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거리 어디에서도
바라보기만 하면 가슴이 뛰는 산
내 것이면서 내가 잘 모르는 산
이성부 시인이 그려내는 북한산이다.그렇다.서울 북쪽에 하늘을 찌를 듯 위풍당당하게 치솟은 북한산.서울의 진산(鎭山)인 그 품속으로 간다.몇 개월 전부터 블로그 산님들과 약조를 했지만 일정의 이빨이 맞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던 행보를 드디어 오늘에사 결행하게 되었다.
5월 12일,토요일,첫 차를 타고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 다다르자 껑충한 키에 잘 생긴 풍경님이 환하게 웃으며 맞는다.궂이 말이 필요 없었다.첫 대면이었지만 낯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이는 그동안 불로그를 통해서 마음을 주고 받고 면면을 익힌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산행으로 다져진 넉넉함 때문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풍경님이 이끄는 대로 전철을 타고 다라미님과 혜영이님이 기다리는 북한산성매표소로 간다.지난해 불로그를 시작하고서 알게 된 혜영이님,아름다운 글과 자상한 마음씨로 뭇 블로거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혜영이님을 만나 교류를 시작하면서 다라미님과 지언님도 덩달아 알게 되었다.특히 혜영이님과 "산행의 첫걸음"을 함께 쓰면서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던 두 산님과 폭넓게 교류하게 되었다.시공을 넘어 나이를 잊어버리고 흡사 형제처럼 친구처럼 슬플 때는 함께 슬퍼하고 즐거움은 서로 나누는 사이가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봐도 블로그의 위력을 새삼 실감케한다.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은 이제 수정되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 지난해 미시령~마등령 구간의 백두대간을 함께 했던 후배 배슈맑 아우도 토요일 저녁 호남정맥 종주를 떠나기에 앞서 하산날머리에서 합류키로 했으니 이번 서울행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쁨이요 설레임이었다.
[북한산성계곡 길을 가는 왼쪽부터 풍경님,혜영이님,다라미님의 다부진 뒷모습>
내게 남아 있는 북한산의 모습은 60년대 말의 기억들로 정지화상이 되어 있다.학교를 파하거나 빼먹고 교외선을 타거나 버스를 타고 우이동이나 구파발,송추 쪽으로 들어 산을 즐기는 유산객으로서 질펀하게 노닐던 그러한 추억만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그런 북한산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은 단순히 산행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하겠다.청운의 큰 뜻을 품고 배움에 빠져들던 그 때 그 시절,지금은 귀밑머리 하얗게 서리가 내렸지만 또 다시 그 품 속에 들어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니 세월의 시차를 어찌 느끼지 않을손가.
북한산 주봉인 백운대의 높이래야 해발 836.5m.높이로만 따진다면 거산(巨山)의 반열에도 들지 못하는 평범한 산으로 보기 쉽다.그러나 북한산은 명산 중의 명산이다.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오악(五岳)이라 하여 이름 난 산 다섯 곳을 꼽아왔다.금강산,지리산,묘향산,백두산,삼각산이 그것이다.삼각산은 북한산의 옛이름이다.비록 높이는 낮을망정 오악에 당당히 낀 것만 봐도 예사로운 산은 아닐 것이다.
군두더기 없이 속살을 드러낸 거대한 백악(白岳)의 봉우리,그것이 뿜어내는 빛나는 가운,북한산을 처음 보는 이들이나 제 집처럼 드나드는 산꾼들이나 모두 경탄의 대상이 되곤하는 저 눈부신 화강암의 영기서린 봉우리와 암벽들...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 전율이 엄습해오는 산정기를 느끼게 된다.
오늘 우리가 찾은 북한산성계곡은 도봉산 산자락의 도봉계곡과 더불어 북한산을 대표하는 골짜기이다.재작년 "북한산성 원형을 잃고 있다"라는 르뽀를 펴내 허물어져가는 북한산성의 유적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다라미님.그의 헌신적인 탐사로 말미암아 이젠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공간이 되어버린 문화유적들을 내게 보여주기 위해 다라미님이 이 골짜기를 선택한 게 분명했다.북한산에 산재한 돌조각 하나,풀 포기 하나,기왓장 한 자락도 손금 들여다보듯 휀히 꿰고 있다는 다라미님이 이 코스를 앞장서서 안내하며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찌나 즐거운지 말로 이를 수가 없었다.그뿐인가 건축 감리사답게 북한산에 흩어져 있는 구조물이나 건축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안목을 두루 맛볼 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당초 백운대를 오를려던 계획은 시나브로 내리는 빗방울로 아쉽게도 다음으로 미루고,순하디 순한 코스를 따라 대동문을 거쳐 우이동 쪽으로 하산할 요량이었다.오후 4시 직원연수를 마치는 지언님의 시간에 늦지 않도록 배려한 결정이었다.
북한산성매표소에 이르자 꼬장꼬장한 다라미님과 블로그의 연인이라는 혜영이님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그저 눈빛만으로도 척 보면 알 수 있는 두 분을 만나니 풍경님을 만날 때도 그러했지만 전혀 어섹한 기색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서울이라는 동일한 공간에 살면서도 그동안 불로그에서만 만났지 실제로 산행을 같이 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친구들.어찌 보면 나 때문에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으니 이 또한 뜻 깊은 일이 아니겠는가? 좀 듬직하고 풍성한 모습을 기대했던 혜영이님은 자그마한 키라 다소 뜻밖이었지만 눈빛이 형형하고 다부진 몸매여서 예사롭지 않음을 대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그의 다정다감한 마음씨처럼,아름다운 시와 산문으로 많은 벗님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소이를 느낄 수 있었다.다라미님은 꼼꼼하면서도 대범한 성격을 읽어낼 수 있었다.역시 지언님 입버릇처럼 서울 산님들의 오라방으로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다.
<북한산성계곡 들머리의 암반과 계류>
다라미님의 열띤 북한산성 강의는 계곡 탐방로를 따라가다 수문터에 이르자 불을 뿜기 시작한다.이 수문터는 1925년 8월 대홍수로 성돌과 장대석이 깡그리 사라졌지만 그 흔적이 건너편 암벽에 남아 있어 아쉬움만 더해주었다.대서문에서 이어져 내려오던 성벽이 끊어진 자리와 비교해보면 어렴풋이 그 실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당초에는 폭 50척(16.5m),높이 16척(5m)에 이르는 수문이 축조되어 있었다고 한다.수문이 있던 자리는 백운대를 비롯 시단봉,문수봉,나한봉,용출봉,의상봉과 염초봉,원효봉에서 흘러내린 골골의 물들이 이 수구(水口)로 모여 한 몸이 되어 빠져나갔을 것이리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수문터-건너편 바위 위로 성터의 흔적이 상기 남아 있는데,이 산성은 서암문을 거쳐 원효봉으로 이어져나간다.
<수문터 일원의 계곡 풍광>
<탐방로와 인접한 커다란 바위에 수문의 축조 년도가 새겨져 있으나 사진으로는 희미하다>
<수문터를 바라보는 다라미님,혜영이님,풍경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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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터를 뒤로 하고 계곡길을 오른다.다라미님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저 멀리 계곡 한가운데 둔덕처럼 보이는 곳을 가리킨다.그곳이 세심루(洗心樓)가 있던 자리라며 지금은 식당이 들어서 흔적마저 묘연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북한산성계곡에는 헤아릴 수 없는 문화유적이 즐비했다는데 지금은 대부분 원형이 사라졌거나 복원되었더라도 옛모습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수문에서 2~300미터 윗쪽으로 올라가면 개울가 텃밭이 있고 정교하게 쌓은 축대가 나온다.이곳이 서암사지이다.주변에 인위적으로 가공한 네모난 돌들이 많이 흩어져 있으며 주민들이 이 돌로 자기 집의 계단을 놓거나 하여 훼손이 이만저만 아니었다.2006년부터 서암사지 발굴작업에 들어갔다.
서암사는 숙종37년(1711년) 북한산성을 쌓은 뒤 건립되었다.승병(僧兵)을 유치하기 위해 산성 안에 건립된 13개 사찰 가운데 하나인 서암사. 광헌(廣軒) 스님이 133칸 규모로 세워 수문 일대의 산성을 지키는 역할을 맏았다,서암사는 고려 때 문인공 민지(閔漬)가 살았던 터인데 당시에는 민지사라고 불렸다.서암사는 갑오경장 이후 승병이 해산되고부터 소멸된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산성계곡 수문터 위에 있었다는 서암사지>
이 날은 가랑비가 내려 시계가 좋지 않았다.수문터에서 원효봉 쪽으로 암장이 싱싱한 신록을 뚫고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대서문으로 가기 위해 숲길로 들어서는 산님들...
해발 150미터에 있는 대서문(大西門)에 다다랐다.다라미님이 대서문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한 덕분에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1958년 최헌길 경기지사의 주도로 문루(성루)를 복원했다고 한다.문 높이 11척(3.6m),폭 13척(4m)에 이른다.대서문 왼쪽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며,오른쪽은 의상봉이다.대서문 왼편 앞에 사유지인 과수원이 있다.아치형의 홍예문 윗쪽 좌우에는 빗물이 빠지는 용머리 형상의 배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아치문 윗쪽 좌우에 있는 용머리 형상의 배수구-담장이덩쿨이 뒤덮고 있다.>
<대서문 앞에서 다라미님,혜영이님,풍경님>
대서문의 벽면에는 담장이덩쿨이 뒤덮고 있고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라고 한다.
<북한산 성문가운데 유일하게 차량통행이 가능한 대서문을 등지고>
북한산성은 백제의 온조왕과 개루왕 때 중흥고석성이라 하는 성을 쌓았는데,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다음,조선 19대 왕인 숙종37년(1711년) 도성인 한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북한산성을 튼튼하게 재축성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쌓은 것이 지금의 북한산성이며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성의 둘레는 약 12km,이며 13개의 성문이 있다.이가운데 대동문을 이롯 대남문,대서문,북문,중성문 6개소의 성문은 들어가는 입구가 아치 형태로 높게 되어 있고,나머지 위문(일명 백운동암문),시구문(일명 서암문),가사당암문,부왕동암문(일명 소남문),청수동암문,보국문(일명 동암문),용암문 7개의 문은 성루가 없고 출입구는 규모가 작으며 문 윗부분인 인방에는 아치가 없고 평인방인 암문(暗門)으로 되어 있다.암문이란 적의 눈을 잘 띄지 않는 일종의 비밀문이므로 어두운 문이라고 했다
대서문은 서쪽 방향에 있는데 가장 낮은 곳에 터잡고 있어 당시에도 우마차가 군량미나 생필품,무기따위를 싣고 성안으로 들었으며 지금도 북한산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승용차가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그런데 예전부터 내려오는 자연부락(북한동)이 있어 지금도 이들 주민들이 음식점과 무속인들의 굿당,등산용품점 따위를 운영하고 있어 국립공원으로서 면모를 훼손하고 있다.
대서문의 벽면에 균열이 생긴 사진만 올렸으나 최근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출입구 천정에 장대석을 없애고 두꺼운 판재를 깔고 이를 눈속임하기 위해 단청으로 그럴 듯하게 문양을 그려놓았다. 모든 성문이 그러하듯 천정 밑으로 튀어나온 각재부분의 장대석에 문을 달 수 있는 돌쩌귀(경첩,Hinge) 역할을 하는 구멍이 있어야 하고 여러 명의 적들이 통나무 기둥으로 문을 부수려할 때 문이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돌에 구멍을 뚫었는데,(아랫 부분에는 지금도 구멍이 있음)이 문에는 구멍도 뚫지 않고 보수를 했다며 다리미님은 몹씨 유감스러워 한다.
벽에 있는 네모난 구멍은 적군이 문을 밀고 들어 올리려 할 때,문고리만 잠그면 쉽게 부셔져 문이 열리게 되므로 네모난 각재로 빗장을 걸어서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빗장이 바로 그것이다.아울러 빗장을 끼우려면 반드시 한쪽이 더 깊게 뚫려 있어야 하며,실제로 모든 성문의 빗장구멍은 한쪽이 더 깊게 �려 있는 것이다.우리가 자칫 지나치기 십상인 문 하나에도 전문가인 다라미님의 해박한 견해를 듣고 나니 선조들의 지혜에 새삼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나이가 들어도 배움의 즐거움은 그 어떤 즐거움에 못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서문을 거쳐 탐방로를 따라 발품을 나니 예부터 형성된 북한동이라는 자연부락이 나타난다.원효봉능선을 뻬고 북한산성 산행은 산성마을인 이 북한동이 집합처가 된다.백운대,북한산대피소,대동문,보국문,대성문,대남문을 비롯하여 북한산성 주능선의 주요 목표지가 아곳에서 부채살처럼 펼쳐진다.
우리는 번잡한 이곳을 지나쳐 선봉사를 지나 국녕사 들머리까지 오른다.그때 혜영이님이 아무래도 점심식사를 하려면 궂은 날씨에 다시 북한동으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냐며 다리미님한테 물으니 깜빡 했다며 우리는 산성마을로 되내려왔다.예전엔 털보가 운영했다는 식당에 들러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황태찌개에다 된장쩨개를 곁들여 점심을 때웠다.
오늘 직원연수로 산행에 불참한 도봉산 막걸리파 지언님 생각이 굴뚝 같았다.이럴 때는 지언님이 동석해야 제격인데..풍경님도 다라미님도,지언님의 언니로 통하는 혜영이님도 아쉬운 듯,다같이 건배를 들었다.북한산 막걸리는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아! 이래서 다라미님도 지언님도 막거리를 애용하는가보다.이제사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흡사 부산의 금정산성 마을의 산성막걸리처럼 말이다.학창시절 방학 때 금정산 산성마을에서 잔뜩 술에 취했던 기억이 삼삼하게 떠오른다.흐밋!
북한동 산성마을에서 잡은 거목-저 거목은 기억하고 있을까? 이곳의 애환을...꿈과 청운의 젊음이 넘실대던 지난날의 시간과 숨바꼭질하던 역사의 아이러니를!!!
산성마을을 벗어나면서 북한산계곡은 울창한 숲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연출한다.다만 오늘은 그렇게 수량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부신 화강암 돌들이 널부러저 어느 물가 모퉁이 돌확에 앉아 시름을 달래보고픈 충동마저 일어난다.북한산엔 이름난 바위도 유명하지만 자연생태계도 그에 못지 않다.연간 1,300만이 찾아든다는 북한산에 계곡미가 아름답지 않다면 과연 숱한 이들이 이 산에 그토록 빠져들겠는가.그래서 북한산은 서울 사람들에게는 도심 속의 허파와 같이 늘 생기롭고 건강한 기운을 불러일으켜주는 것일 게다.
북한동 산성마을을 경계로 북한산성계곡은 아래위가 확연히 달라져 보였다.이제 번잡하고 시끄러운 인파는 점점 줄어들고 위로 오를수록 계곡의 자태는 풍미를 더해갔다.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워서일까? 계곡 곳곳에는 연등이 울긋불긋 걸려 잇어 잠시 발걸음을 무디게 했다.
산성마을에서 점심을 들고 다라미님과 고향 후배인 혜영이님이 북한산을 탐승하기에 앞서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예서 태고사 앞까지는 오가는 차량들이 처음에는 눈살을 찌프리게했으나 오늘은 산객들이 많이 오지 않아서인지 그마저도 참아줄 만했다.
돌확이 놓인 탐방로를 따라 걸어오르는 훤칠한 키의 풍경님과 혜영이님-풍경님을 안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멋진 산꾼이었다.혜영이님의 표현대로라면 '롱다리'라지만 사물을 보는 눈이 남달라 블로그에서도 자신의 마음속에 비친 키워드로 불필요한 군두더기를 생략하는 특이한 글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자신의 말처럼 사설펀드를 운영하며 더러는 수학문제를 지도할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다.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그이지만 불로그만은 맘에 맞는 사람들과 우정 진하게 교류하고 있기도 하다.언제가는 산장지기를 하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는 풍경님-하루 빨리 그 꿈이 성취되어 우리가 찾아가 무심하게 술잔을 나누며 세월을 낚는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중성문으로 발품을 하는 산님들>
북한동 마을에서 대남문 쪽으로 올려가면 골짜기가 병목처럼 좁은 지점이 나온다.이곳에 중성문(中城門)이 자리잡았다.문 이름은 가운데 중(中),중성문이지만 여기에 쌓았던 중성(重城)은 '무거울 중(重)'자를 쓴다.'겹'이란 뜻도 있기 때문이다.그것은 대서문 안쪽에 다시 쌓은 성이란 뜻이다.말하자면 성안의 성,즉,내성(內城)이다.
북한산성은 동.남.북 면은 철벽의 요새이지만,대서문이 지키는 서쪽은 트여 있어 적이 그리로 밀려들 불안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이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중성을 쌓은 것이다. 성안에 또 다른 성문과 성벽을 쌓아 그 안쪽에 있는 행궁,어영청,금위영,훈련도감,경리청과 승병의 지휘본부인 중흥사,그리고 중창,상창의 창고 등 주요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이중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다.
그래서 중성문도 아치형식으로 성문 위에는 우람한 문루를 세웠다.대서문보다는 좀 작은 규모로 축조했다.예전에는 누각은 간데없고 홍예문만 덩그러니 서 있던 것을 1998년 관할 행정구역인 고양시에서 보수를 하였으며 초대 민선시장인 고 신동영 시장의 글씨로 된 현판이 걸려 있다.홍예문이 정교하게 잘 짜여 있고 다행스럽게도 새로 보수한 돌에 줄눈이 기존과 동일하게 새겨 넣었다.
중성문으로 들어서기에 앞서 문 왼쪽 성벽에 뚫린 얼핏 보기에는 문 같지도 않은 작은 암문(暗門)이 덤불에 가려 있다.다라미님은 이루 두고 시구문(屍柩門)라고 한다 두어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좁은 문이다.이 암문은 시체를 실어내는데 섰다.내성 안에서 발생한 시체를 정문이 중성문으로는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이 암문도 서암문처럼 시구문으로 불렸다고 한다.
<새로 보수한 흔적이 확연히 드러나는 성벽>
<성벽에는 붉은병꽃이 수놓고 있고 물빠짐 배수구가 돌출되어 있다.>
<중성문의-현판 1998년 고양시의 초대 민선시장인 신동영 시장의 글씨다>
이곳에도 대서문처럼 천정을 보수하면서 깔지 않고 목재를 깔아 문짝을 다는 경첩(힌지)구멍이 있으며 원향이 훼손되었다.사진은 빗장구멍으로 좌우는 깊이가 다르게 뚫려 있어야 빗장을 걸어 문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다.
<중성문 뒷쪽 전경-이곳에도 홍예문 상단 좌우로 배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중성문을 살피고 다시 발품을 판다.빗줄기는 제법 굵어지기 시작했지만 우산을 펼쳐들 정도는 아니었다.오가는 산꾼들이 거의 없어 오히려 고즈너기했다.그게 정말 신기했다.주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뤄 체증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북한산도 일기가 불순하니 산꾼들도 나오지 않는가보다.정말 날씨가 도와주는 것 같다.지언님은 날씨 탓에 멋진 암장과 봉우리를 보지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필시 울음을 삼켰을 거라 뒤에 썼지만,꼭 그런 것만도 아니란 걸 말해주고 싶네요.다음에 장봉이 형제나 백운,인수,맹경대를 찾아보면 될 것을!
조금 가니 큰다리가 나온다,계곡은 더 헤벌어지고 그윽해진다.혼자라면 아무데나 내려가 한자락 쉬었다갔으면 좋을 테지만...그저 말없이 눈으로 마음으로 보며 걸음을 옮겨도 마냥 뿌듯한 기분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우리는 저리도 싱싱한 연초록 잎새나 바위 한 조각도 터럭만틈이라도 만들어내지 못하지 않는가? 자연의 오묘한 섭리을 온몸으로 주고 받으며 산님들과 함께 걷는 이 길이 그대로 행복인것을! 그대들이여 멀리서 구하지 말라는 말을 여기서도 전하고 싶구나.
<하편>에서는 비석거리를 거쳐 중흥사터,행궁터,금위영터를 둘러보고 대동문에 이르러 진달래 능선길로 가다 아카데미하우스로 하산한 산길을 더듬어본다.그리고 하산길 인근에 있는 시골밥상집에서 서울 산님들과 함께 산행 뒷풀이를 가졌던 (장)애인산악회의 첫 모임을 스케치하고자 한다.
그동안 숫제 제 개인의 문제로 블로그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여러분에게 폐만 끼쳐 송구하다는 말씀과 함께 한나절 북한산에 들었던 감회를 이렇게나마 풀어낼 수 있었으니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이 글에 쓰인 대부분의 유적에 관한 글은 오류를 줄이기 위해 북한산 지킴이요,전문가인 다라미님의 글에서 빌어왔음을 밝혀둡니다.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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