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대에서 바라본 세걸산,바래봉과 삼봉산 산줄기]
만복대-정령치-고리봉-고기삼거리-수정봉-여원재 13.25km(2003년 6월 29일)
만복대 정상에서 바라본 산그리매-제1선이 세걸산 능선이며 두번 째 능선은 바래봉 능선이다.산꼭대기가 초지처럼 보이는 봉우리가 철쭉으로 이름 높은 바래봉,그 뒤로 울퉁불퉁한 산줄기는 삼봉산 능선이다.백두대간은 고리봉에서 왼쪽 고기리로 방향을 꺾기 때문에 세걸산과 바래봉은 거치지 않는다.

[정령치로 가며 클로즈업한 바래봉]
만복대에서 하산에 들어 정령치로 다가가면서 상봉이 초지로 이뤄진 바래봉 능선을 조망하다.

[고리봉 오름길에 뒤돌아본 정령치]
만복대를 떠나 정령치(1,172m)에 닿은 시각은 9시 3분-어쩌면 의선이가 정령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가닥 기대에 부풀었으나 그곳에 그는 없어었다.
휴대폰으로 의선이를 찾았으나 불통지역이라 통화가 되지 않았다.다만 두 시간 전인 아침 7시,의선이가 재화와 통화를 시도한 흔적만 휴대폰에 남아 있었다.재화는 휴대폰에 뜬 메시지로 볼 때,신변에 위험이 처할 정도는 아닐 거라고 조심스럽게 내다본다.
하지만 정령치에서 30분이나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우리는 모종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종주를 포기하고 의선이를 찾는게 급선무였다.먼저 오기묵 후배한테 전화를 걸어 이곳 정황을 털어놓고 봉고를 정령치에 오도록 알렸다.그런 다음,황세와 나는 빈몸으로 정령치에서 거꾸로 만복대에 올라 묘봉치로 가기로 했다.기묵이의 봉고가 오면,일행은 성삼재로 다시 가서 재화와 현기가 종주를 시작해 묘봉치에서 우리와 만나기로 단안을 내렸다.
황세와 내가 만복대로 가기 위해 정령치 나무계단을 올라서고 있는데,저 아래 정령치에 있는 친구들이 큰 소리로 우리를 부른다.의선이로부터 전화가 왔다며 빨리 내려와서 전화를 받으라는 것이다.너무 반가워 재화의 휴대폰을 받자마자 "의선아,거기 어딘데.?"하며 다그치듯 물었다.의선이는"상의마을"이라고 한다.그렇다면 '묘봉치에서 하산한 게로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지리산온천랜드가 있는 마을 위안리에 있었다.재화는 정령치로 오고 있는 기묵이한테 다시 전화를 넣어 위안리 상의마을로 가서 그를 데리고 고기삼거리에서 만나자며 일정을 바꾼다.
우리 일행은 고리봉에 올라 고기삼거리로 내려가기로 했다.기묵이가 의선이를 태우고 고기삼거리에 오는 시간이나 우리가 대간을 타고 고기삼거리로 내려서는 시간은 거의 비슷할 듯했기 때문이었다.저간의 사정이야 어떻든 의선이가 탈없이 생생하다는 사실에 안심을 하며 우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사진은 고리봉으로 오르다 돌아본 정령치의 모습이며 정령치 뒤 높은 봉우리가 만복대다.

[대간분기점,고리봉에 올라]
727번 도로가 통과하는 정령치에서 800미터 떨어진 고리봉(1,304.5m) 오름길은 생각밖으로 힘이 무척 들었다.오름길이 가파른 탓도 있었지만 정령치에서 너무 오래 다리쉼을 하여 몸이 굳어버린게 더 큰 요인이었다.고리봉 이정표를 사이에 두고 만복대를 등진 대간팀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손의선(뒷줄 왼쪽 4번째) 회원과 고기삼거리에서]
9시 57분 고리봉에 섰다.잠시 숨을 고른 뒤 고기삼거리로 하산에 들어가 11시 10분,드디어 고기삼거리로 내려섰다.여기서 4시간 가량 실종되었다 돌아온 의선이를 만나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이정표를 깃점으로 대간은 지리산 산역을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가재마을 지나가게 된다.그토록 높고 범접하기 어렵던 백두대간도 이제는 인가(人家)로 내려와 사람들과 어깨를 부비며 정답게 어울린다.사진은 오기묵 후배가 찍었으며 그는 구례군 산동면 하의마을에 있던 의선이를 태워 고기삼거리에서 우리와 합류시켰고,의선이는 남은 2구간을 우리와 함께 종주하게 됐다.

11시 10분,고기삼거리에 다다라 점심을 들어야 했다.마을에서 버너를 피우고 밥을 해먹기는 영 마땅치 않았다.그래서 고기리삼거리휴게소에서 비빔밥으로 때우기로 했다.
12시 20분,점심식사를 마치고 가재마을로 떠난다.대간의 마루금은 마을 한복판으로 난 시멘트도로를 따라 주촌리 가재마을을 관통한다.12시 49분 가재마을로 들어서자 수정봉 산자락이 시작되는 마을에"노치샘"이 나온다.'물 맛이 좋다.'며 백두대간 종주꾼들에게 갈증을 축이고 가라는 안내문이었다.
우리는 노치샘을 지나쳐 마을 당산목이 있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정말이지 모든 것 다 잊고 소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이나 한숨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을 당산목은 소나무다.수령은 아마 200년은 됨직하다.마을의 노거수나 당산목은 대개 느티나무나 회나무가 보통인데,소나무를 당목으로 모시는 곳은 흔치 않다.
사진 오른쪽에 산신당 제단을 만들고 쇠울타리로 철책을 쳐놓았다.사실 소나무는 우리나라의 나무다.우리네 조상들은 소나무로 집을 짓고,소나무로 땔감을 사용해왔다.그리고 송진으로 불을 밝히고 죽어서는 소나무 관에 묻혔다.소나무의 송이를 귀하여 여겼고 소나무 뿌리에서 나는 백복령으로 병을 치료하기도 하였다.따라서 소나무는 신령한 나무로 우러러 받들었다.속리산의 정이품 소나무는 관직을 하사받을 정도로 품격을 지니고 있다.소나무 숲속에 들어서면 그 특이한 향기는 삶에 찌든 우리의 일상에 청정한 기운을 불어넣는다,우리는 이 당산목 아래서 땀을 식히며 간식을 들었다.

주촌리 가재마을 들판 너머로 보이는 높은 봉우리가 고리봉이며,거기서 대간은 가재마을 오른편 산줄기를 따라 마을로 내려온다.사진에 보이는 마을 한가운데 솔숲 가운데로 난 도로가 대간의 분수령이다.그 분수령 왼쪽으로 떨어지는 물은 경호강을 거처 남강으로 스며들고,도로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물은 섬진강으로 스며든다.대간의 분수령에서 갈라진 두 물길은 이 땅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고,그 물길이 바다에 이르러 마침내 커다란 해후를 하게 된다.
대간의 마루금은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이렇게 우리 땅 곳곳을 관통하며 그 지역 물길의 유역을 가름한다.여기 고기리와 주촌리는 평지처럼 보이나 해발 55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다.대간은 지리산 산역을 완전히 벗어나 우리네가 몸부비며 사는 삶의 현장을 지나간다.사진에 보이는 고리봉 오른편 잘룩한 고개는 727번 도로가 지나가는 정령치이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잘룩한 고개가 정령치(1,172m)이며 그 오른쪽 산줄기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는 만복대(1,433.3m)다.이 만복대를 경계로 전라남도 구례군과 전라북도 남원시가 갈라진다.남원시 운봉읍 주천면 고기리에서 727번 도로가 정령치를 넘어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달궁으로 이어진다.

[수정봉 정수리에서]
가재마을 산신당 너른 공터에서 갈증을 축이고 오후 1시 10분,수정봉으로 오른다.고도 200미터 가량의 가파른 오르막길이다.12분 가량 땀을 흘리며 수정봉 능선에 올라서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후덥지근하던 몸을 식혀준다.다시 능선을 따라 28분 가량 다리품을 팔아 삼각점이 있는 수정봉(840.7m)에 다다랐다.사진은 수정봉 정수리에 올라선 종주팀이 배낭을 풀고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다.맨 앞에 익수 그 뒤로 황세,금구,환부가 보인다.

[수정봉 오름길의 기환,현기]
백두대간 2구간 종주 내내 우리는 말나리꽃을 보며 걸었다.정말 아름답고 예쁜 야생화였다.자칫 무덤덤하기 십상인 종주길에 이 예쁜 나리꽃은 우리에게 시적인 정서와 몽환을 불러 일으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말나리는 활짝 피어 뒤로 젖혀진 다섯 장의 꽃잎마다 점점이 박혀 있는 점들이 정겹다.나리꽃 종류에서 가장 먼저 피는 섬말나리를 훨씬 앞세우고 말나리,솔나리,하늘나리,땅나리,하늘말나리,중나리,털중나리,참나리,백합이 줄을 선다.
일찍부터 외국에서는 우리나라의 나리를 값지게 여겨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가져다가 종자를 개량하여 여러 모양,여러 빛깔로 키워냈다.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나리와 백합은 뿌리든 꽃이 든 우리 것에서 개량된 것이 많다.백합의 서양 이름인 릴리(Lilly)는 우리 이름인 나리와 본디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수정봉 정수리에서 조망은 별로였다.우리는 수정봉 정수리에 앉아 의선이가 가져온 황도통조림으로 요기를 하며 15분쯤 휴식을 취했다.그런 다음 입망치(笠望峙)로 내려가기 시작했다.사진은 수정봉에서 하산하는 종주팀의 모습으로 맨 앞에 재화,그 다음에 기환,익수,금구가 차례로 하산길을 내려오고 있다.

최금구-그는 금정산 산자락 남산동에 살고 있다.조기등산으로 단련된 그의 몸매는 군두더기살이란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다.작년 낙남정간 종주 때도 시간이 허락하면 꼭 종주에 참여하곤 했는데 백두2구간 끊어타기에 오면서 그는 말했다. "그동안 장거리 종주를 게을리 했는데,과연 대간을 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래도 도전해보는 거야."라며 투지를 불태웠다.2구간 끊어타기를 마치고 그는 "이제 몸이 풀리는구먼..."하며 산속에 더 머물고 싶다고 했다.그래,그 말이 맞다.산 속에 오래 있을수록 우리는 더 자연에 가까워지는 법이리라.

[중앙동 신사-최금구]
수정봉에서 25분 가량 다리품을 팔아 입망치에 다다랐다.늘 선두에 서서 준족을 자랑하는 김황세 동기를 카메라 화인더에 고정시켰다.그의 이름 그대로 황세는 긴 다리를 리드미컬하게 흔들며 마치 황새처럼 날아간다.어찌 뱁새가 황새의 다리를 알리요.

[나는 듯한 걸음걸이의 김황세]
3시간 가량 그토록 우리를 가슴조이게 하고 허탈하게 만든 장본인,손의선 회원-그는 불가사의한 인물이다.밤새도록 술추렴을 하고도 산에 오는 걸 보면 신기할 정도로 놀랍다.산행을 하고 처음 한 시간 쯤은 맨 뒤에서 전전긍긍하곤 한다.그러나 그 워밍업이 끝나고 나면 어디서 그의 괴력이 나오는지 선두에 선다.그래서 우리는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그를 사천왕이라 부른다.그런 그도 오늘은 힘이 부쳤는지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옆길로 새는 과오를 범했다.의선아! 이제 몸 생각도 좀하고 밤새껏 마시는 술은 자제하려므나.평소 너한테 핀잔 주기를 다반사로 하는 재화가 너의 실종을 두고 얼나마 애태웠는지 모를 게다. 특히 일이 잘못되면 아지매한테 무슨 면목이 있으랴! 하는 재화를 보는 우리도 가슴이 찡 하더구나.그는 학교 동기는 아니지만 동기들보다 더 붙임성이 있고 친근한 우리들의 산꾼이다.

[괴력의 사나이자,별종인 손의선]
전기환 혜성병원 원장은 외과의원을 운영하는 황세와 함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 의료인이다.친구 좋아하고 산을 좋아하는 두 동기는 그저 병원에 눌러박힌 앉은뱅이 의사가 아니다.주말이면 자연을 벗하여 그 속에서 자신을 갈고 닦는 성실한 친구이요,산꾼이다.

[피노키오,아니 자칭 가젯트라는 전기환]
늘 스포츠형 머리에 평소 말이 없고 선이 굵은 여환부 동기-얼마전 마산에서 아들 결혼식에 많은 동기 산꾼들이 참석한 것을 두고 새삼 산꾼들의 의리와 끈끈한 정을 확인했다며 고마워하는 그를 보면서 젊은 날 지리산에 파묻혀 살던 그가 대간 종주에 함께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마산의 통술집에서 산행 뒷풀이를 하고 선뜻 그 술값을 쾌척한 것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그의 소신에 다름 아닐 것이리라.

[과묵한 산꾼,여환부]
이번 구간을 끊어타면서 우리는 나리꽃을 비롯 기린초,산오이풀,산수국,노루오줌풀 따위 아름다운 야생화를 만날 수 있었다.그 가운데서도 엉겅퀴는 단연 돋보이는 꽃이었다.
"가시나물"이라 하는 엉겅퀴는 결각진 잎의 톱니가 모두 가시로 되어 있어서 다치면 따끔거린다. 보기에도 무척 험상궂지만 연한 어린 순은 나물로 이용한다. 엉겅퀴는 종류가 많으며 대개는 어린 순을 산나물로 먹을 수 있는데 보기보다는 좋은 산채이다.
잎의 생즙은 관절염에 잘 듣는다고 하여 즐겨 먹으며,또 생즙에 밀가루를 반죽하여 척추가리에스의 환부에 붙여도 효과가 있다 하여 잎을 삶은 물로 줄기나 치질의 세척제로 이용하면 효과가 있다 한다.엉겅퀴의 뿌리는 잘 게 썰어서 볕에 말렸다가 다려 약용하는데 건위,강장,소염,해독,이뇨제 따위로 쓰이며 신경통에도 잘듣는다고 한다.또 잎을 말렸다가 토혈,출혈 등의 지혈제로도 효과가 있다.
엉겅퀴라 하면 옛날에 스코틀랜드에 침입한 바이킹의 척후병이 성 밑에 난 엉겅퀴가시에 찔려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성내의 병사들이 깨어나 바이킹을 물리쳤다 하여 구국의 공로로 스코틀랜드의 국화가 된 것으로도 유명한 식물이다.
우리 산우회가 일년 내내 산중에서 즐겨드는 현기의 트레이드마크,솔송주는 솔방울에 엉겅퀴 뿌리를 넣고 소주 주정를 부어 만든 약초술이다.이때 엉겅퀴를 넣으므로써 솔송주 의 색갈이 더 깊어지며,엉겅퀴와 솔방울의 성분이 뒤섞여 기막힌 술이 빚어지는 것이다.


[대간길의 야생화-기린초]
노루오줌풀! 곱디 고운 모습과 달리 꽃이름은 뜻밖으로 엉뚱하다.노루가 살아 갈만큼 깊은 산골에 피는 식물이며 식물체에 약간 찝찝한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나 노루오줌에 한번 눈길을 주고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이름을 두고 마음 쓰지 않는다.보는 일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좋으니 말이다.
노루오줌은 범의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아주 크게 자라면 꽃대의 높이까지 모두 합쳐서 70㎝정도 자란다.곧게 올라간 줄기는 두 세 번 갈라져 작은 잎들이 모여 이루어진 잎새를 달고 있고,줄기 끝에는 지름이 3㎜나 될까 싶은 작은 꽃들이 모여 길이가 30㎝에 달하는 고깔모양의 커다란 꽃차례를 이룬다.비록 아주 작은 꽃들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기 위해 서로 조화롭게 달리는 노루오줌 꽃의 슬기가 참으로 부럽다.더욱이 진분홍빛 꽃잎은 그 때깔이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모른다.노루오줌 가운데는 잎이 달리는 각도가 아주 큰 진퍼리노루오줌,꽃차례가 축축 늘어져 달리며 꽃의 빛깔도 다소 연한 홍색인 숙은노루오줌이 있으며 아주 흰 노루오줌이 드물게 발견되기도 한다.
예전에 노루오줌의 가장 중요한 쓰임새는 약용식물이었다.보통 소승마라고 부르는 땅 위에서 자라는 부분은 해열,진해 작용이 있으므로 감기로 인한 열,기침,두통과 몸살 기운이 있을 때 처방하고 적승마 즉 뿌리 부분은 진통작용이 있으며 혈액순환을 돕기 때문에 관절이나 근육통,타박상에 의해 멍이 들었을 때 처방한다.
요즈음 사람들이 노루오줌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관상적인 가치 때문이다.우리의 노루오줌은 특히 추위에 견디는 힘이 강하고 한번 심어 놓으면 아주 심하게 건조하지 않는 한 특별한 관리가 없어도 몇 년 정도는 매년 꽃을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더욱이 봄에 화려했던 꽃들이 다 져버리고 꽃을 보는 식물이 뜸해질 즈음에 꽃을 피기 시작하여 여름내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흰노루오줌풀]
수정봉에서 하산에 들어 입망치로 내려오면 진행방향 왼쪽으로 뻗은 산줄기에 커다란 암장이 보인다.이곳이 남원시 이백면 양가리 5-3 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여원치 마애불상이다.98년 전북유형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된 마애불인데,여원치 낭떠러지에 병풍처럼 둘러진 바위 가운데 양각되었다.높이 230cm, 어깨 너비 120cm이다. 다소 두꺼운 가사,신체 표현에 육감적인 면이 부족한 점 등으로 미루어 고려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사진에 보이는 암장은 마애석불의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이라 아쉬웠다.

[입망치로 가다 바라본 여원재의 마애석불 뒷모습]
수정봉에서 2시 28분경,입망치에 내려서고 난 뒤에도 우리는 몇 개의 봉우리를 더 넘어야 했다.
첫 봉우리를 지나고 다시 그 다음 봉우리를 지날 즈음 처음으로 산꾼을 만났다.혼자였다.반가워 가볍게 수인사를 건네자 "오늘이 40일째 입니다."하며 우리를 스쳐지나간다.진부령에서 남쪽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있는 백두대간 종주꾼이었다.홀로 대간을 종주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배짱에다 산행능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완주를 기원하며 걸음을 옮겼다.그때 시각이 오후 3시 12분이었으니,오늘 그는 정령치까지 구간을 끊을 듯했다.이제 3번만 더 대간에 몸을 부대끼면 그리운 천왕봉에 서게 될 것이리라.그가 부러웠다.우리는 이제 겨우 대간을 시작한데 불과하니 언제 저 진부령에 닿을꼬.이런 상념에 잠기며 우리는 다시 30분 가량 더 발품을 팔아 3시 45분,드디어 여원재에 내려설 수 있었다.

[여원재 운성대장군을 배경으로 선 여환부,손의선]
백두대간 2구간의 마지막 종착지인 여원재(女院峙)에 다다라 운성대장군을 사이에 두고 기념촬영을 했다.운성대장군 뒤로 우리가 내려온 대간 흙길이 열려 있다.
여원재는 남원과 운봉,함양 즉,호남과 영남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 임진왜란이나 왜구의 침입 같은 전쟁이나 민란,반란 따위가 있을 때마다 항상 쟁탈의 대상이 되곤 했다.
1894년 1월에 일어난 동학혁명 때도 마찬가지였다.백두대간 서쪽 호남지역과 충청 일부지역에서 세력을 키우던 동학군이 백두대간 동쪽 영남으로 진격을 시도하기 위해 노렸던 곳이 바로 여원재다.그러나 동학군은 이 여원재를 넘지 못하고 패퇴함으로써 그 세력이 약화되어 남원으로 후퇴하고 말았다,동학군은 이 여원재 전투에서 패하는 바람에 영남지방으로는 한발짝도 들여 놓지 못했다.

[2구간 종주날머리,여원재에서]
남원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운봉읍으로 가다보면 해발 477m의 여원재(女院峙)를 넘는다.교통이 불편하던 옛날,남원과 운봉, 함양을 오가는 길손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이 고개의 유래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때 이 곳 운봉현까지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고개마루 주변 주막집을 들락거리던 왜구의 무리들은 주모에게 손찌검을 했다.이에 주모는 날이 시퍼런 칼로 왜구의 손을 탄 왼쪽 가슴을 잘라내고 자결한다.한편으로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운봉에 이른 이성계는 꿈자리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날짜와 전략을 계시받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성계는 꿈에 나타난 이 노파가 왜구의 손찌검으로부터 몸을 지키고자 한 주모의 원신이라고 믿고,고개마루 암벽에 여상을 암각한 다음 주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사당을 지어 여원이라고 불렀다.이런 사연으로 여원치라는 명칭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현지 주민들은,이 여원치를 연재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필시 여원의 이름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짐작된다.이렇듯 이 고개 이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됐으며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남원에서 운봉을 향하다 여원치 고갯마루 바로 못 미쳐 한 굽이 휘돌다 우측의 옛 도로 수풀 사이에 발을 디디면 남원 분지의 너른 들판과 지리산 시루봉을 비롯해 서쪽으로 장쾌하게 펼쳐진 산군들을 만나 볼 수 있다.여원재에서 바라보는 일몰,즉 여원낙조는 운봉팔경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아름답다.등산동호인이나 문화유산 답사 애호가들은 지리산 연봉을 한눈에 감상하기 좋은 곳이 바로 이곳 여원치라고 대답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고갯마루를 지키고 있는 운성대장군 석물상을 지나치면 들녁 끝에 지리산 산줄기에서 뻗어나온 부운치와 팔랑치,바래봉의 장엄한 능선이 펼쳐진다.바래봉은 봄철 철쭉 군락지로도 유명하다.한편 운봉읍은 목기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24번 국도 주변에는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여러 개의 목기공장과 전시장이 길손의 눈길을 끈다.운봉이라는 고장은 목기 외에도 동편제라는 판소리가 자랑인 곳이기도 하다.인월로 향하는 비전마을에는 송홍록에서 송만갑,근대에 와서는 명창 박소월로 이어지는 동편제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곤 한다.
여원재 고개의 사연과 풍경을 감상한 후 지리산 단풍 비경을 만나려면 주천면 주촌리에서 시작,정령치를 넘는 산록도로를 찾아가 보도록 한다.정령치 고개를 넘어 만복대와 반야봉 사이 지리산 관통도로 삼거리에 이르면 북동쪽으로 실상사, 남서쪽으로 노고단 성삼재와 시암재를 거쳐 천은사로 가게 된다.
[종주정보]
05:53 성삼재(1,070m)...1.6km...06:40-06:50 작은고리봉(1,248m)...3.3km...08:13-08:33 만복대(1,433.4m)...1.5km...09:03-09:45 정령치...0.75km...고리봉(1,304.5m)...2.2km...11:10-12:20 고기삼거리...4.2km...13:50-14:00 수정봉(804.7m)...3.7km....15:45 여원재(477m)
도상거리 18.15km
종주시간 7시간 30분
휴식시간 2시간 22분
산행시간 9시간 52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