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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시약산(蒔藥山) 찾아가기

[승학산 달담샘 부근의 억새 풍경]

 


 시약산(蒔藥山)을 오르며


구덕령 꽃마을 오르는 하얀 길 왼편에 구덕산이 있지요.그 곁에 시약산이 얼굴을 마주보며 있답니다.어두컴컴한 영주터널을 빠져나오면 턱 마주치는 구덕산과 시약산 만당(滿堂) 아래 검푸른 암장은 언제 보아도 답답한 가슴을 풀어주지요.그 암장은 건너편 엄광산 아래 모교에서 보면 더욱 더 우람한 형상으로 닥아오죠.그 봉우리와 암장에 구름이 드리운 날이면 신비스럽다 못해 영험하다는 느낌이 들곤 했지요. 

 

엄광산 아래 모교에서 한때 선배들을 가르쳤던 이양하 선생님도 찬탄한 구덕령 꽃마을 오르는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신작로,그 길 위로 큰바위 얼굴처럼 돋올한 시약산의 암장,그를 향해 날마다 시약산을 오릅니다.

 

능선에 올라서면 박씨 묘라는 묘지를 지나 아예 사람 그림자 없는 오솔길로 들어서지요.지금은 불탄 소나무가 아직도 화근내를 풍기지만 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지요.금년에 산불이 났을 땐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답니다.마주치는 나무나 바위마다 이름을 붙여주고 어느덧 처녀바위에 이릅니다.바위가 열열히 기도하는 모습 같대서 그런 이름을 얻었나봅니다.아무리 뙤약볕이 내려쬐도 이 처녀바위에 앉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지요.어느 높고 깊은 산에서도 아직 느껴보지 못한 바람입니다.

 

시약산 정수리 조금 아래 수십길 바위턱에 올라서면 세상이 대롱처럼 좁아보이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하지요.때로는 그 암장 위로 구름이 드리우면 이내 비가 쏟아진다는 걸 알았고,큰바위가 보랏빛 얼굴을 하면 단풍이 건너편으로부터 스며들 거란 것도 알았죠.시약산(蒔藥山)이란 산이름처럼 산나물도 많고 꽃도 그렇게 많답니다.이른 봄이면 진달래,뒤 이어 철쭉,딸기,꿀풀,제비꽃,살갈퀴가 가는 길섶마다 화려하게 피어나고 가을이면 사그락거리는 억새풀,마타리꽃,코스모스,구절초,쑥부쟁이가 앞다투어 피고 집니다.

 

어느 땐가 밤에 시약산에 올라보니 부산항의 야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죠.시약산 정수리엔 하얀 기상대 건물이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그 건물 철조망을 둘러 마당뜨리 같은 만당에 서서 을숙도 갈대밭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면 왜 그리 가슴이 서늘해지는지 모르겠군요.저 건너편에 학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승학산(乘鶴山)을 보면 그 아래 억새풀 속에 잠들고도 싶어집니다.

 

나는 날마다 시약산을 오릅니다.이젠 시약산은 내 마음속에 심은 튼튼한 나무입니다.헌데 이 시약산이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정기가 낙동정맥을 따라 이곳에 와서 뭉쳤다는 것을 알았죠.다대포 몰운대에서 끝나는 맥이 이 산에서 마지막으로 용트림친다는 것을 알고 참으로 놀랐습니다.이 산이 영양 땅 오지의 야트막한 산과 맥이 닿아 있다는 건 경이롭습니다.내가 매일 바라보며 오르는 시약산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시약산이!


1997년 4월 5일-낙동정맥 종주 때,시약산에서 대티고개로 내려서면서

 

 [시약산 시약정 부근의 암장]  

 

오늘은 70년 말부터 90년 중반까지 살았던 사하구 대티고개와 괴정의 산을 가는 날이다.내가 처음 대티고개에 터잡았을 적에는 달리기와 산행을 번갈아 하던 터라 아침이면 다대포 백사장까지 달렸고,저녁에는 시약산,구덕산 산행을 하며 산악구보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80년대 말 괴정으로 집을 옮기고나서 달리기는 그만 두었지만,아침 저녁으로 약수를 뜨러 다니며 산행은 멈추지 않았다.장거리 산행을 하지 않는 날이면 어김없이 시약산과 구덕산,그리고 승학산 구석구석을 밟곤했다.그 덕분에 이 일대의 산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녀 나에겐 친숙한 공간이 되었다.90년대 중반 광안리 쪽으로 집을 옮기면서 내 젊은 날의 뒷동산인 그 산들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그러나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산의 숲과 산길과 나무와 풀과 계곡을!


오늘 내가 문득 이 산을 찾기로 한 까닭은,젊은 날에 대한 그리움도 있겠지만,시약산 산허리길을 다시 걸어보는 것과 당시 산불이 나 새카맣게 불타버린 그곳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고,부산에서 가장 멋있다는 승학산의 억새를 보고 싶어서였다.10시 넘어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잔잔한 흥분마저 밀려온다.

 

대티역에서 내려 대티고개에 올라섰다.한티고개라 불렸던 이 고개엔「天下大將軍」과「地下女將軍」의 장승이 있었는데 6ㆍ25동란 때 사라졌다고 한다.지금은 서대신동으로 넘어 가는 길이 되었지만,그 당시에는 괴정에서 아미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였다.이 길은 하단,독지(禿旨 :구평동),구포,강 건너 김해지역에서 부산까지 왕래하는 보부상(褓負商)과 일반 행인들이 다니던 길목이었다.

 

일제시대에 지금의 대티고개에 큰 길이 닦이고,괴정사거리를 거쳐 엄궁,사상으로 가는 길과 다대포로 가는 길을 닦았지만,좁고 거칠은 시골길 그대로였다.거기에다 대티 마을에 분뇨투기장이 생기고 하단에 분뇨처리장이 생겨 매일 똥차가 오가면서 마을 사람들이 사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1945년 해방될 때에 대티(괴정2동),큰샘거리(괴정1동)에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았고,과수원이 띄엄띄엄 있었으며,대부분은 논밭이었다.괴정동은 일제시대 사하지방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중심지였기에 경찰관(警察官) 주재소가 세워졌다.


대티고개에 올라섰을 때만 하더라도 시약산 산행들머리를 금방 찾을 것만 같았는데,고개의 집들이 바뀌어 한참이나 오르내린 끝에 대밭1길로 해서 산불초소가 있는 산속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예전에는 풀섶길이었는데 이제는 조림을 해서 숲길로 바뀌어 있었다. 

 

[예전엔 한티고개라는 대티고개-시약산 산행들머리는 왼쪽 가로수가 있는 대밭1길]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서다 뒤돌아보니 아미동 까치고개 너머로 내 유년의 산인 천마산이 닥아온다.6.25동란 후에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그곳에도 이제는 어엿한 찻길이 �려 한결 소통이 나아지긴 했으나 지금도 예전의 궁핍한 삶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부산에서도 몇 안 되는 달동네,까치고개-난 초등생 시절 그 고개를 넘어 감천으로 드나든 적이 많았다.감천 화력발전소가 생기기 전에 고기를 잡으러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형들과 넘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지독히도 가난했던 우리네 어린시절이 이젠 아름다운 향수로 저며오는 건 세월의 강물 탓인가 보다.

 

 [대티고개에서 첫 봉우리에 오르며 돌아본 천마산(맨 뒤)과 낙동정맥의 마루금(중앙)]

 

첫 봉에 올라서자 샛길들이 나타나고 솔숲이 나오면서 밀양 박씨 묘지에 다다랐다.십수년 전만하더라도 듬성듬성 햇빛이 스며들던 솔 숲에는 어두칙칙하다.이곳에도 어김없이 양지마을과 싸리골에서 올라오는 실핏줄같은 샛길이 열려 있다.

 

 [박씨 묘 입구의 솔밭-그늘이 져 쉬어가기에 좋았다.]  

 

  [밀양 박씨 묘-오른쪽 기상대 건물이 시약산 정상이다] 

 

오늘따라 많은 등산객들이 시약산으로 오르내린다.등산복으로 차려 입은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물병 하나만 달랑들고 운동화에 츄리닝 차림인 이들도 있었다.또 싸리골 약수터에 물을 길러 오른 이들도 적지 않았다.박씨 묘를 지나 봉우리에 오르니 드디어 시약산 동릉 위의 암장이 눈에 들어온다.봉우리 오른쪽 바위턱으로 닥아가 주변을 살펴본다.내가 이 곳에 오고싶어했던 불탄 소나무지역을 훑어봤으나 숲이 우거져 조망이 안 되었다. 

 

 [박씨 묘 지난 봉우리에서 돌아본 박씨 묘와 천마산(좌),낙동정맥(중),그리고 감천만.

   천마산,아미산,시약산,구덕산 능선은 완만하여 조선 때 목장초지로 쓰이기도 했다.] 

 

  [박씨 묘 지난 봉우리에서 바라본 시약산 동릉]  

 

시약산으로 곧장 오르는 산길을 버리고 등산객들이 잘 찾지 않는 오른편 샛길로 들어선다,처녀바위로 가는 산길이다.이 길은 예전에는 거의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았으나 이젠 어엿한 산길로 변모해있었다.길 가에는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드문드문 피어 있었고,기린초와 산박하도 간간이 보였다.조금 더 가면 10년 전에 화재로 시약산 동릉까지 불탄 지역이 나올 것이다.

 

허름한 묘지에 다다르니 길은 또 두 갈래길.나는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오른쪽 산허릿길을 따라간다.그런데 이 일대는 불에 탄 흔적이라곤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10년 사이에 자연은 저절로 복원이 되어 말끔하게 바뀌어 있었다.그때만 하더라도 아직도 화근내가 코를 찔렀고 소나무와 떡갈나무 밑둥에는 검게 그을린 상처가 보기에도 애처로웠는데...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었다.정말 놀라웠다.이곳이 불이 난 곳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묘지에서 시약산 동릉까지 제법 넓은 지역이 새카맣게 불에 그을렸는데 이젠 무성한 숲과 풀이 싱그러웠다.

 

 [불탄 지역에 복원된 솔숲-자연의 치유능력은 경이롭다.]

 

 [시약산 동릉,처녀바위 가는 길에 핀 산박하]

 

잠시 뒤 작은 개울을 지나 시약산 동릉에 올라서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너럭바위에 걸터 앉아 물 한 모금을 들이키고 사위를 조망한다. 부산 시내가 휜히 내려다보이고 영도와 구덕운동장은 물론 광안대교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엄광산 아래 모교도 가늠된다.


엄광산은 일제 때 일본의 신하가 되어 일본에 엎드려 절 한다는 고원견산(高遠見山)으로 창산개명하여 일본 학생들의 단골 소풍지라는 아픈 역사의 굴곡을 지녔던 산이다.95년 4월 '부산을 가꾸는 모임'의 요청으로 제 이름을 되찾은‘엄버치’으뜸으로 빛을 비춘다는 엄광산(嚴光山 504m)-수목이 울창한데다 산자락에는 구덕수원지가 있어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초읍의 성지곡수원지와 더불어 부산 사람들의 쉼터로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시약산 동릉에서 직선으로 바라본 영도-엄광산,구봉산에서 굽이치는 맥이 복병산을

거쳐 용두산,용미산(옛시청자리)을 세우고 북항과 남항을 가르며 그 자리에 영도대교

   를 세웠다.그림자 끊어진 섬,절영도(絶影島)가 아파트로 둘러싸여 도시화되었다.]    

    

 [시약산 동릉에서 바라본 부산 북항,그 앞쪽으로 복병산과 용두산공원이 보이고,사진

앞쪽에는 구덕운동장이 모습을 드러냈다.구덕운동장에서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아름다

운 보수천이 부산 남항으로 유입되고,영도가 안산으로 부산항을 진호하고 있다.]   

 

 [시약산 동릉에서 북쪽으로 본 엄광산(좌)과 구봉산(우),그 고샅에 짙은 수림의 구덕수원지

와 대신공원이 쉼터로 자리잡고 있다.구봉산 아래 모교가 보이고 엄광산 앞쪽에는 내원정

                                                        사와 그 왼쪽이 꽃마을로 유명한 구덕령이다.]

 

 [시약산 동릉 너럭바위서 돌아본 시약산 동남릉-동릉에 이르는 산허릿길이 희미하다.] 

 

[시약산 동릉에 핀 층층이풀] 

 

처녀바위로 가는 길은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서야 한다.그런데 지난 여름 그렇게 화려하게 꽃을 피우던 꽃들은 이제 가을걷이가 한창이다.길섶에는 가을의 전령사 구절초가 청초한 자태로 길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가을걷이 분주한 야생화-가을이 성큼 닥아왔으니...]

 

 [청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쑥부쟁이(?)] 

 

드디어 짙푸른 암장 아래 처녀바위에 다다랐다.흡사 열열히 기도하는 모습 같아서 그런 이름을 얻었지만 어찌 보면 처녀바위라기보다 성숙한 여인네가 아기를 돌보는 듯한 다정한 느낌이 옳을 성싶다.처녀바위를 돌아 암장 아래로 내려서니 또 기묘한 모습의 바위들이 벼랑 끄트머리에 서 있다.

 

 [뙤약볕이 내려쬐도 시원한 바람이 부는 처녀바위-열열히 기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시약정에서 내려다본 쳐녀바위(우)와 기암] 

 

마침내 시약정으로 오른다.거대한 암장 곁에 서 있는 시약정에는 벌써 산꾼들이 진을 치고 점심을 들고 있었고 암장 위에는 산꾼들이 올라가 바람을 맞으며 조망을 즐기고 있었다. 

 

 [시약산 시약정 부근의 절벽바위]

 

 [시약정에서 본 거대한 절벽바위-왼쪽은 보리밥과 해장국으로 유명한 산중 꽃마을.] 

 

시약정을 돌아 시약산(515m) 정수리에 있는 기상대 건물을 오른편으로 돌아 시멘트도로로 가는 길에는 다라미 님이 보여주었던 그령이 가득하다.

 

 [시약산 기상대 건물 아래 임도의 "그령"]

 

시멘트도로에 올라서서 시약정 아래 거대한 암장을 카메라에 담고 50미터쯤 떨어진 구덕산으로 간다. 

 

[시약산 정수리 시멘트도로에서 본 절벽바위 옆모습] 

 

이 구덕산 입구에도 항공무선표지소가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여기서 억새로 유명한 승학산을 담아보았다.

 

 [승학산 북동릉에 펼쳐진 억새밭-구덕령 사거리 앞 작은봉우리 아래로 임도가 열려 있다]

 

  [학이 날아오르는 듯한 형상의 승학산(乘鶴山 496m)과 억새밭] 

 

구덕산은 울창한 수림을 자랑하고 있으며,시민의 휴식공간으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는 대신공원과 한때 대규모 꽃 재배단지로 유명했던 꽃마을,구덕수원지 등을 품고 있다.구덕산은 해발 565m로 북구 학장동과 사하구 당리동,서구 서대신동의 경계에 솟아 있다.금정산에서 달려온 낙동정맥이 물운대로 굽이치기 전에 돋올하게 치솟아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엄광산에,남서쪽 50미터 지점에 시약산과 연이어져 있다.


고로(古老)들에 따르면 구덕산을 예전에는 고적(古低岐),또는 구직(久至岐)라고 불렀다 한다.“고적”“구직”의“고”와“구”에서 구(舊)가 나왔고“적”,"직”이 변하여“덕(德)”으로 변하여“구덕[九(舊)德 ]”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구덕산은 순수한 우리말인 구덩이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가파른 경사와 비탈 뿐 만아니라 산 아래에 움푹하게 깊이 팬 구덩이가 많았다는 것.현재 구덕터널이 지나는 그 위의 구덕嶺을 "구덩이재"라고 일컬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구덩이골 구덩이산으로 부르다가 한자로 舊德山이나 九德山으로 굳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구덕산을 사병산이라고도 하며 병풍처럼 둘러진 산이라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고로들은 증언하고 있다. 

 

 [구덕산 시멘트도로가에 핀 궁궁이]

 

[구덕산 시멘트도로가에 핀 미역취]

 

구덕산으로 오르는 시멘트도로를 따라 구덕령 꽃마을로 내려가는 사거리까지는 휴일이라 많은 산꾼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사거리 가는 길에 궁궁이와 미역취를 카메라에 담고 사거리에 이르니 축제를 방불케 하는 인파로 술렁거린다.승학산 억새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기나긴 행렬이었다. 

 

[승학산 바람재로 가다 바라본 괴정 일원과 제석골,승학산]

 

나는 구덕령으로 빠지는 길 반대편으로 들머리를 잡아 승학산으로 가기 위해 임도따라 걷는다.많은 인파가 억새를 구경하기 위해 줄을 잇고 있었다.이 임도는 예전에 내가 산악구보를 하기도 하고 맨발산행을 즐기던 추억이 서린 곳.돌 하나 풀 한 포기에도 내 그리움이 배여 있는 길이다.모롱이 하나를 돌아나가자 '장수천'과 '대성천'으로 빠지는 샛길이 나온다.조금 더 가자 드디어 '바람재'다.학장과 당리의 제싯골(帝釋谷),승학산 억새밭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는 이름 그대로 시원하기 짝이 없는 바람이 불어온다.많은 인파가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바람재에서 억새능선으로 곧장 오르지 않고 임도를 따라가다 달담샘 쪽 억새밭으로 올라선다.달담샘 못 미쳐에 다다라 억새를 카메라에 담고 달담샘에 이르니 많은 사람들이 물을 받고 있었다.그런데 올해에는 억새가 별로였다.만개하려면 열흘 넘게 기다려야 할 듯했고 해마다 찾아오는 인파로 억새밭도 규모가 줄어들어 예전만 못했다.

 

달담샘에는 많은 산꾼들이 물을 받고 있었다.억새밭 사이로 흘러나오는 물은 가물면 물이 나오지 않으나 물맛은 그런대로 괜찮다.달담샘을 지나 억새능선에 올라서면 본격적인 억새밭이 펼쳐지지만 아직 때가 일러서인지 억새는 만개하지도 않았고 볼품마저 없었다.

 

[승학산을 바라보며 달담샘으로...]

 

 [기치창검하던 지난 여름의 억새는 은빛 물결로 고개 숙이고...]

 

 [달담샘에서 잡은 구덕산(좌)과 시약산(우)을 등진 등산객들의 행렬]

 

[달담샘 지난 봉우리에서 승학산을 등지고]

 

 [억새밭 정수리에서 을숙도를 보며]

 

[억새밭 정수리에서 바라본 괴정과 신평 일원]

 

이렇게 해마다 억새밭 규모가 줄어드는 큰 요인은 물론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등산객 탓일 것이다.그런데 또 다른 요인으로는 작년부터 사상구청에서 억새문화제를 열면서 억새밭의 훼손이 더욱 가속화되기 시작했다고 환경단체와 산악인들은 보고 있다.사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승학산의 억새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그런데 작년 10월 8일 사상구청이 개청 10주년을 맞아 사하구와 경계에 있는 승학산에서 제1회 승학산 억새문화제를 개최하여 사하구청과 주도권 다툼을 벌여 갈등을 빚었다.축제를 놓고 두 지자체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 표면적인 이유는 환경훼손.사하구청 관계자는 "몇 년 전부터 억새축제 개최를 검토했지만 주민들과 산악인들이 억새밭의 훼손이 우려된다는 지적에 따라 없던 일로 했다"며 "실제 한 사람만 겨우 다닐 수 있는 억새밭 등산로에서 축제를 개최하면 환경훼손이 심각할 것"이라고 지적했다.또 많은 사람이 몰리면 쓰레기로 인한 환경오염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우려하기도 했다.


이에 축제 개최를 강행하고 있는 사상구는 승학산 억새축제를 통해 이 일대 억새밭이 전국으로 알려지면 관광객이 많아져 지역경제에 보탬이 된다는 입장이다.사하구가 지적하는 환경훼손에 대해서도 "별도 무대설치 없이 차양막 1개 정도를 치고 등산로 주변에서 행사를 치르기 때문에 우려할 만한 환경훼손은 없고 참가 시민들에게 쓰레기 봉투를 나눠줘 쓰레기 발생을 억제할 것"이라고 일축했다.두 지자체 간에 갈등이 증폭된 것은 이 같은 표면적인 이유보다도 자존심 싸움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승학산 정상 부근의 억새밭 36㏊가운데 80% 정도가 사하구에 분포해 있고 사하구는 실제 몇 년 전부터 억새밭에 창궐하던 칡을 제거하며 억새밭 보호에 큰 힘을 쏟아왔던 터에 사상구가 협의 없이 축제를 개최하려 하자 불만이 분출한 것으로 보인다.사하구청 관계자는 "승학산 억새 군락의 80%가 넘는 지역은 사하구에 분포해 있다"며 "축제를 한다면 비탈길 쪽 일부 억새군락만 보유하고 있는 사상구보다는 우리 쪽에서 개최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사상구청 관계자는 "제1회 축제를 우리 쪽에 빼앗긴 것이 못내 아쉬워 극단적인 방법으로 축제를 반대하는 것 같다"며 "같은 부산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축제에 관할 논란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올해에도 지난 9월 말 사상구청은 억새문화제를 열었지만 날이 갈수록 황폐화되고 훼손되어가는 승학산 억새밭은 억새없는 억새제가 열리지 않을까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만 가고 있다.

 

 [바람재에서 학장  대림아파트 쪽으로 내려오다 본 억새]

 

[학장동 대림아파트 근처의 양광이 쏟아지는 숲속] 

 

바람재로 되돌아온다.구덕령 꽃마을로 가서 저 유명한 보리밥 해장국으로 점심을 들까 하다 넘쳐나는 인파를 우려해 학장동 대림아파트 쪽으로 내려서고 말았다.하산길은 어쩌다 등산객을 만났을 뿐 너무나 호젓한 산길이어서 내가 다시 찾은 시약,구덕,승학산을 되짚어보기에도 그저 그만이었다.

 

대림아파트 근처에 오자 숲 사이로 10월 오후의 빛나는 햇빛이 오롯이 비춰 내 젊은 날의 기억이 투영되는 듯했다.

 

2006년 10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