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복령~원방재~상월산~이기령~갈미봉~고적대~연칠성령 16.45km(2005년 6월 5일)
금강산과 설악산을 지난 백두대간은 오대산 아래 대관령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곧장 백복령을 건너 청옥산과 두타산으로 이어진다.한편으로는 푸른 동해를 거느리고 또 한편으로는 한강 유역을 품에 안아 무릇 대간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남진한다.그 백복령으로 간다.
1주일 전,세 동기의 불참으로 속리산 구간을 벌충한데 이어 금년 처음으로 백두대간 끊어타기를 재개한다.그러나 세 동기가운데 김익수 동기만 참가했고 김황세,최금구 두 동기는 종주에 오지 못했으니 못내 아숴웠다.
오기묵 후배의 봉고로 장쾌한 7번국도 따라 삼척시에 이르러 왼쪽 42번 도로로 꺾어든다.동해시의 유명한 무릉계곡 들목을 지나면서 남면치에 다다르자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오른쪽은 강릉시 옥계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이번 구간 종주들머리,백복령 오르는 길이다.
6월 5일 새벽 3시,백복령(780m)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승용차 한 대가 불을 밝히고 있다.대구에서 온 두 종주꾼은 1년 반 전에 대간 종주를 마치고 이번 구간을 땜빵하러 왔단다.황금빛 별들이 마구 쏟아지는 백복령에는 정선군에서 세운 아우라지,정선 아리랑의 고장이라는 빗돌이 어둠 속에서도 선연하다.
백복령은 삼척의 소금이 넘던 소금 고갯길이다.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개,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 한다.서해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의 소금 길은 뱃길 따라 충북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라와 기껏 영월읍에 닿아 멈추었고,정선 땅은 올곧게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에 의지하여 살았다.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던 소중한 길목이 백복령이다.
소금꾼들이 정선의 아우라지,여량으로 가기 위해 백복령을 넘나들던 고단한 삶을 대변하는 정선 아리랑의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가 실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하다.
우리 댁의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찌거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헐께눈에 노가지나무 뻐덕지개 부끔덕
세쪼각을 세뿔에 바싹 매달고 엽전 석양
웃짐 지고 강능 삼척으로 소금 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구비 부디 잘 다녀오세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정선엮음 아라리 중에서」
3시 40분,헤드랜턴에 불을 밝히고 연칠성령으로 발품을 판다.원래 계획은 연칠성령에서 백복령까지 종주를 해야 하나 비경이 연이어지는 무릉계곡을 다시 보고자 하는 중지에 따라 거꾸로 대간을 타게 되었다.
숲 속으로 들어서자마자 완만하면서도 부드러운 흙길이다.10분 뒤,855봉 전망대에 올라서니 동해시와 삼척시의 불빛이 보석처럼 빛을 발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아 종주를 하기에 그저 그만이었다.전망대를 지나면서 대간은 거진 남진한다.다시 숲속으로 빠져들어 쉼 없이 걸음을 재촉한다.종주들머리부터 이렇게 편한 길은 아마 처음인 듯했다.
5시 18분,숲속을 벗어나자 처음으로 눈앞이 훤히 열리면서 850미터 잘룩이에 있는 전망바위에 다다랐다.앞쪽으로는 1,015봉이 우뚝 솟았고 오른쪽 골짜기로는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일원이 새벽안개에 휩싸여 그림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850봉 전망바위에서 다리쉼을 하며]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쪽의 운해]
850미터 잘룩이 전망바위에서 다리를 풀고 물을 들이키며 요기를 한다.기환이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홍삼정 팩을 친구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준다.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도타운 정이 철철 흘러넘치는 순간이다.어디 그뿐이랴.재작년에는 황세가 반팔 기능성 티를,금년에는 기환이가 긴팔 기능성 셔츠에 "이일산우회 백두대간 종주"를 새겨 대간팀에게 제공했으니 대간에 대한 그의 열정과 친구들에 대한 후의에 우리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대간을 종주하면서 우린 저 혼자 먹고 마시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떡 한 조각이라도 함께 나누어 먹곤 한다.28번 대간을 끊어타면서 우리는 하나의 끈으로 묶인 실타래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왔다.팀웍이 무엇보다 중요한 게 대간 종주다.개인의 산행능력이야 차이가 없을 수 없겠지만 공동체의 단합은 개인의 산행능력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멀고 먼 험로(險路)를 우리는 끈끈한 우정과 동지애를 바탕으로 헤쳐 나왔으니 그 또한 보람찬 일일 것이다.한 개인의 기준에서 대간을 보는 게 아니라 친구들의 입장에서 대간을 분석하고 검토하고 일정을 세워야 하는 법이다.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종주해낼 수 있었다.전망바위에서 우리가 올라야 할 1,015봉을 배경으로 친구들을 카메라에 담는다.동해에서 떠오른 태양이 사위를 비춰 만물이 생기가 넘치고 친구들의 얼굴도 붉으므레 하다.
[전망바위에서 다리쉼하며-뒷쪽으로 가야 할 1,015봉이 듬직하다.]
5시 29분,전망바위에서 내려와 발품을 판다.5시 55분 1,015봉에 올라서니 헬기장이 나오고 대간은 왼쪽(동)으로 방향을 틀어나간다.5분쯤 더 발품을 팔자 산행안내판과 만난다.원방재까지 2km 남짓 남았다고 적혀있다.
[원방재로 가며 바라본 상월산-동쪽은 가파르고 험하다]
전망바위에서 상월산 일원을 조망하고 원방재(720m)로 가는 대간 길에는 하늘로 쭉쭉 뻗은 적송이 즐비해 보기에도 시원스럽다.오지인 이곳의 적송은 접근이 용이하지 않아 도벌꾼들의 남획으로부터 용케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6시 44분,장구목이라고도 불리는 원방재에 다다르니 좌우로 갈림길이 열려 있다.왼쪽은 동해시 달방동 삼흥마을,오른쪽은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부수베리로 빠지는 길이다.사진은 동해시 삼흥마을 쪽으로 선 동기들의 모습이다.
친구들이 원방재에서 다리쉼을 하는 동안 나는 오른쪽 갈림길로 15미터쯤 내려가니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임도가 개설돼 있다.이 임도는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부수베리에서 시작,원방재와 이기령을 거쳐 갈미봉 북동릉의 괘병산(1,221m)을 감돌고 이어 중봉산(1,259.3m) 산허리를 감싸며 석이암산(970.4m) 동쪽 골짜기로 해서 정선군 임계면 장성거리로 이어지는데 어림잡아도 60km는 될 듯하다.이 임도는 석이암산 위 기추목이에서 또 다시 남쪽으로 가지를 쳐 삼척시 하장면 갈전리까지 이어지는데 그 거리가 좋이 25km는 됨직하다.모르긴 해도 MTB 코스로 이용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언제 시간이 나면 이 임도를 꼭 답사해보고 싶다.
[장구목이라고도 하는 원방재에서]
이제 상월산으로 오른다.상월산 오름길은 생각보다 가파르지는 않으나 대간 왼편은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전형적인 지세인 탓에 골짜기를 내려다보면 아찔 할 정도로 직벽을 이루고 있다.원방재에서 남동진하던 대간은 890봉에 이르면 거의 동진하며 서서히 고도를 높여나간다.
이제 조망이 트이는 지점에서 원방재까지 우리가 밟은 대간마루를 뒤돌아본다. 사진 아래쪽을 가로지르는 능선 위에 하얗게 빛나는 지점이 상월산을 바라보던 전망바위이며 그 오른쪽 봉우리는 860봉,그 뒤 숨겨진 봉우리 또한 860봉이다. 그리고 두 봉우리 바로 위 왼쪽으로 높게 치솟은 봉우리가 1,015봉이다.1,015봉 뒤쪽으로 푸른 산그리매는 삼각점이 있는 987.2봉,그 산줄기 따라 맨 오른쪽에 보이는 봉우리는 대간이 남동에서 남서로 급격하게 꺾이는 815봉이다.
[원방재 위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상월산능선과 대가마루]
7시 35분,상월산 정상에 다다르니 나무로 된 해묵은 정상 안내판이 고사목에 걸려 있다.당찬 산세와 달리 정상에는 그 흔한 표석마저 없으니 참으로 순박한 분위기였다.우리는 이곳에서 김밥으로 아침을 때운다.
그때 진주의 알파인가이드 선두 일행 9명이 상월산으로 올라온다.백복령에서 댓재까지 간다는 이들은 지난해 겨울 폭설 때문에 2시간 거리를 종주하는데 무려 6시간이나 걸린 끝에 철수하고,금년 처음으로 대간을 재개해 29명이 참여했다고 한다.상월산 정상에 미리 진을 친 우리 근처를 살피던 그들은 아침을 들 마땅한 장소가 없자 정상 너머로 사라졌다.
오늘 두 번째 대간 길에 참여한 원경이는 아직은 괜찮다며 내 염려를 기우로 돌린다.어릴 적 시골에서 성장한 그의 기본 체력은 믿음직스러웠다.원경이보다 사실은 내 자신이 짐짓 걱정스러웠다.얼마 전부터 오른쪽 발목이 좋지 않아 압박붕대를 하고 진통제를 먹었지만 걸을 때마다 아프다.한 두 시간도 아니라 거의 12시간을 이렇게 걸어야 하니 예삿일이 아니었다.그래도 걸을 때는 아픔을 잊을 수가 있는데 앉았다 일어서면 통증이 심했다.평소 잘 쓰지 않던 스틱에 의지하여 걸을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이왕 나섰으니 연칠성령까지는 가야 하는데...걱정이 앞선다.
[상월산(上月山) 정수리에 올라]
[상월산 정상에서 뒤돌아본 대간마루금]
9시 51분,상월산을 뒤로하고 이기령으로 떠난다.이기령까지 남은 거리는 약 1.5km.상월산을 내려와 잘룩이에 이르니 진주 안내산악회 알파인가이드의 선두 일행이 아침을 들고 있었다.목례를 하고 가파른 오르막을 더터 8시 13분,헬기장이 있는 970봉에 올라섰다.여기서 동진하던 대간은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기령으로 잦아든다.8시 33분,이기령(810m)에 닿았다.
산행안내판이 서 있는 이기령 바투 오른편으로 임도가 열려 있다.원방재에서 만났던 그 임도다.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부수베리에 다다른다.부수베리(火石鳥洞)란 지명은 처음 들으면 외래어 같은 어감을 주지만, 이는 부싯돌이 많은 곳이란 뜻을 지닌 예쁜 우리 이름이다
우리는 배낭을 벗어놓고 자연이 시키는 대로 했다.조금 있으니 알파인 가이드의 선두 일행이 휑하니 지나간다.이기령에서는 대간마루를 타는 방법이 옳지만,그냥 임도 따라 가다가 삼거리에서 숲길로 들어서는 방법도 있다.
[이기령에 다다라]
8시 48분,우리도 행장을 챙겨 이기령에서 왼쪽으로 10미터쯤 들어가 숲속 길로 들어섰다.대간 길은 온통 숲 터널이었다.초여름의 숲속에 들면 온갖 향기로 정신은 드높아지고 맑아진다.그 향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9시 8분 삼거리(880m)에 다다르니 오른편으로 임도가 보인다.임도로 내려가는 숲속에는 기세 좋게 뻗어 오른 적송(赤松) 무리가 우리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9시 13분,880m 갈림길에서 1,142.8봉으로 오른다.15분가량 발품을 팔아 1,000미터 지점 아래턱에 이르니 샘이 나타난다.대간꾼들이 만들어 놓은 샘인 듯한데,쪼개진 바위 틈서리에서 매우 차거운 물이 솟아나와 목마른 종주꾼들에겐 감로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5분 가량 쉬고 9시 34분,샘을 뒤로 하고 오르막을 올라서니 대간은 산등으로 오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열린 산허리 길을 돌아나간다.이상하다 싶어 산허리 길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되돌아오니 산등으로 난 길은 너무 희미해 사람이 다닌 자취가 묘연했다.그래서 많은 종주꾼들이 다닌 산허리 길을 따르기로 한다.
산림청에서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산허리 길을 따라 800미터에 이르는 돌계단길을 만들어놓았다.나중에 알았지만 산허리 길을 타는 바람에 1,142.8봉 정수리에 있는 삼각점은 확인할 수 없었다.9시 51분, 돌계단길이 끝나면서 1,142.8봉 산줄기와 만났다.대간은 서서히 오르막 길이다.10시 3분,1,200봉 전망바위에 올라서니 앞이 훤히 열리면서 두타산과 청옥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위쪽 사진 왼쪽의 뾰족한 봉우리는 두타산(頭陀山 1,352.7m),오른쪽 두리뭉실한 봉우리가 청옥산(靑玉山 1,403.7m)이다.두타산 앞쪽으로 질러진 골짜기는 박달골이며,청옥산에서 대각선으로 길게 뻗어 내린 산줄기는 학등능선이다.
옛 지도를 보면 두타와 청옥의 위치가 서로 뒤바뀌어 있다."대동여지도"나 "산경표",더 오래된 기록인 영조 44년의 "해동지도"를 보면 지금과 반대로 두타산이 청옥산 위쪽에 있다.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일제가 땅이름을 바꾸며 표기가 바뀌게 된 것이라 여겨진다.
백두대간 우리이름 바로 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녹색연합은 최근 대간이 지나는 32개 시군의 자연지명과 행정지명을 조사한 결과 22곳의 왜곡된 사례를 발표했다.뒤틀린 역사는 산이름까지도 함부로 바꾸어놓았다.이제야 본디 이름을 뒤찾기 위해 뜻있는 사람들이 나서고 있지만 오랫동안 익숙해진 지명은 이미 또 다른 이름으로 굳어버렸다."두타면 어떻고 청옥이면 어떠랴.다시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뭐 나아지는 게 있겠느냐.?"는 지역 주민들의 심드렁한 답변을 자주적이지 못하다 비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두타를 청옥이라 부르든,청옥이 두타가 되든 일상은 변할 게 없고 산도 끝내 아무 말도 없을 터이지만,그래도 일제의 왜곡된 역사 위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갈미봉 오름길에 바라본 두타(좌),청옥(우)]
[갈미봉 오름길에 바라본 두타산]
전망바위에서 두타, 청옥산을 조망하며 후미를 기다린다.7분을 기다려 10시 10분,표고 200미터의 된비알을 더터 갈미봉으로 오른다.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등줄기에도 흥건하다.10시 28분,갈미봉 정수리에 올라섰다.굴참나무 숲으로 둘러쌓인 갈미봉 정수리는 조망은 전무했으나 시원한 바람이 불고 그늘이 져서 쉬어 가기 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일행이 갈미봉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진주의 알파인가인드에서 온 젊은 종주꾼이 갈미봉으로 올라온다.선두는 10여분 전에 벌써 갈미봉을 통과했다는 기록이 땅바닥에 놓아둔 종이쪽지에 적혀 있다.그 젊은이와 우리는 종주날머리 연칠성령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종주를 했다.그도 다리가 안 좋아 선두를 놓치고 말았다고 했다.나중 연칠성령에서 다시 만나 "부산에서 왔다"고 하자 자신은 부산고 31회 졸업생이라고 밝히고 진주에 산다며 금세 친밀해졌다.우리 일행은 댓재까지 간다는 그에게 행운을 빌며 연칠성령에서 헤어졌다.
[갈미봉 정수리에서]
갈미봉 정수리에서 땀을 식히고 10시 45분 다시 발품을 파니 대간 왼쪽으로 두타산과 청옥산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다.13분쯤 가자 또 다시 전망바위가 나온다.여기서 다시 한 번 두타,청옥산을 클로즈업하여 한 컷 했다.댓재에서 종주를 시작한 종주꾼들과 심심찮게 마주쳤다.
전망바위에서 두타산과 청옥산을 조망하고 짙은 숲속 길로 들어선다.사위를 살필 수 있는 전망터가 간간이 나타났지만 대부분 앞만 보고 걸음짓을 할 뿐이었다.이제 고적대가 가까운 탓인지 바위가 심심찮게 나타난다.발목이 불편해서인지 몸이 마냥 무겁다.저 봉우리만 넘어서면 연칠성령이 지근거린데 하며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1,282봉 바윗길을 타고 내려섰다.
11시 5분,그 바윗길을 뒤돌아보니 깎아지른 벼랑에 주목이 촛대처럼 솟아 가슴을 뛰게 한다.김익수 동기가 이 멋진 풍광을 등지고 섰다.11시 20분,왼쪽으로 빠지는 사원터 갈림길에 다다랐다.11년 전 나 홀로 두타산 벙커에서 한둔을 하고 청옥산을 거쳐 이 길로 내려선 경험이 있어 친숙한 하산길이었다.사원터 갈림길을 벗어나자 등산객들이 무리를 지어 오고 있다.동해시청 산악회 회원들이었다.
사원터 갈림길을 지나면서 숲속 그늘진 곳에 이따금 보이던 아름다운 꽃이 눈길을 끌어당긴다.그런데 고적대로 다가갈수록 이 꽃들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큰앵초꽃이다.이 꽃을 만난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큰앵초는 이즈음에 숲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다.우선 자라는 곳을 가려 깊고 좋은 숲에서 자라니 그저 이 식물이 살고 있는 곳의 풍경만으로도 아름답고 그 가운데 선연하고 진한 분홍색 꽃을 마치 점을 찍듯 강렬하게 피어 단연 돋보인다.줄기를 따라 내려가 잎의 모양을 보아도 단풍잎처럼 갈라져 독특하니 한번 만나고 나면 기억할만한 특별한 우리 꽃이며 휘귀식물이다.
양지바른 물가에 무리를 지어 5개의 분홍색 꽃을 피우고 주름인 잎을 가지고 있는 키 작은 앵초와 달리,큰앵초는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는 않는 희소성과 까다로움이 유별난 꽃이다.많은 우리 꽃들이 나무 그늘로 들어가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할 뿐더러 꽃색도 희미하지만 큰앵초는 그늘이 오히려 꽃이 살아가는 적지(適地)이다.큰앵초나 앵초,설앵초는 모두 앵초속(屬)에 속하고 이 앵초속을 라틴어로는 프리뮬라(Primula)라고 부른다.꽃가게에서 흔히 프리뮬라라고 부르지만 엄격히 말하면,원예종 앵초의 한 품종에 불과하다.위 세 종류의 앵초 가운데 "앵초"가 가장 널리 분포하고 있는 종류다.
~7월 새벽녘에 자주색 꽃을 피우는 앵초는 꽃이 필 때 비눗방울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또 꽃잎이 풍차 같다고 해서 풍륜초(風輪草),독일에서는 열쇠꽃이라고도 부른다.유럽에선 6개의 꽃잎을 발견하면 곧 연인이 나타난다는 속설이 전해져 온다.천주교에서는 성모님께 봉헌하기도 하는데 앵초의 꽃이 마치 열쇠꾸러미처럼 보여 천국으로 가는 열쇠라는 뜻에서 였다고 한다."행복의 열쇠"란 꽃말도 여기서 비롯된 것 같다.
큰앵초꽃 군락지를 지나자 희미한 샛길이 나오더니 이내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고개를 돌리니 1,282봉의 기암보다 더 멋진 기암괴석이 대간 왼편의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알고 보니 비탈길을 내려서기 전에 만났던 희미한 샛길로 들면 그 기암 위에 오를 수 있다.누군가 저 암장에 올라서면 완벽한 구도일 텐데.."재화와 익수한테 저 암장으로 올라갈 생각이 없느냐.?"고 넌지시 물어보니 다들 고개를 가로젓는다.몸이 천근처럼 무거워 한 발짝이라도 수고하지 않으려는 친구들을 탓할 수야 없는 노릇-그 대신 나는 친구들을 모델로 그 기암괴석을 등지고 서게 했다.
고적대 오름길에 뒤돌아본 대간마루-동고서저(東高西低)의 전형적인 산세다.
[고적대로 오르며 돌아본 갈미봉과 대간마루]
오늘 구간가운데 가장 높은 고적대(高積臺 1,353.9m)로 오른다.표고 약180미터의 된비알을 치고 올라야 한다.좋이 20분가량 땀깨나 쏟아야 정수리에 오를 것이다.종주 초장이라면 대수롭지 않은 거리요,경사도지만 이미 8시간가량 산행을 한 탓에 오름짓이 수월치만은 않을 것이리라.하지만 암릉이 거의 없는 흙길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바탕 비지땀을 흘린 끝에 11시 53분,고적대 정수리에 올라서니 동해시청산악회 회원들과 산행객들로 왁자지껄하다.
[고적대 정수리 안내판을 중심으로]
고적대는 삼척시,동해시와 정선군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으로 기암절벽이 대(臺)를 이루고 있다.동남쪽으로 뻗은 청옥산, 두타산과 더불어 해동삼봉(海東 三峰)이라 일컬어진다.
고적대는 이름 그대로 천하의 조망터다.동남쪽으로는 청옥산과 두타산,서쪽으로는 중봉산(1,259.3m),북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석병산을 비롯해서 시계가 좋으면 오대산까지 가늠이 된다.동쪽으로는 갈미봉과 청옥~두타산 사이 고샅에 신선이 산다는 호계와 무릉계곡이 일궈져 있다.그 너머로 창창한 동해바다가 눈을 시리게 한다.
고적대 정수리에는 뙤약볕이 쏟아지고 있어 점심을 들기가 마뜩찮았다.그래서 연칠성령으로 하산하기에 앞서 고적대 남쪽 암릉에 올라 청옥산을 등지고 기념사진을 찍었다.동기들 오른편에 보이는 봉우리가 청옥산이고,동기들 뒤에 희미하게 실루엣으로 보이는 봉우리는 두타산이다.
[고적대 암릉에 올라 청옥산을 비켜]
12시 8분,고적대 암릉을 내려간다.위험구간은 없었으나 눈이 오는 겨울철에는 조심해야 할 듯 했다.암릉을 다 내려오고 나서도 점심을 들 장소는 찾을 수가 없었다.내친 김에 망군대(望君臺)를 향해 발품을 판다.12시 19분,망군대 아래턱에 다다랐으나 망군대로 오르는 등산로는 희미했다.
망군대(또는 望京臺 1,244m)는 등산로에서 왼쪽 능선 위에 있는 암릉이다.전하는 말로는 고려 유민이 이곳에 올라 개성을 향해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도 하고,조선조 인조 원년 명재상 택당 이식이 중봉산 단교암에 은퇴하였을 때 이곳에 올라 서울을 사모하여 바라본 곳이라고도 한다.요즘은“서울에 계신 임금을 바라보았다.’하여 망군대라고 많이 부른다.
[녹음 짙은 종주날머리 연칠성령에서]
12시 29분,이번 구간 종주날머리인 연칠성령(1,170m)에 다다랐다.오늘 종주는 여기까지.숲 속 아래 풀밭으로 이뤄진 고갯마루,연칠성령은 점심을 들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오후 1시 6분,연칠설령을 떠나 칠성폭포로 내려간다.등산로는 연칠성령 왼쪽 비탈을 가로질러 망군대 북동릉으로 붙는다.그런데 여기서부터 내리막길은 어찌나 가파르던지 상상을 뛰어넘는다.잠시라도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 그대로 저 아래 골짝으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다.그러니 한발 한발 내딛는 걸음짓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지난번 종주 때,재화가 엉덩방아를 찍으면서 손목이 접질린 곳도 바로 이곳 아닌가.그런 재화는 아무 탈없이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익수가 넘어졌으니 하산길은 그 누구도 장담할 일이 아니었다.산을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어렵다는 말은 어찌 그리 우리네 삶과 흡사할까?
30분가량 망군대 북동릉을 치고 내려와 칠성폭포 갈림길에 다다르니 비로소 물소리가 울린다.땀과 소금기로 얼룩진 얼굴을 물에 담그니 살 것만 같다.물이 얼음처럼 차다.나는 등산객들이 보이지 않는 계곡 위 바위 틈서리로 들어가 몸을 담그고 말았다.이어서 재화와 익수,현기가 몸이 시키는대로 입수했다.목욕을 싫어하는 기환이는 한사코 손과 발만 ?는다.
40분가량 계곡에 머물다 하산한다.칠성폭포는 등산로 아래쪽에 숨겨져 있어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이제 등산로는 왼쪽 산자락을 따라 사원터로 이어진다.그런데 많은 이들은 무릉계곡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무릉계(武綾溪)는 문간재에서 삼화사 아래 무릉반석까지다.칠성폭포 갈림목에서 문간재까지를 호계(虎溪)라 부른다.
일제 때 의병들이 활약했고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가 은거했다는,지금은 무인대피소로 변모한 사원터를 지나니 등산로는 백옥같은 반석이 즐비한 호계로 빨려든다.호계는 덕풍의 용소골처럼 계곡 바닥이 반석으로 이뤄져 있어 폭우가 쏟아지면 갑자기 물이 불어나 급류에 휩쓸릴 위험이 크다.그래서 폭우가 쏟아질 때는 계곡산행에 주의하라는 안내판이 곳곳에 서 있다.
백옥 같은 반석 위로 수수만년 흘러내리는 물살은 급하게 바윗돌을 돌기도 하고 치마폭을 드리운 듯 잔물결을 이루며 여울지기도 한다.그러다가 소를 만나면 온산이 떠나갈 듯한 굉음을 내며 곤두박질친다.마침내 청옥산에서 뻗어내린 학등능선이 문간재로 수긋해지기 전에 한 지릉이 호계에 발치를 드리우는 지점에 이르렀다.7~80미터는 됨직한 직벽이 흘립한 이곳의 장관을 배경으로 동기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호계(虎溪)의 암반에 서서]
비경이 연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그런데 갑자기 산행안내판이 가로막는다.지난번 종주 때는 보이지 않던,왼쪽 절벽을 가로질러 설치한 철계단길로 가라는 안내판이었다,우리는 철계단 길이 싫어 바윗돌을 타고 문간재에 올라섰다.
문간재(390m)에는 해방 전까지 석문(石門)이 있었다고 한다.문간재에서 신선봉은 오른쪽 바윗길을 올라야 한다.두타~청옥산 산행에서 아름다운 풍경이 어디 한두 군데일까.눈 가는 곳마다 절경이요 멋들어진 풍광이다.그 가운데서도 나는 여기 신선봉에서 조망을 으뜸으로 친다.물론, 신선봉 장군바위 밑의 ’쌍폭’이나 무릉계 최고의 비경이라는 ’용추폭포’,그리고 두타산성과 대궐터 오름길의 산성 12폭도 아름답고 신비롭지만 신선봉에서 바라보는 산세는 그야말로 황홀경 그 자체이며 선경(仙景)이 아닐 수 없다.
신선봉 암릉에 올라서면 건너편 수백 길 되는 학등의 깎아지른 벼랑과 두타산성 북릉의 단애,호계 오른편 능선의 기암괴석이 한데 어우러져 선계(仙界)를 이룬다.그러므로 두타산과 청옥산에 오면 다른 곳은 몰라도 신선봉은 꼭 올라봐야 한다.가파른 바윗길을 돌아올라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랑바위를 지나 병풍바위로 간다.
신선봉은 동석산(動石山)이라고도 하는데,산꼭대기에 세 겹으로 된 층대가 있어 밟으면 움직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그 안을 동석산성(動石山城)이라 하며 문간재의 석문은 바로 이 산성의 정문인 셈이다.그런데 그 동석(動石),즉 흔들바위는 굴러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릉계 최고의 전망대 신선봉에 올라]
신선봉에서 문간재로 내려와 철계단 길을 내려오니 갈림길이다.왼쪽은 하늘문을 거쳐 관음암 가는 길,오른쪽은 저 유명한 무릉계의 쌍폭과 용추폭포 가는 길이다.우리는 오른쪽 길을 따라 또 다시 가파른 철계단을 내려선다.박달골 갈림길을 지나 오른쪽 쇠다리를 건넜다.박달골에서 내려오는 두 물줄기가 소로 쏟아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은 "쌍폭"-왼쪽은 세차고 도도하게 물줄기를 쏟아내지만 오른쪽은 물줄기가 보잘 것이 없어 거창한 물줄기를 잔뜩 기대했던 우리는 적잖이 실망했다.비가 오고난 뒤라면 쌍폭은 멋진 장면을 연출할 테지만 오늘은 별로였다.
쌍폭 위에 있는 "용추폭포"로 갔다.많은 유산객들과 등산객들로 초만원을 이룬 용추폭포도 예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물줄기가 한결 가늘었다.용추폭포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사진에 보이는 부분은 하폭이며,상폭을 보려면 소 왼쪽으로 난 계단길을 걸어 올라야 한다.그러면 하폭 위에 둥근 항아리 형상의 바위에서 물줄기가 용출된다.문간재 위 호계에서 흘러온 계류가 왼쪽 학등능선과 오른쪽 신선봉 사이의 암반을 뚫고 솟구치는 것이다.
우리는 용추폭포 상단을 올라가는 대신 기념사진을 찍고 박달골 갈림길로 내려와 무릉계를 따라 내려간다.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숲길이다.두타~청옥산을 찾는 유산객은 대개 매표소에서 무릉반석을 보고 이곳 쌍폭과 용추폭포를 구경하는 것으로 자족한다.굳이 산에 오르지 않고도 무릉계의 비경을 만끽할 수 있으니 뭐하러 힘들게 산행을 할 것인가.오늘도 많은 인파가 무릉계를 찾아들고 있었다.
[용추폭포를 등지고]
4시 50분,매표소에 다다라 산행을 마무리했다.우리는 7번 국도를 따라가다 원경이의 백두대간 종주를 환영하는 뜻에서 태백시로 발길을 돌렸다.대간을 종주 하면서 몇 차례 찾은 적이 있는 태백시 태성실비식당에서 입에 살살 녹는 한우 등심으로 산행뒤풀이를 했다.물 좋고 공기 좋아 육질이 쫄깃쫄깃하고 신선도가 높은 태백의 한우는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이날 우리는 1시간가량 기다린 끝에 연탄 직화불로 구워내는 한우 등심을 맛볼 수 있었다.
[주] 종주기에 표기된 산높이는 1/25,000 지형도에 따른 것으로 1/50,000 지형도의 그것과 차이가 날 수 있으며,지형도에 나타나지 않은 산봉우리의 고도는 등고선을 감안하여 표기하였다.
[산행정보]
*2005년 6월 4일~5일(무박 종주)
*참가자:김익수,김현기,송원경,신남석,이재화,전기환 6명
*차량지원:오기묵 동문(23회) 봉고
*차량이동 경로
부산-경부고속도로-경주-7번국도-삼척시-42번 국도-백복령(상행)
동해시 무릉계곡 매표소 주차장-삼척시-7번 국도-427번 지방도-태백시-427번 지방도-416번 지방도-원덕-7번국도-경주-경부고속도로-부산(하행)
*산행시간/통과 지점 및 도상거리(2005/6/5)
03:40 백복령(780m)...03:50 855봉 전망대...830봉...1.25km...875봉(동남진)....0.63km...910봉....0.5km...808봉(동진)....0.75km....959...0.38km....05:02 887.2봉(삼각점?)...05:18-05:29 890m 잘룩이 전망바위...1.5km...1,015봉(헬기장,동진)...0.75km...06:12 860봉(동남진)...0.25km...06:21 860봉...1.0km....적송구간...06:44-06:55 원방재(720m)...0.5km....890m 지점(동진)...0.6km....07:35-07:51상월산(上月山 970.3m)...8:13 950봉(헬기장)...0.63km)....940m 지점(남남동진)...0.25km...884봉....0.86km...08:33-08:48 이기령(810m,좌->대간,우->부수베리 하산 임도)....880봉...1.0km....880m 삼거리(적송,임도->이기령)....09:29-09:34 1,000m 지점 아래 샘터...1.25km...1,142.8봉 왼쪽 산허리 우회(돌계단길)...10:03-10:10 1,200m 삼거리(전망바위)...0.63km...1,200m 지점(서진)....0.8km....10:28-10:45 갈미봉(1,273)...1,230봉...1.9km...1,282봉(암릉)...0.37km...11:20 1,200m 삼거리(좌-사원터 하산길)...11:30-11:33 1,250봉 기암...1.0km....고적대(高積臺 1,353,8m,정선군/동해시/삼척시 경계,대간->남진)...0.75km...12:19 망군대 갈림길....(망군대 1,244m)...0.15km...12:29-13:03 연칠성령(連七星嶺 1,170m,좌-칠성폭포)--->13:38-14.26 칠성폭포 삼거리(600m)--->사원터--->문간재---->신선봉--->문간재--->쌍폭---->용추폭포--->쌍폭---박달골갈림길--->학소대--->삼화사--->무릉반석---16:40 매표소
*대간 종주:16.45km(백복령-연칠성령)/9시간 14분
*탈출산행:5.05km(연칠성령-매표소)/3시간 46분
*총산행거리:21.5km/13시간
'백두대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움으로 걷는 백두대간 33구간 끊어타기<미시령-진부령> (0) | 2008.03.28 |
---|---|
그리움으로 걷는 백두대간-30구간<백복령-석병산-삽당령> (0) | 2006.11.22 |
그리움으로 걷는 백두대간-36구간 화보<마등령-비선대> (0) | 2006.11.01 |
그리움으로 걷는 백두대간-36구간<미시령-황철봉-마등령> (0) | 2006.10.27 |
그리움으로 걷는 백두대간-28구간<댓재-두타,청옥산-연칠성령> (0) | 2006.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