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헌산 정상에서 토함산으로 빛
보내기]
[주]이 글은 2005년 4월 19일 개최되었던
물리학자와 산악인이 함께 한
빛의 축제
뒷이야기이며,사람과 산 2005년 8월호에
실렸다.빛의 축제와 관련된 사진은 따로
덧붙였음을 밝혀둔다.
올해는
UN이 정한 물리의 해(WYP 2005)이다.이를 기념해 지난 4월 19일,환상의"빛의 축제"가 전 세계에 걸쳐 열렸다.이번 행사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지 100주년 이자 서거 50주년을 기념해 2005년 4월 18일 미국 뉴저지주에서 빛을 쏘아 24시간 이내에 전 세계에
중계하여 지구를 한바퀴 돌게 하는 사업이다.우리나라에는 4월 19일 밤 8시 부산에 이 빛 도착하여 1시간 동안 머문 뒤,9시 중국으로
전달되어스위스와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행사를 위해 부산대 물리학과 한창길 교수,기술위원에는 부산대 물리학과 김형국 교수가 국내 “빛의 축제” 추진위원장과 기술위원을
맡게되었다.산악지형이 대부분인 국내에서는 빛을 전달하는 릴레이 포인트를 어떻게 잡느냐가 행사의 관건이었다.지난 1월 말,한 교수와 김 교수는
산악인의 도움 없이는 이 행사를 추진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날 찾아왔다.
나는
개인이 이 행사를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산악단체나 산악잡지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한 교수한테 설명하고,지난 2월 초 ’사람과 산’지
곽수웅 부산지사장과 함께 첫 모임을 가졌다.
여기서
얻은 결론은 우선 빛을 중계할 전국의 산 선정 작업과 빛을 릴레이 할 손전등 구하기였다.손전등은 휴대하기 쉽고 빛의 밝기는 최소한 15km
이상에서도 식별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 대두되었다.곽 부산지사장은 산악계의 마당발에다 산행장비에도 탁월한 식견이 있는 터라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2월
19일,첫 번째 빛의 시연을 금정산 고당봉~영축산에서 실시키로 하고,부산대 물리학과 안재석 조교,2명의 학생이 통도사 뒤 영축산을
올랐다.고당봉에서 영축산까지는 약 26km의 도상거리.시중에서 구입한 휴대용 할로겐 손전등은 350만 광촉(양초 350만 개의
밝기)이었다.동굴탐사용으로 쓰이는 이 손전등의 성능이라면 30~40km 거리에서도 빛의 교신이 가능할 듯하여 매우 고무적이었다.
아직도
산정에는 두툼하게 잔설이 남아 있는 영축산,오후 4시 대피소까지는 별로 눈이 없어 무리 없이 올랐지만 오르막길에는 눈이 깊고 찬바람이 몰아쳐
악전고투였다.곳곳에는 백설이 터널을 이뤄 장관이었다.저녁 7시 무렵,영축산 정수리 암봉에 기다시피 하여 오르니 어찌나 추운지 몸이 덜덜
떨렸다.장갑을 끼고 방한복을 입었는데도 칼바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채 1분도 서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빛의 시연을 위해 백설로 뒤덮인 영축산 오르기]

나는
나침반에 방위각을 맞춘 뒤,금정산 고당봉에 있는 남덕우 대장한테 휴대폰을 걸어 빛을 쏘게 했다.잠시 뒤,고당봉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쟁반만한 빛이
켜졌다 꺼졌다.이때 기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일행은 환호성을 지르며 고당봉으로 빛을 보냈다.고당봉에서도 우리의 빛이 매우 잘 보인다는
답이 왔다.그런데 고당봉에서 전해져오는 빛은 생각보다 아주 낮은 위치에서 점멸되곤 했다.아마 빛의 굴절현상 때문인 듯했다.우리는 정상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서둘러 하산하였다.한밤중에 영축산을 내려가기는 오를 때보다 힘이 배로 들었다.대피소에 들러 관리인에게 인사를 하고 지산 마을로
내려왔다.이제 빛을 릴레이 할 도구인 손전등은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각 지방의 릴레이 포인트인 산을 확정하는 일.한 위원장은 금정~영축산 의 시연 성과를 바탕으로 관련 대학교 모임에 보고했으며,빛이
지나는 경로 인근 대학교의 물리학과 교수를 각각 추진위원에 선임했다.
4월
19일 오후 8시,우리나라에 전달된 빛은 부산의 광안대교에서 황령산을 거쳐 금정산 고당봉으로 전달된다.따라서 고당봉은 그야말로 우리나라를
경유하는 빛의 센터인 셈이다.고당봉에서 빛은 두 갈래로 나뉘어 전달된다.고당봉에서 북쪽으로
영축산~고헌산(언양)~토함산(경주)~운제산(포항)~비학산~면봉산~팔공산(대구)~유학산~금오산(구미)~황학산(김천)~서대산~계룡산(대전)으로
전달되고 또 하나의 경로는 고당봉에서 서쪽으로
용지봉(창원)~무학산(마산)~여항산(함안)~적석산(고성)~와룡산(사천)~금오산(하동)~백운산(광양)을 경유, 광주의 무등산을 거쳐
모악산(전주)~대둔산~계룡산(대전)에 이르러 두 빛은 다시 만난다.계룡산에서 오봉산~작두산~상당산~두타산~옥녀봉~칠장산을 거쳐 경기권에 진입한
뒤,구봉산~부아산~광교산~관악산~남산~서울 시청으로 같은 시간(오후 8시)에 전달,전국적으로 다양한 행사를 치르게 된다.
이렇게
41개 산정(山頂)의 릴레이 포인트를 통과할 빛의 경로는 주로 대도시를 지나기 때문에 각 릴레이 포인트에 오를 해당 지역 대학교의 물리학과
교수와 학생이 선임되었다.아울러 이들과 함께 오를 산악인도 함께 선정되었다.
3월
12일,부산과 인접한 경남지역의 빛 시연이 실시되었다.고당봉~용지봉 구간과 고당봉~영축산~고헌산 구간에 대한 점검이었다.이 시연에서
나는,부산대학교 안재석 조교 팀과 함께 고헌산에,영축산에는 부경대학교 물리학과 하강열 교수 팀과 산악인 박건장 씨가 올랐다.이날 시연에서는 약
40km 거리의 고당봉~고헌산 구간까지 빛의 전달에는 전혀 문제가 없음이 밝혀졌다.그러나 이날도 매서운 바람과 영하를 밑도는 쌀쌀한 날씨 탓에
시연이 끝난 뒤,저녁 7시 30분경, 곧장 와항재로 하산하고 말았다.안개 때문에 토함산을 조망할 수 없어 대단히 안타까웠다.고헌산에서 산내면
와항재로 내려서는 길은 날카로운 너덜지대라 위험하므로 다음부터 산행코스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두 번째 빛의 시연이 끝났다.
지난
4월 19일 "빛의 축제",운명의 날이 왔다.부경대 물리학과 하강열 교수, 장경혁 조교와 함께 언양의 고헌사에 차를 두고 고헌산 남서릉을 빛의
축제를 기념하는 리번을 달며 오른다.이날 오후부터 전국적으로 40~60mm 가량의 비가 쏟아질 거라는 일기예보에 빛의 축제 자체가 무산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저녁
7시 20분쯤 고헌산 정수리.멀리 토함산도 보이고 고당봉도 희미하게나마 가늠이 되었다.“8시 30분까지만 비가 내리지 않으면 좋을 텐데”하며
간절히 빌었다.고헌산은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던 신령스런 산이었는데,되레 비를 멈춰달라고 기원했으니 세월이 변해도 엄청 변한 것이다.서서히 날이
저문다. 나는 토함산에 있는 포스콘산악회의 오수환 차장과 통화했다.아! 28km 거리의 토함산에서 빛이 명멸하기 시작했다.몇 차례나 시연에 실패
한 끝에 마침내 토함산과 교신에 성공한 것이었다.감개무량했다.고당봉과도 희미하게나마 교신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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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열 교수와 장경혁 조교,그리고 이영우 씨 가족]


[울산에서 온 이영우 씨 가족과
함께]
그때
고헌산 동릉에서 불빛 4개가 정상으로 접근해오고 있었다.잠시 뒤,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두 명이 다가왔다."어디서 왔니?"하고 물으니 아빠가
고헌산에서 아인슈타인 빛의 축제를 연다고 해서 올라왔다고 한다.조금 뒤 이영우 씨 부부가 올라왔다. 고헌산 북쪽 산자락 소호가 고향인 이들
부부는 주말마다 고헌산에 오른다고 했다.우리끼리 빛의 축제를 치를 뻔했는데,이들 가족이 와 주었으니 고맙기 짝이 없고 분위기는 한결
고조되었다.그런데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녁
8시 4분 30초,우리가 고당봉에서 빛을 받을 시각이다.그런데 막상 그 시각이 되자 시계(視界)가 불량해지면서 고당봉의 빛은 식별할 수 없을
만큼 희미했다.그러나 고당봉에서는 고헌산의 빛이 잘 보인다고 했다.이어서 우리는 토함산으로 빛을 전달했다.오수환 차장으로부터 빛을 잘 받았다는
답이 왔다. 우리는 서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아인슈타인의 빛’을 통해 친구가 되었다.
빛의
축제는 눈 깜짝할 순간에 막이 내렸다.순식간에 빛의 전달이 끝나자 이씨의 아들 상걸이는 "벌써 다 끝났어요.?"하며 의아해 한다.거창한 축제를
기대했던 이들에게 빛의 축제는 너무 싱거운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이씨 가족과 작별하고 고헌산을 내려서는데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9시 반이 다 되어 고헌사로 내려왔다.이제 지난 3개월 동안 내 머리를 짓누르던 아인슈타인의 빛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홀가분했다.
독도문제로
한일 두 나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시점에서 포항과 독도를 연결, 빛을 전달함으로써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참으로
시의가 적절했다.아울러 우리가 전달한 빛이 온 누리로 퍼져나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든 미움과 번뇌를 녹여 사랑과 평화가 넘쳐 흐르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