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연화봉-비로봉-국망봉-상월산-마당치-고치령(2004.10.10)
10월 3일 예정된 백두23차 종주가 1주일 순연되었다.종주를 이틀 앞둔 9월 30일,전기환 동기의 부친께서 갑작스레 별세했기 때문이었다.백두대간 종주팀은 혜성병원 영안실에 들러 삼가 조의를 표하며 슬픔에 잠긴 기환이 부부를 위로했다.그리고는 10월 2일 아침,영락공원에서 선친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그렇다고 10월 3일 일요일 집에만 박혀 있을 수 없는 일.우리는 지난 3월 7일,강진 덕룡산 산행에 이어 주작산으로 달려 갔다.그때 남도의 짱뚱어 맛에 반한 동기들은 "짱뚱어회"를 입버릇처럼 외치며 벼르곤 했는데 마침내 강진행을 결행한 것이다.점심 때 강진의 동해회관에 들러 짱뚱어회와 전골을 시켜 먹고 소주 4병을 순식간에 비웠다.
강진군 북일면에서 해남으로 넘어가는 오소재 산행들머리에서부터 작천소령까지 5.4km의 주작능선 산행은 흡사 주작이 날개를 펼친 것처럼 암릉이 이어져 숨돌릴 틈마저 없는 박진감과 스릴,아기자기함이 넘쳐 흘렀다.덕룡산 산행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재미 있고 험준한 3시간 반 동안의 바윗길 오르내리기였다.산행을 마치고는 강진군 병영면에 있는 설성식당의 별미,한 상에 20,000원하는 백반을 먹었다.아주 유쾌하고 멋진 산행이요.나들이였다.
10월 10일 새벽 3시경,우리는 중앙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어두컴컴한 영주시 풍기읍(豊基邑)으로 스며들었다.소백산 아래 기쁨의 도량,희방사와 인삼과 천하승지 금계동을 품었다는 경상도의 첫 고을 풍기는 한적한 산읍(山邑)이다.풍기읍을 등지고 죽령 길을 오르면 금세 소백산이다.
참으로 높고 크되 저 홀로 존귀하지 않고 그저 아래위로 멀리 덕을 펼쳐 거느리는 산,격암 남사고가 그야말로“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하여 넙죽 절을 하고 갔다는 바로 그 산 소백산,백두대간이 태백산을 지나면서 문득 서해를 향해 말머리를 돌려 내룩으로 행하다가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곳이 저 장엄한 소백의 연봉들이다.
일찍이 조선시대에는 영남좌도 일원의 크고 작은 고을들이 그 소백산에 기대어 죽령으로 한양길을 삼았다.삼국사기에는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에 죽죽이라는 신라인이 처음 고갯길을 열었다 하였다.문경의 하늘재(서기156)에 이어 두번째로 개척된 고갯길이 바로 죽령이다.고개 나이 무려 1천8백살이 넘었다.
죽령이 시작되는 풍기의 수철리(水鐵里).죽령 옛길 표지판을 지나 구불텅거리는 도로를 따라 죽령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새벽 3시였다.그러나 우리는 아침 식사도 부족할 뿐더러 점심도시락마저 변변치 않아 차머리를 돌려 다시 풍기읍으로 내려갔다.풍기역 근처 편의점에서 충무김밥,족발집에서 족발을 산 뒤 죽령으로 돌아왔다.사진은 소백산 천문대로 오르는 들목에선 종주팀의 모습이다.모처럼 이재화 총무가 대간에 합류했다.
백두대간 23구간 끊어타기는 바람과 단풍과 구릉의 종주였다.이번 구간은 소백산에 떠도는 바람과 상월봉에서 고치령에 이르는 대간 길의 단풍,그리고 소백산 주능선의 묏부리를 연결하는 구릉으로 특징지울 수 있을 것이다.(04:12)
[소백산 천문대에서 뒤돌아본 도솔봉]
김익수의 카스타를 단양 쪽 기념품 가게 곁에 주차시키고 새벽 4시 12분,천문대로 오르는 시멘트포장도로를 걸어오른다.조금 오르니 소백산 국립공원 매표소가 나오고 갑자기 외등이 켜진다.이 시간에도 매표소에는 직원이 잠을 자지 않고 산행객의 출입을 확인하고 있었다.우리는 입장료 9,600원(한 사람 당 1,600원)을 내고 다시 시멘트도로를 걸어오른다.
매표소 근처에 죽령 산신당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두워서 확인할 길이 없었다.죽령 산신당은 본래 단양군 용부원리 매바우 건너편에 있는데,지난번 종주 때,기념품 가게 할머니 이야기로는 매표소 근처에 또 다른 산신당이 있다는 이야기였다.죽령 산신은‘다자구’할머니다.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죽령에는“나라에서 지내는 제사(國行祭)”가 있었다고 단양군 민속조사보고서에 적혀 있다.지금의 죽령사(竹嶺祠)를 짓고 산신제의 틀을 갖춘 것은 대략 조선 중기로 보이는데 이때 등장하는 산신이 다자구할머니다.
산적에게 두 아들을 잃은 한 노파가 있었다.노파는 죽령의 산적을 잡는데 번번이 실를 거듭하던 토벌군과 미리 짜고 산적굴에 들어갔다.‘들자구야’는 기다리라는 신호였고‘다자구야’는 공격 신호였다.산적에게는 이름이 들자구와 다자구인 두 아들을 찾는다고 둘러댄 터였다.마침내 산적이 모두 술에 취해 잠든 사이 노파의‘다자구야’소리를 신호로 토벌군이 들이닥쳐 산적을 섬멸했다. 훗날 나라에서는 죽어 산신이 되었다는‘다자구’할머니를 기려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천문대 오르는 시멘트 포장도로는 대간마루 왼쪽 비탈을 요리조리 헤집고 오른다.흙길도 아닌 세멘트 포장도로를 걸어오르기란 여간 짜증스러운 게 아니었다.4시 58분,대간마루와 포장도로가 만나는 전망대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고 다시 발품을 팔아 오른다.여기서부터 송신소입구까지는 가파른 오르막길.드디어 5시 29분,찬바람이 몰아치는 송신소 입구에 다다랐다.이제부터는 평탄한 길로 고생끝이었다.
헌데 재화가 이쯤에서 하산을 하겠다고 한다.지난번 주작산 산행 때도 오른쪽 발 모지구에 통증을 호소하더니 이번에는 도저히 종주를 못하겠다며 현기한테 차 열쇠를 내놓으라고 한다.그러더니 재화는 기사노릇이나 하겠다며 고치령에서 보자고 완강하게 버틴다.재화의 결정이 어찌나 단호한지 우리는 순순히 열쇠와 소백산 일원의 지도를 건네주었다.웬만해선 종주를 포기할 재화가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아쉽지만 재화를 내려보내고 송신소 입구에서 왼쪽으로 열린 포장도로를 따라 간다.
제2연화봉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송신소는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왼쪽 산허릿길을 돌아 천문대로 가야 한다.5시 41분,제2연화봉과 시멘트 포장도로가 만나는 지점을 지나 6시 10분,천체관측소인 천문대에 다다랐다.천문대 건물 현관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연화봉으로 오르기에 앞서 주변 경관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에 보이는 제3선이 죽령 너머 지난 구간 최고봉이자 소백산 마주보기 도솔봉(1,315.6m)의 장중한 능선이며 제2선은 제2연화봉에서 죽령으로 내리뻗은 대간마루다.(06:34)
[소백산 천문대를 등지고]
소백은 바람이다.바람이 유별난 산이다.언제 어느 때 찾아도 지독한 바람이 불어온다.특히 겨울철의 바람은 말로 이를 수 없을 만큼 세찬 강풍이 몰아친다.그래서 소백산에서는 한 자리에 오래 서 있을 수가 없다.체감온도는 삽시간에 내려가고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소백 주능선에는 숲이 없는 탓에 바람을 막을 아무 것도 없다.오늘도 천문대 현관에서 아침밥을 먹는데 예의 그 세찬 바람이 몰아쳐 순식간에 체온이 내려간다.천문대의 온도계는 7도를 가리키지만 체감온도는 3~4도 가량 될 듯했다.오버트라우저를 꺼내입었는데도 몸이 덜덜 떨린다.황급히 아침밥을 들고 건물을 빠져나와 양지녘에 서니 바람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견딜 만했다.최금구,전기환,김익수 그리고 김현기 동기가 첨성대 모양새의 천체관측소를 등지고 섰다.(06:39)
[소백산 천문대에서 도솔봉을 등지고]
이번에는 소백의 마주보기,도솔봉을 등지고 종주팀이 섰다.한겨울 옷차림새인데도 동기들의 얼굴에는 한기가 묻어나오고 있다.(06:40)
[연화봉(蓮花峰 1,383m)에 올라]
천문대에서 연화봉은 지척이다.5분가량 발품을 팔아 6시 45분 연화봉에 올라섰다.연화봉 정수리에 맴도는 소백의 바람은 더욱 거세져 사진을 찍는 내 몸을 흔들고 지나간다.몸이 휘청거린다.오! 소백의 바람이여.덕분에 걸음걸이는 예사로 빨라지는 게 아니었다.(06:49)
[연화봉에서 뒤돌아본 천문대와 제2연화봉]
맨 앞쪽 이슬람 사원처럼 보이는 건물이 천문대이다.그 뒷쪽에 높은 철탑 모양이 제2연화봉 정수리에 세워진 송신중계소 탑이다.그리고 그 오른편 멀리 솟은 봉우리가 도솔봉이다.(06:51)
[연화봉에서 바라본 제1연화봉과 비로봉,그리고 종주팀]
연화봉에서 도솔봉을 비롯 천문대와 제2연화봉의 송신소 중계탑을 찍는 사이 친구들은 벌써 연화봉을 내려선다.나는 저만치 내려가는 친구들을 불러 세우고 제1연화봉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소백의 장중한 능선을 카메라에 담았다.사진 맨 왼쪽 봉우리는 제1연화봉이며 맨 오른쪽 봉우리가 소백의 최고봉인 비로봉이다.(06:51)
[제1연화봉 가는 길에 바라본 단양군 천동리 일원]
[제1연화봉(1,394m) 가는 숲길]
제1연화봉으로 발품을 팔다 1,290봉을 오르는 대간팀이 단양군 천동리 일원의 산들을 굽어보고 있다.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멀리 충주호반과 주변의 산들에는 구름바다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07:15)
[1,290봉 오름길,단양의 천동리 일원을 보며]
1,290봉에 올라서니 제1연화봉이 우뚝 치솟았다.제1연화봉 오름길에는 등산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철제 데크가 설치되어 있었다.등산로를 따라 놓여진 철제 데크는 등산로가 패이고 무너져 내린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설치한 것이다.(07:18)
[1,290봉에서 바라본 제1연화봉 오름길 철제 데크]
제1연화봉 아래 잘룩이 숲속을 빠져나와 철제 데크를 딛고 제1연화봉 갈림목인 깔딱재에 올라섰다.여기서 풍기읍 삼가리 일원을 조망한다.소백산 능선에 올라서면 조망은 기가 찬다.어디를 굽어보든지 심원하고 장대한 계곡에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제1연화봉에서 동남쪽으로 열린 계곡도 그 가운데 하나다.
사진 윗쪽에 금계(金鷄) 저수지가 보인다.이 일대가 천하승지라는 금계동이며,금계저수지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질러진 금선정계곡이 제1연화봉 아래턱까지 이어진다.이 장대한 골짜기를 중심으로 오른쪽 제1선이 연화봉과 제1연화봉 사이의 능선이며,제2선은 연화봉에서 뻗어내린 지능선이다.이 두번째 능선 너머가 당골계곡이며 오른쪽에 보이는 제3선은 연화봉에서 금계호로 이어지는 능선이다.금계호가 바라뵈는 이 능선 위에 금계(金鷄)바위가 있다.제2선과 제3선이 만나는 일대가 풍기읍 삼가리이며,삼가리 매표소가 있다.삼가리매표소 왼쪽에 보이는 높은 봉우리는 원적봉(圓寂峰 961m)인데,소백산 비로봉에서 뻗어내린 능선이다.그리고 원적봉 바로 밑에 비로사가 자리잡고 있다.(07:25)
[제1연화봉 갈림목 깔딱재에서 굽어본 풍기읍 삼가리와 금계호]
제1연화봉 오르는 갈림목에서 풍기읍 삼가리와 금계저수지를 조망한 다음 카메라의 각도를 조금 오른쪽으로 옮긴다.제1연화봉 갈림목,깔딱재로 오르는 철제 데크에 현기와 익수가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친구들 둘레에는 단풍으로 물든 산자락이 황홀경을 이루고 있다.(07:26)
[제1연화봉 오름길 데크에서 다리쉼하는 종주팀]
[단양군 천동리 일원의 연봉]
대간은 제1연화봉을 거치지 않고 제1연화봉 오름길 갈림목인 깔딱재에서 1,382봉으로 이어져나간다.우리는 제1연화봉으로 오른다.제1연화봉 정수리(1,394.4m)에는 아무런 표지판도 안내판도 없었다.서너 개의 암릉만이 뾰족하게 돋아나 있었다.종주팀이 그 암릉에 걸터앉아 자세를 잡았다.(07:36)
[제1연화봉(1,394.4m) 암릉에 올라]
7시 42분까지 제1연화봉에서 다리쉼을 하며 주변 경관을 조망하고 비로봉으로 걸음을 옮긴다.깔딱재로 다시 내려선 다음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소백주릉을 카메라에 담았다.사진 앞쪽부터 1,382봉과 1,395봉 그 뒤에 1,409봉이 보이고 오른쪽 가장 높은 봉우리가 비로봉(1,439.5m)이다.(07:47)
[제1연화봉 하산길에 바라본 비로봉]
소백은 육산(肉山)이다.주릉선에서는 바위를 찾아보기 어렵다.여름철이 되면 광활한 능선은 초원으로 변모하고 가을이면 억새로 뒤덮여 황금물결로 춤을 춘다.1,382봉 하산길에 만난 기암은 그 모습이 특이하여 잠시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07:54)
[비로봉 가는 길,1,382봉 내리막길에 만난 기암]
1,382봉 내리막길에도 철제 데크가 설치되어 있었다.대간팀이 그 데크에 서서 1,395봉과 비로봉을 등지고 기념사진을 찍었다.(08:04)
[제1연화봉 하산길 데크에서 비로봉을 등지고]
8시 13분 1,395봉을 넘어서니 또다시 철제 데크가 나온다.사진은 1,409봉으로 닥아가다 뒤돌아본 대간마루금이다.사진 앞쪽 오른편에 보이는 봉우리가 제1연화봉이고,한가운데 봉우리는 연화봉이다.송신중계소 탑이 있는 제2연화봉이 아스라하게 보이고 연화봉 왼쪽 뒷편으로 도솔봉이 우뚝하다.(08:20)
[비로봉 가는 길에 만난 기암]
[1,395봉에서 비로봉으로 가면서 뒤돌아본 대간]
1,409봉을 넘어선다. 8시 30분,비로봉 아래에 있는 주목관리 감시초소인 대피소에 다다랐다.무인대피소인 이 감시초소에는 아무도 없었다.우리는 대피소에 들어가 9시 10분까지 아침 식사를 했다.비로봉으로 오르기 위해 대피소를 나온 대간팀을 주목관리 감시초소를 등지고 한 컷트했다.(09:16)
[주목관리 감시초소에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은 해발 1,439m 소백산 비로봉 서쪽 산비탈에 서식한다.수령 500여년이 넘는 주목 3,400여 그루가 무리를 이뤄 천연기념물 제244호로 지정되었다.그리고 주목군락 주변에는 마가목,백당나무,벚나무 따위가 자라고 있어 그 휘귀성과 생태적 가치가 높아 충북은‘자연환경명소 10걸’로 지정했다.사진에 보이는 단풍과 어울린 상록수가 살아 있는 주목이며 그 앞쪽에는 죽은 주목이 살아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웅혼한 기상을 떨치며 서 있다.(09:21)
[비로봉 오름길에 뒤돌아본 주목과 단풍]
주목관리 감시초소를 뒤로 하고 비로봉으로 오른다.비로봉 오르막 왼편으로는 주목군락을 보호하기 위해 철책이 처져 있다.마침내 9시 23분,소백산의 최고봉 비로봉(1,439.5m)올라섰다.
소백의 세 봉우리는 바로,비로,국망,연화다.소백의 큰 줄기들이 모두 이 셋에서 비롯되고 가지쳐 나간다.그 가운데 제일봉이 비로봉이다.북북서로 한 자락을 도담삼봉에 뻗치고,남동으로는 원적봉을 거쳐 풍기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어 홑산인 소백에 깊음을 준다.동쪽의 선달산(先達山 1,236m)에서 백두대간의 내림을 받은 국망봉(國望峰 1,420.8m)은 북서로 구인사와 온달성 품은 신선봉(1,272m)을 뻗었고,남동으로는 늦트재 넘어 순흥고을을 에워쌓다.날개처럼 펼쳐진 주릉은 북쪽의 단양과 남쪽의 영주로 3개씩의 가지를 갈래쳐서 여섯 계곡을 만들었다.이 계곡들이 바로 소백의 등산로가 된다.
영주 쪽에는 희방골,삼가동계곡과 죽계구곡이 있고,단양 쪽에는 천동,어의,성골계곡이 있다.능선길로는 죽령에서 시작하는 주릉과 어의계곡의 을전마을 뒷쪽 능선,신선봉에서 구인사로 향하는 능선이 있다.계곡 입구에서 시작하여 주릉에 올라서는데는 모두 2~3시간쯤 걸린다.가장 서쪽의 희방사골이 주릉과 만나는 1,389봉에서 비로봉까지는 2시간,동쪽의 죽계계곡이 주릉과 만나는 국망봉에서 비로봉까지는 1시간 30분 거리이므로 소백산을 넘는 등산은 대체로 4~6시간이 걸린다.
충북의 단양군과 경북의 영주시를 가르며 죽령에서 고치령까지 60리에 이르는 소백산은 온화하고 여유로워서 주름치마 같은 골짜기마다 사람들을 포실하게 키워준다.비로봉 정상 빗돌 뒷편에는 서거정(徐居正)의 시“소백산”이 각인되어 있다.(09:28)
태백산에 뻗어나온 소백산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았네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소백의 최고봉 비로봉(毘盧峰)에 올라]
비로봉에서 북동쪽에 있는 국망봉을 등지고 종주팀이 기념사진을 찍었다.(09:31)
[소백산 비로봉에서 국망봉을 등지고]
비로봉에서 국망봉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밟은 대간을 등지고 기념사진을 찍었다.앞쪽에 주목관리 감시초소 건물이 있는 봉우리가 1,409봉이며,그 뒤에 1,395봉에서 대간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1,382봉,제1연화봉으로 이어진다.제1연화봉에서 대간은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송신중계소 탑이 있는 제2연화봉으로 이어진다.(09:39)
[비로봉에서 대간을 등지고]
[비로봉에서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대간 길]
9시 39분까지 비로봉에서 머물다 국망봉으로 하산한다.그 내리막 대간 길 오른편 비탈에 선 거대한 기암을 만났다.(09:42)
[비로봉 하산길에 기암을 등지고]
비로봉에서 대간은 거의 북진하다가 450미터쯤 가면 북동으로 방향을 틀면서 가파른 내리막길이 민백기재(1,410m)까지 이어진다.이 내리막 비탈에서 앞의 사진에서 본 기암을 만나게 되었다.기암을 지나 9시 47분 민배기재에 다다랐다.민배기재를 지나면서 군데군데 암릉이 나타나지만 대간은 이들을 돌아나간다.10시 16분,커다란 암봉을 지나 10시 25분,사스래나무가 있는 숲속에 들어섰다.
자작나무류에 속하는 사스래나무의 흰빛 수피가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참으로 아름답다.자작나무와 마찬가지로 사스래나무의 수피도 껍질이 종이장처럼 벗겨진다.러시아 문학하면 떠오르는 자작나무,너무 신비롭고 아름다워 자작나무의 숲에선 신들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그 자작나무의 수피가 흰빛인 이유는 무엇일까?.극지방에 가면 고산일수록 태양광선이 아주 강하여 수피에 피해를 줄 수 있으므로 수피를 희게 하면 강력한 햇빛을 반사하여 나무가 받을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높은 산에 서식하는 사스래나무는 1년 가운데 성장에 필요한 기간이 90일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라는 식물이겠는가.(10:27)
비로봉 하산길에 만난 사스래나무]
이제 국망봉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 다다랐다.비로봉에서 우리가 밟은 대간을 뒤돌아본다.이 구간은 소백의 주릉(제2연화봉~연화봉~제1연화봉~비로봉~국망봉~상월봉)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손꼽히는 곳이다.소백의 진수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소잔등 같은 주능선에 암릉과 암봉이 지루함을 덜어주고 품이 넓은 산자락과 계곡은 우리의 마음마저 넉넉하게 해준다.그리고 봄이 되면 기화요초가 피어나고,여름이면 천상의 화원으로 탈바꿈하고 가을이 오면 억새와 단풍으로 온 산이 물들고 겨울에는 설원으로 바뀐다.그러므로 어느 계절에 이곳을 찾더라도 제각기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10:40)
[국망봉 오름길에 뒤돌아본 대간과 비로봉]
[국망봉 능선에 올라 바라본 상월산]
국망봉 아래 철제 데크를 오르는 종주팀-커다란 암릉이 하늘선을 가르는 그곳이 바로 국망봉인데....(10.10:44)
[국망봉 정상 데크를 오르는 금구와 현기]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의 경계를 이루는 국망봉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신라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은 천년사직을 왕건에게 넘기고 백성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명산대찰을 찾아 제원군 백운면 방학리 궁뜰에 동경저(東京邸)라는 궁을 짓고 머물렀다.마의태자 왕자는 신라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엄동설한에도 베옷 한 벌만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소백산으로 들어와 이 봉우리에 올라 멀리 옛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하여 국망봉(國望峰)이라 일컫었다고 단양군지와 호서읍지는 전한다.
그리고 풍기읍지에는,“명종 1년 배순이라는 사람이 순흥배점에 와서 대장간을 열고 질 좋은 철물을 만들어서 양심껏 소비자에게 공급하였다.행실이 착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조상을 모시는 정성이 극진하여 퇴계가 불러‘과연 듣던 바와 같다.’고 칭찬했다고 한다.그 뒤 퇴계가 세상을 뜨자 철물로 상을 만들고 3년복을 입었으며,선조가 승하하자 매월 삭망(朔望)에 정성을 들여 장만한 음식을 들고 뒷산에 올라 북쪽 궁성을 향해 곡제사(哭祭祀)를 3년 동안 지냈다.그 슬픈 소리가 궁안에까지 들리게 되어 나라에서 정여(旌閭)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당시 그가 음식을 들고 올라와 궁성을 바라보며 곡을 했다는 산을 국망봉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또 다른 이야기로는 고려 공민왕 때 이의(李議)가 선왕을 경조하는 4배를 올렸다고 해서 그 산 정상을 국망봉이라 불렀다고 한다.(10:50)
[국망봉(國望峰) 정상 빗돌과 함께]
국망봉 정수리 양지 바른 곳에서 10시 45분에서 11시 10분까지 점심을 들고 상월봉으로 떠난다.국망봉(1,430.m)에서 상월봉(1,396m)까지 거리는 약 750미터-이 구간에는 고원지대의 특징 그대로 안은뱅이 철쭉에다 억새,그리고 수리취,엉겅퀴 따위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5분가량 발품을 팔자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 벌바위로 내려가는 하산길을 만났다.그렇게 심하게 불던 바람도 다소 기세가 누그러지고 뜨거운 햇빛이 내려쬔다.상월봉으로 닥아가면서 상월봉 정상 9부 능선에 돋올하게 솟은 희한한 모양의 바위가 시선을 끌어당긴다.그 생김새는 주먹을 불끈 쥔 것 같기도 하고,거대한 버섯이 삐죽 돋아난 듯하기도 하다. 이 바위가 바로 상월각자(上月刻字)가 각인 되어 있다는 그 유명한 바위다.신선봉 너머 9봉 8문(九峰八門)으로 이름난 천태종 총본산,구인사의 창건주인 상월조사를 기리기 위해 이 바위에 "상월불(上月佛)"이란 각자가 새겨져 있다.(11:27)
[상월봉(上月峰 1,396m)을 등지고]
11시 29분,상월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에 다다르니 상월봉 직등길과 왼쪽으로 돌아오르는 길로 나뉜다.우리는 마당히 상월봉 직등길을 걸어오른다.잠시 뒤 갈림길을 만나“상월불(上月佛)”각자가 새겨진 상월암에 이르렀지만 바위를 오를 수는 없었다.다시 오름길을 따라 11시 33분,상월봉 정수리(1,396m)에 올라섰다.그곳에서 우리가 가야 할 대간을 훑어본다.상월봉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트는 봉우리가 대간분기봉(1,265m)이며,대간은 거기서 오른쪽 산줄기를 따르게 된다.이 대간분기봉에서 북쪽으로 가지친 지능과 저멀리 하늘금을 가로지르는 신선봉(1,389m) 능선과 만난다.신선봉은 그 옛날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봉우리로 지금도 바둑판바위가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신선봉에서 왼쪽 봉우리를 따르면 민봉을 거쳐 9봉8문(九峰八門)으로 유명한 구인사로 하산하게 된다.소백산의 지맥이 아홉 개의 봉우리를 이루면서 그들 사이사이의 골짜기가 여덟 개의 문으로 되어 있어서 절경을 이루고 있다.전하는 말로는,불제자가 이곳을 법문으로 오인하여 그곳에 오르려고 애를 쓴 곳이라 하여“법월팔문”이라고도 한다.구봉팔문 중의 4봉에서 우뚝 솟은 영주봉(수리봉)의 정상엔 구인사 초대 종정,상월원각대조사의 묘소인 적멸궁이 있는데,적멸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세계를 의미하며,풍수지리학상으로 세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이라 한다.
영춘면 남천리와 백자리 사이에서 시작하는“구봉팔문”은 2개면,5개리에 걸쳐 있는 자연의 신비함과 불교의 법문과 일치하는 매우 기이한 형상으로서 9개 봉우리에 8개 골짜기를 문에 비유하여 문마다 이름을 붙였다.매우 기이하고 인생을 살아 가는데,많은 교훈을 주는 자연형상이다.
첫째 봉우리를 아곡문봉,둘째 봉우리를 밤실문봉,셋째 봉우리를 여의생문봉,넷째 봉우리를 뒤시랭이문봉,다섯번째 봉우리를 덕평문봉, 여섯번째 봉우리를 곰절문봉,일곱번째 봉우리를 배골문봉,여덟번째 봉우리를 귀기문봉,마지막 아홉째 봉우리를 새밭문봉이라 하며,국망봉계곡에서 끝이 난다. 여덟문은 1문안을 아골문안골,2문안을 밤실문안골,3문안을 여의생문안골,4문안을 덕평문안골,5문안을 곰절문안골,6문안을 배골문안골,7문안을 귀기문안골이라고 하며,마지막 8문안을 새밭문안골이라 한다.“9봉”과“8문”이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자연의 형상을 9봉8문이라고 한다.9봉8문이 합하여 표대봉(1,066m)에 끝이 모여 저 신선봉으로 올라 마치 접는 부채꼴 모양을 이룬다.9봉 중의 곰절문봉을 중심으로 정확하게 한자의 팔자 모형을 이루고 있다.자연의 오묘함과 기이함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예부터 이곳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불교에 입문하여 득도를 목표로 해 법문을 오르려고 무수한 세월을 흘러 보내고,결국 법문에 오르지 못했다고 하여 그 힘과 정열을 쏟은 곳이라 해 법월팔문이라고도 한다.구인사 중창조사인 상월원각 대조사 박상월 스님은 9봉 8문을 올라,국망봉과 신선봉 사이에 "상월"이라고 새겨 놓아서 상월봉이라고 부르고 있다.옛날 불제자가 오르지 못한 법문을 상월스님이 넘었다.구인사 중창조사,상월조사 스님은 생전에 9봉8문과 법월팔문을 이렇게 풀이했다고 2대 종정 남대충 대종사가 후세에게 전했다.
[상월봉에서 바라본 신선봉과 대간마루금]
상월봉 정상에서 우리가 밟은 국망봉을 배경으로 동기들이 섰다.친구들 뒤로 뻗은 능선이 오른쪽 끄트머리의 국망봉으로 이어진다.(11:38)
[상월봉에서 국망봉을 등지고]
[상월봉에서 뒤돌아본 대간마루금]
상월봉에서 신선봉과 국망봉을 조망하고 11시 38분,하산한다.상월봉 내리막길은 제법 가팔랐다.10분 가량 발품을 팔자 갈림길이 나온다.대간 왼쪽 어의곡리 하산길이다.여기서부터 대간분기봉까지는 완연한 숲길이다.11시 58분 늦은맥이재(1,220m)에 다다른 뒤,3분뒤에는 대간분기봉인 1,265봉 갈림길에 올라섰다. 이 분기봉에서 직진(북서쪽)하면 신선봉으로 가게 되지만 대간은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북동진한다.이제부터는 주위를 전혀 조망할 수 없는 숲속이다.제2연화봉에서 상월봉에 이르는 대간길과 영 딴판으로 숲속에 갇힌다.사진은 신선봉 갈림길을 지나 대간 길에서 만난 단풍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12:17)
[신선봉 갈림길 지나 대간길의 단풍]
신선봉(1,265m)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 대간 길은 만산홍엽의 단풍천국이었다.사진에 보이는 단풍도 대간마루에 한껏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12:25)
연이은 단풍군락에 마음을 빼앗기며 발품을 판다.대간 길은 평탄하고 부드러워 걷기에는 그저그만이었다.1,170봉을 지나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넘어서서 우리는 점심을 들기에 좋은 바람 없는 곳을 찾는다.12시 20분,바람이 잠풍한 곳에 배낭을 부리고 점심을 들었다.오후 1시 12분,마당치로 가기 위해 대간 길을 잇는다.1시 20분,해묵은 헬기장이 있는 1,046봉을 지나 17분 뒤에는 1,060.6에 다다랐으나 삼각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이제 마당치로 가야 한다.
1시 50분,1,045봉을 지나 오른쪽 연화동으로 내려가는 갈림길(1,010m)에 다다르니 2명의 산꾼들이 쉬고 있었다.정말 뜻밖이었다.이 깊은 산중에서 산꾼들을 만나다니....그들은 뒤에 알았지만 고치령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신선봉을 다녀오는 산꾼들이었다.연화동 갈림길을 벗어나서 조금 가자 새롭게 단장한 헬기장이 있는 1,040봉에 이르렀다.이 봉우리를 내려서면서 대간은 1,020봉 오른편 허릿길을 돌아가더니 2시 4분,990봉에 다다른 뒤에는 봉우리를 오르지 않고 왼쪽 허릿길을 따라 돌아나간다.이제부터 대간 길은 북동진하며 거의 일직선 길이다.1,002봉을 지나면서 북동진하던 대간은 다시 오른쪽(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950m 잘룩이로 내려간다.이 잘룩이를 지나 조금 발품을 팔자 15명이 넘는 산꾼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아까 만난 산꾼들과 같은 일행이었다.우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그들을 지나친다.2시 40분,1,031.6봉에 다다라 삼각점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이곳에서 7분 가량 목을 축이며 다리쉼을 했다.그러는 사이 아까 만난 일행이 우리를 앞질러나간다.1,031.6봉에서 북진하던 대간은 크게 방향을 틀어 동진하다가 서서히 북동진한다.
3시 9분 마당치(馬堂峙 920m)에 다다르니 이정표가 서 있었다.새목 7.5km,형제봉 3.5km의 거릿수가 이졍표에 적혀 있었다.마당치는 고려 공민왕 때 군사를 훈련시키던 곳으로 제법터가 넓었다. 여기서 우리는 3시 14분까지 다리쉼을 했다.(15:15)
[마당치에 다다라 걸음을 멈추고]
3시 14분,마당치(920m)를 떠나 1,020봉으로 오른다.표고 100미터,도상거리 500미터를 치오른다.이제까지 편한 길을 걷다가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려니 땀이 흐른다.9분 가량 발품을 팔아 1,020봉에 올라섰다.3시 37분에는 형제봉 갈림길이며 칼바위가 있는 1,040봉에 다다랐다.이 봉우리에서 형제봉으로 가려면,오던 길 그대로 직진해야 하나 대간은 90도 오른쪽(동)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이곳에서 우리를 앞질러 간 산꾼들과 다시 만났다.이제 그들과 함께 고치령(770m)으로 내려간다.사진은 칼바위를 지나 대간 길에서 만난 단풍의 모습이다.갈색에다 노랑색,연노랑색,그리고 빨강색이 어울린 단풍과 그들 속에 있는 친구들마저 단풍 빛갈로 곱게 물들었다.(15:44)
[마당치에서 칼바위 가는 길의 화려한 단풍]
10분 가량 발품을 팔아 헬기장이 있는 990봉을 지난다.890m 잘룩이로 내려와 4시 868봉에 다다르니 갈림길이 나온다.대간은 868봉 날등을 타야 하나 오른쪽으로 산허릿길이 하나 열려 있다.우리와 만난 산꾼들은 절반은 대간마루를 타고 절반은 허릿길로 내려간다.우리는 868봉을 탄다.암릉인 868봉은 매우 가파르고 위험하기까지 했다.그러나 등산로는 바위 서리서리를 돌아 교묘하게 내려가고 있었다.먼지 푸서푸석 나는 암릉길을 내려서니 비로소 산허리를 돌아내려오는 그 갈림길과 만난다.4시 5분,금구와 나는 종주날머리인 고치령에 내려섰다.
그곳에는 몇 대의 차량이 보였다.재화가 차를 갖고 고치령에서 기다리고 있고 풍기의 개인택시 안벽수 씨도 보였다.그리고 막바지 대간 길을 함께 탄 그 산꾼들의 승합차도 있었다.7분 가량 기다리자 익수와 현기,기환이가 고치령 고갯마루로 내려섰다.
-고치령의 이름 내력으로는 딱히 알려진 바가 없다.다만 가까운 마을에는 공민왕의 대궐터 산성과 함께 어우러진 이야기가 전해온다.산성을 쌓을 적에 사람들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 돌이며 기와를 날랐는데 고치령(顧峙嶺)에서 돌아보니 그 꼬리가 미내치(尾乃峙)에 닿았다는 이야기다.자연스럽게 마당치(馬堂峙)는 군사를 훈련하던 곳이 되었다.아뭏튼 이지음에는 미내치(美乃峙)와 더불어 고치령(古峙嶺)도 쓰고 고치령(高峙嶺)도 쓴다.고개가 하염없이 높으니 그렇다는 얘기고 또한 그저 옛 고개이니 그렇다는 말이다.큰 산 태백과 소백은 그렇게 나뉜다.고치령에 이르러 마침내 태백은 끝이 나고 바야흐로 소백이 시작된다.소백산 자락에 들어선 부석사를 굳이 태백산 부석사로 쓰는 까닭도 여기에 뿌리를 두었다.고치령 고갯마루에는 태백 산신과 소백 산신을 함께 모신다.이곳 사람들은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을 태백 산신이라 믿고 남쪽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안동에서 죽은 금성대군을 소백 산신이라 믿는다.그들 조카와 삼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고개 고치령이 오죽이나 한스러웠으랴.지금도 정월 열나흗날이면 단양과 영주 사람들은 어김없이 산신제를 지내니 형과 삼촌 손에 죽은 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함이다.사진에 보이는 산신각은 2001년 5월 촛불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근자에 새로 지은 것이다.
영북(嶺北)의 영남,부석면 마락리-대간을 넘어간 경상도의 외로운 땅
산신당 고갯마루 남쪽의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북쪽의 물은 장차 한강에 닿지만 고개 너머는 아직도 경상도 땅이다.고치령으로 올라온 길의 두 배는 될 법한 내리막길 끝에 그렇게 외떨어진 경상도 마을이 하나 숨었으니 이름하여 마락리다.슬그머니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어와 한강수계에 터를 잡은 외로운 마을 마락리(馬落里).마을 앞 골짜기 말굽이 바위에서 순흥과 영월을 오가던 단종과 금성대군의 밀사가 탄 말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마락리를 따라 내려가면 충북 의풍에 다다르는데 의풍과 어깨를 맞닿은 부석면 남대리도 백두대간의 고개,마구령을 넘어온 경상도 땅.한강수계에 속하기로는 마락리나 남대리는 매양 같은 처지다.(16:15)
[태백 산신과 소백 산신이 만나는 고개-고치령 산신각을 등지고]
이번에는 산신각이 있는 앞쪽 언덕에 서 있는 태백천장(太白天將) 장승을 가운데 두고 종주팀이 기념사진을 찍었다.앞서 이야기 했지만 이 태백천장은 단종을 기리는 장승이다.태백장승 건너 도로 맞은편에는 금성대군을 기리는 장승,소백지장(小白地將)이 세워져 있다.
[고치령 태백천장 장승과 함께]
새벽녘에 제2연화봉 아래 송신소 입구에서 우리와 헤어진 산우회 총무 재화는 시멘트도로를 걸어내려 왔는데,사실 이 도로는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더 힘들었다고 한다.죽령고갯마루에 세워둔 찻 속에서 한잠을 자고 풍기읍으로 내려갔다.풍기에서 소백을 따라 태백을 바라보면 길은 바야흐로 소문도 자자한 부석사 길이다.절도 절이거니와 산천 또한 유별하고 기운이 비범하다.부석사 길에 걸린 마을은 순흥,단산,부석 3개 면이다.
본래 이들은 모두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를 따르던 마을이다.시절이 바뀌면서 영주군이 되었다가 다시 영풍군이 되었고 이제는 어엿한 영주시가 되었다.논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사과나 인삼 같은 밭작물로 목돈을 만지지만 한결같이 여두소읍(如斗小邑)이다.순흥의 소수서원과 요지음 한창 축제가 열리는 선비촌으로 갔다.선비촌에서는 타임머쉰을 타고 조선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선비들이 아침에 눈 뜨고 나서 배갯머리에 누을 때까지 하루 일과를 살펴보며 선비체험을 할 수 있게 해놓아 흥미로웠다.차를 몰아 무량수전으로 유명한 부석사로 들어갔다.그 장중한 땅기운에 실려 도량 중의 도량,부석사에서 시간을 보낸 다음 고치령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기회가 닿으면 부석사 일원을 찾을 것을 마음 속으로 다지며 우리는 풍기온천으로 갔다.2년 전에 문을 연 풍기온천은 유황온천으로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찾는 이들이 많았다.이날 우리는 넘쳐나는 사람 때문에 한참이나 차례를 기다려 입욕할 수 있었다.수질이 매끄럽고 부드러웠다.우리는 산행의 피로를 풀고,현기의 제안에 따라 풍기읍에 있는 삼계탕 집에서 인삼삼계탕을 들며 산행뒷풀이를 했다.인삼의 도시 풍기에서는 늘 인삼을 제일로 친다.인삼삼계탕,인삼갈비탕,인삼한우....인삼 자가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서는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소백의 넉넉한 품에 둘러쌓인 풍성한 터전 풍기(豊基)는 그리하여 이름 그대로 사람을 살리는 땅인지도 모를 일이다.(16:16)
[종주정보]
*차편:김익수 카스타
*종주시간/거리
04:12 죽령(700m)....850m 지점(죽령터널 위)...1.1km...920봉(대간+도로)...1,024봉...1.35km...04:54-04:58 1,144봉(전망대)...0.6km....05:29-05:32 송신소 입구(1,250m)...0.5km...제2연화봉(1,357.3m 삼각점) 왼쪽 시멘트포장도로 따라...05:48 1,230m 잘룩이...1,270봉...1,300봉...1.5km...06:10-06:30 1,320봉(천체관측소)...0.4km....06:45-06:50 연화봉(1,383m,전망대+삼각점)...07:16 1,260m 잘룩이...1,280봉...1,290봉...1,320......<1.6km>......07:27-07:42 제1연화봉(1,394.4m 삼각점)...1,340m 잘룩이...0.62km...07:55 1,382봉(삼각점)....1,330m 잘룩이...08:13 1,395봉...1.13km...08:25 1,409봉(대간분기봉)....08:30-09:10 주목관리 감시초소...0.75km...09:23-09:27소백산 비로봉(1,439.5m 삼각점)....09:47 민배기재(1,410m)...1.0km...1,290m 잘룩이...0.5km...10:16 1,328봉...1,390봉...1.5km...10:45-11:10 국망봉(1,430.8m 삼각점)...1,350m 잘룩이...0.75km...11:33-11:37 상월봉 (1,396m)...11:49 1,290m 잘룩이...1,300봉....11:58 늦은맥이재(1,220m)...1.25km...12:01 신선봉 갈림길(1,265m)...1,170m 잘룩이...12:30-13:12 1,130봉....2.0km...13:37 1,046봉...0.6km...1,060.6봉(삼각점)...1,045봉...13:50 연화동 갈림길(1,010m)...14:00 1,040봉...1,020봉...1.5km...14:04 1,002봉....950m 잘룩이...1,040봉...0.75km....14:40-14:47 1,031.6봉(삼각점)....990m 잘룩이....990봉(대간분기봉)....970봉..1.0km...15:09-15:14 마당치(920m)....1,020봉....0.75km...15:37 형제봉 갈림길/칼바위(1,040m)....890m 잘룩이(헬기장)....0.75km...15:57 868봉(암릉)...1.0km...16:05-16:12 고치령(770m)
*도상거리:22.9km
*종주시간:1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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