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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그리움으로 걷는 백두대간-19구간<이화령-새재-하늘재>(상)

[영남의 관문 이화령에서 종주를 마치고]

 

 

                             이화령-조령산-신선암봉-새재-마패봉-탄항산-하늘재(2004.8.1)

 

이화령~조령산~조령(새재)~마패봉~탄항산~하늘재에 이르는 도상거리 16.2km의 19구간 끊어타기는 백두대간 그 어느 곳보다도 지난날 역사의 애환이 흥건히 젖어 있어 가슴 설레게 하는 구간이다.백두대간의 유서깊은 고개 이화령을 비롯하여 새재와 하늘재를 차례로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새도 쉬어 넘는다."는 문경새재는 옛날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고갯길이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쭉 미끄러진다." 했으니 누가 이들 고개를 넘으려 했으랴. 반면 새재는'늘경사스러운 소식이 들려오는 행운의 과거길'이 되어 고을 이름마저'문경(聞慶)'이라 불려졌다.문경은 경상도 북쪽 울타리이자 관문이다.


백두대간이 문경을 지나면서 주흘산,조령산 같은 일 천 미터 안팎의 명산을 곳곳에 일으켜세워 영남과 기호지방을 갈라 놓았지만,사람들은 그 험난함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숲을 헤치고 바위를 깨뜨려 길을 개척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156년,문경 관음리에서 충주 미륵리로 넘어가는 하늘재(鷄立嶺)가 뚫렸다.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열린 고갯길이다.길은 문화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외침의 길목도 되어 그때부터 교통의 요충지인 문경 땅은 치열한 격전장으로 변하였다.누가 이 길목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삼국의 세력 판도가 바뀌었고,후삼국 쟁패기에는 왕건과 견훤이 서로 이곳을 차지하려고 수차례 출정을 단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새재(鳥嶺)가 열려 내국인은 물론,사신과 우마차들의 발길까지 묵묵히 받아내는 대동맥 구실을 하였다.그러나 1592년,신립(申砬) 장군이 새재를 막지 못하므로써 우리의 국토는 왜군의 말발굽에 처참하게 유린되어야만 했다.그렇게 하여 쌓은 것이 조령산성이다.하나로도 부족하여 세 겹으로 관문을 둘러쳤다.


문경 땅의 사람살이는 이처럼 길을 내고 그길목을 지켜온 사람들의 역사로 점철되었다.그러나 살을 베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이 빚어낸 무형의 문화유산이 없을 리 없다.길목 길목에는 지나간 사람들의 애환과 자취가 서려 있고 괴기한 전설과 민담도 돌멩이처럼 곳곳에 딩굴고 있다.문경을 지나는 백두대간의 청화산,대야산,희양산,조령산,주흘산,포암산,대미산,황장산 등은 듣기만 해도 산꾼들의 마음을 설레게하는 명산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화령을 넘어온 것을 "새재"를 넘어왔다고 말하지만 이화령과 새재는 다른 길이다.조선 초 새재가 국도로 뚫리면서 신라 때 개척된 하늘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영남대로(嶺南大路)의 500년영화를 누렸던 그 새재길도 1925년 이화령(548m)에 신작로가 닦이면서 그 수명을 마쳐야 했다.그런데 1977년,이화령 고갯길 밑으로 다시 이화령터널이 뚫리면서 한 세기동안 3번 국도의 애환을 몸으로 안았던 이화령 고갯길마저 더 이상 차들이 찾지 않는 옛길이 되었다.이처럼 길도 세월과 시대의 변천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것이다.

 

8월 1일(일) 새벽 3시,이일산우회 일행 4명은 전기환 동기의 승용차로 이화령 옛도로를 따라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빛나고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이화령휴게소 주차장에는 몇 대의 차량이 보였다.백두대간 종주팀을 지원하는 차량인 듯했다.우리는 1시간쯤 눈을 붙이고 새벽 4시 종주에 들어가려 했으나 잠이 오지 않은 바람에 3시 30분,종주를 밀어붙이기로 했다.경북 문경 쪽에 있는 이화령 경북도계비를 중심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뒤,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19구간 종주 첫걸음을 디뎠다.(03:36)

 

[조령샘의 시원한 물로 졸음을 씻고]

 

산불감시초소를 지나면서 대간 길은 왼쪽 산등성이로 곧장 올라서야 하나 우리는 평탄하게 열린 산허릿길을 따라간다.보름달이 휘영청 밝았지만 짙은 수림에 싸인 등산로는 어둡다.헤드랜턴에 불을 밝혀 오른다.이화령에서 우리보다 먼저 종주에 들어간 대간꾼들 5명의 랜턴 불빛이 산구비를 돌 때마다 얼핏얼핏 스쳐 지나간다.


이화령을 떠나 7분 뒤인 3시 43분,너덜지대를 거쳐 20분쯤 가자 산허릿길은 대간마루금과 합쳐지면서 이내 헬기장에 이른다.배낭을 헬기장에 벗어놓고 기환이가 가져온 자두로 요기를 한다.보름달이 떠올랐지만 주변 산세를 살피기엔 아직 이른 시각,디카로 그 보름달을 등진 친구들을 찍어보았으나 온통 검은색뿐이다.4시 20분,헬기장을 뒤로하고 조령샘으로 간다.조령샘 가는 길도 산허릿길이다.9분 가량 발품을 팔자 너덜길로 바뀐다.


4시 41분,조령샘에 다다랐다.1990년 6월 17일,문경군청산악회에서 정비한 조령샘은 일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그 어느 약수에 못지 않을 정도로 물맛도 좋다.등산객들이 쉬어가기 그만인 조령샘에서 우리도 잠시 다리쉼을 했다.(04:49) 

 

[조령산 정수리 빗돌을 중심으로]

 

5시 22분까지 조령산 정상에서 다리쉼을 한 다음,하산길이다.첫 잘룩이(960m)로 내려서는 길목에 전망바위가 나타나면서 조령산 최고의 절경이 눈 앞에 열렸다.아직 동이 트지 않아 푸른 이내가 온 산을 감싸고 있으나 눈 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우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진 제일 앞쪽에 검게 솟아오른 봉우리가 946봉이며,그 뒤쪽에 불끈 치솟은 암봉은 바위꾼들이 즐겨 찾는 신선암봉(937m)이다.신선암봉 오른쪽으로 날카롭게 솟은 봉우리는 치마바위봉(928m)이며 그 뒤쪽에 암봉인 깃대봉이 수줍은 듯 얼굴을 내밀고 그 너머로 신선봉과 마패봉이 하늘금을 갈랐다.이 천하의 절경을 음미하면서 오늘 구간은 바위와 지겹도록 씨름을 하겠구나. 생각하니 전기에 감전된 듯 온몸에는 짜릿한 전율이 엄습해온다.(05:31)

 

[조령산 하산길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새벽 풍광]

 

 

960m 잘룩이로 내려서기에 앞서 조령산 최고의 전망을 배경으로 동기들을 한 컷트한다.(05:34)

 

 

전망바위에서 조령산 최고의 조망을 즐기고 960m 잘룩이로 내려서니 갈림길이 나온다.왼쪽은 괴산군 연풍면 신풍리 절골,오른쪽은 조령1관문으로 빠지는 길이다.갈림길을 지나 946봉 오르는 910m 잘룩이까지는 길이 좋았다.사진은 910m 잘룩이에서 946봉으로 오르면서 치마바위봉을 바라본 풍경이다.날카롭게 치솟은 치마바위봉 앞쪽에 보이는 능선은 887봉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이다.(05:40)

 

[946봉 오름길에 바라본 치마바위봉]

 

5시 47분,946봉에 올라 거기서 다시 한번 신선암봉과 치마바위를 바라본다.맨 앞쪽 봉우리가 887봉으로 그 왼쪽에 거대한 암장을 품고 있으며 그뒤 봉우리가 신선암봉이다.또 887봉 동릉 너머로 보이는 송곳 모양의 봉우리는 치마바위봉(928m)이고 대간은 신선암봉에 오른 다음,잘룩이로 내려섰다가 치마바위 능선으로 이어진다.(05:47)

 

[946봉에 올라 바라본 신선암봉]

 

[946봉에서 오른쪽으로 각도를 옮겨 바라본 대간과 신선암봉,뾰족한 치마바위 봉이... ]

 

[946봉에서 조망한 부봉(釜峰)-6개의 암봉이 아름답다.]

 

946봉에 올라선 뒤 내리막길로 내려간다.946봉 정수리를 떠나 3분쯤 내려서자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절벽구간이 나온다.오늘 구간가운데 첫 바위지대를 통과하는 모습이다.사진 제일 앞쪽에 최금구 동기가 로프를 잡고 내려서고 있고 그 뒤에 전기환,김현기 동기가 바윗길을 통과하기 위해 기다린다.동기들 뒤에 보이는 이들은 부천에서 온 대간팀이다.(05:50)

 

[946봉 내리막길의 첫 바위지대를 내려서며]

 

 

[887봉 아래 전망바위에서 뒤돌아본 조령산과 대간마루금]

 

 

5시 54분,887봉 아래 갈림길에 다다랐다.왼쪽은 괴산군 연풍면 신풍리,오른쪽은 새재주막으로 빠지는 길이다.이제 887봉으로 오른다.887봉 정수리에 다가가자 6시 5분,전망바위가 반긴다.그곳에서 우리가 하산한 조령산을 뒤돌아본다.뒷쪽 가장 높은 봉우리가 조령산(1,026m)이며 그앞 봉우리는 946봉이다.조령산 정상에서는 사진 왼쪽에 보이는 조령산 동릉을 타고 잘룩이에서 오른쪽 계곡으로 내려서면 조령샘에서 하산하는 등산로와 만나게 되고,조령1관문으로 하산할 수 있다.(06:08)

 

 

[887봉 전망바위에서 조령산을 등진 대간팀]

             

[887봉 전망바위서 바라본 신선암봉]

 

887봉 아래 전망바위에서 조령산을 뒤돌아보고 887봉으로 오른다.사진은 887봉 하산길에 바라본 신선암봉 동릉과 치마바위 모습이다.흡사 인수봉 슬랩을 연상케하는 치마바위의 빛나는 암장은 마치 여인의 치마폭을 드리운 것 같이 아름답다.(06:14)

 

[887봉 하산길에 바라본 신선암봉 동릉과 치마바위봉]

 

6시 20분,신선암봉 아래 갈림길에 이른다.왼쪽 괴산군 연풍면 신풍으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나 신선암봉으로 오른다.드디어 바윗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사진에 보이는 바위는 로프를 잡고 오르게 되어 있는데,왼쪽 암장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몸의 균형을 잘 잡고 올라야 한다.금구가 로프를 잡고 먼저 오른 다음,기환이가 막 바윗길을 오르려 하고 있다.눈이 부실만큼 화려한 이 바위는 정갈하면서도 고결한 자태를 지니고 있다.(06:23)

 

[신선암봉 오름길에 만난 로프지대-본격적인 바위타기가 시작된다.]

 

 

첫번째 바윗길을 현기가 로프를 당겨 오르고 있다.현기 왼쪽 아래로 깎아지른 절벽이 아찔하다.바위 모서리를 따라 균형을 잡으면서 올라야 한다.팽팽한 긴장감이 묻어난다.이 바윗길은 위험하여 겨울철 빙판이 지거나 비가 오면 조심해야 할 구간이다.(06:23)

 

 

두번째 슬랩이다.다행히 로프가 걸려 있어 우리는 무난하게 통과했다.사진은 현기가 로프를 팽팽하게 잡아당겨 오름짓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06:26)

 

 

두번째 바위 슬랩을 오르자 전망바위가 기다리고 있다.거기서 나는 우리가 한발한발 밟은 조령산을 뒤돌아본다.사진 맨 뒤쪽에 우뚝 솟은 조령산이 보이고,대간은 이리 꿈틀 저리 꿈틀 용트림을 치며 신선암봉으로 나우리치고 있다.(06:27)

 

[신선암봉 아래 마당바위에서 뒤돌아본 대간마루금]

 

두번째 바윗길을 오르고 나서 전망바위에 다다라 숨을 고르고 다리쉼을 한다.바윗길은 생각보다 힘이 많이 소진되기 때문에 적당하게 휴식을 가져야 한다.호흡이 흔들리고 숨길이 가쁘면 바윗길 오름짓이 제대로 될 리 없을 뿐만아니라 갑자기 현기증이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게 된다.전망바위에서 우리는 기환이가 가져온 인절미와 자두를 꺼내 요기를 했다.동기들 뒤로 치마바위봉이 한결 더 가깝게 속살을 드러내고 치마바위봉 뒷쪽 오른편으로 도깨비 뿔처럼 세 봉우리가 나란히 어깨를 맞댄 부봉이 멋스러움을 뽐내고 있다.(06:29)

 

[신선암봉 아래 마당바위에서 건너다본 주흘산]

 

[신선암봉 아래 마당바위에서 치마바위를 등지고]

 

전망바위를 뒤로하고 오르니 집채만한 바위슬랩이 또 다시 기다린다.로프도 없고 기댈 곳도 없다.두리뭉실한 슬랩 뒷편에 가로 놓인 날카로운 모서리를 몸을 비틀어 한 순간에 바위슬랩에 몸을 붙여야 한다.기환이와 현기가 바위모서리를 통과하여 슬랩을 오르고 있다.(06:34)

 

 

바위 슬랩을 무사히 올라선 뒤,조령산을 등지고 한 컷트.(06:38)

 

 

6시 39분 마침내 신선암봉(937m)에 다다랐다.신선암봉에서 조망은 기가 막힐 정도로 빼어났다.건너편 치마바위봉은 말할 나위도 없고 부봉과 깃대봉,그리고 건너편 동쪽의 주흘산이 커다란 장벽처럼 막아서 있고 발치 아래로는 괴산군 연풍면의 크고 작은 산들이 아스라 하게 펼쳐진다.사진은 부천에서 온 대간꾼들이 찍은 것으로 모처럼 나도 피사체가 되었다.우리 일행을 사이에 두고 산행 도중 이 신선암봉에서 사고가 났을 때 119 에 구조를 요청할 수 하는 안내판이 서 있고 그 곁에는 푸르디 푸른 솔잎이 빛나는 바위와 조화를 이뤄 너무 인상적이다.(06:39)

 

 [신선암봉에 올라 치마바위봉을 등지고]

 

신선암봉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고 있는데,부부 대간꾼이 신선암봉으로 올라온다.강원도 횡계에 사는 최능규 씨 부부가 그들이다.대관령산악회에 소속되어 대간종주에 참여하고 있는 최씨 부부는 이번 구간을 빼먹는 바람에 부부가 함께 종주를 하고 있었다.

 

58세의 최능규 씨는 대관령스키클럽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민박집도 운영하고 있다며 대관령 구간을 종주할 때는 필히 연락을 해달라고 한다.서글서글한 눈매에 마음씨 좋은 최 회장은 스키로 단련된 늘씬한 몸매하며 주력 또한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하고 하늘재까지 함께 가기로 했다.

 

그러나 최 회장이야 그렇다치더래도 그의 안사람은 대단했다.이 고통스러운 대간 종주를 허위단심 해내는 그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남자들도 해내기 어렵다는 대간 종주를 무슨 힘으로 해내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신선암봉을 떠나 치마바위봉으로 내려간다.

 

6시 47분,신선암봉 정상 왼쪽으로 신풍마을 절골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열려 있는 데 위험구간이라는 경고문이 걸려 있다.사진은 신선암봉을 내려서면서 만나는 가파른 하산길이다.최 씨 부부가 로프에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가파른 산비알을 내려서고 있다.(06:49)

 

[대관령산악회의 최능규 씨 부부]

 

대관령산악회의 최능규 부부가 비탈길을 내려가고 난 뒤,금구가 로프를 잡고 하산하고 있다.(06:50)

 

 

신선암봉에서 치마바위봉 아래 잘룩이(790m)로 내려선 다음,치마바위봉으로 오른다.그러다 사진에 보이는 전망좋은 바위를 지나면서 조령1관문 쪽 새재계곡을 조망해본다.조령1관문에서 새재로 오르는 새재길이 실날같이 드러난다.(07:01)

 

[치마바위봉 오름길에 조망해본 새재1관문]

 

전망바위에서 새재길을 살피고 다시 치마바위 928봉으로 오르다가 조령산을 뒤돌아본다.조령산에서 뻗어내린 조령산 동릉 위에 있는 기암이 유별나다.(07:05)

 

 

치마바위봉(928m) 정상 아래 봉황 형상의 바위에 다다른 친구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07:08)

 

 

치마바위 최고봉 928봉을 너머 910봉으로 발품을 판다.사진은 910봉 가는 길에 910봉 오른쪽 사면과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부봉을 바라본다.(07:12)

 

 

부봉을 조망한 뒤,몸을 돌려 우리가 밟고 내려온 신선암봉을 바라보았다.신선암봉에서 왼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조령산으로 이어지는 대간마루금이다.(07:12)

 

 

치마바위 두번째 봉우리인 910봉을 넘어서자 말안장처럼 생긴 기묘한 바위와 만났다.금구가 그 안장바위에 올라 잠시 흥겨워한다.말타면 풍경 잡고 싶은게 인지상정이라는데....금구야! 그 풍경은 어디메 있노.그런데 금구는 말을 거꾸로 타고 있구먼.이번에는 기환이가 안장바위에 올라탄다.안장바위가 간지럼을 먹이는지 그는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한다.(07:15)

 

 

 

 

안장바위를 내려오니 또다시 로프가 걸린 바윗길이 나온다.현기가 확보를 보고 기환이가 로프를 타며 바위를 내려서고 있다.(07:17)

 

 

로프를 타고 바윗길을 내려서자 또다시 바윗길을 로프를 타고 오르는 구간이 나온다.기환이는 잽싸게 로프를 타고 바윗길을 올라 후미를 기다린다.(07:18)

 

 

바윗길을 올라선 다음,900봉으로 내려간다.사진은 900봉으로 가면서 대간 동쪽에 거대한 성벽처럼 막아선 주흘산(主屹山 1,075m)을 바라본다.시계가 나쁜 탓에 주흘산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게 못내 아쉽다.

 

주흘산은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새와 앉음새가 달리 보이는 기묘한 산이다.문경읍내에서 보면 깎아지른 절벽이 마치 거대한 성곽을 이뤄 천혜의 요새지를 방불케한다.그래서 예부터 주흘산(1,076m)은 문경현의 뒤쪽에서 현을 진호하는 진산(鎭山)으로 신성하게 여겨져 왔다.

 

사실 주흘산의 최고봉은 1,076봉이 아니라 주흘영봉(1,106m)이다.그런데도 1,076봉이 주봉으로 대접받는 까닭은 문경읍내에서 주흘영봉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주봉을 높이로만 보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올려다보며 경외의 대상으로 삼았던 우리 선조들의 산관(山觀)이 이곳에도 무르녹아 있는 것이다.

 

사실 주흘산의 최고봉은 1,076봉이 아니라 주흘영봉(1,106m)이다.그런데도 1,076봉이 주봉으로 대접받는 까닭은 문경읍내에서 주흘영봉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주봉을 높이로만 보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올려다보며 경외의 대상으로 삼았던 우리 선조들의 산관(山觀)이 이곳에도 무르녹아 있는 것이다.


문경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주흘산은 그 기묘한 앉음새 때문에 "돌아앉은 산"이라고 불린다.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주산(主山)을 모집할 때 전국의 여러 산들이 앞다투어 한양으로 모여들었다.뒤늦게 소식을 들은 주흘산이 한양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삼각산이 자리를 잡은 뒤였다.주산 자리를 놓친 것이 한이 되어 주흘산은 그때부터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주흘산에 얽힌 전설이다.

 

경상도지리지"에는 주흘산을 태백산(봉화),지리산(진주),사불산(문경),가야산(성주)과 함께 경상도 5대 명산으로 일컫었다.그래서 매년 춘추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내는 소사(小祀)로 등제되었다.또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경상도 관찰사가 직접 주흘산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제사의 예는 천신(天神)에게는 '사(祀)',지기(地祇)에게는 '제(祭)'라 하며 인귀(人鬼)에게는 '향(享)'이라 한다.명산대천에 제사를 올리는 사전(祀典)제도는 조선 태종 때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었다.


주흘산은 엄일히 말해서 백두대간의 산은 아니다.백두대간 마루금에서 한발짝 비켜 나 있기 때문이다.사진에 보이는 왼쪽 제일 높은 봉우리가 주흘영봉(1,106m)이며 그 능선을 따라 오른편으로 가면 뾰족하게 튀어나온 봉우리가 주흘산의 주봉(1,076m)이다.그리고 주흘산(1,076m) 주봉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아름다운 능선이 주흘 북서릉인데,사진 중앙에 보이는 또 하나의 능선이 바로 그것이다.다시 말하면 산속의 산을 이루고 있는 능선이 바로 북서릉으로 주흘산 정상에서 제2관문으로 연결되고 그 북서릉 아래 계곡이 꽃밭서덜이다.(07:30)

 

 

문경의 명산 주흘산을 조망하고 발품을 팔아 치마바위봉 3번째 봉우리인 900봉 정상 부근 암릉에 다다랐다.이곳도 전망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119 구조요청 안내판이 소나무에 걸려 있다.(07:36)

 

 

치마바위 3번째 봉우리인 900봉을 내려서자 이번에는 흡사 돌고래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와 만났다.바위 위에는 주리를 튼 소나무가 세월의 풍상을 말해준다.고래바위 뒷쪽으로 조령산이 아스라하다.(07:39)

 

 

고래바위를 조금 지나 현기가 치마바위 3봉인 900봉을 등지고 포즈를 잡았다.현기 옆으로 기묘하게 생긴 노송이 푸르름을 더해주고 저 멀리 조령산이 아아하다.우리 일행은 이 지점에서 아침을 먹는다.어제 저녁 칠곡휴게소에서 산 햄버거와 떡으로 아침식사를 때웠다.7시 52분,배낭을 챙겨 다시 발품을 팔기 시작한다.(07:39)

 

 

900봉을 지나면서 880봉까지는 완만한 길이 이어지더니 880봉 내리막길에서부터 사뭇 가팔라지면서 로프가 걸린 바윗길이 시작된다.(08:02)

 

 

880봉 내리막길을 내려와 10분쯤 가자 깃대봉이 시야에 들어온다.이곳에서 우리가 가야 할 대간을 바라본다.진행방향 앞쪽에 거대한 바위봉우리는 깃대봉(812.5m),그 앞쪽에 보이는 육산이 753봉이다.그리고 깃대봉 뒤에 송곳처럼 치솟은 산이 마패봉 북서릉 상의 신선봉(967m)이며,그 오른편으로 백두대간의 산인 마패봉(922m)이 얼비친다.(08:18)

 

  

 

[우리가 밟아야 할 깃대봉과 대간의 산들]

 

8시 24분,삼거리봉(750m)에 다다랐다.이제부터 대간은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완만한 능선길이다.사진은 삼거리봉을 떠나 7분쯤 발품을 팔았을 때 평평한 너럭바위와 만났다.그곳에서 마패봉에서 부봉으로 이어지는 대간마루를 배경으로 동기들을 카메라에 담았다.현기 오른편 아래 계곡이 조령2관문(鳥谷關)에서 조령3관문(鳥嶺關)으로 오르는 새재길로 산줄기가 만나는 계곡 그 한가운데 어간에 새재로 넘는 마지막 마을 동화원(桐華院)이 있다.(08:31)

 

 

8시 24분,삼거리봉(750m)에 이르렀고 9분 뒤에는 740m 잘룩이를 지났다.오늘은 오전 종주 내내 타는 듯한 뙤약볕도 들지 않았고 대간마루에는 항시 바람이 불어와 종주하기에는 최상이었다.밀양의 한낮 기온이 무려 38도를 오르내리고 문경도 낮기온이 33도에 이르겠다는 예보는 우리를 주눅들게 하기에 십상이었다.그런 기우를 일시에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문경 구간의 백두대간은 바위 오르내리기가 힘들 뿐,날씨는 그저 그만이었다.사진은 753봉을 지나 깃대봉 오름길에서 전망바위에서 치마바위봉과 신선암봉을 뒤돌아본 모습이다.사진 왼쪽에 올망졸망 어깨를 맞댄 4개의 봉우리가 치마바위봉으로,앞쪽부터 880봉,900봉,910봉,928봉이며 사진 오른편 하늘을 찌를듯이 솟구친 봉우리는 신선암봉(930m)이다.(08:45) 

 

깃대봉 아래 전망바위에서 치마바위봉과 신선암봉을 뒤돌아보고 이번에는 남동쪽 제2관문(鳥谷關) 일대를 굽어본다.동기들이 서 있는 왼쪽 산비알에는 햇빛이 들어 밝음과 어두움이 교차되고 사진 중앙에 돌출된 능선이 주흘산 주봉(1,076m)에서 조족관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꽃밭서덜이다.사진 왼편 계곡이 합쳐지는 곳은 저 아래 조곡관과 그 위 동화원 사이 새재계곡 중간 지점이다.(08:45)

 

 

깃대봉으로 오른다.한동안 바윗길이 없어 다행이구나 여겼는데,깃대봉 정상 바로 아래에 이르자 또 다시 거대한 바위슬랩이 나타난다.친구들은 '혹시나'했는데 '역시나'였다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체념하는 눈치다.금구가 바위 아래에서 자세를 잡았다.이제 저 바위를 넘어서면 새재에 도착할 것이다.(08:56)

 

 

8시 54분,깃대봉 정상에 올랐다.북진하던 대간은 깃대봉을 분기점으로 북동쪽으로 급격하게 꺾인다.우리는 쉴 겨를도 없이 새재(鳥嶺)로 발품을 판다.9시 1분,조령산성터가 보이기 시작한다.사진은 740봉 갈림길 못미쳐 성터에 다다른 동기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09:13)

 

 

조령산성터를 따라 9시 4분 오른쪽으로 동화원 마을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난다.그리고 잠시 뒤,새재 산신각을 돌아 9시 15분,오늘의 소구간인 유서깊은 새재(鳥嶺)에 다다랐다.

 

조령 약수 바로 뒤에 있는 산신각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내려온다.새재가 개척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조정에 올릴 장계를 지니고 가던 군졸이 호랑이에게 화를 당했다.장계가 전달되지 않아 문경현감이 사람을 풀어 찾아보니 호랑이한테 잡아 먹힌 피묻은 옷이 발견되었다.이를 조정에 보고하자 "새재 호랑이를 당장 잡아 들이라."는 어명(御命)이 떨어졌다.

 

군사 백 여명이 산을 뒤졌지만 찾지 못하여 대신 제를 올리고 임금의 교지를 그곳에 놓고 왔다.다음날 새벽에 가보니 교지를 본 호랑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그 호랑이의 넋을 기려 산신각을 짓고 해마다 제를 지냈는데,그 이후 새재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고 한다.그래서 새재 산신각에는 호랑이 그림이 모셔져 있다.

 

동화원과 관문 부근의 사람들이 이 산신각을 모셔왔는데,지금은 무녀들의 몫이 되었다.하루는 호랑이가 여궁폭포 근처에서 덫에 걸렸다.덩치가 얼마나 큰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볼뿐이었다.이 소식을 들은 마을의 임포수가 호랑이를 잡으러 산으로 올라가는데 소만한 산돼지가 콩밭에 누워 있어 총을 쏘아 잡았다.다시 산을 올라가면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산신령의 조화로 호랑이 대신 산돼지를 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임포수는 호랑이를 잡지 않고 걸려 있는 덫의 철사고리를 맞추어서 호랑이를 풀어주었다.새재 산신령의 조화로 호랑이을 살린 것이다.이처럼 새재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내려온다.2004.8.1. 09:19(72)

 

 [호랑이를 모신 새재 산신각을 등지고]          

 

새재 산신각 바로 밑에 있는 조령약수(鳥嶺藥水)에서 현기가 아직도 녹지 않은 얼음에 약수물을 채우고 있고 기환이는 족자로 목을 축이고 있다.조령약수는 조령산성을 쌓을 때,새재 정상(640m)에서 발견했다는 샘으로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감로수다.사시사철 오랜동안 새재를 넘나들던 많은 길손들에게 생명수 역할을 했을 것을 생각하니 샘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옛날부터 이 물을 즐겨 마시면 장수한다는 백수영천(百壽靈泉)이라고 했다.(09:21)

 

[백수영천(百壽靈泉)-조령샘에 다다라]

 
임진왜란 때,신립이 왜적을 천험의 요새인 새재에서 방어하지 않고 충주 달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다가 패한 것이 계기가 되어 새재는 국방의 요충지로 새롭게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1594년 새재 정상에서 동쪽 10리쯤 내려오면 양쪽 절벽이 매우 험준하여 매바우(鷹岩)라 부르는 곳에 성을 축성하기 시작하여 1년만에 완성했다.이것이 조령2관문이다.
 
임란 이후에도 일본의 재침에 대비한 성 축성 문제가 논의되어 1708년 11월 조령 축성이 허가되고 이듬해 축성이 이뤄졌다.당시 초곡성(草谷城,1관문)과 정상의 성(3관문)이 새로 축성되었고 신충원이 쌓았던 중성(2관문)은 개축하였다.이리하여 오늘날의 3관문 체계가 이루어졌다.축성 당시 초곡성의 현판은 '진남(鎭南)'이라 달았다가 1752년 조령진(鳥嶺鎭)이 설치될 때 밖의 현판은 주흘관(主屹關),안쪽은 영남제1관(嶺南第一關)으로 바꿔 달았다.
 
왜적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조령산성은 그러나 외침의 방어에는 한 번도 쓰이지 못했다.관문 축성은 결국 '소 잃고 지은 외양간'이었던 셈인데 현재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성은 제1관문(主屹關)이다.양옆으로 이어진 성축도 비교적 온전하며 개울물을 흘러보내는 수구문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1981년 이 일대가 문경새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관문은 사적 제147호로,주흘산 조령관문 일원은 경북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옆에서 본 새재 제3관문]

 

제3관문(조령관)은 1708년 1관문 축성시 현재의 모습으로 쌓은 것이나 그 이전인 임란 당시 이미 하늘재로 이어지는 고개의 산성이 쌓여졌던 것으로 보인다.문루는 1907년 의병전쟁 때 불탔고,지금의 홍예문과 그 위의 누각,그리고 좌우의 석성은 1976년 복원한 것이다.동쪽으로 이어진 성에는 현재 북문(북암문)과 동문(동암문)이 남아 있다.제3관문을 기준으로 남쪽은 문경 땅이고 북쪽은 충주 땅이며,영남(嶺南)이란 말도 바로 이 새재(鳥嶺)의 남쪽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09:22)

 

*19구간 새재-마패봉-탄항산-하늘재 종주기는 하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