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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그리움으로 걷는 백두대간-25구간<도래기재-태백산-화방재>

 

 

                                       도래기재-구룡산-곰넘이재-태백산-화방재(2004.10.31)

 

 

종주들머리,도래기재에서 금정(金井)을 생각한다.

 

중앙고속도로 풍기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온 안성수 부장의 봉고는 순흥,단산,부석을 거쳐 물야면 오전리로 들어선다.조선 최고의 물맛을 자랑하던 오전약수터를 지나 주실령을 넘어서니 춘양면 서벽리.서벽리에서 도래기재로 오른다.도래기재 100미터 아래,장승 2기가 서 있는 곳에는 아주 오래된 금정터널이 있다.도래기재 너머 첫 동네인 춘양면 우구치리에서 금을 캐가기 위해 뚫은 터널이다.


우구치리(牛口峙里)는 도래기재에서 바라보는 골짜기 생김새가 마치 소의 입을 닮은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금정’이라는 이름을 더 친숙하게 부른다.일본인들이 금광을 개발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당시 금광에서는 물이 많아 나 금을 캐는 것이 마치 우물 속에서 금을 기르는 것과 같다고 해서 금정(金井)이라 불렀다 한다.금정은 한창 때는 나라 안에서 두 번째 가는 금 산지였다고 한다.

 

금정에 본격적으로 금광을 개발한 것은 일본인들이었다.산 너머 무랭이골에서 캐낸 광석을 제련장이 있는 금정까지 나르기 위해 산 허리에 터널을 뚫었다. 엄청난 금의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당시로서는 드문 자동화 설비가 갖추어졌다.자동화 설비를 돌리기 위한 전기도 일찌감치 들어와 밤을 밝혔다.산에는 굴이 부지기수로 뚫렸고 사람이 늘어났다.학교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아예 매일 열리는 상설시장이 들어서기도 했다.그럴수록 금 생산량은 늘었고 그 금을 나르기 위해 일제는 1925년 춘양으로 나가는 도래기재에 금정터널을 뚫었다.삼동산(三洞山1,178.2m)을 끼고 도는 40여리 산길이 열린 것도 이때였다.

 

땅을 파기만 하면 쏟아지던 금정의 금은 해방이 닥치기 직전부터 마르기 시작했다.그러나 광산 일은 줄지 않았다.전쟁을 치르던 일본은 아연과 중석이 필요했다.금정계곡 맞은편 구점골에는 삼국시대부터 고아산이 있던 곳이었다.한국전쟁이 끝나고 금정광업소 뒤를 이었던 대명광업소나 함태광업소가 광산을 이어받았으나 찌꺼기 금밖에 만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금정의 금 우물에 대한 소문은 끊이지 않는다.금 우물에 금이 마르면서 태백산의 마지막 자락 구룡산(九龍山 1,344m)에는 푸르름이 가득하다.최근 들어 하나둘 금맥을 찾는 발길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고 한다.금이야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초록이 없이 이곳 사람들은 살아갈 수가 없다.반세기 넘게 영화를 누렸던 금정터널(석조터널150m) 또한 붕괴 위험이 많아 지난 85년부터 터널 위로 도로가 열린 뒤,폐쇄되어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경상도와 강원도를 연결하는 역(驛)이 있던 마을이라고 도역이,도래기라 부르는 도래기재에서 산행장비를 챙기고 있는데 서울 잔디밭산악회의 대간팀을 실은 대형버스가 고갯마루에 멈춘다.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종주를 하며 종주날머리는 화방재라고 한다.그러더니 그들 35명은 우리보다 먼저 헤드랜턴에 불을 밝히고 쏜살같이 종주에 들어가버린다.우리는 늘 그런 것처럼 도래기재에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종주를 시작한다.사진 왼쪽부터 이재화 산우회 총무,최금구,김익수,전기환,신남석 산행대장과 김현기 후미대장이 포즈를 잡고 안성수 부장이 디카의 셔터를 눌렀다.

 

 

[구룡산(九龍山 1,344m) 정상 빗돌과 함께]

 

새벽 3시 8분,도래기재(775m)를 뒤로 하고 종주에 들어간다.헤드랜턴을 밝히고 오르는 길은 처음부터 된비알이다.날씨는 찹찹했으나 바람이 불지 않아 산행하기에는 좋았다.3시 30분,동진하던 대간이 북동진하는 910봉에 올라서자 대간 길 양쪽으로 수령 백년은 넘은 아름드리 춘양목(春陽木)이 즐비하다.힘차게 하늘로 치솟은 소나무들의 늠름한 자태를 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칠흙같이 어두운 신새벽,겨우 랜턴 불빛으로 그 모습을 어림짐작할 뿐이니 명성이 자자한 춘양목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춘양목이란 봉화,울진,영양 등지에 자라는 금강소나무를 말하는데,일제 때 이들 금강송의 집산지가 춘양역이었기 때문에 춘양목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금강소나무는 곧게 자란다고 해서 강송(剛松),겉이 붉다고 해서 적송(赤松)이라 불리는 조선 소나무의 원형이다.껍질이 얇고 붉으며 터지거나 비틀림이 없고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벌레가 안 먹고 잘 썩지도 않아 예부터 궁궐이나 사찰을 비롯,한옥을 짓는데 으뜸으로 쳤다.울진 소광리에는 나라 안에서 가장 오래된 대왕금강송(수령 530년)이 있으며 일본이 자랑하는 국보 1호,반가사유상의 재질 역시 이 금강소나무라고 한다.

 

대간 길의 춘양목은 구룡산 아래 금정임도에 다다를 때까지 보였다.910봉을 떠나 3시 42분,첫 임도를 만났다.춘양면 애당리 참새골에서 상금정(上金井)까지 열려 있다.동쪽으로 달리던 대간은 임도를 지나면서 차츰차츰 북동쪽으로 머리를 틀어 1,049봉으로 이어진다.1,049봉을 깃점으로 대간은 동진하다가 2번째 금정임도에 가까워지면 다시 북동진하여 구룡산에 이른다.3시 40분 1,020봉에 올라 5분간 다리쉼을 하고 1,049봉을 지난다.대간 왼쪽으로 불빛이 보인다.상금정 마을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다.이어서 4시 16분,1,060봉 헬기장을 거쳐 2번째 금정임도(960m)에 다다랐다.


춘양면 애당리 참새골에서 삼동산으로 이어지는 임도다.임도 절개지를 올라서자마자 가파른 길이 시작된다.조금 발품을 파니 앞서 가던 잔디밭산악회의 후미대장과 20대 여성회원을 만난다.그 아가씨는 무척 힘이 드는 지 땀을 억수같이 흘린디.그들과 우리는 각화산 갈림길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함께 종주를 했다.구룡산 앞봉우리 1,256봉 오름길은 장단지가 당길 정도로 까꿀막졌다.임도에서 40분 가량 발품을 팔아 1,256봉에 올라섰다.

 

오랫만에 종주를 재개한 재화는 오른발 뒷꿈치에 극심한 통증을 호소한다.익수가 신발패드를 건네주었으나 아픔은 여전하단다.점심을 들고난 뒤 기환이가 주는 진통제를 먹고 겨우 참아낼 수 있었다.우리는 1,256봉 정상에서 10분 가량 다리쉼을 하고 5시 15분,구룡산으로 오른다.이 봉우리에서 구룡산(1,344m까지는 10여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1,256봉 오름길보다 수월했다.


5시 27분,구룡산 정수리에 올라서니 너른 헬기장에다 사방이 툭 트여 전망이 좋았지만 우리는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북동쪽 대간 너머로 태백시의 불빛이 보일 뿐이었다.(31.05:38)

 

 

[곰넘이재에 다다라]

 

구룡산을 오르느라 한바탕 진땀을 뺀 우리는 요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기환이가 가져온 기정떡(스펀지떡)을 나누어 먹었다.대간은 구룡산(1,344m)에서 오른편(동남)으로 급격히 방향을 틀어 남진하다가 고직령을 지나면서 동남진한다.구룡산에서 왼편(북서)으로 갈래친 산줄기는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와 영월군 상동읍 천평마을을 가르며 민백산을 거쳐 삼동산(三洞山 1,178.2m)으로 뻗어나간다.


5시 38분,구룡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은 뒤,하산길에 들어간다.500미터쯤 내리막길을 내려오자 대간과 나란히 잡목이 무성한 방화선이 나타난다.잔돌과 흙이 뒤섞인 급사면을 20분쯤 내려오자 방화선이 끝나며 6시,고직령(高直嶺) 삼거리(1,200m)에 내려섰다.


삼거리 오른쪽 길로 100미터쯤 내려가면 산령각이 있다.이 산령각은 엣 보부상들이 호환(虎患)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4일에 재를 올린다고 한다.높고 곧은 고개인 고직령은 예로부터 영남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중요한 길이었다.특히 고개 너머 경상도 땅의 도심리(道深里)에는 도심역(道深驛)이 있어 태백산 천제(天祭)를 지내려오는 관리들을 묵게 하였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고갯길이었다.삼거리에서 그대로 방화선을 따라 간다.밋밋한 1,231봉을 넘어 능선길을 가자 산죽길이 펼쳐지면서 6시 34분 이정표가 서 있는 곰넘이재에 다다랐다.


이정표에는 이곳이 참새골 입구라 적혀 있는데 오른쪽 골짜기를 따라 40분쯤 내려가면 진조동(眞鳥洞)에 이른다.일제 때 우리의 지명을 정리하면서 아름답고 예쁜 참새골이 느닷없이 진조동이란 얄궂은 지명으로 바뀌었다고 한다.이 곰넘이재는 태백시 천평(川坪)에서 춘양의 예당리(芮堂里)로 넘어가는 고개다.옛날 천제를 지내려 태백산으로 오던 사람들이 넘었고 영남에서 강원도로 들어가는 고갯길이다.영가지(永嘉誌)에는 웅현(熊峴)이라고 적혀 있다.곰은 검에서 나온 말로 신(神)을 뜻하는 태백산으로 천제 행렬이 줄을 이을 때 이 고개를 넘어왔으니 신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곰님이재 또는 곰넘이재라고 불렀다.(06:49)

 

곰넘이재에 다다르자 동이 튼다.6시 49분까지 곰넘이재(1,120m)에서 머물며 간식을 들고 다시 대간 길을 잇는다.7시 헬기장이 있는 1,170봉에올라서니 비로소 사위를 조망할 수 있었다.우선 대간팀을 동쪽으로 등지게 하고 사진을 찍기 전에 장엄한 일출을 카메라에 담았다.회색 빌딩이 즐비한 도시에서는 이제 해돋이 구경도 할 수 없다.만물이 생동하는 해돋이를 보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곤 하는 우리의 일상이 가련하지 않은가! 그런데 해돋이는 순식간에 일어나 사라지고만다. 오! 위대한 일출이여(07:04)

 

 

[곰넘이재 지나 1,170봉 헬기장에서 본 해돋이]

 

헬기장에서 해돋이를 감상하고 구룡산 쪽으로 고개를 돌려 우리가 밟은 대간마루금을 뒤돌아본다.오른쪽 제일 높은 봉우리가 구룡산(1,344m)이며,거기서 왼편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대간마루금으로 도래기재로 수긋해진다.구룡산 앞쪽,잘룩한 곳이 고직령(1,200m)이며 그 앞에 솟은 봉우리는 1,231봉이다.그리고 그 봉우리를 따라 앞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잘룩한 곳이 바로 곰넘이재(1,120m)다.(07:04)

 

 

 

 

[곰넘이재 지나 1,170봉 헬기장에서 뒤돌아본 구룡산]

 

1,170봉 헬기장에서 북동쪽에 솟은 대간의 산,신선봉(1,290m)을 바라본다.여기서 신선봉까지는 30분쯤 걸린다.(07:05)

 

 

[곰넘이재 지나 1,170봉 헬기장에서 바라본 신선봉]

 

1,170봉 헬기장에서 북서쪽으로 질러진 곰넘이골과 무랭이골을 조망한다.곰넘이골은 왼편 구룡산(1,344m) 산줄기와 오른편 신선봉(1,290m) 산줄기 사이에 이뤄진 골짜기이다.신선봉 남릉과 남서릉 사이에서 시작된 곰넘이골의 물은 구룡산 산줄기를 감돌며 북으로 나가다 삼동산(三洞山1,178.2m)에서 흘러내리는 무랭이골의 물을 받아들여 동쪽 상천평 마을로 흐른다.사진 뒷쪽에 장벽처럼 막아선 산줄기가 삼동산에서 줄달음치는 삼동산 동릉인데,곰넘이골과 이 동릉 사이의 골짜기가 일제 때 금을 캐던 무랭이골이다.그러나 지금 이 무랭이골은 미군 공군 폭격장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07:06)

 

 

[곰넘이재 지나 1,170봉 헬기장에서 바라본 곰넘이골 일원]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던 해돋이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스러지고 말았다.나는 사라진 그 여명을 대신하여 동쪽으로 등진 친구들을 카메라에 담는다.(07:07)

 

 

[곰넘이재 지나 1,170봉 헬기장에서]

 

이번에는 구룡산을 등진 친구들의 모습이다.(07:07)

 

 

[곰넘이재 지나 1,170봉 헬기장에서 구룡산을 등지고]

 

1,170봉 헬기장에서 사위를 조망하고 7시 5분,신선봉(1,290m)으로 발걸음을 옮긴다.1,210봉을 지나 1,180봉에 이르니 동진하던 대간은 90도 왼쪽으로 머리를 틀어 북진한다.헬기장을 떠나 10분쯤 발품을 팔자 묘지1기가 나오면서 산죽밭이 시작된다.허리까지 오는 산죽은 신선봉 9부 능선까지 이어지고 우리는 산죽밭을 헤쳐 올라야 했다.사진은 신선봉 오름길에 산죽밭에 든 동기들,아침 햇살을 받은 친구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07:21)

 

 

[신선봉 오름길,산죽밭에서]

 

7시 35분,신선봉에 올라서니 정수리에 경주 손씨의 묘지 1기가 나온다.그리고 잔디밭산악회 회원 5명이 목을 축이고 있었다.그 가운데는 물론,우리가 만났던 후미대장과 여성회원도 거기 있었다.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우리는 신선봉에서 아침 먹을 자리를 잡았다.금구가 가져온 약밥과 열무김치,과일로 아침식사를 때웠다.때마침 바람도 잠잠하고 날씨도 포근해 아침을 들기에는 좋은 장소였다.8시 7분까지 신선봉에서 머물다 하산길에 들어간다.(08:08)

 

 

[신선봉(1,290m)을 떠나며]

 

북동진하던 대간은 신선봉(1,290m)에 이르면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각화산 갈림봉 1,226봉까지 동남진한다.신선봉을 내려서자 대간은 다시 산죽밭을 뚫고 이어진다.신선봉을 떠난 지 7분 뒤,동남진하던 대간이 동진하는 1,180봉을 지난다.300미터 가량 동진하던 대간은 다시 동남쪽으로 방향을 튼다.이 지점(1,178봉)을 지날 때 산죽밭에 든 재화와 익수를 카메라에 담았다.(08:31)

 

 

[각화산 갈림봉 가는 길,산죽밭에 든 재화,익수]

 

1,178봉 근처의 산죽밭에서 재화와 익수를 카메라에 담고 발품을 판다.대간 양쪽으로 숲이 짙어 조망이 되지 않았다.단지 대간 왼쪽 골짜기인‘춤서리골’만이 간간히 시야에 들어온다.각화산 갈림봉 아래턱에 다다르자 암릉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그것도 잠시 순한 육산으로 바뀐다.


8시 46분,각화산 갈림길인 1,226봉에 다다르니 신선봉에서 먼저 떠난 잔디밭산악회 대간팀이 반긴다.각화산 갈림길 안내판에는 참새골 입구 6km,태백산 10km라 적혀 있다.차돌배기는 춘양면 애당리 석문동을 가리키는데 각화산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이 각화산 갈림봉에서 남쪽 능선을 따라내려가면 봉화의 명산이요,태백산 사고터(史庫祉 사적제138호)로 이름난 각화산(覺華山 1,176.7m)에 이른다.

 

사고지는 조선조 실록과 왕실족보를 적은 선첩(璇牒)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사고본이란 본디 복사본 4부를 마련하여 한양 춘추관 외에 충주,성주,전주 등 원격지에 분산 보관해오다가,임란 때 거의 소실된 가운데 하나 남은 전주본을 평안도 묘향산으로 옮겨다가 그것을 저본(底本)으로 삼아 다시 5부로 늘여,선조 39년(1606년)에 이르러 한양 다음 임란 때 비교적 안전했던 여기 태백산과 오대산.강화 마니산,무주 적상산에 다시 분산해온 것이다.(08:51)

 

 

[각화산,차돌배기 갈림봉에 다다라]

 

각화산 갈림길에서 8시 51분까지 머물다 다시 발품을 판다.그런데 각화산에서 이 갈림길에 올라 부쇠봉을 거쳐 태백산 영봉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예전에는 하늘고개인 천령(天嶺)이라 일컫는 유서깊은 길이다.이제 우리는 그 천령 길을 간다.


동남진하던 대간은 각화산 갈림봉(1,226m)에 이르러 90도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북동진,200미터쯤 가다 1,209을 지나면서 북진하게 된다.그런데 대간은 1,209봉으로 오르지 않고 왼쪽 산허릿길을 따라가다 다시 산등으로 올라선다.길은 완만하고 부드럽다.1,160봉 잘룩이에 다다르자 백연봉 철제 이정표가 버려져 나뒹굴고 있었다.백연봉은 아직도 멀었는데,엉뚱한 장소에 버려져 있으니 메고 가기 너무 무거워서였을까.

 

1,173봉에 가까워지자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참나무 높은 가지에 겨우살이가 보인다.북진하던 대간이 북동진하는 1,173봉을 지나면서부터는 대간 좌우로 겨우살이가 군락을 이뤄 장관을 이룬다.겨우살이는 주로 참나무의 높은 가지에 기생하는데 항암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겨우살이는 옛 선조들이 초자연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온 식물이다.겨우살이는 모든 나무가 잎을 떨군 겨울에도 홀로 공중에서 푸르름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일생 흙과 접촉하지 않아도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특히 유럽 사람들은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를 불사신의 상징으로 믿었고 하늘이 내린 영초(靈草)라고 신성시하여 절대적인 경외의 대상으로 여겼다.


겨우살이는 나무 줄기 위에 사는 착생식물로 참나무,팽나무,뽕나무,떡갈나무,자작나무,버드나무,오리나무,밤나무의 나무 줄기에 뿌리를 박아 물을 흡수하며 살아간다.그러나 겨우살이는 엽록소를 갖고 있어 자체에서 탄소 동화작용을 하여 영양분을 만들기 때문에 숙주식물한테서는 물만을 빼앗을 뿐이다.그러므로 대개 겨우살이는 숙주식물에 거의 피해를 주지 않는다.겨우살이는 새들을 통해서 번식한다.

 

여름철에는 다른 식물의 그늘에 가려서 햇볕을 받지 못하므로 자라지 않고 있다가 가을이 되어 나뭇잎이 떨어지면 꽃을 피우고 겨울동안에 구슬처럼 생긴 연한 노란빛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다.이 열매는 겨울 철새들이 먹이를 구하기 어려울 때 새들의 좋은 먹이가 된다.이 열매에는 끈적끈적한 점액이 많이 들어 있는데 새들은 이 점액과 씨앗을 먹고 나서 부리에 붙은 점액을 다른 나무의 껍질에 비벼서 닦는다.이때 끈끈한 점액에 묻어 있던 씨앗이 나무껍질에 달라붙어 있다가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다.


겨우살이는 옛 선조들이 믿었던 대로 놀랄 만큼 약효가 뛰어나다.가장 강력한 항암식물의 하나이며,훌륭한 고혈압 치료제다.신경통,관절염에 효과가 있고 지혈작용이 뛰어나므로 여성의 월경과 다증이나 갖가지 출혈이 있는 증상에 효과가 있다.몸이 붓고 소변이 잘 안 나오는 증세에도 치료 효과가 크다.간경화나 암으로 인한 복수에 효과가 있으며 결핵성 당뇨병에도 좋다.겨우살이는 몸을 따뜻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독성이 없으므로 누구든지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만능약이 바로 겨우살이다.(09:29)

 

 

[백연봉(깃대배기봉) 가는 길의 겨우살이 군락]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가지 끝에 매달린 겨우살이의 신기한 모습은 우리를 탄복하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한참이나 겨우살이를 감상하다가 백연봉으로 오른다.1,132봉 왼편으로 열린 산허릿길을 돌아서니 산죽밭이 나오며 대간은 서서히 가파른 된비알이다.이마에 땀이 흐를 정도로 힘이 들었다.10분 가량 발품을 팔아 9시 42분,1,274봉에 올라섰다.여기서 12분 가량 다리쉼을 하고 백연봉으로 오른다.된비알의 연속으로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장단지가 당길 정도로 걸음이 느려진다.15분쯤 발품을 팔아 산죽밭을 가로질러 10시 16분,백연봉에 다다르니 이곳에도 예의 잔디밭산악회 회원들이 쉬고 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사진은 잔디밭산악회 회원이 찍어준 것으로 모처럼 나도 모델이 되었다.(10:22)

 

 

[백연봉(깃대배기봉 1,353m)에 올라]

 

깃대배기봉을 깃점으로 대간 오른쪽은 여전히 경북 봉화 땅이다.그러나 대간 왼쪽은 영월 땅을 벗어나 태백 땅으로 들어선다.그리고 깃대배기봉(1,345m)에서 대간은 북진하게 되며 남동쪽으로 뻗치는 산줄기는 두리봉(1,353m)을 거쳐 태백과 봉화의 경계에 있는 청옥산(靑玉山 1,276.5m)을 일군다.10시 25분까지 깃대배기봉에서 다리쉼을 하고 부쇠봉으로 떠난다.부쇠봉으로 가는 천령 길은 너무도 완만하고 부드러워 흡사 평전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다만 키 낮은 산죽과 참나무,은빛 사스래나무가 숲을 이룰 뿐,대간 길은 너무나도 평탄했다.발밑에 밟히는 낙엽 소리와 이따금 들려오는 새소리,꽃을 피운 채 말라 시든 풀과 야생화,그 위로 한량없이 쏟아지는 가을 햇빛....고개를 들면 나뭇가지 사이로 물들 것만 같은 쪽빛 하늘....천령 길은 밝고도 투명했다.그러나 우리는 이미 허기가 져 있었다.11시,평평한 곳을 골라 배낭을 부리고 점심을 들어야 했다.(10:41)

 

 

[부쇠봉 가는 옛 천령(天嶺) 길의 대간 풍경]

 

우리가 점심을 들었던 곳은 1,420봉 어간이었다.그러나 점심을 먹고나자 다들 졸음이 밀려와 10분쯤 낮잠을 잤다.거의 8시간 발품을 팔았으니 점심을 먹고나서 배부름과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와 바로 운행을 하기에는 무리였다.배낭을 베개삼아 잠깐 눈을 붙여 11시 42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현기가 깨우지 않았으면 한없이 잠 속에 빠져들 뻔 했다.다시 천령 길을 간다.산죽과 잔돌이 뒤섞인 그런 길을 10분쯤 발품을 팔아 1,450봉을 지난다.대간 길의 숲속은 여전히 참나무와 사스래나무가 뒤섞여 있었다.특히 은빛 사스래나무가 햇빛을 받아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멋들어 진 풍경은 쉽사리 잊을 수가 없었다.사진은 부쇠봉 오르막길의 대간 풍경인데,사진 앞쪽의 은빛 나무가 고원지대에서만 자란다는 사스래나무다.(12:07)

 

 

[부쇠봉 오름길의 숲속 풍경]

 

조금 더 오르자 부쇠봉 오름길과 부쇠봉 왼쪽 산허릿 길이 갈라진다.그런데 부쇠봉(1,546.5m) 오름길에는 잡목이 우거져 등산로가 희미했다.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탓이었다.사실 이 부쇠봉을 지나면 경북 봉화 땅을 벗어나 온전히 태백 땅으로 들어선다.우리는 산허릿길로 간다.이제 태백산 영봉이 눈에 들어오고 천제단도 뚜렷하게 보인다.부쇠봉 산허릿길을 가다 처음으로 주목과 마주쳤다.친구들을 주목 앞에 서게 하고 카메라를 들이댔다.(12:14)

 

 

[부쇠봉 갈림길 가는 길-주목과 함께]

 

12시 20분,산허릿길은 부쇠봉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부쇠봉 북서면 일대에는 고사된 주목과 살아 있는주목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부쇠봉(1,546.5m)은 부소봉이라고도 하는데,천제단이 있는 영봉과 태백산 동쪽 봉우리인 문수봉(1,517m) 사이에 있는 산봉우리다.옛날 신라 때부터 태백산 영봉에서 이 부쇠봉을 거쳐 남쪽으로 뻗은 산등으로 길(天嶺)이 있어,경상도에서 강원도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그 길은 고려 이후 태백산 서쪽 산자락 마을인 천평으로 해서 새길재를 넘어 혈리로,소도로 통하는 길이 열리자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졌다.부쇠봉은 해발 1,546미터로 그동안 우리의 지도에 태백산 높이로 잘못 인식되게 한 봉우리다.아울러 이 산봉우리는 중국의 태산(泰山)과 높이가 같다.

 

부쇠봉의 유래는 딱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근처에 차돌이 있어 부싯돌(부쇳돌)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그 부쇠를 부소로 보아 단군의 아들 부소왕자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왜냐면 영봉이 단군에게 제사지내는 장소라면 그 아래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는 부소봉일 것이며 부소단(천제단 하단)은 부소(夫蘇)가 쌓았다는 말이 전해오기 때문이다.(12:26)

 

 

[부소단(천제단 하단) 가는 길에 올려다본 천제단]

 

 

[부소단(천제단 하단) 가는 길의 주목]

                 

부쇠봉 갈림길에서 천제단 하단 가는 길에 부쇠봉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 위의 문수봉을 조망한다.해발 1,517미터의 문수봉은 산봉우리가 바위로 되어 있는 특이한 생김새다.옛날 이 산봉우리의 바위로 문수불상을 다듬었다 하여 붙여진 산이름이다.문수봉 위에는 자갈이 많다.그 자갈로 된 돌무더기가 멀리서 보면 마치 눈이 쌓인 듯해서 태백산의 이름이 이곳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척주지(陟州誌)에 전한다.바위로 된 문수봉 정수리가 가늠되고 사진 오른편 부쇠봉에서 뻗어내린 산비알에는 주목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12:27)

 

 

[부소단(천제단 하단) 가는 길에 바라본 문수봉]

 

마침내 부소단에 다다랐다.태백산에는 3개의 제단이 있다.태백산 영봉의 천제단과 장군봉의 장군단,그리고 천제단 하단이라 하는 이곳 부소단이 그것이다.부소단은 높이 1.5m,가로 6m,세로 4m가량 되는 편마암으로 쌓은 사각형 제단인데,좌우와 전면에 계단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단군왕검의 아들 부소 왕자가 쌓았다 하기도 하고 단군조선 때 구을 임금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천제단과 함께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다.(12:31)

 

 

[부소단(천제단 하단)에서]

 

태백산 영봉의 천제단으로 오르는 대간팀-재화와 현기는 벌써 천제단으로 떠났고 기환이와 익수가 그 뒤를 따른다.기환이와 익수 뒤로 주목이 푸른 빛을 더한다.(12:35)

 

 

[천제단으로 오르는 동기들]

 

태초에 하늘나라 하느님,환인의 아들,환웅 천황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어 우리 민족의 터전을 잡았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이로써 우리 민족은 하느님의 아들이 내려온 산을 하늘로 통하는 길로 봤고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와 같은 곳으로 믿게 되었다.그래서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내려온 그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고 신비하고 영험스런 신산(神山)을 태백산이라 이름 하고 성역으로 숭배해 온 것이다.


그후 우리 민족의 흥망성쇠와 분열에 따라 원래의 태백산인 백두산은 제 기능을 잃고 또다른 태백산이 파생되었다.민족은 분열되어도 풍습은 같아 남쪽으로 이동한 우리 민족(삼한)은 북쪽의 백두산과 지리적으로 비슷한 형태의 산을 찾아 태백산이라 이름하고 그 산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옛 풍습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그것이 지금의 태백시 소도동에 있는 태백산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천하의 명산이 삼한 땅에 많은 가운데 그 삼한의 경승은 동남쪽이 최상이요,또 그 동남의 가장 큰 덩치로는 태백산으로써 으뜸으로 친다.”고 이르니 말하자면,태백산은 삼한의 지붕이라는 뜻이다.“크게 밝은 산”이며“한밝뫼”라 일컫는 태백산은 그리하여 백두대간의 중추이자 모산이다.신라 때는 오악 가운데 북악으로 신성하게 여겨 제를 지냈다.단기 2471년(서기 138년) 일성왕이 몸소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이 산에서 발원하는 물이 낙동강과 한강을 이루고 삼척의 오십천이 되니 반도 이남의 모태가 되는 뿌리산이다.태백산의 산역(山域)은 약 700리로 북으로는 두타산 오대산까지 이어지고,동으로는 동해 바닷가까지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고치령을 거쳐 소백산에 닿아 있고,남쪽으로는 청량산 일월산까지 이어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수많은 산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있는 큰 산이다.고려 때 문장가 안축(安軸)은 태백산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12:38)


태백산에 올라

 

허공에 뛰어들어 안개 속에 파묻히니

더 오를 곳 없는 그곳이 정수리임을 알겠네

동그란 해는 머리 위에 나직하고

둘레의 뭇 산봉우리들이 눈 아래 내려앉네

구름따라 몸이 나르니 학의 등에 올라탄 듯

돌을 밟고 허공에 길이 걸렸으니 하늘 오르는 사다리인가

비 그치자 골짜기마다 시냇물이 흘러 넘쳐

오십천 구비구비를 맴돌아서 가이없네

 

 

[태백산 영봉(1,560.6m) 정상 빗돌을 중심으로]

 

태백산 빗돌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고 부쇠봉에서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등지고 대간팀이 섰다.동기들 뒤 왼쪽 산줄기가 부쇠봉 능선이며 그 세 번째 봉우리가 문수봉으로 정수리에는 수만 개의 흰빛을 내는 돌과 돌탑이 있어 장관이다.(12:39)

 

 

[태백 영봉에서 문수봉을 등지고]

 

태백산 영봉에서 우리가 지나온 산줄기를 바라본다.사진 왼쪽에서 뻗어나간 산줄기가 부쇠봉에서 옛 천령을 따라 깃대배기봉에 이르는 능선이다.(12:40)

 

 

[태백 영봉에서 뒤돌아본 대간마루금]

 

영봉에서 카메라의 각도를 조금 오른쪽으로 옮겨 구룡산과 천평(川坪) 일원을 바라본다.사진 오른쪽 골짜기가 허옇게 드러난 곳이 공군 폭격훈련장이다.폭탄 투하로 산정과 협곡이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맨땅이 그대로 드러났다.지난 79년 건설된 이곳은 태백산에서 남쪽의 구룡산(1,345.4m까지 백두대간을 따라 능선 서북쪽 계곡을 포함하는 지역이다.이곳이 바로 천평마을(영월군 상동면)이다.오늘은 일요일이라 미공군 폭격기의 굉음을 들을 수 없었다.하지만 평일에는 폭격훈련이 재개돼 지축을 뒤흔드는 폭탄세례로 자연생태계 파괴는 물론,민족의 영산 태백산의 정기는 깡그리 말살되고 있다.


천평은 예부터 정감록의 무대로 터잡고 살던 씨족은 없고 항상 주민들이 들고나며 살았던 곳이다.시절이 어수선하면 이곳으로 몰려와 살았고 세상이 좀 나아진 듯하면 곧 고향으로 돌아가곤 했다.구한말에는 동학교도와 의병,우국지사가 이 땅으로들어와 신분을 숨기고 살았고 관리의 횡포와 과중한 세금을 피해 ?겨온 양민들이 보따리를 푼곳이다.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허물어진 천제단을 다시 쌓고 독립기원제를 지냈다.잠시 머무는 땅 천평에 그래도 뿌리를 내리려던 그들은 1979년 이곳에 공군부대의 전투기 사격연습장을 만들게 되면서 정든 땅을 버리고 떠나갔다.

 

전하는 말로는,천평 땅을 떠난 사람들은 몇 년 안에 수십명이 죽었다고 한다.오염되지 않는 물과 공기를 마시며 바깥 세상과 동떨어져 있던 천평 사람들은 외지로 나가자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적응이 되지 않고 모든 병원체에 면역력이 약해 하나하나 죽어간 듯하다.약초를 캐며 살아가던 그들은 나중에는 고랭지채소도 심었으며 천평의 독일 감자는 머리통만 했다고 한다.천평(川坪)은 내뜨리라고 하는데,시냇가에 작은 들이 펼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그러나 원래는 천평(天坪)이라고 했다.태백산 꼭대기에 길에 있을 때 천령(天嶺)이라 했고,천제단이 있는 태백산은 천산(天山)이며,그 아래에 있는 들은‘하늘들’즉 천평(天坪)인 것이다.(12:40)

 

 

[태백 영봉에서 바라본 구룡산과 천평 일원]

 

대간팀이 우리가 지나온 대간마루금을 뒤로 하고 태백산 영봉에 섰다.

 

[태백 영봉에서 대간마루를 등지고]

 

우리가 밟은 대간마루금을 돌아보고 이번에는 우리가 가야 할 대간을 바라본다.젊은 남여가 앉은 뒷쪽으로 뾰족한 바위 봉우리(1,184m)가 유일사 뒷산으로 대간은 이 봉우리의 능선을 따라 오른쪽(북동)으로 휘어져나간다.(12:40)

 

 

[태백 영봉에서 유일사 일원 바라보기]

 

태백산 영봉에 있는 제단으로 둘레 27m,폭 8.26m,높이 약 3m이며 약간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녹니편마암의 자연석으로 쌓여 있는데,윗쪽은 원형이고 아랫쪽은 사각형이다.단군조선시대 구을(丘乙) 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 제단은 1991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다.상고시대부터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으로 단군조선시대에는 남태백산으로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고,삼한시대에는 천군이 주재하며 천제를 올린 곳이다.신라 초에는 박혁거세가 제를 올렸고,그 뒤 일성왕이 몸소 천제를 지냈으며 기림왕은 춘천에서 망제(望祭)를 올렸다.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방백수령(方伯守令)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으며,구한말에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우국지사들이 천제를 올렸다.일제 때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올린 성스런 제단이다.지금도 천제의 유풍은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


대간팀이 천제단으로 들어가자 한 여인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보살처럼 차려 입었으나 무녀(巫女)처럼 보였다.그녀는 제단에 술을 올려놓고 묵직한 실타래 마디를 돌려가며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우리가 곁에 있음을 느낀 그녀는 서둘러 기도를 끝내고 제단을 빠져나갔다.우리 차례다.제단에 제물을 올린 다음,술을 붓고 제례에 들어갔다.그러자 주위에는 50대 부부와 산행객들이 몰려와 삽시간에 천제단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전기환 동기가 제문을 읽어내려간다.“유세차 단기 4337년 10월 31일,이일산우회 백두대간 종주팀은 하느님께 엎드려 고합니다.평소 보살펴주신 은덕으로 저희 종주팀은 우리 산줄기를 따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아무 탈 없이 종주를 하고 있습니다.지난 해 6월,지리산 천왕봉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오늘 민족의 영산,태백산에 이르렀습니다.삼한 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유서깊은 천제단에 서니 실로 감회가 새롭습니다.태백은 백두의 다른 이름이며,우리 민족의 고유한 신앙과 믿음이 무르녹아 있는 곳입니다.백두에 천지가 있다면 태백에는 황지라는 천황이 있습니다.그리고 반세기 넘게 방방곡곡 우리의 구들장을 달구어 왔으니 태백은 불의 도시입니다.이렇게 물과 불의 도시,태백에서 종주팀은 지나온 우리 산줄기를 되돌아봅니다.때로는 힘 들어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우리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하지만 앞으로 더 밟아야 할 산줄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그러므로 하느님이시여,우리에게 남은 대간을 무사히 완주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고,언젠가는 우리의 발걸음으로 북녘의 백두대간을 밟아 모든 산의 조종(祖宗)인 백두산에 오를 수 있는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생략)”기환이가 낭랑한 목소리로 제문을 읽어내려가자 전기에 감전된 듯 북받치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다.주위에 서 있던 참배객들도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다 함께 기도를 했다.우리는 차례대로 술을 따르고 하늘에 3배를 한 뒤 제례를 마쳤다.(12:41)

 

 

[태백 영봉에서 천제단을 배경으로]

 

12시 41분,천제단을 떠나 장군봉으로 간다.천제단을 내려와 잘룩이에 이르니 수 백년 된듯한 주목이 나타난다.그 주목은 제 몸통을 비워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고 있다.반은 죽었고 반은 아직도 살아 있으니 여느 주목(珠木)과 달리 주목(注目)을 받을 만큼 그 모습에 경외감이 느껴진다.나는 주목을 배경으로 친구들을 차례대로 찍어나갔다.친구들은 "모델료도 주지 않으면서 사진만 찍는다."고 성화가 대단했다.이 사진 가운데서 가장 잘 찍힌 한 컷트만 홈피에 올릴 것이라 하니 "그러면 그렇치."하며 다들 피익 웃는다.(12:59)

 

 

[장군봉 가는 길,반생반사(半生半死)의 주목을 등진 기환]

 

 

[귀공자 풍모의 익수]

 

 

[중앙동 신사요,뚝심의 사나이,금구]

 

 

[늘 선두에 서는 강인한 체력의 재화]

 

 

[반생반사(半生半死)의 주목을 등진 현기]

 

장군봉은 천제단이 있는 영봉에서 북쪽으로 약 300미터 지점에 있는 해발 1,568미터의 산으로 태백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장군봉 정상에는 장군단이라는 사각형의 제단이 있다.자연석 규암을 대충 깨내어 쌓은 장군단은 가로 4m,새로 약 8m,높이 3m 가량의 직사각형 제단이다.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으나 치우천황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천제단과 무관치 않은 제단이다.천제단과 함께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어 있다.(13:04)

 

 

[태백산 장군봉에서 장군단을 등지고]

 

장군봉을 뒤로 하고 하산길에 들었다.유일사매표소로 내려가는 돌계단 길은 좀은 성가신 길이었다.하산길 곳곳에 크고 작은 주목이 많아 주목을 보는 재미로 하산길을 재촉했다.태백산 일원에 있는 주목은 모두 관리번호를 붙여 주목의 상태를 확인하고 보호하고 있었고 주목군락지에는 철조망을 쳐 놓아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더러는 몸이 잘려진 부분을 덕지덕지 시멘트 따위의 보형물을 채워 넣어 임시 몸통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1시 48분 유일사 갈림길에 다다랐다.왼쪽 길로 빠지면 유일사로 내려가는 길이다.우리는 매점을 건너 작은 봉우리로 올라간다.봉우리에 올라서면서 길은 아늑하고 부드러웠다.대간 길에는 산죽이 나오고 2시 18분,다시 잘룩이 갈림길로 내려섰다.왼편은 유일사 하산길,오른편은 유일사매표소 하산길이다.우리는 곧장 직진한다.장군봉에서 바라보던 뾰족한 암봉의 능선길인데,전혀 기암절벽이나 암릉은 보이지 않았다.대간 길은 너무 아늑하고 조용하다.다시 1,174봉의 암봉에 올라선 뒤,하산길에 접어들자 산길은 넓어지며 2시 35분,새길재 산령각에 다다랐다.

 

해발 1,140미터의 새길재는 혈리에서 천평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흔히 새길령으로 부르며 신로치(新路峙),사길치(四吉峙),서길령(瑞吉嶺)으로 적고 있다.이 고갯길은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통하는 큰 길로서 옛날에는 교통의 요로(要路)였다.신라 때에는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태백산 정상으로 해서 산마루로 나 있는 천령(天嶺) 길로 다녔다.그러나 그길이 불편하여 고려 때 새로이 길을 뚫었는데 지금의 새길재이다.소도당골 어귀에 원(院)을 설치하고 새길재를 넘어온 사람들을 쉬어가게 하였다.

 

옛 천령 대신 새로 길을 열었다 하여 새길이라 하고 새길재라 했다.새길재에 있는 산령각도 보부상들이 지어놓은 것이다. "태백산 산령각"이라 현판에 씌여 있는데,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기리는 제각으로 단종은 죽어서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 한다.

(14:31)

 

[새길재에서 산령각(山靈閣)을 배경으로]

 

새길재 산령각을 뒤로 하고 새길재매표소로 내려오는 길은 차량이 다닐 만큼 넓었다. 재화와 나는 선두에 서서 새길재 매표소로 내려오다 이깔나무 숲에 다다랐다. 이깔나무 숲 사이로 늦가을 오후의 황금빛 햇살이 쏟아진다.그 황금빛 숲을 배경으로 선 재화를 한 컷트 한다.(14:37)

 

 

[새길재 매표소로 내려가다 이깔나무 숲을 배경으로 선 재화]

 

이깔나무 숲에 드는 황금빛 햇살이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재화를 카메라에 담고 2시 39분,새길재 매표소로 내려오니 배추밭이 앞길을 가로막는다.대간 길은 배추밭 왼편 가장자리로 해서 1,019봉을 넘어간다.그 봉우리를 넘어서자 2시 45분,오늘 구간의 날머리인 화방재(936m)에 다다랐다.

 

 

[종주날머리 화방재(花房嶺 936m)에 다다라]

 

태백시 혈리에서 영월군 어평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인 화방재는 31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흔히 어평재라고도 하는 이 고갯마루 부근에 함박꽃(산목련)이 무성해서 꽃방석재라고도 부른다.다음 구간 종주들머리는 사진에 보이는 푸른색 민가 오른편으로 대간 길이 열려 있다.(14:51) 

 

[종주정보]

 

*차량:한국자유총연맹 청룡.노포동지부 안성수 부장
*종주시간/거리 및 지점

03:08 도래기재(775m/88번 지방도)...0.63km...03:30 910봉(동->북동)...03:42 임도(900m)....03:45 950봉...0.87km...03;53-03:58 1,020봉(북->북동)...1,030봉...0.75km...1,049봉(북동->동)...0.35km...04:16 1,060봉(헬기장)...0.75km....04:32 960m 잘룩이(임도)...1.0km...05:05-05:15 1,256봉(북->동)...0.65km...05:27-05:38 구룡산(1,344m/삼각점 동->동남)...1.15km...06:00 고직령(1,200m)...0.35km...1,231봉...1,220봉...1,200봉...06:20 1,090m 잘룩이...1,100봉...1,140봉...1.35km...06:34-06:45 곰넘이재(1,120m)....07:00-07:08 1,170봉(헬기장)....0.75km...1,210봉...1,180봉(동->북)...1.2km....07:35-07:50 신선봉(1,290m,북북동->남동)...1,223봉...1,180봉...1.0km....08:15 1,178봉....1,154봉...1.0km....08:45 1,226봉(북서->북동/남->각화산,차돌배기)...1,209봉....1,160m 잘룩이...1.3km...1,173봉...1,132봉...09:24 1,070m 잘룩이...1.05km...09:42-09:54 1,192봉...1,274봉...0.8km...10:16-10:25 백연봉(또는 깃대배기봉,1,345m,남서->북/동남->두리봉,청옥산)...10:40 1,368봉...1,358봉...1.2km...1,353봉...1,352봉.....11:00-11:42 점심 1,420봉....11:52 1,450봉....1.25km...1,459봉...1,480m 지점(직진->부쇠봉/왼쪽 허릿길-지름길)...12:20 1,500m 지점(지름길 만남)...0.5km...12:30-12:50 태백산 영봉 천제단,560.6m)...0.25km...13:38 태백산 장군봉 장군단(1,567m)...1.3km....13:48 유일사 갈림길(1,250m)...1,279봉...1,160봉...1.25km...1,184봉....1,150m 잘룩이...14:20 1,196봉...0.5km...14:25 새길재(산령각 1,140m)...1,019봉...0.9km...14:42 화방재(어평재,936m/31번 국도)

*도상거리:23.6km
*종주시간:11시간 34분(산행시간:9시간 10분,휴식시간 2시간 2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