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구곡 九曲-파천(巴串)의 파노라마〕
지난해 황간의 석천,월유봉에 이어 올해는 괴산의 화양구곡을 찾았다. 그런데 이 두 경승지는 묘하게도 우암 송시열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우암尤庵은 32세 장년에 월유봉 한천정사에 머물렀고 60세인 노년에는 화양구곡(또는 화양동계곡)에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쳤으니 곳곳에 그의 발자취가 흥건하다.그는 풍광이 빼어난 화양동계곡 9곳을 화양9곡이라 이름 지었다.오늘 우리는 유유자적 발품을 팔아 그가 설정하고 경영한 아홉 굽이九曲를 더터나갈 요량이다.
깊어가는 가을빛에 젖어,가벼운 차림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걸음마저 가볍고 가슴 또한 노상 들뜨기 마련이다. 산에는 나무마다 가을빛이 물들어 있었다.현란하게 물든 단픙도 눈을 유혹하곤 했지만 정작 나를 사로잡은 건 고요한 정적이었다.모든 소리와 빛깔은 고요함 속에서 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법이니 오늘은 그 고요한 정일에 빠져보기로 작정해본다. 늘 내 속은 시끄럽고 부글부글 끓고 있으니까.
백두대간의 속리산 밤티재를 넘어서면,중화지역인 상주 땅 화북이다. 중화지역은 백두대간을 벗어난 상주의 화동,화서,화남,화북과 모동,모서 모두 6개 고을이 충북 땅으로 깊숙이 침범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화동,화서,화남,화북의 4개 면은 본래의 화령현이요,모동면과 모서면은 옛날의 중모현이니 중화란 바로 상주목을 따르던 중모현과 화령현을 뭉뚱그린 이름이다.이어서 충북의 송면을 지나 죄회전하면 충북 괴산군 청천의 화양동계곡(華陽九曲)이요,우회전하면 퇴계 이황이 풍광에 반해 9개월동안 머물렀다는 선유동계곡(仙遊九曲)이다.
버스에서 내려 화양구곡 가운데 9곡,파천으로 가는 들머리엔 은행나무의 단풍이 투명하리 만큼 화사하다 못해 현란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화양구곡 가운데 구곡,파천으로 내려서기에 앞서 서울팀을 기다리며 사진 한 장을 건져본다.
〔화양구곡 가운데 9곡-파천巴串〕
팔경八景이나 구곡九曲은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이르는 말이다.‘팔경’은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여덟 가지 경관을 말하고‘구곡’이란 흘러가는 물줄기‘아홉 굽이’를 뜻한다. 팔경은 정적인‘점’의 미학이고 구곡은 동적인‘선’의 미학이다.그런데 점 안에 바람과 같은 움직임이 있고 선 안에 심연과 같은 고요함이 있다.
중국의 소상(瀟湘)팔경에서 유래한 팔경은 고려 말 이후 산수화의 화제(畵題)로서 즐겨 쓰이다가 점차 독립된 서경시의 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송도팔경, 관동팔경, 단양팔경 가까이는 해운대팔경 등 지역마다 팔경을 설정하는 문화가 널리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그에 따라 지어진 팔경시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남아 전한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시대의 주자(1130-1200)는 자신이 은거했던 무이산(武夷山)의 아홉 굽이를 두고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읊었다,이 시는 주자의 학문적 세계가 잘 드러나 조선에 수용되었고 조선의 많은 성리학자들이 이 시를 차운次韻하였다, 또한 시를 차운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이도가의 배경이 된 무이산의 무이구곡을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에 직접 구현하고자 하였다, 성리학자들의 이러한 의지가 현실로 나타나게 된 공간이 구곡원림(九曲園林)이다.
한국의 구곡문화는 조선 중기 이후 유학자들은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보다 향촌에 은거하기를 즐겼고 그들의 은거지는 산수경치가 빼어난 경승지이었다.이러한 경승지를‘동천(洞天)’이라고 불렀는데 유학자들은 주자가 무이구곡을 경영한 전례에 따라 자신이 즐겨 유람하는 동천 구간을‘9곡’으로 설정하고 구곡시九曲詩와 구곡도九曲圖를 남겼다.
중국의 주자가 경영했던 무이구곡을 모델로 했지만 구곡은 단순히 경승지에 그치지 않고,한국유학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문학의 단순한 현장이 아니라 조선유학의 역사, 철학이 종합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 바로 구곡문화라 하갰다.‘동천洞天“이란 깊은 산속에 있는 골짜기로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한다.원래 도가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자신의 은거지를‘동’ 혹은 ‘동천’으로 불렀다.
무이구곡을 직접 본 사람들이 없는 시대에서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는 무이구곡의 경물을 눈에 보이는 듯이 상상하고 말할 수 있던 구곡문화에 관한 한‘선지식(善知識)’들이었다.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이라는 이 두 사람의 학풍을 이어받은 문도들에 의해 구곡문화는 더 깊이 나아감은 물론 정치적인 이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9곡,파천의 여러 모습〕
구곡九曲은 나라 안에 백여 개가 흩어져 있다,하지만 구곡 시와 그에 걸맞는 장소가 확인되고 구곡경관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은 화천의 곡은구곡, 괴산의 화양계곡,문경의 선유동 구곡, 성주-김천의 무흘구곡 등 수십개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수몰과 현장 경관의 변화,자료부족으로 충분한 재현에 어려움이 따른다.반드시 구곡이 아니더라도 안의삼동을 비롯.수많은 동천이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동천구곡은 현대인이 찾을 수 있는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산수문화 현장이며, 대표적 전통명승지이다.
조선에서 구곡을 경영한 유학자는15세기에 박하담(朴河淡, 1479~1560)의 운문구곡(雲門九曲)이 최초로 알려져 왔다,그러나 이보다 30여년이나 앞서 박구원(朴龜元, 1442~1506)이 고야구곡(古射九曲: 밀양)을 경영했다는 자료가 나와 구곡의 효시로 밝혀졌다,고야구곡 가운데 7,8,9곡은 밀양댐 건설로 수몰되어 아쉬움이 남는다.시간이 허락한다면 고야구곡을 답사해보는 것도 뜻깊은 일일 것이다.
이를 보면 역시 점필재 김종직과 그 문도들에 의한 영남사림파의 형성과 구곡문화의 전개가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박구원은 김종직과 사우관계를 맺고 있고 박하담 역시 기묘사화 이후 강화된 사림의식을 체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조선의 구곡문화는 퇴계의 시대에 들어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또한 16세기 이후 전개된 구곡문화의 흐름을 살펴보면, 기호지방의 적극적인 활동에 주목하게 된다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북으로 흘러 화양구곡위 원류가 된다.또한 백두대간 대야산 밀재에서 시원한 물줄기와 서로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으로 달천 상류 괴강(槐江) 에 든다.처음엔 두 물줄기는 멀리서부터 구불구불 흘러오다가 선유동仙遊洞과 송면松面 사이에서 한 몸이 되어 파천巴串에 이르면 점점 평평하게 넓게 퍼져서 흐르는데 계곡은 온통 암반이며 바닥의 돌은 모두 희다.그 가운데 갈라진 틈 사이로 시냇물이 흘러 그 모양이 천串과 같다 하여 파천巴串이라 부른다.
서울 동기들과 반가운 해후는 언제나 시끌벅적 하다.이게 사람 사는 맛이리라.멀리서 온 동기들의 면면이나 우리 모두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말을 이곳 물가에서 새삼 절감한다.
오후 1시,점심시간이다.이 수려한 풍경 속에 너럭바위에 앉아 벗들과 함께 하는 점심은 얼마나 값지랴!. 특히 부산 집행부가 준비한 밀치회는 산중진미로 지난해에 이어 최고였다.
〔삼삼오오 모인 즐거운 점심시간-이모습 저모습!〕
〔점식식사를 마치고 다함께〕
부산의 아름다운 홍이점 상인과 수명의 동반자!!! 우측엔 화양구곡가운데 9곡인 파천巴串 각자刻字-우암이 노닐던 화양계곡의 구곡은 우암의 수제자 권상하가 순서를 정하고 이름을 붙였고 민진원이 굽이마다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
파천에서 다같이 사진을 찍고, 8곡인 학소대로 간다.그런데 길은 천변으로 이어지지 않고 뜻밖에도 우측 숲속으로 들어간다.이를 두고 곁에 있던 자연파自然派 현영이는 못내 아쉬웠던지 다음에는 꼭 물길을 걸어보겠다고 벼른다.정녕 그의 말이 옳았다. 자연은 그저 눈으로만 보지 않고 손으로,발로 온몸을 맡겨야 제격이지 않겠는가. 답사하러 온 친구들은 저 푸른 냇물에 몸을 맡겼다던데....언제 다시 와서 물길을 걷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사진 왼편 아래로 물길은 유장하게 흘러가고 작은 둔덕 위로 숲길은 나보다 먼저 앞장선다.햇빛과 그늘이 조화를 이뤄 걷기에는 좋았다,군데군데 단풍이 눈길을 끌어당기기도 하고 미풍이 상쾌하게 스치고 지나가기도 한다.물줄기를 보지 못하고 숲길울 걷는 게 답답하기는 했지만 머릿 속은 청량하기만 했다.
화양구곡과 골골을 품고 있는 낙영산과 도명산의 단풍은 물론 화양구곡 또한 아직 철이 일러 제대로 된 가을빛은 보기 힘듫었다.그래도 숲속길에는 간간이 화려한 빛갈의 단풍이 화사하게 물들고 있었다.
〔 8곡 학소대 들머리서 바라본 7곡,와룡암 원경〕
15분 가량 숲길을 걸어 발품을 팔자 드디어 길은 천변으로 내려선다,8곡 학소대鶴巢臺가 지척이다.
〔 8곡 학소대鶴巢臺 전경〕
천변에는 바위봉우리가 층층이 쌓여 있고 봉우리 위엔 큰 돌아 얹혀 있다.예전에는 흙이 조금 덮여 있는 곳에 푸르고 무성한 노송이 있었다고 한다.청학이 새끼를 치기 위해 둥지를 만든 곳이라 하는데 지금은 흔적마저 없구나.신선과 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적어도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신선은 없고 대(臺)만 남았지만 신선경은 그대로이다.
학소대를 보기 위해 설치된 다리를 가득 메운 동기들-이 화양3교를 건너 산길로 들어서면 암릉이 빼어난 도명산에 오를 수 있고 낙영산을 이어 타거나 암서재가 있는 화양2교로 내려올 수 있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내 가을은 마침표를 찍었다.하루 종일 일터에 박혀 두억사니처럼 팍팍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탈풀하여 여기서 이가을을 보다니_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나무와 단풍 그리고 잡목이 얽혀 역광으로 눈부시게 드러내는 저 오묘한 세계를 어찌 도시의 내 작은 가게에서 상상이나 했을까보냐, 온 몸이 소름끼치도록 사무친다.드가 윤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명욱 내외,훙인 일곤 학소대를 배경으로〕
〔7곡 와룡암臥龍巖〕
학소대의 화양3교 아래에서 한 굽이 휘어져 꺾인 곳 오른편으로 커다란 너럭바위가 천변에 누워 있으니 와룡암臥龍巖이다.우측 바위롤 품은 산봉우리가 도명산 ,좌측 바위산이 낙영산이다.‘와룡(臥龍)’은 누워 있는 용이란 뜻이다. 주자가 55세 때 여산 오란봉 밑의 와룡이라는 곳에서 살면서 와룡암과 무후사(武侯祠)를 지어 촉한의 승상 제갈량을 제사지낸 고사와 관련돼 있다고 한다.
와룡암 천변으로 조금 내려가 학소대 화양3교 쪽을 되돌아본다.그 뒤에 흰바위 앙가슴을 한 낙영산이 암팡지다.
〔7곡,와룡암 주변 풍경〕
와룡암에서 바라본 화양2교쪽 계곡 풍경이다.
〔6곡 능운대凌雲臺에서〕
와룡암에서 두 세번 굽이 돌아 내려가면 오른쪽에 6곡인 능운대凌雲臺가 나온다. 한덩어리의 바위가 우뚝 솟아 대臺를 이루었는데 족히 수십 명은 앉을 수 있겠다. 능운대의‘능운(凌雲)’은 표표히 구름 위에 치솟는다는 뜻으로, 의기가 고상하고 속되지 않은 기품을 비유해 하는 말이다.
〔5곡 첨성대瞻臺〕
능운대에서 조금 아래 건너편 천변 위 산자락엔 첨성대가 하늘 위로 솟았다.첨성대는 깎아 놓은 듯 우뚝 서 있는 큰 바위 꼭대기에 겹겹의 돌이 서로 포개져 대臺를 이루고 있다.그 아래 바위엔 선조의 어필을 새겨 놓았다.또 돌로 만든 감실은 비바람을 가릴 수 있으니 참으로 기이하다 하겠다.
화양2교에서.바라본 첨성대는 그늘이 드리워 세세한 모습은 보기 어려웠으나 여기서 하늘의 별자리를 보기에 좋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첨성대에서 별 중의 별 북극성을 관찰하듯이 임금의 덕화가 미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첨성대 근경〕
〔첨성대가 바라뵈는 화양2교-현영,동렬,택렬,성환 그리고 서울동기회 회장 연호〕
〔마산에서 온 현기,성한,마산의 화원,택렬〕
〔화양2교에서 본 화양4곡 암서재로 이어지는 계곡 풍경〕
〔화양구곡의 4곡 금사담金沙潭과 암서재巖棲齋〕
화양2교를 건너자 화양구곡 가운데서 가장 풍광이 빼어나다는 금사담과 암서재가 눈에 들어온다.물과 돌이 어우러진 절경絶景과 구름이 드리운 그윽한 숲 사이로 굽이굽이 펼쳐진 기이한 경치가 선경仙景이라 할 만하다.
암서재와 파천이 화양구곡 가운데서도 경치가 빼어나다.흔히들 암서재의 맑고 수려함은 파천의 넓게 탁 트임만 못하고 파천의 넓게 탁 트임은 암서재의 맑고 아름다움만 못하다고들 한다. 이는 산수山水의 아름다움과 흥취를 느끼는 정도의 차이에 불과한 것일 터이다.
화양동 풍월주인,우암 송시열-조선의 주자(朱子)로 추앙받으면서 성리학과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 사상의 수호자임을 자처한 대학자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의 명분과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앞세워 항상 당쟁의 최선두나 배후에서 노론 세력을 이끈 탓에, 평생 동안 28차례나 벼슬살이와 귀양살이, 사직과 낙향을 거듭했다.
한때 자신의 제자이자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계획의 정치적 동지였던 효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난 후 우암은 보위를 이은 현종과 갈등을 빚었다. 낙향을 결심한 우암은 그의 나이 60세인 1666년(현종 7년) 8월 화양동계곡으로 들어온다.
화양동계곡은 원래 황양동이라 불렸다. 그러나 조선의 걸출한 선비 우암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화양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우암을 파옹(巴翁)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가 화양구곡 중 하나인 9곡 파곶[巴串]에 살았기 때문이다. 만동묘(萬東廟)와 우암을 모신 화양서원이 있는 이곳 화양동계곡은 가히 우암의 거대한 산수정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암은 화양계곡 남쪽에 정사를 짓고 은거하면서 때로 지팡이를 끌고 구곡을 오르내리며 소요음영했다. 또한 금사대 근처 바위 위에 암재(巖齋)라는 작은 서재를 짓고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뒤바뀐 세상은 그를 기어이 귀양길로 내몰았고, 얼마 안 있어 우암은 83세에 사약을 받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우암이 사라진 화양동계곡은 산수정원의 의미를 잃고 다시 원래의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화양구곡 4곡인 금사담은 맑은 물 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가루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석양이 붉게 비치면 물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그러면 모래 역시 금빛이다.
우암과 깊이 교우했던 유학자이자 수제자인 권상하는 그의 시문집에서 암서재 부근의 아름다운 경관과 달밤의 풍류를 이렇게 표현했다.
“암서재가 있는 대(臺) 아래에 깊은 못이 있어 충분히 뗏목도 배도 띄울 만하였으므로, 가끔 일엽편주를 띄우고 물결 따라 오르내리다 보면 물이 밑바닥까지 환히 보이도록 맑아서 물고기를 하나하나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밤에 암서재 난간에 기대고 있노라면 마치 낮과 같이 환한 달빛이 영롱하게 서로 비추어 수정세계(水晶世界)를 방불케 하였다. 선생이 여기에서 지팡이를 끌고 시문을 읊으면 소리가 금석(金石) 같았고, 언뜻 세속 밖에 우뚝 서 있는 듯 하였으니, 주자의 무이정사(武夷精舍) 띳집의 맑은 흥취와 비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선생이 기사년에 참화로 세상을 떠난 후에 암서재가 무너지고 산 어귀가 적막해지니,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가슴 아파 했다. 그로부터 26년 뒤, 1715년(숙종 41)에 김진옥이라는 사람이 서재를 다시 지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아서 의연히 옛날의 모양을 갖추었다. 다시 6년이 지난 후에 권상하가 '암서재'라고 이름 지였다.
〔3곡 읍궁암泣弓巖〕
금사담을 지나 수십 보 아래의 읍궁암은 우암이 효종(孝宗) 임금의 제삿날이면 통곡한 곳이라 한다 .넓은 암반에 수많은 구멍이 난 너럭바위다. 옛날 중국 황제가 정호(鼎湖)라는 곳에서 솥을 만든 후 용을 타고 신하와 후비(后妃) 70여 인과 함께 승천하려하자 남아 있던 신하들이 함께 가려고 용의 수염을 잡았는데, 용의 수염이 빠지면서 신하들은 추락하고 황제가 가지고 있던 검과 함께 활[弓]이 떨어졌다 한다. 이 이야기는 흔히 임금의 서거를 슬퍼하는 고사로 쓰이는데, 읍궁암(泣弓巖)의‘궁(弓)’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읍궁암 부근의 가을빛과 산수〕
〔읍궁암 지나 운영담으로 흐르는 물길 주위의 풍경〕
〔운영담 못미쳐 계류 풍경〕
〔2곡 운영담의 파노라마〕
〔운영담 근경〕
〔운영담 일원에서 소요하는 동기들!!!.〕
〔화양서원(좌)과 만동묘(우)〕
읍궁암 곁 평지의 정사精舍(홍수로 유실되었음)는 우암이 일찍이 거처한 곳이며 정사의 남쪽 조금 위엔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고 만동묘 아래엔 화양서원華陽書院을 세웠다.
금빛 윤슬이 일렁이는 2곡 운영담 천변에서 여유롭게 답소하는 동기들.특히 오른쪽 조희부 동기는 답사 때는 물론이거니와 합동산행애서도 화양구곡을 앞장서서 안내하며 매 굽이마다 세세한 설명을 곁들여주었다,희부는 인근 청천에 거주하며 이 일대를 소상하게 알고 있는 터라 동기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상인! 운영담의 소용돌이치는 물이랑이 예술이네〕
〔2곡 운영암雲影潭〕
화양서원의 북쪽 조금 아래에 운영담이 있는데 금사담 하류에서 읍궁암까지 바위와 돌을 만나 물살은 빠르다.운영담에 이르면 고르고 넓은 물이 못을 이루고 곁의 석벽은 짙푸른 등나무 덩쿨이 뒤섞여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구름의 그림자가 맑은 물에 거울처럼 비친다 하여 얻은 이름이리라.
운영담은 하류 1곡 경천벽에서 1km가량 올라간 위치에 있다. 오른쪽 암벽 아랫쪽에‘雲影潭(운영담)’이라는 예서가 새겨져 있는데,이것은 주자의 유명한 <관서유감(觀書有感)> 시의‘천광운영(天光雲影)‘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선명히 비칠 정도로 물이 맑고 깨끗할 때 흔히 이 표현을 쓴다.
〔운영담을 배경으로 선 동기들〕
〔운영담의 가을빛〕
〔하늘빛과 석벽,가을 숲이 물에 투영된 운영담〕
〔운영담 아래 수위롤 조절하기 위한 수중보〕
동기들이 석식을 위해 모인 화양서원 곁 식당을 뒤로 하고 홍인 일곤과 나는 경천벽 탐방을 위해 수중보 아래 화양1교를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차량이 다니는 도로를 따라 걸으니 단풍이 제법 화사하다.그러나 이런 길은 화양동계곡의 풍치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그래서 우리는 물가로 난 길로 들어선다.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선 흙길은 걷기에도 좋았다
아울러 물가와 이웃해 있는 그 길은 군데군데 천변의 모습도 감상할 수 있어 눈을 시원하게 했다.
〔화양구곡의 1곡,경천벽(擎天壁)〕
화양구곡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경천벽이다. 경천벽擎天壁이라는 글자가 표면에 새겨진 암벽이 가파르게 솟은 모습이 말 그대로 하늘을 떠받치고 서있는 듯하다.우암이 소요음영하던 화양구곡 9곡 파천에서 1곡 경천벽까지의 아홉 굽이의 모습을 담아보았다.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 들어와 정사를 짓고 살면서 우암은, “전에 살던 회덕(懷德)에서 이 화양동 계곡으로 들어오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 마치 신선의 세계에 온 듯하다. 이곳에서 회덕을 돌아보면 그곳은 참으로 티끌 같은 세상이다.”라고 말했다. 바깥세상을 속계로, 화양동을 선계로 본 것이다.
지금의 화양구곡 풍광은 우암이 소요하던 그때와 많이 다르다. 계곡물도 혼탁해졌고 수량도 줄어들었으며 천변의 나무나 정자도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그러나 이 땅에 구곡의 원형을 제대로 갖춘 곳은 화천의 곡은구곡과 더불어 이곳 화양구곡,문경의 선유구곡 뿐이니 오늘 우리가 화양구곡을 유람할 수 있던 것은 그나마 행운이 아니겠는가.
우암 송시열은 충청도 회덕懷德 사람이다.24세에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율곡 이이의 학통을 물려받았다.1년 뒤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에게 학문을 배워 대성했다.젊은 시절 스승이 있는 연산連山까지 50리 길을 오가며 하루 100리 길을 걸어다녔다.그 덕에 다리가 무척이나 튼튼해졌다.그 바람에 넓은 개울이나 도랑을 거의 평지같이 걸을 정도였다고 한다. 늙어서 산수유람을 다닐 때는 문하생들이 미쳐 따라갈 수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빨기 걷기의 달인이었다.
우암은 아주 가난했기에 산나물로 만든 몇 가지 반찬이 고작이었고 때로는 끼니를 굶기도 했다.평소 소식을 하는데다 밤늦게 귀가하면 저녁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담배는 해롭다 해서 피우지 않았고 젊은 시절부터 술과 여자를 멀리 했다.80세 가까이 돼도 머리카락에 윤기가 있어 제자들의 탄복을 자아내기도 했다.또 정신 건강에 주의를 기울였고 비록 가난한 살림이었으니 편안함을 즐기는 자세로 지냈다.그랬기에 수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마음 건강의 달인이기도 했다.
우람은 곧음(直)을 종신토록 따르는 준칙으로 삼았다.이 곧음은 그릇됨을 없애고 선함을 홀로 지키는 것,곧 마음이 곧고(心直) 몸이 곧고(身直),곧지 않음이 없는(無所不直)의 경지이다.그는 이것이 사람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도덕의 경지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너무 강직한 나머지 타협할 줄을 몰라 수많은 정적을 만들었고 정쟁에 휩싸였다.그래서 사돈인 윤휴, 윤중과 불화가 생겨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서기도 했다.그는 결국 숙종 때 예송문제로 남인의 공격을 받아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던 귀양길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르렀다.우암 사후 다시 정권을 잡은 노론은 한일합방 때까지 200여년간 정국을 좌지우지 했다 .
〔돌아오는 차중에서-마산 갑준,혜산 현기의 파안대소〕
300년 전에 설정되고 경영되던 화양구곡 원림은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높아 2014년 괴산 화양구곡槐山 華陽九曲이란 이름으로 제110호 명승으로 지정되었다,문화재로 지정된 명승으로는 거제 해금강,진도의 바닷길,진안 마이산,부산 태종대,문경새재,남원 광한루,동해 무릉계곡,순천만,도담삼봉,영월 청령포 등이 있다.
이번 화양구곡을 탐방하면서 답사를 다녀온 서울의 홍총무 순길,성모,동기회장 연호와 부산의 산행대장 금구,익희,동기회 회장 원경(송시열의 20대손?)과 답사는 물론 정기산행 때 구곡을 안내해준 조희부 동기에게 고마운 마음을 다시 전한다.아울러 유람 일정은 물론 먹거리와 동기들의 많은 동참(서울 36명/부산 29명)을 이끌어준 서울,부산 집행부에게도 심심한 고마움을 표한다.
세상그물에 갇힌 나는 바깥 나들이를 전혀 하지 못하는 터라 이번 화양구곡 유람을 통해 자연과 호흡하며 동기들과 나눈 시간이 너무 값지고 알찼다.덧붙여 낮에는 전혀 글을 쓰지 못하다 보니 답사기를 이렇게 늦게 내놓아 부끄러울 따름이다,너그럽게 양해바란다.아울러 부실한 내 핸펀의 사진을 보충해 답사기를 쓰도록 해준 서울의 드가 윤득,홍인 일곤,성집,상인한테도 깊이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불원천리 올랜도에서 고국을 찾아 ,바쁜 일정속에서도 동참해준 바람소리 재청 동기에게도 격려와 함께 고마운 마음 전한다,
제아무리 빼어난 풍경일지언정그곳에 사람의 향훈과 체취가 서리지 않으면 황량한 법이다.화양구곡은 엣사람과 오늘날 우리의 입김이 서린 곳이라 친근한 감이 들었다. 화양구곡을 유람하면서 땅이 청정하면 마음도 깨끗해진다는 경귀가 가슴에 와 닿는다.끝으로 하서 김인후의 시라고도 하고 우암 송시열의 시라고도 하는 청산가를 여기 적어본다,
청산(靑山)도 절로절로 녹수(錄水)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 물 절로 산수(山水) 간(間)에 나도 절로
그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참조 문헌- 화양지와 수암 권상하의 한수재문집,한국의 정원 및 우암연구소의 저작물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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