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신록-저 초록세상에 빠지고 싶다.] *모든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사진을 볼 수 있어요.*
1.들어가면서
"더 높이 오르기 위하여 나는 더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고 니체는 말했다.그렇다,나는 더 높이 산에 오르기 위해 저자거리로 숨었다.1년 8개월 동안 그 저자거리에서 숨죽이며 산을 잊고 살아왔다.한번도 집과 가게를 떠나지 못한 나날들-이 세상은 내 눈높이 아래에만 있었다.결국 세상 그물에 옴짝없이 갇힌 셈이었다.높이 오른다는 수직본능은 생각도 못했고 나들이마저 사치에 불과했다.계절이 바뀌고 신록이 움틀 즈음,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본다.눈이 부셨다.무뎌지고 초라해진 육신이 부끄러웠다.이 몸으로 어딜 간단 말인가?
작년 가을,닭쟁이가 모인 굽네가족모임에서 봄나들이를 가보자는 제의가 나왔다. 올 5월부턴 바빠질 테니 4월 초순이 결행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들 했다.모임에서 중지를 모은 끝에 4월 6일 나들이를 가기로 정했다.우연찮게 나들이코스 안내는 내가 맡았다.신록이 무성한 5월이라면,꽃구경을 핑계 삼아 갈 만한 산과 들이 어디 한둘이랴만 4월은 벚꽃 구경을 제외하곤 딱히 가볼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게다가 들쭉날쭉한 꽃샘추위로 예년보다 개화시기가 늦어졌으니 하동십리 벚꽃길이나 쌍계사 탐방도 별로였고,진해군항제마저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천안함사건으로 마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2~3시간 안팎의 산행과 맛있는 먹거리 탐방이 대안으로 떠올랐다.그런 산행지로는 합천 황매산 자락 모산재가 제격이다.하루 종일 움추린 채 생활하는 우리에겐 신선하면서도 강렬한 기운이 필요하다.모산재는 신령스런 바위산이다.이를 반증하듯 산자락 아래에는 이름 그대로 천년 절집 영암사(靈岩寺)가 들어서 있질 않은가.산행을 마치고 나면 20분 거리,합천 삼가에 한우전문식당이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시간이 허락하면 반성에 있는 경남수목원을 둘러보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성인터체인지 들목에 있는 서박사 칡냉면으로 마무리를 할 계획이었다.
치킨점이 매양 그러하듯 부부가 함께 일하지 않으면 가게를 꾸려나갈 수가 없다.배달은 주로 남편 몫,주방에서 요리는 아내가 떠맡는 생계형이다.거의 12시간 넘게 쉬지도 못하고 생업에 매달리는 탓에 크고작은 말다툼도 비일비재하다.그래서 '부부는 함께 일하지 말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어디 그뿐이랴,까다로운 고객들의 상식을 벗어난 언행도 아내들이 오롯이 받아들여야 한다.그러다 보니 아내의 불만은 쌓이고 쌓여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오죽했으면 "이건 징역살이야...."하며 볼멘소리를 할까보냐.이번 나들이도 따지고 보면.아내를 위한 배려가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밤 12시 지나 주문을 넣고 오븐 청소를 마치고 나면 대개 새벽 1시나 2시경-그때 비로소 자유시간이다.그 시간에 어디로 갈 것인가.대낮 나들이는 꿈도 꾸지 못하는 게 우리네 일상이다.그래서 우리 닭쟁이들은 새벽에 만나 술추렴도 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게 된다.제아무리 친한 친구일망정 그 시간에 나오라고 불러낼 수 없으니 점점 멀어지고..... 그렇게 모임을 하면서 우린 자연스레 '달빛가족'이 되어버렸다. 동병상린이라고나 할까.이제 서로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히고 어려움을 털어놓고 보듬어줄 수 있으니 감히 가족이라 말해도 무방하리라.그래서 우리 모임엔 자질구레한 회칙 따위가 아예 없다. 회원들의 나이는 40대 초반부터 60대 중반에 이르지만 세월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낌 없는 대화를 나누며 친목을 다지니,때로는 형제처럼 때론 벗처럼 오붓하기만 하다.
우리 회원들은 잡초와 같은 삶을 산다.마음 낮추는 하심(下心)이 없으면 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그래서 알게 모르게 일상 속에서 삶의 도리를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우리는 만나기만 해도 즐겁다.특히 아내들의 수다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어디에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끼리끼리의 공감대가 이루어져 마냥 즐거운 것이리라.이번 나들이가 확정되자 제일 먼저 반긴 이들 역시 아내들이었고,이왕에 간다면 산행코스를 꼭 넣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내들이었다.나는 이런 바램을 저버릴 수 없었다.
[황매산주차장의 주례 수석님,총무 대신 철수님,회장인 송도 판동님,동대 상용님 09:19:49]
4월 6일 아침 7시,구덕운동장 후문을 뒤로 한 버스는 구덕터널을 벗어나 옛도축장 맞은편 도로에 멈춰 선다.거기서 엄궁 용수님 부부를 태웠다. 송도,엄궁,주례,대신,동대,동삼 부부 12명,감천 효손,성애 형제와 성애님의 짝지 수기님을 비롯 하단 기순님 모두 16명이 나들이에 동참했다.우리를 실은 버스는 남해고속도로를 거쳐 의령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의령으로 들어섰다.의령에서 칠곡,대의를 거쳐 합천군 삼가를 지난다.모산재 산행을 마치고 한우고기로 뒷풀이할 장소가 바로 이곳 삼가다.삼가에서 가회를 거쳐 9시 무렵 모산재 아래 가회면 중촌마을에 닿았다.
[황매산가든에서 국수로 허기를 달래고... 09:45:25]
주차장에 차를 대고 다들 아침을 거른 터라 인근 황매산가든에서 국수로 허기를 면했다.송도 판동님,엄궁 용수님과 주례 수석님은 국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캔맥주로 목을 축인다.평소 애주가가 아니랄까봐....황매산가든 주인장은 얼핏 보면 꼬장꼬장한 60대 중반처럼 보였다.하지만 78세라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그는 "산 좋고 물 좋은 이곳 산촌"이라며 웃는다.모산재가 해발 767m,중촌마을이 해발 360m이니 여름에도 선풍기가 필요치 읺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기가 막히단다.이어서 그는 모산재와 황매산 자랑에 침이 마르지 않는다,특히 모산재는 소금강산이라 일컫어지며 그 아름다움이 다큐멘터리로 소개되기도 했단다.성수기에는 산객들이 줄을 서서 오르내린다는 모산재-오늘처럼 고즈녁할 때 찾은 우리는 행운이라며 모산재 감상 포인트까지 일러준다.일행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모산재 산행들머리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모산재 산행들머리에서 10:07:22]
2.모산재산행
영암사로 가는 길,우리는 절집 한 모롱이 못 미쳐 산행들머리에 멈춰 선다.다같이 증명사진을 찍는다.남정네들은 대체로 근엄한데 여인네들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자가 사진발에 훨씬 민감하다.엔돌핀이 팍팍 쏟아지는가 보다.오! 볼륨있는 웃음보...그 웃음에 기운이 넘친다.평소에 그토록 자제하던 웃음,절로 터져나오는 탄성인가,환희인가? 나는 셔터를 누르면서 나도 모르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오늘의 하일라이트가 바로 여기요,이것으로 모산재산행은 70% 완결된 셈이리라.저 웃음은 잠시 뒤 바윗길을 오르면서 사라지겠지만 그 웃음의 여운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비록 힘들고 지칠지언정 가슴에 파문처럼 밀려와 항시 웃음을 잃지 않게 될 것이리라.
[흐드러지게 핀 맑고 고운 진달래꽃.10:10:42]
다시 발품을 팔기 시작한다.이 얼마만의 걸음짓인가.나는 일행들에게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호흡에 맞춰 걸어보라고 귀띰해준다.사실 나도 1년 8개월의 공백기에 과연 산을 오를 수 있을까,아무런 준비없이 저 바위산을 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일행한테 한 그 말은 기실 나 자신을 타이르는 말이기도 했다.내가 감히 저 가족을 무턱대고 이 바위산으로 오게한 건 어쩌면 무리일런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우리 일행은 하루 일상의 절반을 끈기와 배짱으로 이겨내곤 하지 않는가.잡초처럼 모진 시간의 억압을 스스로 견뎌내는 저력을 알기 때문에 일행을 여기로 초대한 것이었다.
눈 앞에 진달래꽃이 탐스럽게 흐드러졌다.뒤따라오던 감천의 언니 효순님,동생 성애님은 "어쩜 이렇게 이쁠까?"하며 연신 감탄을 한다.겨우내 흙속에 감춰두었던 연분홍 빛깔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저 놀라운 신비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감천의 성애님,효순님 그 뒤로 주례 수석님,그리고 성애님의 짝지 수기님이 발품을 판다,10:11:17]
연분홍 진달래를 뒤로 하고 부드러운 흙길을 밟아오른다.도심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부드러움이 온몸을 휘감는다.솔숲에서는 솔향이 은은하게 배어나오고 바람결은 깃털처럼 몸에 와 감긴다.금세 기분이 고조된다.산길로 들어서자마자 우리 몸의 반응은 놀랄 만큼 빠르다.회색 건물에 갇혀 숨이 막힐 듯한 도시의 삶이란 이렇게 자연 앞에서는 허무하게 스러지고만다.
[동삼 수영님,엄궁 유화님,하단 기순님,엄궁 용수님과 동대 상용,유양님이 다리쉼을 한다. 10:13:45]
평탄한 산길을 오르다 둥그스럼한 바위와 만난다.모산재 바위산의 진면목을 알리는 신호탄이다.잠시 걸음을 멈춰 몸이 시키는 대로 옷매무새를 고치기도 하고 숨길도 고른다.산에서는 우리 몸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더우면 옷을 벗고 추우면 껴입으면 된다.애써 버틸 필요가 없다.자연이 하라는 대로 하면 편하다.
[모산재 산행의 길잡이,돛대바위가 보인다.10:17:25]
숲길을 걷다가 홀연 앞이 훤해지며 조망이 터지는 지점에 닿았다.고개를 드니 산등 너머로 돛대바위가 헌걸차게 치솟았다.당찬 기운이 느껴진다.이제 모산재산행의 길잡이인 저 돛대바위를 오르려면 산길은 갈지자 형상으로 이어진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군에 눈길을 주고 10:17:32]
돛대바위에서 시선을 오른편으로 돌리면 기묘한 형상의 바위군이 눈에 들어온다.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기경괴형(奇景怪形)의 바위들이 쌓여 눈길을 사로잡는다.모산재 고스락(정수리) 앞쪽 경관으로 천 길 벼랑이 병풍을 둘러쳤다.
[모나지 않고 둥근 바위 사잇길을 톺아 오르고 10:17:44]
푸름이 뚝뚝 듣는 솔숲을 배경으로 두리뭉실한 바위 사잇길을 따라 톺아 오른다.바위면은 단단하지 않고 그리 매끄럽지도 않다.아울러 풍화(風化)가 꽤 진행돼 모래가 깔린 곳도 많았다. 마사토로 변한 그런 곳은 제법 미끄러웠다.
[기암괴석을 등진 감천의 두 형제,동삼 수영님 10:18:11]
감천의 수기님이 디카를 꺼내더니 예의 그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어깨동무를 한 성애(좌)님과 효순(우)님한테 촛점을 맞춘다.그 앞쪽에 내 마눌 수영이 바위보다 더 기이한 표정을 짓는다. 왼쪽 잘룩이가 천하의 명당터가 있다는 무지개터,오른쪽 잘룩이는 기도터 바로 위 돈대(墩臺)로 가는 들목이다.
[병풍을 둘러친 듯한 북동릉의 장엄한 바위능선 10:18:21]
모산재 정수리를 지나 순결바위로 물결치는 북동릉의 거대한 바위능선이 펼쳐진다.다만 그 앞쪽에 또하나의 바위능선이 가로막아 전모를 가늠키는 어렵지만 그 장엄함은 보는 이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이 바위능선의 전모를 보려면 돛대바위에 올라서야 한다.
[짙은 솔숲 너머 대기저수지 푸른 물엔 산그림자 얼비치고 10:19:25]
세상살이가 그러하듯 산행도 때로는 올라온 길을 되돌아봐야 한다.둥글넙적한 바윗돌을 이리저리 돌아 올라서 뒤돌아보니 짙푸른 솔숲 너머로 대기저수지 푸른 물이 골안에 가득하여 눈을 시원하게해준다.황매산과 모산재 산자락 골골의 물이 대기저수지에 몸을 섞어 가회면 둔내리,중촌리,도탄리,오도리 주민들의 용수(用水)가 된다.
[풍화된 마사토길,로프를 쥐고 포즈를 잡은 감천 효순님,하단 기순님과 감천 성애님 10:20:52]
이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면서 산길은 시나브로 가팔라진다.화인더에 잡힌 세 여성회원 모두 배시시 뭇음을 띄며 즐거운 모습이다.이제부터 가파른 길을 오르려면 평소 잘 안 쓰던 팔과 다리근육을 활발하게 움직여야 한다.산행의 좋은 점은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서서히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점이라 하겠다.몸이 대자연에 순응하면서 몸안에 감춰졌던 본래의 잠재적인 힘이 발휘된다.산행이 다른 운동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주례 수석,옥순 부부의 걸음짓 10:22:20]
솔숲을 뚫고 얼기설기 얽힌 바윗돌과 인절미같이 길쭉한 바윗돌이 널부러진 바윗길을 주례의 수석님,옥순님 부부가 오른다. 어디서 구했는지 나무지팡이를 든 수석님의 모습이 의젓하다.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수석 도사님!!!
[무념무상의 송도 판동회장님,돌이 굴러와요.비키세요!!! 10:23:19]
주례 부부가 지나가고 이어서 모임의 회장인 송도 판동님이 올라온다.천연덕스럽고 장난끼 많은 백만불짜리 웃음의 소유자-그 앞에서 화를 내다가도 그의 파안대소에 덩달아 웃을 수밖에 없는 타고난 재주꾼이다. 그래서 우린 장난꾸러기란 애칭을 붙였지만 너울가지(붙임성) 좋고 장사에는 도(道)가 튼 사람이다.
[멋쟁이 엄궁 용수님,유화님-인기 짱!!! 10:23:36]
약간 경사진 민탈 바윗길에 멋쟁이 부부 엄궁의 용수,유화님이 떡 버티고 선다.정말 닮은 미남미녀다.부부는 살아가면서 닮아간다더니 그 말이 허언은 아닌가 보다.용수님은 한마디로 한량이다,술 좋아하고 노는 것 좋아해서 모임이 하도 많아 약속이 줄을 선다.닭쟁이하면서 어떻게 그 많은 모임에 얼굴을 내비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그렇다 보니 애주가인 용수님,취기가 돌면 모시러가서 운전은 늘 유화님의 몫이란다.대리운전비(?)는 제대로 받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남편을 다득이며 사는 재미가 쏠쏠하리라 믿어 본다.
[민탈 바윗길을 오르기 전 대신 성은님-몸이 더워지나보다 10:23:47]
민탈 바윗길을 오르기 전 대신의 성은님이 웃옷을 벗는다.몸이 더워지나 보다.멋 모르고 철수님 따라왔다가 몸고생 좀 했을 겁니다.며칠 뒤 만나니 다리는 다음날 플렸는데 어깨쭉지와 겨드랑이가 결려 죽겠다고 하소연하더군요."그게 산행이 아니냐"고 했더니 과히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더군요.
[대슬랩을 등진 주례 옥순님의 역동적인 포즈 10:24:00]
민탈 바윗길을 올라서기 전 사진찍기 좋은 뷰포인트,너럭바위가 나온다.치맛자락을 드리운 듯한 대슬랩을 배경으로 주례의 옥순님이 익숙한 자세로 피사체가 된다.엉덩이를 약간 왼편으로 틀고 허리춤에는 손을 내려놓는다.어디선가 본 듯한 자세가 나온 것이다.역시 사진도 찍혀본 사람이 잘 찍히는가 보다.멋진 옥순님,서방님 술추렴에 때론 힘들겠지만 이렇게 쎈스쟁이이니 슬기롭게 넘어가리라 확신합니다.
[난형난제라 할까 감천 효순님,성애님의 다정한 모습이 부럽다.10:24:45]
우리 회원가운데 부부가 아닌 회원이 두 곳이 있는데 감천과 하단이 그렇다.하단은 어머니와 아들,감천은 여형제가 주축이 되어 매장을 운영한다.이번 나들이에 하단은 어머니 기순님만 왔고 감천은 두 형제에다 동생의 짝지,수기님이 동참했다.평소 운동을 즐긴다는 두 형제는 몸매도 날렵할 뿐더러 걸음짓도 경쾌하다.비록 등산 배낭이 아니라 나들이 가방에다 운동화를 신었지만 자연을 음미하는 자세가 그 어느 누구보다 진지했다.수기님이 어깨뼈를 다친 뒤로 업무에서 멀어지자 더 끈끈한 형제애를 발휘하여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돈독한 우애와 믿음으로 똘똘 뭉친 감천 형제분께 성원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그리고 짝지 수기님도 자주 어울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리요.
[커플룩의 주인공 동대 유양,상용님 10:25:09]
저 붉은색 커플룩은 대체 누구일까? 이 산중에 웬 붉은악마가 나타났남...오해마시라 바로 동대의 상용,우양님이다.회원 중에서 가장 늦게 지난해 5월 문을 연 동대,총무를 맡은 서대와 이웃해 있으면서도 서로 사이좋게 교류하며 모임에도 동참,친목을 다져오고 있다.또한 동대는 우리 점포에서 오픈교육을 받았으니 나와 인연이 깊기도 하다.바늘 가는 데 실이 간다.이를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한다면 상용,유양님을 이르는 말일 터이다.부창부수란 말 그대로 풀면 서방이 노래 부르면 아내도 따라 한다는 말이 아닌가...상용님과 유양님의 창가 실력 또한 어금버금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수준급이다.
후발주자로 장사에 뛰어들었으니 어려움도 많을 테지만 한달에 한번 정기모임은 물론 번개모임에도 불참한 적이 없다.이번에 송도 판동님의 짝지 춘선님의 무릎팍 수술 후 문병을 제일 먼저 제안할 정도로 의리파다.그런 상용님도 몇달 전 뜻하지 않게 오토바이가 넘어지면서 발목에 사고를 당했다.지금은 거의 회복되었다고는 하나 온전하게 돌아온 것은 아니다.산행들머리부터 선두에 서길래 고개를 갸우뚱했는데.아니나 다를까 얼마 못 가서 슬슬 뒤쳐지기 시작한다.과연 암릉투성이인 바위산을 탈 수 있을까 걱정마저 들었다.이런 우려를 털고 무탈하게 산행을 마쳤으니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민탈 바윗길의 철수님,수석님 10:25:54]
너럭바위에서 대슬랩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고개를 돌리니 경사진 민탈 바윗길에 주례 수석님과 서대 철수님이 보였다.나는 그 순간을 낚아챈다.서대 철수님 말로는 가장 멋진 사진이라며 엄지를 세웠지만 하늘 배경이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디카의 한계만 실감했다.
[아름다운 용모,날렵한 걸음걸이의 소유자 하단의 기순님,10:26:09]
하단 기순님이 화인더에 잡혔다.늘씬한 몸매에 이쁜 얼굴이 돋보인다.젊은 시절에는 뭇 남성의 표적이 되었을 법하다.산행도 수준급 경력의 소유자.옷차림만 봐도 한눈에 산꾼이 틀림없다.초기에는 아들과 함께 매장을 운영하더니 지금은 돈까스 점포를 따로 열어 성업중이라 한다.오후 8시 일을 마치고 아들한테 와서 주방을 맡고 있는 억척 주부이기도 하다.이번 나들이에 산행을 한다고 하니 선뜻 따라나선 기순님,물찬 제비처럼 걸음이 날렵하다.다음에는 아들과 함께하기를 바란다오.
[철수와 영희(?)님의 하니문인가? 10:26:27]
이 땅에서 전공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외도 아닌 외도로 삶을 사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서대 철수,성은님도 그렇다.둘 다 미술학도지만 그림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그림 그려 밥 먹고 살기 힘든 현실이 참으로 측은하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태어날 때부터 그림만 그리라고 정해진 것은 아닐 것이다.삶 속에서 전공을 얼마든지 원용(遠用)할 수 있을 것이다.40초반의 젊은 부부이지만 감수성 강하고 다정다감한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한 경력 때문일런지도 모른다.인생유전(人生流轉)이라 하지 않던가.좀더 나이가 들면 정말로 바라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리라.우리 모임은 그런 철수님을 총무로 두어 행복하다.철수와 영희 아니 성은님이 꼬옥 껴안고 대슬랩을 등지고 섰다.흡사 신혼여행길의 연인 같다.
[역동적인 대슬랩을 배경으로 선 붉은岳馬 상용,유양님 10:26:56]
[엄궁 유화님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교? 10:28:51]
민탈 바윗길을 지나면 산길은 가팔라지면서 조금씩 울퉁불퉁 험해지기 시작한다.엄궁의 유화님이 바위를 올라서서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기며 걸음을 옮긴다.얼마 전 중국에서 일하다 인천에 정착한 아들 세간살이를 마련해줄 날인데 그만 나들이를 왔으니 걱정이 되나요.아무렴,산에서는 그런 고민 다 잊어버려요.유화님!
[지팡이를 든 수석님,그 앞에 용수님의 기발한 제스쳐가 일품이네 10:29:36]
민드스름한 바위를 빠져 오르는데 저만치 작은 바윗돌에 걸터앉은 엄궁 용수님,천진하면서도 우스꽝스런 자세로 우릴 반긴다.그 뒤로 육지환 지팡이를 흉내낸 주례 수석님이 아무 말 없이 돌길을 더터오른다. 두 분 모두 산타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다.역시 술 좋아하는 사람 치고 산수 유람하는데 빠지는 이가 있을까 보냐. ㅎㅎㅎㅎ
[바위를 박차고 돌진하려는 저 멧돼지-모산재의 본색이 드러난다.10:30:27]
앞만 보고 오를 때는 숲이 가려 보이지 않더니 바위턱에 올라서서 돌아보니 입이 떡 벌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과연 모산재답다.저기 저건 멧돼지 아닌가.금세라도 바위를 박차고 돌진할 듯 기세당당하다.저 모롱이 막 돌아나오는 성은님,멧돼지 조심하세요!!!
[멧돼지바위를 지나는 성은,철수님-물리지 않은게 천만다행이네. 10:30:38]
멧돼지바위를 지나는 성은,철수님.몸이 움찔거리지 않던가요? 두 눈 부릅뜨고 콧김 씰룩씰룩 내뿜는 저 멧돼지의 힘찬 기운,그래서 모산재는 기운이 엄청 센 산이라 하는가 보다.이런 기세등등한 멧돼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판동 아우님이 뒤따르고 있다.모산재의 특색은 온통 바위산이며 기암괴석의 전시장 같다는 것이다.보는 사람과 보는 각도에 따라 돛대,코끼리,돼지,하마 따위 온갖 모양새의 바위들이 널려 있다는 점이다.돛대바위로 오르는 암릉은 기묘한 바위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듯하고 모산재 정수리 부근은 반반하고 넓은 암반으로 이어지며 느긋하게 뻗쳐 있어 여유롭다.하지만 모산재 오른편,북동쪽으로 열린 능선은 골짜기 쪽으론 까마득한 벼랑을 이루고 있어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바윗길이 가파르게 허리를 펴고 일어서니 우린 몸을 낮출 수밖에 없고....10:31:29]
아,이제 돛대바위가 가까워지면서 바윗길은 가풀막지기 시작한다.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산길이 일어선다.떡시루같은 바위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바윗길 틈서리를 일행은 헤집고 오른다.모산재의 본색이 서서히 드러난다.
[까마득한 돛대바위 아래,두꺼비 형상의 바위에 선 수석,용수님 10:33:43]
가풀막진 바윗길을 오르니 주례 수석님과 엄궁 용수님이 첨탑처럼 치솟은 돛대바위 아래,두꺼비바위 어름에서 올라온 길과 가회면 일대를 조망하며 웃고 있다.바윗길 허리를 돌아가면 한바탕 씨름을 해야 할 난코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힘든 구간에서 성은님을 끌어올리는 철수님 10:35:06]
두꺼비바위를 지나 암릉을 오른쪽으로 돌면 가장자리에 안전용 로프가 처져 있지만,큼지막한 돌확을 딛고 올라가야 한다.팔을 힘껏 당기고 다리는 균형을 잡기 위해 버티고 서야 한다.저 아래에서부터 '홀로서기"를 강조하던 철수님이 보다 못해 아내의 팔을 잡아 당기고 있다.이런 구간을 거쳐야 비로소 정수리에 닿게 되는 것이다.산에서 맑은 공기,시원한 바람,청량한 물,아름다운 풍광은 무상이지만 산을 오르내리는 일엔 공짜가 없다.제 스스로 홀로서야 한다.그러므로 산행은 셀프이며 스스로 하는 D.I.Y(Do It Yourself)이다.처음엔 누구나 남의 힘을 빌리게 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스스로 해낼 수 있다,그런 뜻에서 어릴 적부터 산행(넓은 의미로는 자연)을 가르치면 어린이의 독립심을 키우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동대 유양,상용님 돌확을 오르다 10:36:03]
마지막으로 동대 상용,유양 부부가 돌확을 오른다.돌확이 미끄러워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자신이 없으면 두 손으로 돌확을 잡고 오를 수 밖에 없다.오른쪽 로프가 시작되는 부근에 바위를 뚫고 올라와 머리를 움츠린 거북이와 그 밑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큼지막한 개구리가 유별나다.
[암갈색 너럭바위에서 환호하는 감천 가족 10:37:07]
마당같이 평평한 바위에 이르렀다.고개들 드니 로프가 끝나는 지점에 암갈색의 집채만한 너럭바위에 감천 가족 성애,수기님과 효순님이 올라가 브이 자를 그리고 손을 흔들며 환호한다.그 위에는 주례 옥순님이 발품을 팔고 있다.이 너럭바위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오늘의 하일라이트,돛대바위로 오르는 까꿀막진 철계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10:38:33]
암갈색 너럭바위로 오르다 뒤돌아보니 겉옷을 열어제낀 판동 회장과 동대 유양,상용님이 올라오고 있다.판동님의 짝지 춘선님이 몸이 안 좋아 영암사 부근에서 쑥이나 캔다며 버스에 남았는데,졸지에 외톨이가 된 판동님,오늘은 좀 외로워 보인다.
[기이한 모습의 암릉군 10:38:52]
등산로 오른편으로 카메라 화인더를 돌리니 나즈막한 산등에 기묘한 암릉군이 봄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흡사 바다사자가 서로 몸을 비비며 군집한 듯한 형상이다.그 뒤로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영암사가 내려다보인다.
[10:39:34]
암갈색 너럭바위 끄트머리에 있는 돌계단이다.돌계단을 딛고 둥근 바위에 등을 돌리고 앉은 주례 수석님과 감천 가족,하늘가 능선에 돛대바위가 성큼 다가선다.
[깎아지른 벼랑에 매달린 기도처와 숨은그림 찾기 10:40:20]
드디어 모산재가 자랑하는 거대한 바위벼랑이 시선을 압도한다.저 아래 산길에서는 윗부분만 보이더니 이제 제 모습을 드러낸다.깎아지른 절벽 밑,비를 피할 바위턱이 있는 사각형의 기도처가 눈에 띈다.벼랑에 아슬아슬 매달린 그곳이 궁금하다.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그리고 숨은그림이 하나 더 있다.기도처에서 오른쪽 위로 거대한 돼지가 절벽 끝을 막 빠져나올 듯한 자세로 게걸스럽게 혓바닥을 내밀고 있다.내 평생 저렇게 거대한 몸집의 돼지는 처음 본다.
[모산재 본색-천 길 바위벼랑을 등진 주례 옥순님-그 위에 거대한 보살이 현현(現顯)하고...10:40:27]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순결바위로 이어지는 북동릉의 바위벼랑이 나온다.정말 장관이다.주례 옥순님이 그 바위 병풍을 등지고 모델이 되았다.이 벼랑에도 슴은그림이 하나 있다.옥순님 바로 위에 이제 막 바위벽을 뚫고 반쯤 나온 듯한 보살이 그것이다.풍만한 가슴선과 팔,얼굴이 뚜렷하다.
[철계단 밑에서 바라본 북동릉의 장엄한 바위벼랑-각도는 다르지만 보살의 모습도 선명하다,10:46:09]
돛대바위 오른쪽 철계단으로 발품을 판다.철계단을 오르기 전 모산재에서 순결바위로 이어지는 북동릉의 암릉을 바라본다.저 아래애서 보았던 바로 그 보살이 각도만 달리할 뿐 이곳에서도 선명하다.
[돛대바위로 톺아오르는 마지막 관문-30여미터의 철계단길-스릴 만점이다.11:10:57]
마침내 돛대바위로 오르는 마지막 관문,철계단이다.30여미터 높이에 45도쯤 되는 경사가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한다.까꿀막지기 한량없는 철계단을 회원들이 톺아 오른다.고소공포증이 없어도 다리가 후들후들 거리고 오금이 저려 스릴 만점이다.이럴 땐 오로지 앞만 보고 오르는 게 상책이라나...
[힘들게 발품을 파는 유양,상용님 11:11:03]
후미의 동대,상용,유양님이 철계단으로 접근하고 있다.상용님은 다친 발목 때문에 걸음에 무리가 온 듯하고 유양님도 산행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그렇지만 산에서는 빠르고 늦음은 큰 의미가 없다.늦으면 늦는 대로 제 걸음에 맞게 걷는 게 중요하다.자신의 몸을 해칠 정도로 무리하면 산행은 득이 되긴커녕 되레 독이 되는 법이다. 그래서 부산이 낳은 시인이자 위대한 산꾼,장호 선생은 "산행은 발로 하되 가슴으로 머리로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까꿀막지기 한량없는 철계단을 톺아오르는 회원들. 11:21:11]
[철계단 들머리의 상용,유양님 11:11:58]
회원들이 철계단을 톺아 오른다.가파르면 가파른 만큼 몸을 낮출 수밖에 없다.어것이 순리다.사람 사는 도리도 이와 같다.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자신을 낮춰야 한다.그런 뜻에서 산행길은 사람이 사는 길과 다르지 않다.
[모산재 정수리에서 순결바위로 물결치는 북동릉의 장엄한 바위능선 11:14:45]
회원들은 코스는 짧지만 스릴 넘치는 철계단을 무탈하게 올라섰다.다들 휴우~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내가 마지막으로 철계단을 올라서서 숨돌릴 틈도 없이,모산재 정수리에서 순결바위로 물결치는 저 바위벼랑의 장관을 카메라에 담았다.이곳에서 바라보니 기도처가 흡사 토굴같고 그 아래 계곡은 협곡을 이뤘다.
[모산재의 생각하는 사람-수석님 11:15:33]
철계단을 올라서면 왼쪽 벼랑 끄트머리에 돛대바위가 있고 오른쪽 능선에는 사진에 보이는 암릉이 있다.저 암릉에 위태롭게 앉은 이는 누구인가.주례의 수석님이 도사처럼 멋들어진 자세로 향불(?)을 피우며 상념에 잠겨 있다.
[다시 웃음꽃 피우는 일행 11:15:37]
일행은 힘겹게 철계단을 올라온 탓인지 수석님이 위태롭게 앉아 있는 암릉 밑 펑퍼짐한 조망터에 모여 물도 마시고 가쁜 숨을 고른다.이제 비로소 웃음을 되찾은 모양이다.
[돛대바위를 감상하고 조망을 즐기는 판동님,서대 철수님,등을 돌린 감천 수기님 11:15:45]
조망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회원들에게 돛대바위를 가리키자 판동 회장을 비롯 대신 철수님,감천 수기님이 그곳으로 간다.돛대바위는 사방 어디서도 잘 보이는 그야말로 모산재 산행의 이정표 노릇을 한다. 천 길 벼랑 위 세찬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는 돛대바위는 정말 신기했다.
[금세라도 날아오를 듯한 돛대바위. 11:15:57]
[수석님,용수님 좋아요,좋아! 11:16:11]
주례 수석님은 아직도 돛대바위 맞은편 암릉 위에 옴짝않고 앉아 있었다.엄궁 용수님이 암릉을 오르더니 수석님 등 뒤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잡는다.평소 거리가 지척이라 교류가 빈번한 두 회원,이렇게 이 산중에서도 우의를 과시하는가 보다.소주 한 병이라도 꿰차고 올 건데 못내 아쉬울 뿐이다.
[주례 옥순님 어디로 가시나요? 은하수를 건너려구요! 11:16:41]
평일(화)이라 우리 회원들 말고는 산객은 아무도 없다.정말 조용하다.주말이라면 떠들석한 소음으로 산이 몸살을 앓을 텐데...이렇게 오붓하게 산속에 있다니 정말 얼마만에 맛보는 정일(靜逸)이냐.회원들은 느긋하게 돛대바위 주변을 맴돌며 사위를 감상한다.주례 옥순님이 돛대바위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그리로 다가간다.돛대를 움직여 어디로 가려는지...은하수를 건널 셈인가?
[대신 성은님,철수님 송도 판동님 주변 조망에 느긋함이 묻어나오네요. 11:17:05]
[하단 기순님,동삼 수영,동대 유양님 멋져요!!! 11:17:27]
[돛대바위에서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하는 동대 상용,유양님. 11:19:31]
[돛대바위를 뒤로 하고 돌길을 걸어오르는 일행 11:20:56]
돛대바위 주변에서 5분여 사위를 조망한 다음,발품을 판다.수석님이 올라갔던 암릉을 옆으로 돌아 넘으면 울퉁불퉁 험한 바윗길이 기다린다.한번 더 씨름을 해야 한다.정상은 아무한테나 쉽게 내주질 않나 보다.돛대바위 오름길이 고생 끝인 줄 알았던 회원들,아직 더 남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몸을 낮추어 미끄러운 돌길을 오르는 서대 성은님-힘들죠? 11:21:41]
[탁자바위에서 감암산을 조망하고.11:24:31]
3분 뒤,탁자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산등에 다다랐다.쉬어가며 조망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회원들은 '누룩덤'으로 유명한 건너편(서쪽)의 감암산 산세를 감상한다.황매산 산줄기가 남으로 나우리치다 베틀봉을 지나 바위산 감암산을 일구고,베틀봉에서 동쪽으로 날개쭉지를 펼쳐드는 또 하나의 산줄기에 기기묘묘한 모산재를 빚어놓았다. 감암산도 온통 암릉으로 이뤄져 스릴 만점의 산행을 할 수 있는 산이다.감암산은 모산재와 연계해서 산행을 하기도 하고 황매산과 연계할 수도 있다.
[사람인가 하마인가-기이한 형상의 바위 11:24:40]
탁자바위 앞쪽에 기이한 생김새의 큰바위가 시야를 가린다.하마를 닮은 듯도 하고 어찌 보면 턱을 괴고 명상을 하는 사람 모습 같기도 하다.보는 각도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인다. 모산재 산행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태만상의 바위를 감상하는데 있다.
[탁자바위에서 감암산을 등진 회원들-11:25:54]
모임의 총무이자 마당발,철수님은 "돛대바위 오름길이 장난이 아니네"라며 혀를 내두른다.그리곤 "하산길도 이렇게 험하고 힘이 드나요?"하며 묻는다.나는 모산재 북동릉의 바위능선을 가리키며 "아뇨.그렇게 힘들지 않아요."라고 말했다.회원들을 걱정하는 철수님의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느냐.특히 동대 상용,유양님이 염려스러웠으니..산은 언제나 그렇듯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위험하고 힘이 든다.무릎 부상도 대개 내리막길에서 일어난다.그렇다면 순결바위 지나 쏟아질 듯한 내리막길이 찜찜했으나 천천히 내려오면 무탈할 듯했다.
[천하의 명당터라는 무지개터 위에서 바라본 베틀봉(좌),황매평전,황매산 주봉(우)]
모산재 정수리로 걸음을 옮긴다.모산재로 가는 길은 숲과 훍이 조화를 이루는 특이한 지형이다.주능선이 풍화작용으로 인해 넓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흙이 두텁게 깔려 있으며 숲이 우거져 모산재 특유의 기암괴석을 찾을 수 없고 천 길 낭떠러지의 벼랑같은 느낌도 없다.오히려 호젓한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다.숲이 시작되는 곳 조금 위에 무지개터가 있다.자칫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무지개터에는 용마바위가 있고 작은 연못도 있다.이곳은 용이 하늘로 날으는 형국(飛龍上天). 천하제일의 명당으로 천자가 나오고 크나큰 부귀영화를 누릴 자리라 한다. 하지만 이곳에 묘를 쓰면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어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한다.어느 때인가 심한 가뭄이 들어 인근 주민들이 몰려와 무지개터를 파보니 송장이 나왔다고 한다.이에 주민들은 송장을 꺼내고 나니 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지개터 왼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감암산과 모산재가 갈래치는 분기봉,베틀봉이고 그 오른쪽 높은 봉우리가 바로 황매산이다.베틀봉과 황매산 사이가 철쭉으로 이름난 황매평전이다. 무지개터에서 모산재 정수리까지는 300미터 남짓한 거리다.
[무지개터로 가며 바라본 모산재-순결바위로 이어지는 북동릉 11:29:44]
모산재로 가며 순결바위로 나우리치는 북동릉의 바위능선을 잡아보았다.동쪽은 천애만애한 벼랑을 이뤄 장관을 연출하며 저 바위능선을 따라 하산길이 열려 있다.
[모산재 정수리로 가며 바라본 돛대바위와 철계단 11:35:47]
3면이 천 길 낭떠러지인 벼랑 끝에 돛대바위가 우뚝 선 모습이 절경이다.또한 30여미터에 이르는 철계단이 눈으로 보기에도 아슬아슬하다.일행은 저곳을 올랐다는 사실에 뿌듯한 자부심과 함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모산재 고스락-회원 뒤로 황매산 3봉이 아스라하다. 11:36:56]
숲속 흙길이 평탄하게 이어지며 잠시 후 다소 높은 구릉지에 모산재(767m)라는 표지석이 있다.모산재 고스락(정수리)이다.정수리에는 잔돌탑 하나가 모아져 있다. 모산재는 합천 제2명산인 황매산 줄기 아래에 터잡고 있다.주산(主山)인 황매산 사이에 400미터 대의 잘록이가 걸쳐 있으며 산이 아닌 재이다.특히 산이나 봉이란 이름이 아닌 재라는 지명이 바위산에 붙였다는 것은 더욱 이채롭다.
'재'는 높은 산의 고개를 말하고 '고개'는 산이나 언덕을 넘어 다니도록 길이 나 있는 비탈진 곳이다.모산재 부근과 황매산 산줄기를 넘어 산청군 차황면이나 신등면으로 나가는 '이검이고개' '차황재''베틀굴 따위의 고개가 있다.이처럼 모산재는 인근에 여러 개의 고개가 있고 재와 재를 잇는 길 가운데 있는 탓에 산보다는 재로 인식된 것이 아닌가 싶다.이밖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주민들은 모산재를 '잣골듬'이라 부르고 있다.'듬'이란 거대한 바위를 뜻한다.이는 모산재가 거대한 바위산이라는 점에서 '듬'이라고 말하는 것인 듯하다.나는 주민들이 부르는 대로 '잣골듬'을 선호하는 편이다.
모산재 고스락에서 처음으로 50중반의 부부 산객 4명을 만났다.인근에 산다는 이들은 1주일에 두서너 번 안방 드나들 듯 모산재를 찾는단다.그들의 호의로 나도 증명사진에 낄 수가 있었다.이후 하산길도 이들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내려왔다.
[모산재 지나 하산길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돛대바위와 철계단 11:43:08]
[대암벽의 돈대에서 바라본 돛대바위와 철계단-아찔한 고도감에 가슴이 뛴다. 11:46:03)
모산재 정수리에서 남동쪽 암릉 중간에 자리잡은 돗대바위는 높은 철계단 위의 넓은 암릉 씉에 돛대처럼 우뚝 솟아있다.이 바위는 벼랑 끄트머리에 서 있으며 3면이 천 길 낭떠러지이다.
모산재 산행은 모산재를 중심으로 왼편의 암릉을 타고 오른 뒤,고스락(정수리)를 거쳐 오른편 북동릉의 암릉을 타고 내려서는게 가장 좋다.이렇게 하면 영암사터와 문화재를 하산길에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모산재에 올랐다.모산재에서 하산은 숲속 길로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가면 철선을 늘여 막아놓은 곳에 이른다. 이 일대가 황매산성터다.그 이후의 길은 산비탈로 곧장 내려가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펑퍼짐한 곳에 다다르게 된다.여기가 대암벽 위의 돈대다.하지만 낭떠러지가 내려다 보이지 않아 실감이 나지 않는다.이곳에서 산비탈의 숲속 길을 따라 한참 내려서면 오른편이 천 길 낭떠러지인 등성이 암릉 위에 이른다.
[산비탈을 내려와 대암벽 위를 걷는 하단의 기순님. 11:46:08]
황매산성터를 지나 숲속 산비탈을 빠져나오면 눈 앞에 커다란 암릉이 펼쳐진다.이 암릉이 대암벽이다.돈대에 올라서보지만 천애만애한 낭떠러지는 보이지 않는다.암릉이 둥그스럼 하여 돈대 끝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여기서부터 순결바위까지는 암릉과 너럭바위의 연속이다.암릉은 오른편으로 비스듬하게 치솟아올랐고 하산은 암릉 위로 걷기도 하고 때론 암릉 허리를 타기도 한다.
[대암벽의 돈대에서 내려다본 대기저수지와 가회면 둔내리,중촌리-시계(示界) 좋으면 가야산도 보일 텐데... 11:46:15]
[산비탈을 내려와 암릉으로 접근하는 후미 회원들.11:46:34]
[대암벽의 암릉날을 걷는 판동님,성은님과 동대 상용,유양님.11:47:05]
[북동릉 왼편 산줄기에 돋아난 기암괴석.11:48:34]
오늘은 산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덥지도 춥지도 않다.햇볕도 강렬하지 않고 바람결도 유순하다.3월의 변덕스런 꽃샘추위에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기분은 마냥 고조된다.얼마나 갈망하던 산행이던가.갇혀본 자만이 그 기분을 알 것이다.산을 잊고 산 600일,다람쥐 쳇바퀴 돌듯 골목길을 누비고 건물을 오르내렸지만 하늘을 보지 못한 누항(陋巷)의 시간들-친구들은 그런 나를 두고,백두대간 대신 영도의 '봉래지맥'을 탄다고 빗대어 말하곤 한다.말이 좋아 봉래지맥이지 좁은 골목길을 들락날락하는데 지나지 않았다.그런 내게 모산재 산행은 암시하는 바가 컸다.그건 어디 나한테만 그렇겠는가? 3년 가깝게 이 일에 종사한 사람이 세 분이나 되니,그분들의 답답한 심정을 무슨 말로 이르겠는가? 비록 짧은 산행일망정 옭죄어진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났으니 작은 위안이 되지 않겠는가.
[모산재 특유의 모습이 돋보이는 암릉.11:48:53]
암릉을 걷다 잘록이로 내려선다.풍화된 흙길은 잠시,오른쪽으로 치솟은 암릉 밑 바윗길로 산길이 이어진다.숱한 산객들의 발자국이 지나가며 만들어낸 흔적을 따라 발품을 판다.회원들의 발걸음이 한결 경쾌해보인다.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바위,비바람을 견디며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자란 소나무,그속에 산객들이 어우러진 풍광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을 것이리라.
[암릉에 선 판동님,무얼 살피나요? 11:49:36]
[바위턱에 앉아 가부좌 자세로 느긋하게 일행를 기다리는 선두의 수석님. 11:52:40]
[바위틈서리에서 기묘하게 자란 누운 소나무-끈질긴 생명력에 경의를 표한다. 11:54:34]
수석님이 일행을 기다리던 2번째 잘룩이를 지나 순결바위로 오르는 길목에 기막힌 산중분재(山中盆栽) 한 그루를 만났다.바위틈서리에서 뻗어난 가지가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용트림을 쳐 기묘한 모습을 이루었으니 탄성을 지르고도 남음이 있었다.암릉에 몰아치는 세찬 빗줄기와 강풍 때문에 위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누운 끈질긴 생명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모산재 암릉에는 이런 소나무가 산재해 있으며 바위틈으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해 저리도 짙푸른 솔잎을 키워내니 소나무의 자연친화력은 정말 대단하다고 하겠다. 2번2번째 잘룩이번째
[비탈진 바위,풍화된 모래길,솔숲,거대한 암괴의 하모니-그속의 회원들. 11:54:33]
도저히 길이 없을 것만 같은 온통 암괴로 이뤄진 암릉을 넘어선 일행이 화인더에 들어온다.정수리에는 집채만한 암괴가 도사리고 있고 그 밑엔 짙푸른 소나무가 대조를 이룬다.맨 앞쪽에 서대의 성은님이 두 손을 옆구리에 대고 티없이 맑은 웃음을 짓는다.헌데 청바지를 입고 철수님 손에 이끌려 무작정 따라나선 성은님,오늘은 좀 불편하죠.다음 산행 때는 "청바지는 꼭 집에 두고 아끼세요." 여성 회원들의 일침이 귀에 들리는군요.성은님 곁에 선 주례의 옥순님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덩달아 웃음 짓고 있다. 안내이정표 근처에서 물병을 만지는 판동님,산행들머리에서부터 전매특허 백만불의 웃음이 사라지더니 여직 개운치가 않나요.저 아래 주차장에 두고 온 춘선님 생각 때문이요? 한번 웃어보세요..오호라,솔숲엔 동대 상용,유양님이 발품을 팔고 있구려!!!
[11:55:33]
[봅슬레이코스 같이 닳고닳은 바윗길.12:04:58]
이제 순결바위로 가는 마지막 바위능선이 흡사 봅슬레이코스 같다.성은님과 함께 힘차게 발품을 팔고 있던 판동님을 불러 세운다.다부진듯하면서도 한쪽 어깨가 처져 반항기 넘치는 그의 모습에서 60,70년대 우리 젊은 날이 연상되는 건 나만의 짐작일까?
[순결바위의 판동님-굳었던 얼굴이 좀 펴졌네요.ㅎㅎㅎ 12:06:49]
순결바위다.누구의 쏨씨일까.저렇게 갈고 다듬은 정갈한 솜씨는! 일행에게 순결바위 내력을 말해주자 대뜸 판동님이 순결바위로 올라간다.순결바위는 바위 끝부분이 쩍 갈라져 있는 커다란 바위로 여인의 엉덩이를 빼닮았다.예전부터 이 바위는 남녀의 순결을 시험할 수 있는 바위라고 했는데,평소 사생활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은 이 바위의 틈에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한다.그렇다면 바위가 움직인다는 동석(動石)일 텐데.여기 동석을 본 사람 있나요?
[순결바위로 다가오다 민탈 바위에 앉아 미소짓는 동대 상용.유양님. 12:07:13]
[쩍 갈라진 순결바위를 한번 시험해볼려구요? 에궁,수석님...12:07:46]
[가풀막진 하산길 12:11:24]
순결바위에서 합천군 삼가에 있는 삼가식육식당으로 전화를 넣었다.내가 10년 넘게 드나들던 한우고기 전문식당이다.주인 아주머니는 지금 자리가 없다고 한다.요즈음은 주말은 물론,평일에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모양이다.한우의 질과 맛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나 보다.부산에서 온 오랜 단골인데 17명이 40분 뒤에 갈 테니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그러자 산행대장인 나를 알아봤는지 그렇게 하겠다며 예약을 받아준다.
순결바위를 끝으로 하산이다.초입부터 가파르기 짝이 없는 하산길.로프가 매여 있지만 돌확길이 미끄럽고 고도감도 상당하다.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이라면 돌확에 손을 잡고 엉거주춤 게걸음을 걷는 게 보통이다. 25분쯤 씨름을 한끝에 바윗길이 끝나고 평탄한 흙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후미 동대의 상용,유양님도 지팡이에 의지하여 가파른 길을 무사히 내려왔다.
[국사당(國師堂)]
평탄한 숲속 길을 한동안 내려오니 모산재에서 보기 드문 노송이 있고 그 밑으로 돌담에 국사당이 나온다.국사당은 주변을 돌로 쌓아 축성했으며 높이는 1.5미터 정도이다.이곳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등극을 위해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린 곳이라 한다.전에는 지방관찰사가 이곳에서 제사를 올렸고,지금은 감암 동민들이 음력 3월 3일 국태민안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다.
국사당을 지나 숲길을 한참 내려서면 호젓한 오솔길이 가로막는다.그곳에 위장과 부인병에 좋다는 삼백초차를 파는 가게가 있다.일행은 뜨끈뜨끈하게 우려낸 삼백초차를 한 잔 마시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해진다.오솔길 따라 산모퉁이를 500여미터 돌아내려와 영암사터(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소재)에 닿았다.
[병풍을 둘러친 듯한 모산재 주능선-돛대바위가 돋올하다.12:52:11]
3.영암사 둘러보기
새로 지은 법당 앞 뜨락에서 우리가 오르내린 모산재를 등지고 기념사진을 찍었다.왼편 하늘선과 맞닿은 곳에 돛대바위가 돋올하다.등산로는 그 아래 암릉을 타고 돛대바위로 이어진다.돛대바위 오른편 잘숙한 곳은 넓은 평지로 이뤄진 무지개터이며,모산재 정수리는 그 오른편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돛대바위에서 순결바위로 나우리치는 장쾌한 모산재 주능선.12:52:25]
이번에는 돛대바위에서 순결바위로 나우리치는 장쾌한 바위능선을 담았다.사진 오른편 높은 곳에 순결바위가 있으며,하산길은 순결바위에서 오른편 산등성이를 따라 열려 있다. 천년 절집이었다는 영암사,지금은 폐허로 변해 본디 모습은 혜아릴 길이 없다.하지만 이토록 수려한 산세를 미루어 짐작컨대 그곳에 있던 절집이라면 필시 대가람이었을 것이다.
[복원중인 석축과 수령 600년의 노거수.12:55:17]
영암사터로 발길을 옮긴다.영암사터를 이곳 사람들은 '영암사 구질'이라고 부른다.새로 복원한 석축 한켠에 노거수 한 그루가 눈길을 끌어당긴다.노거수에도 어김없이 파릇파릇 신록이 돋아나고 있다. 그 오른편에는 초라한 요사채만 홀로 영암사터를 지키고 있을 뿐 절집은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조형미가 빼어난 심층석탑(보물 480호) 12:57:02]
모산재 산자락 밑에 영암사라는 대가람이 있었다는 절터다.지금도 이 절터에는 쌍사자석등,3층석탑,귀부 3점의 보물이 있다.사적지 131호로 지정되었지만 영암사터는 절에 대한 문헌이나 자료가 없어서 창건연대나 그 내력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1994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두 차례에 걸쳐 절터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여 절의 규모를 부분적으로 밝혔는데,불상을 모셨던 금당(金堂)과 서금당(西金堂),중문(中門),석축,건물터가 드러나 당시 가람배치를 파악하게 되었다.그리고 3층석탑,쌍사자석등,귀부 등 우수한 조각물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금동여래입상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유서깊은 절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영암사 전설에 따르면 이곳의 아름다운 산세를 배경으로 한 큰 절에 구름다리가 있었다고 한다.이 아름다운 구름다리를 타고 왕비가 구경 오곤했다 한다.그러나 구름다리가 무너지는 뜻밖의 사고로 인해 왕비는 목숨을 잃게 되었으며 화가 난 왕은 이 절을 붙태우도록 명령했다.하지만 절이 워낙 커서 절이 모두 타는데만도 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조선조에 만들어진 "삼가현지"에 따르면 황매산에는 몽계사,묵방사,보암사,사나사 등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특히 영암사터 자리에 '보암사 옛터"라는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영암사를 조선조 때는 보암사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주문도 없고 변변한 건물도 없이 그저 요사채만 있는 영암사의 돌계단을 오르면 높이가 3.8미터인 삼층석탑이 나오는데 이 석탑은 보물 480호로 지정되었다.2중 밑단 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삼층석탑으로 꼭대기 상륜부는 없어졌으며 삼층기단과 1층 탑신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으나 각 부재가 짜임새 있는 아름다운 탑으로,탑신부가 무너진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다.
[옆에서 본 쌍사자석등과 돌계단 12:57:29]
[돌계단을 딛고 금당터로 오르는 일행.12:58:03]
영암사터 뒷편으로 기임괴석이 신록과 어우러진 모산재가 보이고,그 바로 앞에 천년의 세월을 견디어낸 석축과 통돌을 깎아내 계단을 만든 그 위에 영암사터 석등(石燈)이 외롭게 서 있다.영암사터 쌍사자석등은 높이가 2.3미터이며 보물 353호로 지정되었다.
[모산재 바위능선과 푸른 숲,아름다운 쌍사자석등의 절묘한 어울림 12:58:08] *사진을 클릭하여 원본사진을 보세요.*
이 석등은 8각의 신라석등 양식에서 사잇기둥만 사자로 바꾼 형식이다. 석등의 8각 밑받침돌 옆면에는 사자로 보이는 웅크린 짐승을 한마리씩 돋을새김 하였고, 바로 위 받침돌에는 8장의 목련 잎을 조각하였다.중간받침돌에는 8각형과 둥근 굄돌이 있으며 한 개의 돌을 붙여서 팔각기둥 대신 쌍사자를 세웠는데,가슴을 대고 마주서서 뒷발은 목련석 위에 세우고 앞발은 들어서 윗돌을 받들었으며 머리를 뒤로 향하였다.사자의 갈기와 꼬리,몸의 근육은 살아있는 듯 섬세하나 아랫 부분은 손상이 많아 보기에 안쓰럽다.그리고 본디 석등이 있던 자리는 금당터 위였지만 축대 붕괴를 염려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중간받침돌은 밑받침돌과 비슷하게 꽃잎 속에 꽃무뉘가 그려진 단판 8엽의 양련석이다.중간받침돌 위 등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8각형으로 4면에 직사각형 화창(火窓)을 내었는데 주위에 작은 구멍이 있어 창문(窓戶)를 달았던 듯하며 남은 4면에는 사천왕입상을 조각하였다.지붕돌(옥개석)의 처마 밑은 수평이며,추녀 귀에는 귀꽃이 붙어 있고 상륜부는 전체가 없어졌다.
통일신라 말기의 미술품을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풐인 이 석등은 1933년 일본인들이 야간에 해체한 뒤 삼가까지 가져가던 것을 허맹도 씨를 비롯한 마을 청년들이 탈환하여 가회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절 건물을 지으면서 원위치에 다시 옮겨온 것이다.그때 아랫부분이 손상을 입었다.속리산 법주사 쌍사자석등과 겨룰 만큼 아름다운 영암사터 쌍사자석등을 바라보며 금당터로 발걸음울 옮긴다.
[금당터로 오르다 돌아본 삼층석탑 12:59:51]
[신록이 우거진 영암사터 삼층석탑,쌍사자석등과 모산재 풍광(2007.4.22)]
[금당터 12:59:42]
금당터다.금당(金堂)은 금색의 불상을 내부에 안치하기 때문에 금당이라 하며,금당을 불전(佛殿)이라고도 부른다.금당은 탑과 함께 가람배치의 핵심요소다.영암사 금당터는 폐사 이후 뒷편 산사태로 거의 매몰되다시피 모래로 쌓였던 것을 1959년 가회 주민들이 영암사터를 정리 복원한다는 취지로 모래를 들어내고 회랑(回廊) 주위의 뜰을 넓히고 그 위에 마을의 고가(古家)를 옮겨와서 영암사(靈岩寺)라는 건물을 세웠다.그러나 문화재 관계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 아래로 옮겼다.현재 삼층석탑 북쪽의 영암사 금당과 남쪽의 요사채는 이렇게 해서 복원된 건물이다.
삼층석탑 주변은 남북으로 건물이 들어서면서 지형이 바뀐 탓에 원상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다.현재의 요사채 자리는 중문터이며,북쪽 금당은 강당터와 같은 큰 건물이 있던 자리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또한 석탑이 놓인 한 단(段) 아래 지역도 당시는 영암사 경내에 속했는데 오랜동안 논으로 개간해 쓰였다가 근래 들어 석축을 새로 쌓아 관리하고 있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따르면 금당터 조사를 할 때는 띄엄띄엄 주춧돌(礎石)이 보이고 주위는 면석(面石)이 정연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그리고 금당터 남쪽에 맞붙어서 축대와 주춧돌을 갖춘 또 다른 건물터가 일부 노출되었지만 대부분 지하에 매몰된 상태였다.북쪽에도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 용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있었다. 금당터 뒷편은 높은 축대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산에서 흘러내린 흙모래와 내다버린 기와조각이 쌓여 있었다.
금당터 남서쪽 50미터에 있는 서금당터(西金堂址)에는 두 개의 비석받침인 귀부[龜趺]가 남아 있다.미수와 비신이 없어진 채로 남아 있는 동쪽 귀부는 1.22미터,서쪽 귀부는 1.06미터로 보물 489호로 지정되어 있다.그리고 두 귀부 사이에는 주춧돌이 있는 작은 건물터가 있었는데 일부 파손되기는 했지만 남은 주춧돌과 불상댓돌(佛象地臺石) 따위 유구는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고 한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 이끼 낀 석축과 복원중인 새로운 석축 13:00:32]
영암사터에 들어서면서부터 만나는 것은 네 곳의 긴 석축인데 자연석을 쓰지 않고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쌓은 최고급 석축이다.열한 줄로 쌓은 석축에는 밑에서 다섯째 줄과 아홉째 줄에 쐐기돌을 박아 석축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면서 동시에 모양도 냈다.석굴암이나 불국사에서만 볼 수 있는 고급 건축기법이다.통일신라의 서울인 경주가 아닌 변방,합천 산골에 이런 격이 높은 고급 절을 지었다는 것은 왕실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수령 600년 된 보호수 13:01:36]
오늘은 일정이 빠듯한 나머지 금당터 서남쪽에 있는 서금당터를 둘러보지 못하고 아쉽게도 영암사와 헤어져야 했다.일행이 막 영암사터를 벗어나려는데 600여년 된 보호수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아름드리 거목은 불기둥처럼 하늘로 치솟아오르고,바람에 뒤틀린 가지는 어떤 격렬한 정신의 뒤끝을 보는 듯하며 우듬지에는 세월의 고난과 시련이 그대로 배여 있는 것 같다.이제 노거수에도 봄빛을 재촉하는 신록이 움터나오고 있다.저 거묵은 보았으리,영암사의 영욕과 세월의 편린을!
대절버스에 오니 송도 판동님의 찍지 춘선님은 쑥을 캐다 말고 다리가 아프다며 버스 한켠에 누워 있었다.부산에 와서야 알았지만 오른쪽 무릎 오금이 퉁퉁 부어 걷기도 힘들 지경이었다.12시간 넘게 업무에 매달려야 하는 우리네 일상이 참으로 안타깝다.충분히 쉬면 호전될 텐데 딱히 그럴 처지도 아니니 더 가슴이 아렸다. 그런 춘선님은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튿날 무릎 수술을 하고야 말았다.몸으로 먹고 사는 우리는 몸이 재산인데 이를 어쩌면 좋을까. 머리에 책을 이고 추는 박스춤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춘선님,얼른 쾌차하기를 빌어요.그리고 다시 우리에게 멋진 그 춤을 선사해주시구려.
[맛집으로 유명한 삼가식육식당의 상차림-산행 후엔 역시 뒷풀이가 최고야. 13:54:31
4.한우 맛집-삼가식육식당
산행뒷풀이를 하러 합천의 가회를 거쳐 합천의 삼가로 이동한다.삼가면 면소재지에 있는 맛집 '삼가식육식당'에 차를 댄다.식당은 허름하게 생겼지만 고기 맛이 좋아서 휴일에는 손님들이 줄을 선다. 요즘에는 평일에도 예약을 해야 할 만큼 손님들로 북적거린다.3년만에 찾아간 식당에는 평일인데도 손님들이 많았다.고기를 다듬던 식당주인은 나를 알아보고 오랫만에 왔다며 반가워했다.미리 상차림을 해놓아 바로 한우가 나왔다.고기를 한 입 베어물자 살살 녹았다.어부인들도 이런 한우는 근래 처음이라며 흡족해했다.
태백이나 횡성의 식당에서는 숯불이나 연탄불로 한우를 구워내는데 반해 이 식당은 돌판으로 구워낸다.한우 맛은 일품이지만 옥에 티라면 바로 그 점이다. 아마 문전성시를 이루는 손님들 때문에 불을 따로 지펴야 하는 고충을 이해할 만도 했다.일인분 250그램에 17,000원,값도 저렴한 편이지만 한우의 질과 맛이 훨씬 뛰어나다는 일행들의 호평에 이곳을 안내한 나 자신도 한시름 놓았다.
[총무로부터 술잔을 받는 박스춤의 달인,송도의 춘선님 13:54:58]
[거울 속에 카메라를 든 저 찍사는 누구요? 13:55:21]
삼가는 예부터 합천, 고령, 거창 일대의 소 장수들이 모이던 곳이었다. 조선후기 보부상들의 집결처였던 상무사(商務社)도 삼가에 있었다. 식당주인은 고기 맛이 좋은 소를 감별하는 노하우가 있었다. 한우 잡종보다는 순종이 맛이 좋고, 소의 털이 노랗고 부드러워야 하고, 골격이 큰 소보다는 작은 소가 좋다, 체구에 비해 머리가 작은가를 참고한다. 거기에다가 수시로 초음파 기계로 소의 육질상태를 검사한다고 한다.이렇게 꼼꼼하게 한우를 챙기는 정성으로 인해 단골이 늘고,나라 안의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된 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수생식물관 16:37:14]
5.경남수목원에서
오후 3시 무렵,삼가식육식당을 빠져나와 진주시 이반성 대천리,경남수목원으로 차머리를 돌렸다.수목원이 문을 닫는 6시까지 산보를 하며 눈을 식히기 위해서다.격렬한 산행 뒤에는 느긋한 걷기가 제격이지 않은가.수목원이라 해봤자 물론,아직 꽃철이 일러 볼 만한 게 별로 없을 테지만 말이다.수목원으로 가는 도로가에는 그 흔해빠져 식상한 벚꽃 대신 목련이 줄지어 있어 눈을 즐겁게 했다.
수목원에 다다라 입장표를 끊어 들어가니 제법 많은 관람객이 보였다.가족나들이객과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각광을 받고 있는 수목원에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자생종과 외국도입 수종 중 보존가치가 있는 식물 1500여 종을 보유하고 있으며, 산림박물관을 비롯한 열대식물원, 야생동물원, 무궁화공원, 무궁화홍보관, 화목원 등이 테마별로 조성되어 있다.하지만 수목원에 오래 머물 처지가 아니라,삼림박물관을 둘러보고난 뒤 열대식물관을 비롯 수생식물,동물관 등 각자 관심 있는 곳을 자유스럽게 관람하도록 했다.
[5월의 수목원 풍경]
[조팝나무 앞에 선 서대 철수,성은님,동삼 수영님16:38:28]
[수묵원애서 만난 백목련과 자목련 16:39:51]
[사랑의 이름으로 해를 따라 돈다는-나팔수선화 16:57:41]
6.진성의 맛집-서박사 칡냉면
오늘 나들이의 마지막 코스는 진주시 진성에 있는 '서박사 칡냉면'이다.경남수목원에서 2번 국도를 따르다 남해고속도로 진성인터체인지 들목 왼편에 서박사 칡냉면이 있다.밖에서 보면 '이곳이 그리 유명한 집이 맞나'라고 생각될 정도로 허름한 느낌이다. 마당에는 여기저기 간이 테이블이 놓여 있다. 실내에 들어가면 시원하게 탁 트여 있고 깔끔하다. 진성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으면서도 냉면의 맛으로는 지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입소문을 타 멀리 마산과 창원, 통영 그리고 부산에서까지 사람들이 찾는다.
오후 6시 무렵 냉면집에 들어갔을 때는 우리 말고는 손님이 없었다.그런데 자리를 잡고 조금 있으니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기 시작하더니 금세 식당은 만원이었다.한여름철에는 보통 1시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만큼 북적댄다. 서박사의 냉면(물냉면 5,500원, 비빔냉면 6,000원) 맛은 넉넉한 양과 저렴한 가격에다 까다로운 미식가들의 입맛도 만족시킬 만한 맛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냉면 맛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맛의 차이는 확연하다.내가 서박사를 즐겨찾는 이유는 또 있다.85세인 어머니는 입이 짧은데다 당뇨가 있어 면류 음식을 전혀 들지 못한다.몇년 전 가을,성묘하러 갔다가 오는 길에 어머니와 함께 이곳을 찾았는데 칡냉면 한 그릇을 거뜬히 비워셨다.냉면 맛도 좋고 소화가 잘 된다며 칭찬이 자자했다.그 뒤로 틈이 나면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서박사를 찾곤 한다.
삼천포에서 가져온 백합조개를 넣은 시원한 칼국수는 날씨가 쌀쌀해지는 가을 이후에만 내놓는다. 냉면과 칼국수는 [놋그릇]에 담겨져 나온다. 여름엔 냉면으로 시원하게 하고, 겨울에는 칼국수로 따뜻하게 유지하는 장점이 있다.이 놋그릇은 거창에 살고 있는 무형문화재인 이용주 선생의 작품이라고 한다.
냉면이 나왔다.우리 회원들에게 얼음이 듬뿍 담긴 육수를 먼저 마셔보라고 권했다."'냉면 맛은 육수 맛이야."하며 모두 엄지를 치켜든다.이 집 육수에는 한약재가 들어가지 않고 12가지 재료를 섞어 만들어 담백하다.서박사 냉면은 양이 많다.굳이 곱배기를 시키지 않아도 될 정도다.여늬 냉면집은 한 두어 젓가락이면 한 그릇 뚝딱이라 대개 사리를 추가해야 하지만 이 집은 그럴 필요가 없다.메뉴들은 서민적이고 저렴하다. 이유는 사람들이 와서 먹고 다른 사람의 음식 값까지 부담 없이 낼 수 있는 그런 음식을 하겠다는 주인의 지론 때문이다. 예전에 3개월 정도 메뉴에 수육을 추가한 적이 있는데 얼마 후 그만 뒀다. 음식 값을 계산하는데 부담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고 한다..
넉넉하고 푸근한 인상의 서금순 대표는 고객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해 화장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앞으로도 체인점을 내거나 가게를 이전하는 일 없이 처음 시작한 이 자리에서 계속 일을 할 계획이다. 서박사 칡냉면은 평일에는 오전 11시부터 저녁 8시까지 영업을 하고 일요일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
[놋그릇에 담아낸 시원한 육수와 칡냉면]
7.에필로그
오늘 우리는 하루만에 한 토막의 짧은 산행과 유적 둘러보기, 두 곳의 맛집 탐방 그리고 수목원의 게으른 산책을 했습니다.우린 산꾼이 아니어서 산을 오르내릴 때 갖춰야 할 변변한 장비도 없이 오로지 열정 하나로 산행을 마쳤습니다.제 경험으로는 열정과 끈기는 그 어떤 장비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나는 열정없는 장비보다 장비없는 열정을 높이 사는 편입니다.우리들 모두 음식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두 곳의 맛집을 섭렵하면서 보고 배운 게 적지 않을 겁니다.성공한 맛집가운데는 피나는 노력과 정성이 깃들어야 손님이 찾아온다는 진리도 체득했을 줄 압니다.영암사 폐사지에서는 우리 선조들의 수준높은 미적감각과 심미안도 보았습니다.나는 일개 산꾼으로서 아무래도 모산재 위에서 보낸 황홀한 시간을 잊지 못할 겁니다.바위에서 뿜어져나오는 강렬한 기운이 아직도 내 몸속에 살아있음을 느끼며 인사를 드립니다.
첫 나들이 치고는 빡빡한 일정일망정 흔쾌히 동참해주고 따라준 회원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정녕 세상 그물에 갇혀 옴짝달싹 하지 못하던 굴레를 박차고 나옴으로써 또다른 세계를 체험한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믿어봅니다.우리 모임에 아무런 회칙이 없듯 우리는 그렇게 만났고 자연스럽게 교류할 것입니다.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면서 절영도의 봉래산 기슭에서 청산이 삼가 몇 자 올립니다.
[산을 사랑하는 불방의 벗님들께 송구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불방을 비운 사이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집안에는 온통 거미줄만 오락가락합니다.다.제 불찰입니다.누항에 갇힌 나날들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게으르고 미련하기 때문입니다.자주 교류해야 가까워지고 정도 두터워지겠지만 이젠 한없이 멀어진 벗님들을 바라보기가 더욱 민망스럽습니다.언제 또다시 산에 들지 알 수 없습니다만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굽네가족과 함께 한 내장산 단풍 유람 (0) | 2010.11.14 |
---|---|
선배들과 함께 오른 황매산(08/5/9) (0) | 2008.05.21 |
문경 새재-마패봉 답사산행(08/4/23) (0) | 2008.04.24 |
응봉산 용소골(07/10/14)<4> (0) | 2007.10.22 |
응봉산 용소골(07/10/14)<3> (0) | 2007.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