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성문을 뒤로 하고 계곡을 거슬러오른다.대남문과 부암동암문이 갈래치는 이정표에서 대남문 쪽 산길로 들어선다.조금 가니 두 길이 또 갈라진다.나중에 두 길은 비석거리에서 만나지만 우리는 계곡 길을 따라간다.왼쪽 돌계단 길로 들어섰더라면,왼쪽 암벽에 새겨진 "백운동문(白雲洞門)' 이란 각자를 만났을 텐데 그 길로 가지 않았으니 아쉬웠다.
<비석거리 선정비군 앞에서 다라미님의 열강은 계속되고...>
이윽고 비석거리에 다다랐다.이름 그대로 비석이 많았다.모두 21기의 선정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열 개 정도는 그런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으나 어떤 것은 비개석(碑蓋石)이 없거나 비신(碑身)이 동강 난 채로 땅바닥에 반쯤 묻혔거나 또 제멋대로 뒹굴고 있었다.그리고 일부는 암벽에 새긴 것도 있다.이들 선정비군(善政碑群)은 성을 지키는 수비대장인 총융사(摠戎使)의 선정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란다.
이들 선정비는 대부분 당대 북한산성 수비대장들의 자화자찬의 비석들.그런데 도광(道光)이나 동치(同治)와 같은 청나라 때의 연호를 그대로 따르고 있어 조선조 때의 독자 연호를 쓰지 못했다는 다라미님의 해석을 듣고 보니 당시 힘없는 나라의 실상이 심히 처연했다.그렇다면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어떠할까.
<승군의 준엄한 군기를 새겨놓은 '북한승도절목'>
비석거리의 비석들도 일제의 만행에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그들은 석질이 좋은 것을 골라서 파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동강 내 내팽개쳐버리곤 했다.
비석거리 가운데의 평평한 바위에는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 새겨져 있다.철종 6년(1885년)에 만든 것으로 승군(僧軍)의 우두머리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지켜야 하는 준엄한 군기(軍紀)를 적은 것이다.
<'북한승도절목' 바로 위의 선정비군>
<산영루 바로 위의 선정비군>
<북한산 세 정자 가운데 하나였던 산영루터>
선정비군과 계곡 사이 개울가에 돌기둥 열 개가 가지런히 서 있다.산영루(山映樓)터다.주변은 백운동계곡이라고 따로 부를 만큼 절경이다.이곳에 정자를 지어서 풍류를 즐겼던 옛 선비들의 운치를 짐작케하지만 돌기둥만 덩그라니 남았다.산영루는 북한산성을 수비하는 장수들의 휴식터인 정자였다고 한다.성능 스님이 쓴 <북한지(北漢誌)>에는 산영루 외에도 항해루(중흥사지 앞 냇가 건너편)와 세심루(서암사지 앞)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선정비군 바로 위쪽의 용학사와 연등>
산영루터에는 황매화가 지천으로 피어나 있다.그 터전 개울 건너편에서 아마 산영루의 사진을 찍었을 것이라 예단하는 다라미님-그는 몇 차례 그곳으로 건너가 산영루의 사진과 동일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보았으나 흡족하지 않다며 쓴맛을 다시기도 했다.다라미님의 열정이 어떠한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선정비군을 뒤돌아보며 또 한 컷>
선정비군을 지나 조금 발품을 파니 계곡 가운데 널찍하게 자리잡은 암반이 널부러져 있고,옥류가 그 위로 시원하게 흐른다.귀룽나무 대여섯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려 그늘을 지어준다.아,그곳에 자리 깔고 앉아 쉬면서 시원한 계곡물에 탁족(濯足)이나 하고픈 생각이 문득 든다.
<중흥사터를 지나며>
수려한 계곡을 벗어나자 중흥사터다.경기도 기념물 제136호이다.정남향의 좋은 터전에 수천 평은 됨직한 절터는 허물어진 축대에 잡초만 무성하다.중흥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당초에는 30칸으로 세운 절이다.그러다가 조선조의 숙종이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133칸으로 새로 짓다시피 중창하고,산성 안 열한 개 사찰의 승군을 총지휘하는 승영(僧營)과 팔도의 승군까지 통솔하는 팔도도총섭(八道徒摠攝)을 이 승영에 두었다.지금 남아 있는 축대와 절터를 미루어 당시 중흥사의 규모를 쉽게 어림할 수 있다.그때가 중흥사의 최전성기였다.
절은 영조 이후 억불정책이 되살아나면서 퇴락하여 고종 31년(1894년)에 원인 모를 화재로 불탔고,또 1915년 물난리에 남아 있던 유구들마저 몽땅 떠내려가고 말았다.당시 중흥사에는 의병을 소탕한다면서 일본 헌병대 분소가 1907년부터 주둔하고 있었는데,이 분견소도 그때 함께 떠내려갔다고 한다.
중흥사에는 매월당 김시습에 얽힌 애절한 사연이 있다.그는 어릴 적부터 천재로 소문이 나서 세종대왕이 무릎에 앉혀 귀여워했다.성삼문,박팽년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들의 단종 복위사건이 터졌을 때 매월당은 중흥사에서 학문을 닦고 있었다.그 참혹한 소식을 그는 이 절에서 전해 들었다.그리고 사육신의 시신을 모아 한강변 노량진 언덕에 묻어주었다.
그후 매월당은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절에서 공부하던 모든 책과 시문을 불태워버리고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방랑길을 떠난다.당대의 천재 매월당에게 '미친 중'이란 별명이 붙은 이면에는 이같은 애절한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남효온,원호,이맹전,조여,성담수와 함께 생육신(生六臣)으로 불린다.남효온은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후세에 그 사실을 전했다.
탐방로 곳곳에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연모가 부실한 예전에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 구멍을 낸 다음,나무쐐기를 박고 물을 부어 불리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쐐기가 팽창하면서 바위에 균열이 가며 나중에는 바위가 서서히 깨진다고 한다.
<경리청터 축대를 뒤덮은 쇠뜨기군락>
중흥사터에서 발품을 팔아 태고사로 올라가는 갈림길을 지난다.오늘은 시간의 제약을 받아 태고사를 그냥 치나쳐 대남문 쪽으로 코스를 잡았다.태고사는 고려 공민왕 때 태고국사 보우(普遇)가 세운 절이다.보우는 1341년에 중흥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지금의 태고사 자리에 암자를 짓고 개인 참선 처로 삼았다.그가 죽은 뒤에 그의 호를 따라 태고암으로 불렸으며 보물 제611호의 원중국사탑비와 보물 제749호인 태고보우국사 사리탑이 있다.
<경리청터 축대에 돋아난 싱그런 쇠뜨기와 양치류군락>
대남문 쪽으로 발품을 재촉하면 이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건넌다.오른쪽으로 흐르던 백운동계곡도 자연히 왼쪽으로 흐른다.이곳에서부터는 산객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아 그야말로 호젓한 분위기에서 산행을 즐길 수 있었다.빗방울이 차츰 굵어지더니 사위가 어슴프레해지고 있었다.
작은 계곡을 다시 건너면 축대를 쌓은 흔적이 오른쪽 풀섶에 묻혀 있다.쇠뜨기와 양치류가 그 축대를 뒤덮고 있다.이 코스를 가노라니 서너 군데 이런 축대들이 보였다.식량 등을 비축하기 위한 경리청의 창고가 있던 곳이라 한다.축대는 풀과 이끼에 덮이고,심하게 허물어졌지만 그 옛날 모습의 편린을 전해준다.
당시에 경리청이 관장하던 창고는 상창,중창,하창 그리고 호조창의 네 군데가 있었다고 북한지는 전한다.상창과 호조창은 행궁에서 가까운 이곳에,중창은 중흥사 앞,하창은 대서문 안쪽에 있었다.특히 호조창은 '어공미(御共米)'라고 하여 왕이 먹을 별도의 쌀 300석을 항상 비축�다고 한다.
<행궁터 안내판을 살피는 풍경님>
행궁은 경리청터 안쪽 산자락에 있었다고 한다.문수봉과 나한봉 사이에 있는 상원봉(715.7m)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내린 동편 끝자락 경사면이다.안내판에서 약 150미터 지점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경리청터에 올라서서>
경리청(經理廳)과 관성소(管城所)를 비롯하여 상창,호조창은 행궁 아래 길 옆 같은 위치에 있었다.산성소는 산성관리를 총괄하는 조직으로 도조제 1명,조제 1명,낭청 1명,관성장 1명으로 이뤄져 있으며 경리청은 23명(군인 7명),관성소는 1,178명(군인 160명)으로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있었다.따라서 셩리청과 관성소가 있던 터는 상당히 넓다.물론 그많은 군인이 이곳에서 근무한 것은 아니고 산성 주위 요소요소에 배치돼 경계 임무를 맡고 있었을 것이다.관성장(管城將)은 경리청 최고의 관직으로 정3품 벼슬이었다.관직 명칭은 행궁소위장(行宮所衛將)이다.
<경리청터 너른 벌판을 지나가는 다라미님>
경리청 상창지(經理廳 上倉祉)-행궁 아래에 자리한 이곳은 조선조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한 뒤,전란에 대비하여 양곡을 보관하던 경리청 상창이라는 창고가 있던 터로 팔비헌(八非軒)이란 편액이 있었다고 한다.상창은 창고 63칸,내아(內衙) 12칸,집사청(執事廳) 3칸,군관청 4칸,서원청 4칸 규모로 창고기능 외에도 성내 사무를 총괄하던 관성장이 근무하던 곳이다.
양곡창고는 이곳 외에도 상창 옆에 '어공미(御共米)'를 보관하던 호조창,중흥사 앞의 중창,대서문 안의 하창(북한동),성밖 탕춘대에 평창(平倉)이 있었다.상창은 혼란기인 19세기 말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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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경리청터를 걸어가는 다라미님의 뒷모습>
산쪽에 다다르니 풀섶에는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았다.무성한 잡초와 나무들 사이로 축대를 쌓았던 흔적이 보였다.경리청터의 주춧돌이었다.이곳에서 행궁터로 가려면 더 들어가야 하지만 오늘은 우이동에서 만나기로한 슈맑 아우와 지언님의 약속시간이 촉박하여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루었다.
기록에 따르면 행궁은 북한산성을 완공한 이듬해인 숙종38년(1712년)에 지었는데 120칸 정도의 규모였다.전쟁이나 재난 시 왕이 잠시 거처하기 위해 만든 행궁은 영조 때 산성의 필요성이 재론되면서 행공도 의미를 잃게 되었다.조선조 말기까지는 그런 대로 보존돼 왔으나 돌보는 사람이 없어 퇴락을 거듭하다가 1915년 물난리 때 완전히 유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 주춧돌 바로 뒤 커다란 바위에 괘궁암(掛弓岩)이라 적혀 있다.이 활을 쏘는 사정(射亭)터인데 활을 걸어둔 바위라 하여 새겨놓았다.
어두칙칙한 경리청터를 둘러보는데 빗방울이 굵어져 마침내 배낭커버를 씌웠다.날이 점점 어두워진다.페허나 다름없고 잡초가 무성한 경리청터를 가로질러 탐승로를 따라 오르니 갑자기 길은 좁아지면서 양편으로 철지난 무성한 물갈대가 반긴다.다라미님은 이곳이 바로 활 쏘던 사정터라 설명해준다.그렇다면 아까 보았던 괘궁암에서 이곳으로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지 않았나 유추해보기도 했다.
물갈대 가득한 사정터를 지나 탐승로를 따라 걸어오른다.시간이 촉박해지는 바람에 금위영터는 생략하고 지근거리에 있는 북한산성 주능선 상의 대동문으로 발길을 옮겼다.대동문에 올라서자 등산객들이 많이 보였다.
<흐리고 비 오는 대동문-혜영이님은 무엇을 저리 보고 있을까나?>
대동문(大東門)은 우이동 버스종점에서 도선사로 가다 한식기와집 고향산천 정문 앞을 돌아 다리를 건너 소귀천계곡으로 오르면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다.소귀천계곡 능선은 진달래능선 오른편에 있다.편액(현판)은 대성문과 함께 조선 숙종의 어필집자로 되어 있다.
대동문은 1993년에 문루를 갖추는 등 지금처럼 화려하게 복원되었고 현판도 이때 새로 달았다.복원되기 이전에는 문루가 내려앉아 없어진 지 오래고 홍예 형식의 성문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초석과 성돌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높이는 해발 540미터,복원된 문루가 늠름하다.
<대동문에 있는 이정표-좌/대남문,우-백운대>
북원을 하면서 배수구 역할을 하는 석루조(石漏槽)를 설치하지 않아 아쉽다.대서문이나 대성문과 중성문과 비교할 때 당초에는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성안 쪽은 지면이 높아 유사시에는 아군이 쉽게 성벽을 오르내릴 수 있으나 성밖은 지면이 낮아 적군이 쉽게 성벽에 오를 수 없데 되어 있다.
대동문이 지키고 서선 이 고갯마루 일대를 옛날에는 석가령(釋迦嶺)이라고 했다.실학자 성호 이익은 숙종 때(1707년) 이미 석가령을 거쳐 보현봉에 오르는 1박 2일ㅇ의 산행기를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라는 문집을 남겼다고 한다.그 당시로서는 참으로 대단한 산행이지 않았을까 싶다.
<숙종의 어필을 모아 편액을 걸었다>
<대동문 안쪽에서 바라본 아치형의 성문>
<성밖에서 바라본 성문>
<대동문 출입구 위의 장대석을 등산객들에게 설명하는 다리미님>
성문 출입구 천정이 대성문,대서문과 달리 널판재가 아니라 장대석으로 되어 있다.판재로 된 성문은 보수를 쉽게 하기 위햐 원형을 훼손하였음을 알 수 있다.대동문의 출입구 천정은 원형보존이 잘 되어 있어 다행스럽다
다라미님은 성문 이곳저곳을 콕콕 집어내며 설명에 여념이 없었다.비를 피하기 위해 성문 출입구에서 서성거리던 등산객들에게 천정의 장대석과 경첩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을 해준다.등산객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몹씨 놀라는 눈치였다.늘 무심코 지나치던 대동문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에 자못 진지한 얼굴로 경청했다.
성밖에서 올려다보니 문루에서 혜영이님과 풍경님이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성문 아치에는 유탄 자국이 많이 보여 안쓰러웠다>
이제 다들 성루에서 내려와 하산 길에 접어들기 전에 대동문을 뒤로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흐린 날씨라 산님들의 모습마저 뚜렷하지가 않다.왼쪽부터 다라미님,혜영이님,그리고 풍경님...
모처럼 나도 혜영이님,풍경님과 더불어 한 컷.이제 북한산성 탐사는 이것으로 끝나고 하산 길에 들었다.그 무렵 하산날머리에서 만나기로 한 배슈맑 아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아침에는 우이동 쪽으로 하산할 거라 전했는데 하산지점이 여러 군데이므로 어디서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단다.다라미님이 휴대폰을 바꿔들고 진달래능선을 타고 우이동 쪽으로 내려가게 될 것이라고 대답해준다.오후 4시 지언님도 연수가 끝나는 대로 합류키로 했고...
<하산 길에 접어든 세 산님들>
먼저 진달래능선 방향으로 내려가는 산님들의 뒷모습을 담아본다.빗방울이 떨어지고 시계가 좋지 않았지만 하산 길은 그런대로 좋았다.우이동 쪽으로 가려면 대동약수를 지나 진달래능선을 따라가다 백련사 갈림길에서 왼쪽 골짜기로 꺽어 내려가야 하는데 시간이 마땅치 않아 아카데미하우스 쪽으로 내려섰다.등산로가 거미줄처럼 열려 있어 조금만 방심해도 엉뚱한 곳으로 내려서기 십상이었다.
진달래능선에서 아카데미하우스 쪽으로 방향을 잡아 오른쪽으로 내려서니 바위 슬랩 아래로는 시원한 계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조금 더 내려오니 일순 시야가 툭 터지면서 도봉구 쪽 시가지가 펼쳐진다.이제부터 하산 길은 바윗길이 이어진다.위험한 곳에는 안전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풍경님과 혜영이님-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시 슈맑 아우로부터 전화가 온다.이곳 지리에 정통한 다라미님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결국 우리가 만날 곳은 당초의 우이동 쪽이 아니라 아카데미하우소 쪽으로 바뀌고 말았다.
<마지막 바위구간을 내려서는 산님들>
계곡으로 내려서니 안내판이 나온다.순한 길이 이어지더니 곧 산행날머리다.빗줄기가 드세져 우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어디론가 들어가야 했다.그때 배슈맑 아우가 차를 갖고 마중을 나왔다.차를 타고 슈맑 아우가 자주 드나든다는 4.19탑 근처에 있는 '시골밥상'으로 들어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가까스로 피한 우리는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만남의 회포를 풀었다.특히 배슈맑 아우는 이날 저녁 호남정맥 종주를 떠나야 하는데도 빠듯한 시간을 쪼개 합류해주어 고마웠다.그는 지난해만 하더라도 콧수염을 길렀는데 이 날은 콧수염을 깎아 한결 젊어보였다.
잠시 뒤에는 놀토에도 직원연수를 마친 지언님이 들어닥쳤다.블로그에서 보아오던 대로 이지적이면서도 항시 웃음을 잃지 않는 정겨운 얼굴이었다.너무 친숙한 모습이라 그저 보는 것만으로 좋았다.시를 쓰는 지언님-좀은 풍성한 몸매였지만 잔잔한 눈매가 고왔다.산행을 같이 하지는 못했지만 연수를 받으면서도 우리들이 어디쯤 와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헤맸을 지언님-오늘은 작은 애마를 가져와 막걸리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였지만 그저 입을 축이는 것으로 만족한단다.
우리는 산행에 대해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불로그를 통해 각자 개성과 성격을 파악하고 있는 터라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나는 정말로 행복했다.온라인에서만 교류하다가 이제 오프라인에서 이렇게 대면하니 감회가 남달랐다.그리고 서울 산님들의 요람이라는 북한산을 더터 오르내렸으니 이 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을손가.!
이렇게 뒷풀이를 하고 있는데 지언님이 거든다."큰행님,이제 우리들 손 볼 차례 아잉교?"하며 산행을 하면서 크고 작은 부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산님들을 가리킨다.사실 제목에서도 그렇게 적었지만 오랫동안 산과 친하다 보면,산꾼은 몸에 탈이 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처음에는 혜영이님이 무릎 고장을 일으키더니 그 다음은 지언님이,그리고 다라미님이 무릎관절에 이상에 생겼다.나도 지난해 대간을 종주하고나서 허리에 이상에 생겨 3개월 가량 산에도 가지 못할 정도였다.하나같이 부상병동이었다.
이를 두고 지언님은 (장)애인산악회라도 만들어야 한다며 우스개소리를 하곤 했다.더러는 침을 맞기도 하고 물리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속시원히 낫지를 않았다.그러나 산행에 푹 빠져버린 우리는 그런 아픔을 속으로 다스리며 꾸역꾸역 산으로,산으로 드나들었으니...이러다간 정말 산행을 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건 아닐까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산행을 하면서 일어나는 무릎이나 발목 고장은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속절없이 무리가 오면서 축적되어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다.따라서 우리 자신은 그런 진행과정을 거의 알아차릴 수가 없다.몸에 이상이나 증상이 생겼을 때는 그 원인든 적어도 몇 개월,아니 수년을 거슬러 올라가기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거의 모르고 살고 있다.아프면 약을 먹고,다치면 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도대체 왜 우리 몸이 고장이 나고 문제를 일으키는지 알 수도 없고 궂이 알려고도 생각 안 한다.모든 것을 의사에게 맡기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따지고 보면 우리는 우리 몸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내 몸을 내 마음 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배우고 실천한 대로 시범을 보이고,산님들의 아픈 곳을 정확히 찝어내고저 했다.산님들을 편안한 자세로 방바닥에 눕게 했다.그런 다음 두 발의 길이와 두 발의 각도를 확인하여 몸의 균형을 면밀히 살폈다.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좌우가 정확히 대칭을 이루거나 균형잡힌 사람은 극히 드물다.한쪽 발이 길거나,틀어지고 어깨는 한쪽으로 쳐지거나 앞으로 꺾여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잘못된 자세로 일관해왔기 때문이다.일테면 구두 뒷축이 심하게 한쪽으로 닳는다든지,한쪽 발에만 힘을 준다든지,한쪽 팔로 일을 한다든지 하다보면 우리 몸은 일그러지게 된다.그러나 우리 몸이 잘못되더라도 더 이상 틀어지지 않도록 근육은 비상조처를 취하게 된다.그러니 생활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하지만 나이가 들거나 힘이 떨어지거나 격렬한 운동을 하게 되면 우리 몸의 불균형은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나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
탑을 예로 들면,탑의 기초석이 기울면 탑신은 저절로 기울게 된다.우리 몸에서 탑의 기초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고관절이다.고관절은 허벅지뼈와 엉치뼈를 연결하는 중요한 관절이다.이 고관절은 베아링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때문에 거의 통증이 없다.한쪽 고관절이 우연한 기회에 빠지거나 틀어지면 그쪽 다리의 길이는 다른 쪽보다 당연히 길어진다.그리고 고관절이 안쪽으로 틀어지면 걸음을 걸을 때 안짱다리가 되고,바깥쪽으로 틀어지면 팔자 걸음을 걷는다.
고관절이 경미하게 빠지거나 틀어지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정도가 심하면 우리 몸은 심하게 불균형을 이룬다.그러므로 고관절이 제대로 균형을 이루느냐 아니냐에 따라 건강의 척도는 결정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중풍에 걸린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연상해보면 쉬이 납득이 갈 것이다.
고관절이 빠지거나 틀어지면 그 윗족의 엉치와 골반도 영향을 받게 되고 요추와 흉추,심지어는 경추까지 문제가 생긴다.그렇게 되면 갖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경추에 문제가 생기면 갑상선,흉추에 문제가 있으면 고혈압을 비롯하여 부정맥이 오게 되고 심한 사람은 중풍과 치매,파킨슨씨병도 발생한다.그리고 흉추 11번에 이상이 있으면 당뇨에 걸리기 쉽다.
단순히 고관절에 이상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런 병이 일어날까 하는 문제는 앞에서 예를 든 탑을 다시 상기해보면 금세 해답이 나올 것이다.그러므로 문제는 고관절이다.요즘은 침대와 쇼파가 생활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이들은 잘못된 자세를 일으키는 주범이다.그리고 컴퓨터는 이들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곤한다.이런 생활에 젖은 이들은 허리가 "S"자 만곡을 그리지 못하고 "1"자이거나 후만이 되고,가슴은 웅크리게 되고 등은 굽어 있다.이런 증상의 원인(遠因)은 모두 고관절이 틀어진 탓이다.
나는 산님들의 고관절을 확인하여 맞추어준 다음,치골과 엉치를 교정했다.그리고 척추와 경추가 제자리를 잡도록 해줬다.고관절을 교정하고 엉치를 올리고 척추를 본디 자리로 밀어올리면 "뚜둑"하는 소리가 나기도 한다.그리고 배꼽 아래를 찬물요법으로 10분간 담그라고 조언해줬다.
고관절이나 무릎교정을 하고나서도 또 다시 예전처럼 되돌아가기 쉽다.뼈는 제자리를 찾았지만 뼈를 감싸고 있는 굳어진 근육은 금방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방석숙제>와 <깎지 끼고 15도 고개들어 제자리걸음 걷기>를 구준히 하라고 주문했다.이 운동법이 바로 "몸살림"운동이다.이 방법은 너무 쉽고 간단하다.꾸준히 실천해보면 엄청난 효과가 있을 것이다.몸살림운동은 우리 몸에 혁명을 가져다준다.
몸살림 홈피( http://momsalim.kr/ )에 들어가보라! 기본숙제 3가지가 동영상과 함께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내가 허리가 아파 산행을 하지 못했을 때 친구의 소개로 1달 반동안 하루에 40분씩 훈련을 하여 그 지긋지긋한 통증에서 해방된 것도 이 운동 덕분이었다.뼈가 제 위치에 있지 못하고 자세가 틀어지면 침이나 물리치료로는 해결되지 않는다.허리디스크나 협착증으로 고생을 하는 이들이 있다면 수술을 하기 전에 이 운동을 해보라고 권하겠다.허리는 칼을 대면 허리가 지닌 원래의 힘의 30%정도 밖에 쓸 수 없고,거의 대부분 재발한다고 한다.
몸살림은 과격한 운동이 아니라 너무나 편안한 운동이다.문제는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몸살림은 단순한 운동이다.이렇게 평범한 운동이 과연 효험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너무나 쉽다.그러나 진리는 단순한 데 있다고 하지 않는가.이 운동법므로 몸을 살리고 잘못된 우리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바꾸어보기를 제 명예를 걸고 권하고 싶다.기회가 되면 우리 산님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몸살림 운동법을 따로 소개하고저 한다.
각설하고 산님들을 차례대로 교정하고나자 배슈맑 아우는 벌써 카운터에 계산을 하고 호남정맥 종주를 하러 일어선다.우리는 그에게 무탈하게 호남정맥을 종주하기를 기원하며 아쉽게 헤어졌다.나는 그에게 줄 맛있는 부산오뎅을 깜빡 잊어버렸다.혜영이님이 대신 슈맑 아우의 몫을 가져갔지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슈맑 아우가 떠난 뒤에도 우리는 한참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담소를 나눴다.이윽고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예정대로라면 문산에서 귀농을 한 친구한테로 가야겠지만 일정이 맞지 않았다.풍경님은 하루 더 머물고 내일 날이 맑아지면 북한산으로 가자고 했다.그러나 부산에 미뤄둔 일도 있는데다 신촌에 있는 막내아들을 만나러 가야 했다.
산님들과 함께 한 북한산 산행은 이제 영원히 잊지 못한 추억이 되었다.사람(人)이 산(山)에 들면 선인(仙人)이요,사람(人)이 골짜기에 머물면 속인(俗人)이 된다는 말처럼 잠시나마 북한산에서 선인이 되었던 뜻깊은 날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다라미님,슈맑 아우,혜영이님,지언님,풍경님 아직도 내 마음속엔 북한산의 그 싱그런 녹음과 바위,옥류가 줄기차게 흐르고 있다오.여러분의 따뜻한 환대,정말 고마워요.
<2007년 5월 12일 북한산 산행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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