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령에서 37용마 윤태훤,33산우 김종만 용마 부총무]
[대간령을 떠나기 직전 용마의 모습들]
9시 25분,설악산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대간령을 뒤로 하고 신선봉으로 오른다.너무 많이 쉰 탓일까.발걸음이 무겁다.이제부터는 가풀막진 오르막길의 연속이다.천천히 숨을 고르며 숨길을 통어해야 한다.들숨과 날숨이 거칠기 시작하면 보폭을 줄여서 숨길이 부드러워지도록 한다.산에서는 어느 누구도 대신해서 걸어줄 수가 없다.오로지 자신의 발품에 의존할 뿐이다.
그러므로 산은 정직하다.어떤 사이비가 끼여들 여지가 없다.산행은 담백하다.담백하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을까.얼핏 보면 그럴런지도 모른다.그러나 담백한 맛은 언제나 알 수 없는 깊이가 있기 마련이다.걸음을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일이다.발로,다리로,몸으로 걸으면서 사람은 자신의 실존(實存)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사람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그 명상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면,이따금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헬기장 오름길에 만난 냉전(冷戰)의 산물,벙커]
숲이나 길,또는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부여하는 의무를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신선봉 오름길 첫 쉼터-850m 헬기장에 도착한 용마]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오름길을 재촉하는데 벌써부터 등줄기에 땀이 흥건하다.위로 오를수록 산길이 허리를 펴고 일어서니 나는 절로 허리를 굽힌다.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나를 밀어오르며 오른다.산길에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자신을 낮추는 일부터 시작된다.낮추지 않으면 정수리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수십 년을 산에 다녀도 한순간에 그걸 잊어버리다니 얼마나 더 채찍으로 후려쳐야 정신이 번쩍 들까.10여 분 땀 흘리며 850m 헬기장에 올라섰다.가쁜 숨을 몰아쉬며 배낭을 부리고 후미가 올 때까지 다리쉼을 한다.
[정 회장이 힘찬 걸음으로 헬기장으로 들어선다.]
[김현기 후미대장과 함께 궂은 일을 도맡은 김종만 부총무,23산우회 최인표 대장,김상영 총무가 헬기장으로 들어서다.]
정영천 회장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헬기장에 들어선다.평소보다 얼굴이 창백해보인다.걱정이 되어 물어보니 자신이 대간을 탈 수 있을 지 의아심 때문에 몸이 잔뜩 굳었다고 말한다.이젠 긴장을 풀고 자신을 옭죄고 있는 근육과 정신을 풀어보라고 귀뜀해준다.대간을 밟는다는 것은 개별산을 타는 것과 다르다.개별산은 대개 힘들더라도 정상에 올라서면 바로 하산길에 드는 게 일반이다.하지만 대간은 마루금이 봉우리와 고개로 이어져 있으므로 쉽게 지치게 마련이다.봉우리를 넘어섰는데 다시 고개나 잘룩이가 나오고 또 다시 봉우리를 올라가야 하고..이를 몇 번이나 되풀이 하다 보면 웬만한 체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감당해내지 못한다.
동문들이 헬기장으로 속속 들어선다.후미대장 현기한테 무전을 넣으니 헬기장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9시 40분,김종만 부총무 일행이 합류하자 선두는 헬기장을 떠나 신선봉으로 오른다.[청명한 날이라면 이곳 헬기장에서 신선봉의 우람한 자태가 보일 텐데,아쉬운 나머지 참고사진으로나마 울적한 마음을 달래볼까 한다.]
[헬기장에서 다리쉼 하는 용마,오기현 왕대장의 모습도 보이고...]
[헬기장에서 다리쉼을 하는 33산우회 일행]
[헬기장에 오른 김법영 용마 총무와 지창근 33산우회 총무 일행]
[헬기장에서 다리쉼 하는 동문들]
[=>헬기장에서 조망한 신선봉-왼쪽 바위봉이 신선봉,그 오른쪽 암장은 "큰바위" photo by 진주산사람,김종호]
[안개가 배회하는 대간 길-몸은 지쳐가는데,눈잣나무의 푸르름은 더 싱싱하고...] .
헬기장을 지나면서 더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숨길은 거칠어지고 입에서는 단내가 난다.다리는 쇠뭉치를 걸어놓은 듯 천근만근이다.그저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다.그렇게 40분 동안 된비알을 더터올라 10시 20분,바윗돌이 듬성듬성 있는 1,094m 대간분기점에 다라랐다.여기서 오른쪽 지릉을 따라가면 대간령 옛길에서 내려오면 만나는 마장터에 이르고 왼쪽 능선을 따르면 대간마루금이 열려 있다.
하영수 고문을 비롯한 선두는 이곳에서 점심을 들기로 했다.신선봉 오르막길에서는 마땅히 점심을 먹을 장소가 없기 때문이었다.2년 전 21동기들과 미시령에서 진부령으로 대간 종주를 하면서 점심을 먹은 곳도 이곳이었고,또 신선봉 갈림길에서 그만 길을 잃고 연락이 끊긴 김현기 동기를 찾으러 이곳에 배낭을 놓고 험난한 바위를 오르내린 것도 바로 이 대간분기점이었다.그때도 오늘처럼 안개가 잔뜩 끼었고 가랑비마저 내리곤 했다.
[1,094m 대간분기점에서 점심을 들고-울산 31용마 최경침,14용마 전부길 선배의 다정한 모습]
[즐거운 점심시간-정 회장은 식사를 마치고 무슨 상념에 젖었을까?]
[1,094m 대간분기점에서 화기애애한 점심시간-산속에서 한 잔 술은 보약이거늘...]
[시종일관 '헤어지지 말자'며 끈끈한 우정을 과시한 13용마-윤기갑,이태랑,제병민,이일희 선배]
후미가 대간분기점에 합류하자 11시 10분,선두는 신선봉으로 걸음을 옮긴다.초록 물감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녹음이 터널을 이룬 산길 한 가닥이 앞장 서 간다.오를수록 돌확이 발길을 조심스럽게 한다.안개가 주변을 배회하면서 나무 잎파리를 젖게 하고 바윗돌을 적신다.젖은 나무들,젖은 산길이 오히려 숨쉬기에는 더 좋다.햇볕 쨍쨍한 날이었으면 이만큼도 걸을 수 없으리라.신선봉으로 다가가면서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으로 바뀌더니 능선에 이르자 커다란 암장이 출현하고 검은 안개구름이 드리운다.날씨가 청명하다면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윽한 조망이 기다릴 텐데 올 때마다 허락치 않으니 못내 아쉬울 뿐이다.
[안개가 점령한 신선봉 능선]
[대간분기점에서 선선봉 오르는 싱그런 숲길 한 가닥이 열렸다.]
[돌확길을 더터오르는 저 용마의 힘찬 걸음짓]
[신선봉 오르는 돌확길]
[신선봉 오름길,운무 노니는 기암]
고도를 높여 암릉지대에 다다랐다.산길은 바위를 넘지 않고 교묘하게 바위를 에돌거나 밑으로 지나간다.고개를 들어 육중한 바위를 쳐다보면 운무가 바위를 휘감아 전신을 드러내놓지는 않는다.대간령에서 이곳에 오르는 동안 함박꽃나무(산목련)이 대간 길에 지천으로 흐드러져 장관이었다.완전히 벙으러진 눈부신 꽃, 절정을 넘어서 시들어가는 꽃,이제 막 봉오리를 맺어 이슬이 맺혀 있기도 하고,반쯤 벙으러진 꽃속으로 벌이 들어와 교접을 하는 장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이곳의 산목련은 여늬 산과 달리 키가 낮아 감상하기에 제격이었다.이들 군락은 상봉 너머 샘터에 이를 때까지 대간 길을 수놓아 고통스럽고 지루한 산길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한여름철 함박꽃나무의 꽃봉오리를 쳐다보면 눈이 시릴 정도로 백옥같이 흰 꽃봉오리에 매료되어 발걸음이 멈춰진다.활짝 벙으러진 꽃은 흰꽃잎 속에 붉은색 수술이 들어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다.하지만 모습만 보고 그냥 스쳐지나간다면 그 꽃의 진수를 알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함박꽃나무에 가까이 다가가서 꽃이 핀 잔가지를 손으로 잡아당겨 그 아름다운 꽃에 코를 대어보면 그 향기에 도취되어 감탄이 절로 난다.그 깨끗하고 청아하고 고결한 향기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수십년 전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처음 접한 함박꽃나무 향기는 어찌나 강렬하던지 숨을 죽였다.향기만 좋은 게 아니라 속이 시원하고 가슴까지 뻥 뚫린 듯한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비염과 축농증으로 고생하는 이들은 살아 있는 꽃봉오리를 코에 끼우고 잠을 자도 그 효험을 느낄 수 있다 한다.피기 직전의 꽃봉오리를 따서 한 잎씩 떼내어 펴서 그늘에 말린 뒤,공기가 통하지 않는 용기에 보관해 두었다가 끓는 물에 꽃잎 몇 개를 넣어 우려내어 차로 마시면 이 세상에 다른 모든 차를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만큼 놀라운 향기와 맛에 반해버릴 것이다.
[대간 길에 지천으로 핀 함박꽃나무(산목련)을 당겨보니...]
[대간 길 암봉엔 운무 자욱,숲속엔 함박꽃나무가 지천이고]
[신선봉 오름길에 만난 기암]
이제부터 기이한 형상의 바위와 암장이 눈길을 끌어당긴다.독수리 부리같은 날카로운 바위,도장 손잡이 또는 모자처럼 보이는 바위,이루 형언할 수 없는 바위가 강렬한 기운을 뻗치며 마루금에 돋아나 있다.신선봉으로 오르는 마루금은 호락호락 가슴팍을 열어 주지 않는 것 같다.서로 얼싸앉은 바위가 키를 높이더니 그 바위를 돌아가자 그 곁에 흡사 부처손같은 바위가 안개속에 형체를 드러낸다.다시 발품을 팔자 완만한 능선길이 기다린다.마루금 오른편으로 안개가 드리워 한치 앞도 안 보이고 잡목 위로 눈잣나무가 솟아나 수묵화를 연상캐한다.
[신선봉 오르다 기암을 등진 후미의 김종만 부총무]
[이 바위를 돌아 넘으면 신선봉 갈림길이 나오고...]
[부처손 같은 바위 밑을 에돌아 신선봉 갈림길로]
[설악의 특산식물,눈잣나무 그리고 운무]
[신선봉이 가까워지자 "큰바위"가 모습을 드러내고]
["큰바위"에 걸터앉은 33용마 김미란 주필의 아름다운 모습.]
그렇게 마루금을 밟아나가자 수십 길은 됨직한 "큰바위"가 장중하게 막아선다.길이 없을 듯했지만 이 역시 에돌아나간다.날이 맑다면 이곳에서 바라보는 신선봉은 실로 장관일 텐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신선봉 오르는 갈림길로 들어섰다.선두 28용마 이종태 동문과 후미의 21용마 김현기 동기를 무전으로 부른다.신선봉 갈림길에 다다르면 안개 낀 신선봉으로 오르지 말고 오른쪽 우회길을 택해 화암재로 내려오라고 거듭 주문을 했다.
백두대간 신선봉! 신선봉은 이번에도 나를 받아주질 않았다.아마 인연이 닿지 않은 모양이다.언젠가 화암사에서 상봉을 거쳐 꼭 신선봉으로 오르고 싶다.금강산 일만이천봉가운데 남녘 땅에 있다는 5개 봉우리 향로봉,삼봉,둥굴봉,칠절봉,신선봉.그 첫 봉우리 신선봉에서 금강산의 영역이 시작된다니 짐짓 믿기질 않는다.그런데 신선봉에서 화암재로 하산하여 왼쪽 화암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금강산 화암사(禾巖寺)가 나온다.
화암사가 '금강산 화암사'로 쓰이는 것은 화암사가 금강산의 남쪽 줄기에 닿고 있기 때문이란다. 남쪽에서 보면 화암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신선봉 바로 아래에 세워져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화암사 사기(寺記)에도 화암사는 하나같이 '금강산 화암사'로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지리 환경과 기록으로 볼 때 화암사는 우리 민족의 통일기도 도량이라 하겠다.
화암사 창건은 지금으로부터 1천 2백여년 전인 769년(신라 혜공왕 5), 이 땅에 참회 불교를 뿌리내린 법상종의 개조 진표율사에 의해서이다. 진표율사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를,서쪽에는 장안사를,그리고 남쪽에 화암사를 창건해 금강산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만들고자 했다.'금강산 화암사' 라는 이름도 이 창건기록에서부터 출발한다.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수많은 대중에게 '화엄경'을 설했는데, 이를 배운 제자 1백명중 31명이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가고 나머지 69명도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얻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사찰 이름은 화엄사(華嚴寺)였다. 진표율사가 '화엄경'을 설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또한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지장보살의 현신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을 창건, 화엄사의 부속암자로 삼았다.
그 이후 화암사는 지장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도 지장보살의 가피를 원하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화엄사(華嚴寺)라는 절 이름이 화암사(禾巖寺)로 바뀐 때는 1912년 31본산 체제로 접어들면서이다. 건봉사의 말사가 되면서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화암사란 이름을 쓰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큰바위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남녘 봉우리라는 신선봉! photo by 진주산사람,김종호]
[=>신선봉 정수리의 기묘한 너덜겅 photo by 진주산사람,김종호]
[=>화암재 지나 암릉에서 돌아본 신선봉과 큰바위-신선봉 우회로가 곧장 화암재로 떨어진다.photo by 진주산사람,김종호]
[=>신선봉에서 조망한 화암재와 상봉,울산바위 photo by 진주산사람,김종호]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에 갇힌 우리는 신선봉(1,204m) 갈림길에서 오른쪽 우회로를 따라 화암재로 내려오고 말았다.그리고 화암재에서 냅다 상봉(1,239m)으로 치오르는 바람에 화암재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그래서 2년 전 화암재에서 동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려본다.이 화암재에서 왼쪽 풀섶을 헤치고 내려가면 화암사가 나오고,오른쪽 하산길을 따르면 마장터에 이른다.이 마장터는 인제나 원통의 지게꾼들이 곡물을 지고 소간령을 거처오는 샛령길이며,고성이나 속초의 마부들은 소금을 싣고 반대쪽으로 넘어와 마장터에 이르렀다.마장터는 산중에서 물물교환을 하던 장터이며 바로 이곳에 마방이 있었다고 한다.
화암재에서 상봉으로 오르려면 네 번이나 가파른 바위를 타고 올라야 한다.그렇다고 힘든 바윗길은 아니지만 눈이 쌓여 있거나 비가 올 때 상봉에서 거꾸로 내려온다면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참고로 바로 위 신선봉에서 바라본 상봉과 울산바위 사진에 보이듯이 상봉 오르막길은 바위 구간이다.]
[=>2006.9.4 이일산우회 대간 종주팀-안개비 내리는 화암재에 다다라]
[화암재 지나 처음 만나는 바윗길 (12:06)]
[수수꽃다리]
[당겨 본 자주색 수수꽃다리의 우아한 자태]
12시 무렵 화암재를 떠난다.화암재에서 서서히 고도를 높이던 오르막길에 막장처럼 막아서는 바윗길이 나온다.로프를 잡고 올라도 되고 그냥 올라도 된다.이 바윗길을 올라서자 정말 멋진 나무와 꽃과 만났으니 행운이었다.순수 우리말인 "수수꽃다리"란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얼마나 근사한 이름인가.이를 라일락이라고도 부르지만 우리가 흔히 보는 서양 라일락은 아니다.
이런 종을 중국에서는 정향(丁香-향기가 "정"자 모양으로 향기가 좋은)나무라 부르고 있고 우리나라에선 흰색은 개회나무,보라색은 꽃개회나무로 부른다.이 향기좋은 우리꽃 종자를 다른 나라에서 개량한 "미스김라일락"은 로얄티를 주고 국내로 들여온다고 하니 웬지 씁쓰레해진다.최근 먹거리 전쟁으로 국경이 무너지고 있는데 저 무서운 식물의 자원전쟁 또한 시작되었으니 이러다가 내 땅의 소중한 자원마저 송두리째 내주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개회나무라고도 부르는 흰색의 수수꽃다리-사진 33용마 김태훈]
[첫 바윗길과 맞딱드린 22용마 김성재 감사와 22산우 김일준회장]
[소금처럼 빛나는 감투바위의 위용]
[감투바위 옆 바위봉의 9회 차진한 선배-장죽 대신 장우산을 든 모습이 산신령을 연상케한다.(12:14:19)]
첫 바윗길을 무사히 올라서자 소금처럼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우뚝 치솟은 감투바위와 만났다.감투바위를 돌면 작은 바위봉이 나오고 마루금이 수긋해지면서 잘룩이에 이른다.안개 속으로 세찬 바람이 블어와 몸이 흔들거릴 지경이다.이곳에도 함박꽃나무가 지천으로 피어 황홀경을 이루었다.
[대간령-미시령 구간에 수도 없이 만난 함박꽃나무(산목련)]
여늬 목련은 대개 꽃이 핀 다음 나뭇잎이 나오지만 함박꽃나무는 줄기와 나뭇잎이 나온 후에 꽃 봉우리가 맺힌다. 함박꽃나무의 꽃은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향기도 좋다. 우리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련 중의 하나이다. 또 얼룩함박이 꽃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중부 지방이나 지리산 등지에서 자란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목련이 있다. 순수한 우리의 목련은 한라산에서 자라는데, 꽃은 약간 작은 편이고 약 8미터 높이까지 자란다.
이맘때 산 속에서 크고 탐스러운 흰 꽃을 피우는 함박꽃나무를 산목련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다. 목련과 같은 속(屬)에 속하므로 일리가 있지만, 학술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우리말 이름일 뿐만 아니라 큰 꽃이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함박꽃나무라는 이름으로 통일해 부르는 게 좋을 듯하다. 꽃이 클 뿐만 아니라 잎도 크고 시원스럽게 생겨서 관상가치가 높다. 한라산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전 지역에 자라며, 사는 곳의 해발고도에 따라서 5월 하순부터 6월 하순까지 꽃을 피운다. 북한에서는 국화로 지정하여 도시의 공원에도 많이 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박꽃나무(산목련)의 우아한 자태]
[두번째 바윗길을 알리는 암릉이 치솟고...]
[험한 바윗길이지만 사람들의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바윗길을 오르는 용마들]
[저 싱싱한 근육을 보라!!!]
[바로 오르거나 옆으로 돌아오르거나 본디 길은 하나.]
[로프에 몸을 싣고 당기고,밀고-거역할 수 없는 힘을 따라 위로 위로...]
[상봉에 선 22산우회 김일준 회장,바위턱에 앉은 23용마 최인표 대장(12:27)]
화암재를 떠나 15분쯤 발품을 팔자 두번째 바윗길이다.첫번째보다 더 가파른 바윗길이었지만 손잡을 데가 많아 오름짓을 하기는 수월했다.그리고 햇볕이 나지 않는데다 골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힐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10분 가량 바위에 몸을 맡기고나서 돌탑이 있는 상봉(1,241m)에 올라섰다.상봉 주위만 가시거리일 뿐 조금만 벗어나더라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미시령도 울산바위도 저 북설악의 장쾌한 주능선도 모두 안개가 삼켜버렸으니....이쯤에서 후미를 불러본다.이제 신선봉 갈림길 아래 바위지대를 통과하고 있단다.그렇다면 1시간은 더 늦어질 것만 같다.
[상봉에 올라 환하게 웃음짓는 정회장(중),하영수 고문,청산(우)]
[33산우회의 상봉 세레머니(12:34:34)]
[상봉 돌탑을 등진 33용마 김법영 총무,13용마 윤기갑 선배,31용마 박봉근 동문]
[상봉에서 포즈를 잡은 13용마 제병민 고문,33용마 이철관 동문]
[=>맑은 날 상봉에서 바라본 미시령,황철봉과 설악의 주능선 photo by 진주산사람,김종호]
맑은 날 상봉에서 조망은 가히 압권이다.우리가 스쳐 지나온 신선봉은 말할 것도 없고 미시령과 울산바위와 황철봉,대청봉을 비롯한 북설악의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상봉에서만은 시계가 열리기를 염원했지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으니 어쩌랴.조선시대 최고의 등산칼럼니스트(?) 정구(鄭逑)는 그의「가야산기행문」에서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 넓히기를 힘씀이지 안계(眼界) 넓히기를 위함이 아니다.”라고 했다.아울러 가야산에 오른 감회를“천년처사의 마음 말없는 가운데 합하네(默契千年處士心).”라 읊었다. 오늘도 한치 틀림없는 명언이다.그래서 옛 선인들은 도처에 청산(靑山)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12시 30분,상봉에서 내려간다.하산날머리 미시령까지 거리는 2.6km. 빠른 걸음이면 1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이다.하지만 너덜겅이 가로막는 데다 가파른 나머지 체력이 떨어진 이들에겐 마(魔)의 구간이다. 선두와 후미가 격차가 벌어지고,사고위험이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리라.여기만 무난히 통과한다면 비록 시간은 늦어질지언정 대미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다들 무사히 빠져나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나는 후미의 현기를 자주 불러내 "안전"을 간과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 동해의 샛바람을 뚫고 올라온 눈잣나무의 싱그런 바늘잎(12:32)]
능선을 밟아 내려가자 운무 속으로 물기 머금어 더욱 더 짙푸른 설악의 특산식물,눈잣나무가 눈길을 끌어당긴다.천미터가 넘는 고도에서도 동해의 세찬 샛바람을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자라는 생명력에 경외감을 느낀다.상봉 정상부엔 키 낮은 관목과 초목이 자랄 뿐인데 말이다.그리고 그 아랫쪽 숲속에는 철 늦은 철쭉이 피어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등에 또 다른 거북을 태운 거북 형상의 바위를 지나자 산길은 암릉 밑으로 돌아 내려 마침내 너덜지대에 이른다.대간령으로 내려가는 길에 만났던 너덜겅보다 더 가파르고 험하다.어디 그뿐일까. 안개비마저 내려 바위는 미끄럽다.조심조심 발길을 떼다 보니 느릿느릿한 걸음짓으로 바뀐다.
[설악 눈잣나무 아래 철쭉이 피었으니-시계를 거꾸로 돌렸나?(12:33)]
[등에 또 다른 거북을 업고 상봉으로 오르는 거북바위(12:37)]
[상봉에서 내려오는 가파른 너덜겅(12:39)]
[잠시 완만한 너덜겅을 지나고(12:41)]
[미로찾기같은 너덜겅을 이리저리 돌아 내려오는 동문들(12:46)]
[너덜겅을 내려서는 17용마 하영수 고문,9회 용마 차진한 선배,정영천 용마회장(12:46:19)]
4분 가량 쏟아질 듯한 너덜을 내려오자 너덜겅은 완만해지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숲길로 스며든다.잠시 뒤,또 다시 가파른 너덜겅이 기다린다.첫번째 너덜겅보다 험할 뿐만 아니라 너덜의 생김새 또한 날카롭고 위험해보였다.너덜겅이 끝나고 숲길로 들어서려는데 화사한 꽃이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백당나무 꽃이다.
[상봉 아래 너덜겅을 내려오는 김법영 총무 가족.(12:46:49)]
[백당나무 꽃-흰꽃은 헛꽃(무성화),그 안은 참꽃(유성화)이다.(12:47)]
33용마 김태훈 동문의 말처럼 바위수국인줄 알았는데 백당나무였다.안개비를 맞아 더욱 함초롬히 핀 진기한 꽃이 유별나게 아름다워 보였다.백당나무의 꽃차례는 원판 모양인데 꽃 가장자리의 헛꽃(무성화)과 꽃 안의 참꽃(유성화)이 함께 달린다.헛꽃은 화려해서 곤충들을 유인하는 역할을 하고 중심부 꽃에서는 실제 중요한 수분이 이루어진다.고도의 역할 분담이다,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지혜를 모으듯이 백당나무도 효율적으로 살아나기 위해 세운 삶의 전략이다.
절집 뜨락에 가면 백당나무를 모체로 한 불두화를 볼 수 있다.흔히 백당나무까지도 불두화라 부르는 이도 있지만 엄연히 다르다.불두화의 꽃차례는 공처럼 생겼는데 헛꽃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수분이 안 된다.초여름 비를 맞고 불두화가 한아름 피면 마치 푸른 하늘의 뭉게구름처럼 보기에 시원스럽다.불두화란 부처의 머리 같은 꽃을 이르는 말로 부처의 동그렇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설악조팝나무]
위의 사진은 백당나무 곁에서 찾아낸 설악조팝나무인데 33용마 김태훈 동문이 찍었다.조팝나무란 이름은 그 꽃이 좁살을 튀겨놓은 듯하다 하여 조밥나무라고 부르다가 이것이 강하게 발음되어 생긴 말이다.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조팝나무의 종류는 그냥 조팝나무 말고도 진분홍빛 꼬리조팝,잎이 둥근 산조팝,꽃이 무성한 참조팝 등 종류가 여럿이다.이러한 조팝나무류는 지역마다 모양이 다양하고 변이도 심하다.외국에서는 이 조팝나무에서 아스피린의 원료가 되는 성분이 발견되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북미의 인디언들도 이 조팝나무류를 민간치료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제부터 산길은 가파르기는 하지만 흙길로 하늘을 가린 숲속을 지나간다.오후 1시쯤 샘터에 다다르니 이종태 선두그룹이 그곳에 있었다.샘의 물맛은 기가 막혔다.아마도 상봉의 너덜겅과 바위지대를 거쳐 흘러나오기 때문인지 맑고 깨끗하며 시원하기 그지 없었다.동문들은 차례대로 한 잔씩 물을 들이키고 물병에 물을 담기도 했다.이 물로 녹차를 달여 마시면 속진을 털어내는 데는 으뜸일 것 같다.
[목마른 대간꾼의 갈증을 축여주는 감로수다.(13:45)]
[샘터에서 후미를 기다리는 용마]
샘터에 합류한 동문들은 뒤에 처진 후미가 오길 기다려 함께 내려가기로 한다.오기현 선배와 이종태 선두는 먼저 미시령으로 내려갔다.그러고 나서도 30분 넘게 기다려봤으나 후미가 상봉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오질 않는다.너무 오래 기다려도 몸이 식을 것만 같아 나는 할 수 없이 동문들을 내려보내기로 결심했다.하산은 샘에서 흐르는 물 따라 곧장 내려가는 길과 왼쪽 사잇길로 내려가는 길,두 갈래가 있었다.하영수 고문이 앞장서서 왼쪽 길을 답사해보고 되올라와 그 길은 아마도 화암사 수암 쪽으로 내려가는 길 같다며 직진하라고 한다.30여 명이 먼저 내려가고 서울의 26용마 배기호 동문과 13용마 이태랑,윤기갑,이일희 선배와 내가 샘터에 남아 후미를 기다린다.
[샘터 하산길 숲속 풍경(14:01)]
시간이 흐를수록 안개의 농도는 짙어만 간다.정말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얼굴에 손을 대보니 이슬인지 땀인지 축축하다.그리고 몸이 차가워진다.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후미와 교신을 했다.미시령 위 잔돌지대에서 기다릴 테니 서두르지 말라고 일렀다.하산길은 처음에는 부드러운 흙길이었지만 내려올수록 잔돌길로 변했다.체력이 고갈되면 이런 길에서도 낭패를 보게됨을 경험이 말해준다.전혀 사고가 안 날 곳에서 긴장이 풀리면 넘어지는 수가 허다하다.다 된 밥에 코를 빠드리는 격이니 조심해야 한다.
[샘터에서 운무 자욱한 하산길을 내려서는 13용마 이태랑,윤기갑 선배(14:01)]
[미시령 잔돌지대-서울에서 온 준족의 26용마 배기호 동문의 멋진 모습(14:25)]
25분 가량 발품을 팔아 펑퍼짐한 잔돌지대에 이르러 두꺼비 형상의 바위에서 후미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25분 여 기다린 끝에 13용마 제병민 고문과 후미의 현기,김종만 부총무가 모습을 드러낸다.평소 똘똘 뭉치기로 치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 고문과 동기들의 반가운 상봉이 이뤄졌다.몸은 지친 표정이 역력했으나 시종 웃음을 잃지 않는 오늘의 히어로,제 고문께 다가가 "괜찮습니까? 이제 다 왔어요.아무튼 대단하네요!"하고 말을 건네자 "내 평생에 이런 곳을 어찌 와 보노.대자연의 위대함을 느끼면 시가 나오지.." "신대장,천천히 즐기며 걸어야 할 텐데.뭐가 그리 급해 빨리 내려왔느냐?"며 되레 호통을 치며 껄껄 웃으신다.
[친구 제병민 고문을 기다리다 못해(?) 통화를 하는 13용마 이태랑 선배(14:27)]
[제병민 고문을 기다리며 두꺼비바위에서 환하게 웃는 13용마 윤기갑,이일희 선배(14:27:13)]
[26용마 서울 배기호 동문이 잡은 내 모습]
[신선봉 갈림길에서 뿌리기 시작한 안개비는 물방울로 맺히고(14:30:44)]
우리들은 제 고문의 호연지기에 감전이 된 탓인지 함께 박장대소를 한다.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해 이제 겨우 몸을 추수른 제 고문은 백내장 수술 날짜마저 뒤로 미룬 채 동문들과 함께 했으니 그 집념과 용기가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제 고문 말마따나 산은 즐겨야 한다.내가 산이 되던가 아니면 산이 내가 되던가.그런 경지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쾌거였다.
제 고문은 2대 용마산악회 회장을 역임하여 동문들의 결속을 다졌고,지금은 13용마의 산행대장을 맡아 동기들의 산행을 이끌고 있는 인간미 넘치는 선배이기도 하다."신대장,처음에는 완주에 대한 생각이 없었어,오늘 해보니 완주하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는 제 고문의 끝말이 아직도 내 귓전에 맴돌고 있다. 아울러 13산우회 동기분들께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칠순의 나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산행을 하면서 이렇게 친구들과 동고동락할 수 있다는 것-그것은 몸과 마음이 젊은이 못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그것을 목도하는 우리들은 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온다.우리는 후미대장 현기와 김종만 부총무의 노고를 위로하고 안개 자욱한 잔돌지대를 빠져나와 3시경 하산날머리 미시령에 다다랐다.
[미시령 위 안개 드리운 잔돌지대를 걸어오는 33산우회(14:14:48)]
[잔돌지대에서 다리쉼을 하는 용마-안개에 젖고 땀에 젖어..]
[운무 낀 미시령}
예전에 소로길이었던 미시령(彌矢嶺)에 고갯길이 열린 것은 조선 성종24년(1493년)무렵이었다.그전에는 한양에서 관동으로 넘는 나라의 고갯길은 대관령과 소동라령(지금의 한계령)이었다.소동라령(所東羅嶺)이 좁고 험해 미시파령(彌時坡嶺)을 열어 양양,간성의 역로로 삼았다,그 미시파령의 간성 쪽 들머리가 원암역으로 지금의 원암리였다.그러다가 미시파령은 1632년부터는 이미 나랏길의 쓰임새를 잃고 다시 풀섶에 파묻혔다고 기록에 전한다.
그렇게 잊혀졌던 미시령에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길이 뚫린 것은 1960년이었다.그러나 워낙 험준한 탓에 미시령 찻길은 이내 망가져 방치되다가 1989년에 들어 다시 열렸다.미시령길은 한계령이나 진부령과는 달리 폭이 좁고 경시가 심하여 지금도 폭설이 내리는 겨울철에는 으레 서너 차례씩 길이 끊겼으니 예전에는 오죽했으랴.그런 미시령도 터널이 뚫리는 바람에 점점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멀어져 유람객이나 등산객들만 찾는 한적한 도로로 변모하고 말았다.
미시령만큼 다양한 이름의 고개도 드물 것이다.조선 시대,나랏길인 관로(官路)였을 적에는 미시파령(彌時坡嶺),또는 미시령(彌時嶺)으로 불리다가 영조 때에는 지금의 이름인 미시령(彌矢嶺)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그렇지만 세간에서는 미시령보다 연수파령(延壽坡嶺,대동여지도),연수파령(連水坡嶺,증보문헌비고),여수파령(麗水坡嶺,증보문헌비고)또는 연수령(延壽嶺,택리지)으로 더 많이 불렸다.
속초에서 미시령으로 오르는 길은 내내 울산바위와 함께 오른다.먼 옛날 조화옹이 금강산을 빚을 적에 울산에서 금강산으로 가다 그만 설악에서 멈추었다는 울산바위.옛이름이 천후산(天喉山)이니 이름 그대로“하늘이 우는 산”이다.울타리를 두른 듯하여 울산(鬱山)이라고도 하지만 여름철이면 벼락과 천둥이 쳐 마치 하늘이 우는 듯 산이 울기 때문에 울산이라 하였다는 설이 옳을 성싶다.
우리를 실은 대절버스는 속초 시내로 들어선다.옛날의 속초는 양양도호부를 따르는 작은 갯마을이었지만,일제시대 촉초항이 개발되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명산 설악을 등에 업고 푸른 동해를 더불었으니 아쉬울게 없고,아래위로 청초와 영랑같은 호수까지 거느렸으니 더 부러울 게 없는 곳이다.속초는 경주,김천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으례 차례를 다툰다고 택리지는 말한다.척산온천에서 산행의 피로를 풀고 해물찜으로 이름난 이모네집에서 산행뒷풀이를 하며 1구간 종주를 마무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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