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마을 인근 채소밭을 지나며]
여원재-고남산-매요리-사치재-복성이재 19.5km(2003년 7월 6일)
백두대간 종주 하루 전부터 전국에 비가 내렸다.특히“경남 지역과 전남 해안지역에 집중호우가 내리겠다”는 기상청 발표가 있자,과연 우리는 종주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그러나 종주는 결행돼야 한다.비가 온다고 종주를 단념한다면 장마철인 7월과 8월은 아예 종주를 접는 편이 나을 것이다.
7월 6일(일) 새벽 3시 50분,국제신문사 건너 한양프라자 앞에 다다르니 재화와 기환이,의선이를 비롯,오기묵 동문이 기다리고 있었다.잠시 뒤에는 익수가 도착했고 이어서 황세가 합류했다.
5분 뒤,기묵 아무의 봉고로 여원재로 떠난다.남해고속도로에서 창원으로 잠깐 빠졌다가 서마산 인터체인지에서 현기를 태웠다.함안을 지날 무렵 빗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하더니 산청휴게소에 다다르자 빗줄기는 제법 굵어지기 시작했다.산청휴게소 식당에서 아침밥을 들고 함양을 거쳐 종주들머리,남원시 운봉면 여원재에 닿았다.
빗줄기는 거세지 않았으나 우리는 배낭커버를 씌우고 아예 비옷을 꺼내 입었다.7시 2분,기묵이의 전송을 받으며 여원재를 뒤로 하고 종주에 들어갔다.
오늘 끊어탈 구간은 19.5km,휴식시간을 합쳐 약 9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이다.종주 도중에 폭우가 쏟아지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빗속에서는 점심을 들 수 없기 때문에 88고속도로의 '사치재'에서 오른쪽으로 약 1km 떨어진 88고속도로휴게소에서 기묵 아우와 만나기로 했고,사치재 근처에 이르면 휴대폰으로 연락하기로 했다.
7명의 대간종주팀은 오늘 구간에서 제일 높은 고남산(846.5m)으로 걸음을 옮긴다.대간마루금은 장치마을을 오른편 발치 아래로 두고 소롯길로 이어지다가 소나무숲 빗돌이 선 묘지에 이르면 오른편으로 꺾어 채소밭을 지난다.바로 그 지점에서 종주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고남산 암장에 올라]
남원에서 88고속도로를 달리다 지리산휴게소 중간쯤에서 왼편으로 눈을 돌리면 거대한 중계소가 서 있는 암봉이 바라보인다.바로 이 산이 고남산(古南山 846.5m)이다.
운봉평야에 우뚝 치솟아 예부터 전쟁터와 격전지의 보루가 되곤했던 고남산-이 산을 근동사람들은 태조봉이라고도 부른다.고려 우왕 6년(1380년),왜구 2천명을 이끌고 인월에 본진을 친 왜장 아지발도에 맞선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변안렬을 참모로,이두란을 아장으로 삼아 1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을 출발,전주 한벽당에 잠시 쉬었다가 남원에 도착하였다.
이때 멀리 운봉 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히 뽀�하여 이곳에 제단을 쌓았다.그리고 서쪽 산기슭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개하고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는 3일간의 산신제를 올려,황산(荒山)대첩에서 승리를 거두고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였다.
왜장 아지발도는 일본에서 떠날 때 그의 애첩이 조선 황산의 산신이 노하여 불길하다며 출정을 만류하였으나 이를 묵살하고 단칼에 그녀의 목을 베었다.사람들은 아지발도가 그 죄값을 황산전투에서 받은 것이라고 여겼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뒤,이성계는 이 산의 이름을 태조봉,또는 제왕봉으로 불렀다.고남산 아래에서 산신제를 지내고,주둔할 때 군사와 말들의 식수로 썼던 샘터 주변에 터를 잡은 권씨마을은 권세가 하늘에 닿도록 그치지 않는다 하여 권포리(權布里)라 하였다.그리고 여원재에서 고남산 초입에 있는 마을은 이성계의 책사,무학대사가 지세를 살피니 고남산의 산줄기가 이 마을까지 뻗어내려 흡사 긴 다리를 놓은 것 같아 장교리(長橋里)라 지었고 이씨와 김씨가 번성할 것으로 예언했는데,오늘날 이씨와 김씨가 평화롭게 살고 있다.
사진은 숨가쁘게 이어지던 고남산 오름길에서 밧줄을 부여잡고 바위를 오르면 만나는 암장을 뒤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통신시설이 있는 고남산 정상은 사진 오른편에 있다.
[고남산 정수리에서]
여원재를 떠난 지 2시간 뒤인 9시,고남산(846.5m) 정수리에 올랐다.이제 빗줄기는 굵어지고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서서히 우중산행(雨中山行)이 시작되고 있었으니......
현기가 늦게 합류하는 바람에 고남산 정수리에서 또다시 기념사진을 찍었다. 지리산 산역을 벗어난 오늘 구간 가운데 제일 높은 봉우리가 바로 고남산(846.5m)이다.
우리 일행이 고남산 암장을 오를 때 영천에서 온 젊은 종주꾼들도 그 암장을 막 올라서고 있었다.우리보다 30분 빨리 여원재를 출발하여 고남산에 오른다고 한다.어디 그뿐이랴.고남산에서 하산을 하자마자 이번에는,고남산 정상으로 올라오는 한무리의 종주팀들과 또 맞닥뜨렸다.서울 자유인클럽의 대간종주팀이었다.새벽 3시,복성이재를 출발하여 6시간만에 고남산에 오르고 있다 한다.그 가운데 한 회원은,우리가 이제 3구간 종주를 한다고 하자 "참 걱정되네요.! "하며 씨익 웃는다.그간의 지긋지긋하고 힘든 대간 종주를 두고 "어디 고생 좀 해보슈"하는 말투였다.
그렇다.백두대간이 어디 개별산 타는 것과 같을손가?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서는 백두대간을‘백수대간’이라고 하지 않는가.시간과 돈,그리고 산 타는 재주,이 세 가지를 두루 갖추야 하는데,그 가운데서도 제일은 시간이 있어야 한다.그렇기 때문에‘백수대간’이란 별칭이 생긴 것이다.아무튼 잇달아 두 종주팀을 만나고나자 조용하던 고남산이 왁짜지껄 소란스럽다.이제 웬만한 산꾼이라면 백두대간 종주를 하지 않고는 산꾼 행세 하기도 어려운 세상이 된 것 같았다.
[고남산 정상 부근에서 만난 멋진 산수국]
고남산 정상에서 대간마루금은 서진하게 되지만 통신시설이 가로막아 남쪽으로 에돌아 내려서야 한다.사진에 보이는 산수국은 정상 바로 밑 길섶에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아울러 이번 구간의 마지막 하산지점인 복성이재 못미쳐 아막성터 근처에서도 산수국 군락지를 발견하였다.
여름이 한참일 즈음, 산길을 걷다 보면 고운 남보라빛 꽃송이가 무성한 초록빛 잎새와 어울려 피어 있는데 바로 산수국이다.산에서 만난 산수국의 모습은 한여름의 더위쯤은 한순간에 씻겨 줄 만큼 시원하고 또 아름답다.그 꽃송이들의 화려하고 변화무쌍하며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매력은 산수국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것이다.
흔히 수국은 잘 알고 있으나 산수국은 조금 낯설다.수국이 꽃을 즐기기 위해 심는,중국을 고향으로 한 낙엽성 작은키나무라면 산수국은 이땅에서 자라는 야생의 우리 수국이라고 할 수 있다.
산수국과 수국을 비교하면 아주 큰 차이점이 있다.산수국은 결실을 하여 후손을 번성케 할 수 있지만,수국은 꽃은 더욱 화려하나 결실하지 못하는 석녀라고 할 수 있다.산수국을 보면 크게 두 종류의 꽃들이 모여 하나의 원반 같이 커다란 꽃 차례를 만든다.가운데 들어 있는 꽃들은 유성화로 번식을 담당하는 꽃이라면,가장자리의 꽃들은 꽃잎만 화려하고 수술과 암술은 퇴화한 그러나 화려한 모습으로 벌, 나비를 유혹하는 역할을 하는 무성화이다.산수국의 입장에서 보면 두 종류의 꽃으로 분업화시켜서 효과적으로 결실을 유도하게 되는 것이다.하지만 수국의 경우에는 꽃잎(실제로는 꽃받침이다) 이 커다란 무성화가 마치 커다란 공처럼 모여 있어 풍성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실속은 없는 편이다.수국은 범의귀과에 속하는 낙엽성 관목이다.보통 1m 정도의 높이로 큰다.중부 이남의 산골짜기에서 잘 자란다.
수국을 비롯하여 산수국 등은 약용으로도 이용된다.생약명으로는 수구(繡球), 수구화(繡毬花) 또는 팔선화(八仙花)라고도 부른다.뿌리와 잎과 꽃 모두를 약재로 쓰는데,심장을 강하게 하는 효능을 가졌으며 학질과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세에 처방하고 열을 내리는데도 많이 쓰인다.산수국은 지방에 따라 거치엽수구,도체비고장,돗채비고장,물파리,장엽거치수구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운다.제주도에서 꽃의 색깔이 하루아침에 변화한다고 하여 도깨비꽃이라고 하여 꺼려했다고 하는데,요즈음에는 이 특징이 좋은 관상적인 장점이 되고 있다.
영어로는 말 그대로 Mountain Hydrangea로 쓴다.수국의 종류를 총칭하는 속명 하이드 란지아(Hydrangea)는 물이라는 뜻의 하이드로(hydro)와 용기,즉 그릇이라는 뜻의 안게이온(angeion)이라는 글자가 합쳐진 합성어이다.이 속의 식물들이 많은 수분을 흡수하고 증산한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데,일설에 의하면 이 식물들이 물가에서 많이 자라고 또 열매의 모양이 그릇과 같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산수국은 나무 아래 지피로 심거나 돌이 있는 계류조경의 주변식물로 식재하면 좋은 효과가 있으며,요즈음에는 자연스런 느낌을 살려 분화로 만든 것도 아주 인기가 높다.재배는 물빠짐이 잘되는 것에 주의해야 하고 공중습도가 높은 것이 유리하다.추위,그늘,공해에 모두 강하다.번식은 삽목이나 종자가 모두 가능한 데,특별히 화려하고 풍성한 꽃을 피우는 개체들을 골라 삽목하면 아주 좋다.
고남산에서 통신중계소를 왼쪽으로 에돌아 내려서자 시멘트도로가 나타난다. 종주길은 대간 마루금을 따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열린 시멘트도로를 따라 가야 한다.통안재에 다다르자 우리는 비로소 대간 마루금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비는 줄기차게 쏟아지고 신발 속엔 물이 스며들어와 철벅거린다.비옷을 입어도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발목을 적시다가 양말 속으로 들어가는데는 속수무책,신발은 온통 물구덕이 되었다.고남산 정상의 중계소로 이어지는 통안재 고갯마루의 시멘트도로를 버리고 703봉에 올라선다.
여기서부터 대간은 동진(東進)하다가 크게 오른쪽으로 감아돌아 유치재에 다다르면서 거의 남진(南進)하한다.사진은 573.2봉 너머 유치재 지나 매요리로 가는 솔숲에서 황도로 요기를 하는 모습이다.등을 돌리고 있는 손의선 회원은 판초를 썼지만 반바지는 물에 젖어 엉덩짝이 고스란히 드러나 육감적이다.
매요리 마을로 가는 능선에서 황도로 요기를 하고 다시 다리품을 팔았다.비가 퍼붓기 때문에 딱히 앉아 쉴 만한 곳이 없어 쉼없이 걷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고남산을 떠난 지 2시간 뒤,11시 매요리 마을에 다다랐다.마을에 들어서자 하늘의 봇물이 터진 것처럼 장대비가 퍼붓는다.7명의 종주팀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대간 마루금은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한다.대간 마루금이 마을 도로와 갈라지는 삼거리에 매요휴게소라는 음식점이 보인다.이 깊고 한갓진 산중마을에 음식점이라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 음식점은 필경 백두대간 종주꾼들을 위한 쉼터이자,식당이리라.사실 매요리는 고남산에서 5.4km,여원재에서 10.6km 떨어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중주팀들이 점심을 들기에는 적당한 장소다.하지만 우리는 오기묵 후배와 88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으니 매요리에서 2km 떨어진 사치재까지 다리품을 팔아야 했다.
매요휴게소를 지나자 다시 사거리인 유재가 나왔다.왼편 도로는 장수군 번암면,오른쪽 도로는 남원시 운봉읍,직진하면 가산리로 가게 된다.이 유재에서 대간 마루금은 번암행 도로와 가산행 도로 사이의 산등으로 올라붙는다.우리는 제법 가파른 산등을 더터 주능선으로 오른다.
사진은 유재에서 가파른 능선을 더터오르는 종주팀의 후미를 카메라가 잡았는데 산불이 난 지역이어서 나무는 검게 그을려 있고 빗속에 안개가 배회하여 칙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기환이의 표현을 빌리면,이 장면은 흡사 "라스트 모히칸"에 나오는 분위기 그것이라는 것이다.맨 뒤에 현기가 오르고 그 앞에 노란 우의를 걸친 기환이가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유재에서 산불지역 능선의 막바지 오르막을 오르는 현기와 기환이-온통 안개가 대기를 덮어 자못 신비한 분위기다.앞의 사진과 약간 다른 각도에서 앵글을 잡았다.
매요리 마을을 뒤로 하고 50분쯤 발품을 팔자 88고속도로가 나온다.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 일행은 고속도로를 과감히 건넜다.고속도로 가장자리의 철조망이 끊어진 곳으로 내려가니 나무 이정표가 서 있다.이곳이 바로 사치재(490m)다.
빗줄기는 억수같이 퍼부어 1km가량 떨어진 지리산휴게소까지 걷기에는 무리였다.기묵이를 휴대폰으로 불렀다.잠시 뒤 휴게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묵이의 봉고가 사치재에 다다랐다.
주말인데도 지리산휴게소는 한산했다.우리는 식당으로 들어가 미처 점심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한 회원은 곰탕을 시키고,도시락을 가져온 회원들은 오뎅우동을 시켜 점심을 들었다.그리고 휴게소에서 젖은 옷도 말리고,신발 속의 물도 짜내며 휴식을 취했다.
오후 1시,사치재로 되돌아와 발품을 판다.빈 속을 채우고나니 원기는 회복했지만 1시간 가량 다리를 쉰 탓에 걸음은 마냥 무겁다.이제 사치재에서 새맥이재까지 2km,시리봉 헬기장까지 1km,그리고 복성이재까지 3.7km,모두 6.7km의 거리가 남았다.아마 3시간 가량 발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치재 이정표에는 복성이재까지의 거리를 4.8km로 표시해놓았다.무려 1.9km 가량 차이가 난다.이런 잘못 투성이의 이정표는 대간길 곳곳에 흔하므로 믿을 바가 못 된다.지형도상의 구간거리를 꼼꼼히 분석하여 올바른 거릿수를 계산해야 운행시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사치재를 출발하여 산불지역을 오르고 난 뒤 새맥이재 못미쳐 헬기장에서 후미의 기환이와 현기가 빗속에서 포즈를 잡았다.
두 번에 걸쳐 화마(火魔)가 핥퀴고 간 산불지역은 굉장히 넓었다.봉우리 몇 개를 넘어섰는데도 여전히 검게 그을린 나무등걸이 출현해 애처로웠다.시커멓게 불탄 나무에 비는 내리고 안개는 잔뜩 끼어 걸음걸이는 점점 무거워진다.이마에 흘러내리는 것은 빗물인지 땀방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선두의 황세,재화,의선이는 봉우리를 막 넘어서고 있고,익수는 바야흐로 안개 낀 봉우리 산등에 올라서고 있다.흐릿한 익수의 뒷 모습과 선두가 보인다.그리고 자세히 보면 불탄 나무의 검은 자태가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잔뜩 대간 마루를 덮고 있던 안개가 일순 벗겨지고 선두에서 발품을 파는 종주팀이 시야에 들어왔다.제일 앞쪽으로 의선이,가운데 재화,맨 뒤에 황세가 보인다.지난 구간 우리의 애간장을 태웠던 의선이는 점심을 먹고나자 심기일전 선두에 서는 저력을 발휘했다.
사치재에서 오후 1시 산행을 시작하여 산불지역을 완전히 벗어나 새맥이재에 다다르니 오후 2시였다.새맥이재를 지나 다시 능선을 오른다.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또 다시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다.마치 물동이로 물을 쏟아붓는 것과 같았다.이제 내 디지탈 카메라도 물에 젖어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마지막 이 한 장의 사진을 끝으로 배낭 속에 카메라를 집어넣어야 했다.
오후 2시,새맥이재에서 제법 가파른 시리봉 헬기장으로 오른다.시리봉 헬기장을 지나면서 철쭉과 싸리나무 지대가 이어진다.걸음이 지체된다.반바지를 입은 종아리와 무릎을 잡목이 핥퀴고,나뭇가지가 팔목을 잡아당겨 상채기를 낸다. 신발은 이미 그 기능을 잃고 다리품을 팔 때마다 텅벙텀벙 이상야릇한 소리를 낸다.
이렇게 잡목지대에 들어서면 허리를 꺾어야 할 정도로 숲이 우거져 연신 배낭이나 모자를 당긴다.한마디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잡목지대를 벗어나면 다시 긴풀이 웃자라 내 키를 넘거나 허리께까지 오는 지대가 연이어 나타났다. 하지만 쉬지 않고 발품을 팔았다.마치 가다가 정지하기라도 하면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쉬려고 하지 않았다.무아상태에서 걸음짓이 이뤄지고 있었다.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우리 가는 길 앞에 그 무엇이 막아서더라도 헤쳐나갈 수밖에 없는 명령을 받은 사람처럼 걷기에 온 신경을 다 쏟았다.이럴 때의 걷기는 자신의 의식으로 걷는다기보다 저절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 돌무더기가 잔뜩 쌓인 아막성터에 이르렀다.신라와 백제의 쟁탈지였다는 아막산성은 시리봉과 복성이재 사이에 있으며 전북지방 기념물 제38호다.성이 있는 일대는 백제에서는 아막성,신라에서는 모산성으로 불리던 곳이다.산성의 크기는 둘레 632.8미터에 북쪽에 수구와 북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리고 동쪽에는 1.5미터의 원형 석축으로 된 정호지(井戶址)가 있다.허물어진 산성의 돌무더기를 딛고 내려서서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갔다.예전에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와 흔적이 엿보였다.
이제 하산길이다.오후 3시 55분 드디어 오늘 구간의 종착지인 복성이재에 다다랐다.거기에는 기묵이의 봉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여원재에서 복성이재까지 장장 9시간 다리품을 팔아 제3구간을 완주했다.
복성이재-남원시 아영면 성리에서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로 넘는 고개다.고갯마루에서 오른쪽 성리 쪽으로는 포장이 되어 있으나 왼쪽 목장을 지나 번암면 쪽은 아직 공사중이라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고 기묵이가 전한다.
사진은 신 대장과 황세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는 가운데 의선이가 맨발로 걸어오고 있다.그 너머로 오기묵 후배의 지원차량인 봉고 뒷문이 열려 있고 동기들이 배낭과 짐을 꾸려넣는 게 보인다.
오늘 구간은 복성이재까지다.여원재에서 복성이재까지 약 19.5km의 거리를 9시간만에 완주했다.대간 종주팀은 온몸이 젖어 있어 여벌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기묵이의 봉고는 온통 물세례를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그리고는 함양의 목욕탕으로 직행하여 산행으로 얼룩진 몸을 �고 피로를 풀었다.
3구간은 한마디로 빗속을 뚫고 강행한 우중산행(雨中山行)이었다.그리고 익수와 기환이가 드디어 본격적인 종주회원으로 참여한 뜻깊은 산행이기도 했다.9시간 가량의 종주에 지칠줄 모르는 두 동기의 주력과 인내심,아울러 치열한 정신력은 이미 대간 종주를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두 동기한테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전한다.
복성이재에서 종주에 참여한 7명 모두 모여 3구간 끊어타기 기념사진을 찍었다.뒷줄 왼쪽부터 이재화 총무,손의선,김황세,신남석 산행대장,김현기 후미대장,앞줄에 앉은 회원이 전기환,김익수 동기다.
[종주정보]
07:02 여원재(477m)...5.2km....09:00 고남산(846.5m)....5.4km...11:00 매요리
....2km....11:50-13:00 사치재(88고속도로)...2.2km....14:00 새맥이재...4.7km
....15:55 복성이재(540m)
도상거리 19.5km
종주시간:8시간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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