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송 형!
늘 생각만 맴돌다가 처음으로 편지를 보냅니다.형이 받아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내려다보고 있겠지요.그래서 받아보지 못할 거란 생각은 안 합니다.
그해 겨울,바람이 몹씨 부는 날,나는 창선동 다방에서 나오다 형을 보았지요.형은 만취한 채 내 손을 덥썩 쥐며“석아,내일 설악에 간단다.”라는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떠났지요.그때 웬일인지 형의 눈이 너무 슬프도록 맑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잊고 말았지요.
형은 항시 내겐 넘지 못하는 벽이었어요.고1 때 수영부에 들어가 헤엄을 배울 때도,산에 오르고 있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76년 2월 16일.산등성이가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설악골에서 조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버스 안에서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아니야,형은 살아 있을 거야.”하며 돌아오길 빌었는데...그런데 형은 하얀 산에서 그렇게 떠났고 나는 바람부는 이 도시에 이렇게 남았고.
그 뒤로 나는 애써 설악산을 모른체 했고 그 어떤 산도 오르지 않았어요.어쩌다 산에 오르다가도 형님 생각이 나서 내쳐 내려오고 말았지요.형이 산에 빠져 산사나이가 되고 나서도 자주 만났지만 내게 한 번도 산 이야기를 안해주더군요.아마 내가 바다에 열광하는 걸 알고 나를 끌어들이지 않으려 했거나 아니면 불 같은 내 성격을 잘 아는 형이 일부러 산을 숨겨놓았거나 그랬을 테지요.형도 알다시피 난 본디 방랑끼가 많은 놈이 잖아요.
여기저기 맘 붙였다가 시들해지자 산이 나를 부르더군요.80년대에 들면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어요.그러나 형님의 빗돌이 있는 금정산은 가기 싫더군요.그래서 다들 금정산에 가지고 하면 난 그럴 수 없다고 말했죠.핑계이겠지만 나는 형님의 빗돌에 꽃다발도 놓아드리지 못했어요.그저 형님을 피해다닌 거지요.형이 그토록 사랑하던 형수를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으니 얼마나 옹졸합니까.
형은 지금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에베레스트 정수리에 머물고 있겠지요.아니 설악산 바위 틈새에서 한 떨기 솜다리로 피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으로 범봉을 바라보고 있겠지요.
지금 나는 낙동정맥을 타고 있어요.이젠 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하지만 형님이 자꾸 그리워지는 건 웬일인가요.청운의 나이 서른.시간이 멈춰버린 형님의 얼굴이 어른거리는군요.
후배에 가혹하리만치 엄격했어도 속내는 한없이 따스한 정을 지녔던 형.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형!이라고 불렀던 사람.내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았던 형! 20여년이 훌쩍 지나갔지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지금 설악에는 그날처럼 흰 눈이 내리고 있고 이곳 관산에도.....
[이
편지는 96년 낙동정맥을 종주하면서 눈 내리는 아화의 관산에서 쓴 것으로 형이 가신 지 30주기를 맞아 다시 부친다.]
[사진은
지난 2월 12일,77'에베레스트 원정대의 공격조로 설악산 공룡능선 1,275봉 아래 설악좌골에서 눈사태로 목숨을
잃은 최수남(36),송준송(30),전재운(26) 대원의 30주기를 맞아 이인정 대한산악회 회장을 비롯 관계자와
유가족이 추모제를 열었다.
한국일보사와
대한산악연맹이 공동주관했던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여한 산악인 40여명은 출발을 앞두고 설악산에서 마무리 훈련을 하던 도중 사고를
당했다.6명이 한 조를 이뤄 등반하던 중 최 대장조가 사고를 당해 최 대장 등 3명이 숨지고 3명은 크게 다쳤다.하지만 원정대는 슬픔을 딛고
일어서 이듬해인 77년 9월15일 낮 12시50분 기어이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 정상에 태극기를 꽂았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봉에 올랐던 고상돈 씨는 설악산에서 숨진 동료 3명의 영정을 태극기와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묻었다.그러나 그도 79년 알래스카
맥킨리봉 등반을 마치고 하산 하던 중 빙벽에서 추락해 사망하고 말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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