로 기어다니던 인류가 꼿꼿이 서면서 비로소 인간은 두 손으로부터 해방되었다.네 손이 자유로워진‘털 없는 두발 짐승’은 걷기를 통해 먹이를 구하고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며 안전하게 머물 곳을 찾았다.그러므로 걷기는 바로 문명의 시작이었다.


18세기 상류층 사회에선 산책문화가 성행했다.이들은 카톨릭 전례를 통해 훈련한 엄숙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과시했다.18세기 후반 낭만주의자들은 걷기에 고독과 자연과 합일이란 고상한 의미를 부여했다.영국 시인 워즈워스는 잉글랜드 레이크 지역을 도보로 여행하며 시를 썼다.루소는“나는 걸을 때만 명상할 수 있다.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도시가 산업화되면서 새로운 종류의 보행자들을 탄생시켰다.거리에는 기업과 관공서들이 문을 여닫는 시간에 맞춰 일정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물결이 나타났다.바삐 서둘러 걸어서 출근하는 사람,한가롭게 상점 진열장을 구경하는 사람,구걸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도시에 섞여 있었다.걷기는 혁명의 도구이기도 했다.프랑스혁명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으로 쳐들어간 군중들이 도보행진을 벌인 사건으로 시작됐다.한편 전체주의 독재자들은 걷기를 통해 군중을 길들였다.무솔리니는 1938년 무릎을 굽히지 말고 뻣뻣하게 걷는‘로마 스텝’을 전 국민에게 강요했다.히틀러는 아예 걷기를 통제했다.그는 통행금지,일제검거 등을 통해 허가받은 사람만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했다.

 

80년 대 초까지 통행금지로 묶여 있던 우리의 우울하고 불안했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사람들에게 걷기를 강요하던 로마시대도 문제였지만 걷기 자체를 금지하던 히틀러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전제주의는 인간의 의식을 파멸로 몰고가지 않았던가.그러므로 걸음을 걸을 수 없는 세계를 이제 우리는 어찌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건 형벌이요.감옥 아니던가?

 

오늘날은 자동차가 보편화되면서 걷기는 쇠퇴한 감이 들지만,사람들은 건강과 여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걷기를 선택하고 있다.산행이나 도보여행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극지탐험을 선택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걷기는‘평화행진’처럼 시위수단으로 쓰여지기도 한다.현대문명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걷기는 여전히 인류의 삶과 움직임의 핵심을 차지할 것이다.아울러 걷기가 제한되거나 통제되는 사회에서는 자유마저 유린된다는 것을 지나간 역사는 반증하고 있다.걷기는 자유요,인간의 고귀한 행위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오,위대한 걸음걸이여! 빛나는 자유여! 그대에게 축복이 내릴 것이다.

 

 

이제 대간마루에는 낙엽이 수북히 쌓인 부드러운 산길로 바뀐다.올해는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단풍은 별로였지만 낙엽만은 풍성하다.낙엽을 밟으며 걷는 대간 길이 그렇게 소담스러울 수가 없다.

 

 

          낙엽

 

지난 여름 그토록 찬란하게 푸르던 잎새

이제는 땅 위애 말 없이 누웠구나

 

어떤 것은 오그라지고

어떤 것은 망가지고 비틀어지고

또 어떤 것은 지난해 떨어진 낙엽 위에

다소곳이 기댄 채

서로 사이좋게 누워 있구나.

 

나뭇가지에 달려 뽐네던 너희들

당당함 다 잊어버리고

정답게 어깨 맞대어

헷빛에 눈부시게 젖는구나.

 

살아온 길 달랐지만

죽어서 비로소 만나

속살을 비비고 있구나.

 

아득한 푸른 하늘 그리며

포근하게 잠에 취해

왔던 그 뿌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1,149봉 암봉을 돌아나가며]

                                                        [1,150봉 암봉 능선에서 바라본 외설악-맨 뒤 마등령~세존봉 능선에 안개가 드리웠다.] 

                                                                                  [뒤돌아본 1,249봉 암봉-하산길이 선명하다.]

                                                     [마등령 잘룩이로 가다 만난 노송이 돋아난 기이한 형상의 암봉-멀리 울산바위가 아아하다]

 

1,249봉을 지나 숲길을 내려왔다.9시 26분,잘룩이에 다다라 1,249봉을 뒤돌아보니 엄청나게 큰 암봉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대간 길은 암봉의 날등을 타고 이어진다.왼쪽 발치 아래는 섬뜩할 정도로 가파르기 짝이 없지만 오른쪽은 다소 평평한 산비탈이다.암봉 두 개를 더 넘을 즈음,마등령 상봉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배슈맑 아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아마도 자유인8기를 비선대로 거의 다 내려보내고 우리와 막걸리라도 기울였으면 하는 아우가 궁금해서 전화를 넣었을 것이다.“곧 마등령 아래 잘룩이에 다다를 것이네.친구들이 걸음짓이 신통치 않아 자꾸만 늦어지는구먼.아마 30분은 더 걸릴 듯하이.”슈맑 아우는 천천히 조심해서 오라는 말을 남긴다.마등령으로 오르는 마지막 너덜겅이 우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등령 상봉으로 오르며 돌아본 구름바다에 솟은 울산바위]

 

전화를 받고 1,150봉 암봉을 지나 노송이 돋아난 암봉을 지났다.세번 째 암봉인 1,178봉 암봉을 지나 9시 28분,마등령 상봉 아래 잘룩이에 다다랐다.이제부터 마등령 상봉으로 오르는 길은 완만하게 오르다가 다시 너덜겅이 이어지는 길이다.너덜겅으로 다가가면서 고개를 돌리니 검푸른 울산바위가 구름바다 속으로 장중한 자태를 드러낸다.

 

                                                                 [마등령 상봉에서-왼쪽부터 배슈맑,보라돌이,청산 그리고 장만옥 후배]

 

재화와 나는 마지막 힘을 쏟아 상봉에 올라서니 슈맑 아우가 환하게 웃으며 우릴 반긴다.새벽녘 못다한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감격에 젖었다.그 곁에는 블로그를 통해 교감을 나누는 보라돌이 벗님의 다정하면서도 환한 얼굴이 보였다.또 슈맑 아우와 동기인 장만옥 후배도 거기에 있었다.만옥 아우는 지난 9월 10일 용마산악회 상주 갑장산 합동산행에서 만나 이젠 구면이 되었으나 설악의 이 깊은 산봉우리에서 다시 해후했으니 어찌 반갑지 않으랴!

 

                                                                           [용마산악회 동문 21산우회 동기들과 26산케 동기들의 만남] 

 

슈맑 아우와 마등령 상봉(1,328.7m)에서 20분 가까이 시간을 보내자 드디어 후미에 처졌던 친구들이 올라왔다.친구들을 슈맑과 만옥 아우,그리고 보라돌이 님과 인사를 나누게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슈맑 아우는 거의 50여분이나 선배들을 기다린 끝에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형님들과 한 잔 하려했는데 시간이 없어 먼저 내려갑니다.”라며 아쉬움을 표했고,나한테는“보라돌이 님이 준비한 발렌타인을 저 아래 매표소로 가져 갑니다.천천히 친구분과 계시다가 내려오세요.”하며 비선대로 발길을 재촉한다.한편으론 고맙고 또 한편으론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결국 마등령 상봉에서 선후배의 만남은 이슬이 한 잔 없이 맹숭하게 끝을 맺었으니 무척 서운했다.

 

                                                                         [마등령 상봉(1,328.7m)에서 공룡능선을 등진 송원경 동기]

                                                      [마등령 상봉에서 외설악 쪽 전망대로 다가가 바라본 황철봉과 대간마루금,그리고 운해]

                                                        [마등령 상봉에서 바라본 공룡능선-짙은 안개 탓에 공룡은 희미했고 비가 내릴 듯하다.]

                                                                  [외설악의 비선대와 내설악의 오세암,백담사로 갈라지는 마등령 4거리]

 

우리는 마등령 상봉에서 공룡능선을 등지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울산바위 쪽 외설악의 풍경을 감상하기도 했다.그런 다음,비선대와 오세암으로 갈라지는 마등령 사거리에 다다랐다.마등령은 설악산(雪嶽山) 대청봉(大靑峯)까지 공룡능선이라 부르는 암릉의 기점이다.북쪽의 미시령(彌矢嶺,770m),남쪽의 한계령(寒溪嶺,1,004m)과 함께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주요 통로였다.지금은 북한강의 지류인 북천 백담 계곡(百潭溪谷)과 동해로 흐르는 천불동 계곡(千佛洞溪谷)의 비선대(飛仙臺)를 잇는 대표적 등산로이다.설악산국립공원의 중심부이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대청봉의 조망이 일품이지만 오늘은 안개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마등령 사거리를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비선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