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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문경 새재-마패봉 답사산행(08/4/23)

 [새재 옛길에서 만난 노루귀-모진 비바람과 혹독한 추위를 관통한 봄꽃이 신비롭다.]

 

 [낙화가 분분한 조령산휴양림 가는 길]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오후부터 개인다는 일기예보이지만 제대로 산행이나 할까 하는 불안감이 배낭을 꾸리면서도 연신 밀려온다. 

 

한해 두 번 봄과 가을,서울과 부산에 흩어져 있는 산을 좋아하는 고등학교 동기들의 합동산행이 치뤄진다.올해로 벌써 12년 째. 이같은 합동산행은 말이 산행이지 적게는 50명에서 많게는 80여명이 참가하는 그야말로 축제에 버금가는 산행이자,만남의 장이다. 한때는 동기들 식구를 비롯,무려 100여명에 이르는 인원이 동참하여 왁짜지걸,소란법석을 피운 적도 있었다.내 개인으로는 지극히 싫어하는 산행스타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런 행사를 준비하고 점검하는 과정에서 피해갈 수 없이 만나게 되는 과정이 바로 답사산행이다.대규모 인원이 한꺼번에 참석하므로 산행코스는 위험요소가 없어야 하고 오르막길은 차치하고라도 하산길만은 부드럽고 완만해야 하며 산행시간은 5시간을 넘지 않아야 된다.그리고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증화지역의 산들을 선정해야 먼거리를 오가는 동기들의 볼멘소리를 해소할 수가 있는 법이다.여기에다 목욕과 저녁식사인 산행 뒷풀이는 필수요소다.아무리 산행이 훌륭했다고 하더라도 목욕과 식사가 엉망이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격이니 이 또한 답사 리더로서는 여간 신경이 쓰이질 않는 부분이다.일년에 두 번 만나면서 보고 싶은 얼굴들과 한 자리에 어울려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며 회포를 푸는 것이 어쩌면 산행보다 더 소중한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10년 넘게 이런 산행을 해오면서 나름대로 원칙이 있다.첫째로 가능하면 유명산은 피한다.둘째로 마지못해 그런 산을 가더라도 등산객들의 발길이 뜸한 길을 오르내린다.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탈출로를 염두에 둔다.그리고 주력이 가장 처지는 이들일망정 한사람도 낙오자없이 완주케하는데 촛점을 맞춘다.

 

그런데 아직까지 큰 불상사 없이 행사를 치뤄온 것은 동기들이 나를 신임하고 잘 따라준 덕분이었다.그러나 해가 거듭되면서 자꾸만 두려워지는 건 이제 이순의 나이를 넘어선 동기들의 주력이다.젊었을 때야 좀 무리하더라도 며칠 안으로 심신이 회복되곤 했다.하지만 이제는 그 회복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다.산행을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쾌면에 들고 아침에 거뜬하게 일어나야 하는데..이게 내 걱정이다.오랫만에 만난 나머지 친구들과 거나하게 술추렴을 하고 난 뒤끝이 염려되는 것이다.그래서 다음날 아침 나는 서울과 부산 총무에게 전화를 해서 동기들의 안부를 곧잘 묻고 한다. 아무 일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서 마음이 놓일 때 비로소 내 산행은 끝나는 것이다.


답사산행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점검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그렇지만 이 답사산행이야말로 진정 해볼 만한 산행이라고 나는 믿는다.나와 한팀이 되어 죽으나사나 후미를 맡아온 마산의 현기,부산의 현영이 그리고 서울의 단골멤버 고윤득,조덕준,홍순길 총무,여기에 몇년 전 명퇴를 하고 사진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문상대.모두 절친한 친구로서 답사 때만 되면 그리워지는 얼굴들이다.그리고 최근에 정년을 마친 부산의 권용효 동기가 "남는 게 시간"이라며 새 멤버로 머리를 올렸으니 가히 환상적인 팀이라 할 만하다.

 

현영이는 입버릇처럼 다른 산행은 몰라도 답사산행 때는 필히 불러달라는 주문을 한다.번잡한 산행보다 단출하고 게으른 산행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그가 아쉽게도 오늘은 불참했으니 얼마나 가슴 아팠으랴.목욕을 마치고 수안보 큰집식당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그의 전화가 울렸다.답사산행에 한번도 빠진 적이 없던 그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며 "느그는 좋겠다~아."를 연발했다.우리는 답사를 하면서 누리게 될 호사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무언가에 쫓기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으며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여 대자연과 합일하는 즐거움,그것은 합동산행 때에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쾌락일 것이다.

 

 [조령산휴얌림 빗돌 앞에 선 답사팀-좌로부터 현기,상대,순길,덕준,용효,청산]

 

답사 차량이 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를 지날 무렵 빗줄기는 잦아들더니 먼산의 실루엣이 하나둘 살아나기 시작했다.이화령터널을 빠져나오자 산정에는 구름이 드리웠지만 산자락에는 수묵화를 보는 듯 운무가 춤을 추고 있었다.서울팀은 조령산휴양림 아래 주차장에서 거의 40여분이나 우리 부산팀을 기다리고 있었다.빗속 운전을 하다보니 약속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턱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상대와 윤득,덕준이가 보이고 홍순길 동기회 총무가 반갑게 맞아준다.오늘 우리가 밟을 산행코스는 조령산휴양림~신선봉~마패봉~새재 3관문을 거쳐 휴양림으로 되돌아오는 원점회귀코스.그러나 잔뜩 찌프린 하늘,한치 앞도 안 보이는 운무,이렇게 궂은 날씨에 선뜻 산행을 해보자는 얘기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래서 나는 이 구간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 3관문으로 가서 마패봉에 올랐다가 내려오자는 제의를 했다.그러자 "아니,어쩐 일이야? 신대장도 타협할 때가 다있네!"하며 윤득이가 아픈 곳을 찌른다.이때 이 코스를 산행해봤다는 덕준이는 "신대장 말이 맞아,나도 코스를 잘 알고 있어.우선 마패봉에 올랐다가 시야가 좋으면 신선봉으로 가자구."하며 나를 후원해주는 바람에 우리는 군말없이 새재 3관문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산행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좋은 사진을 건지러온 서울의 상대 역시 대환영이었다.뒤늦게 사진찍기에  빠져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그는 산행하는 대신 그의 RV차량을 답사팀에 바쳤다.  

 

조령산 휴양림으로 오르는 보도에는 낙화한 벚꽃과 진달래가 꽃길을 만들어 운치가 있었다.가는 비가 내려 먼지마저 일지 않아 상쾌했다.그리고 연초록 나뭇잎들이 층층이 스펙트럼을 이뤄 싱그러움을 내비친다.이럴 땐 걸음은 느릿느릿,가슴은 절로 벌어져 한껏 심호흡이 이루어진다.

 

 [도로변을 수놓은 봄꽃의 전령사 개나리]

 

길가에는 함초롬히 빗물을 머금은 하얀 목련이 생기를 더하고 이따금 산새가 영롱한 울음을 굴린다.저절로 나는 자연의 오묘한 질서에 삘려들어간다.내 숨소리는 일순 멈추고 시야는 더 먼 곳으로 달려간다.보도 가장자리에는 샛노랑 개나리가 앞다투어 꽃을 피워올린다.4월의 숲은 신비롭다.새싹을 틔우기 전에 먼저 꽃을 밀어올린 나무들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지상에 꽃들을 떨어뜨리고 하루가 다르게 부드러운 잎사귀가 돋아나면서 그 색감이 절정에 이른다.누군가는 무성한 신록보다 요즘의 파스텔톤을 더 사랑한다고 단언하지 않았던가.그 말이 새삼 실감이 난다.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이 오는 징후를 가장 잘 느끼게해주는 저 놀라운 변화를!          

 

 

느릿느릿 발품을 팔아 마침내 새재 3관문 아래 쉼터에 다다랐다.거기서 잠시 다리를 풀고 물 한 모금을 들이키고 새재 앞 운무 노니는 백두대간의 봉우리,깃대봉을 올려다본다.저 깃대봉 산자락에서부터 시작된 조령산성이 새재 3관문을 거쳐 하늘재까지 이어진다.  

 

 [운무 드리운 깃대봉]

 

"새재(鳥嶺)"란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전해온다.'나는 새도 쉬어 가는 고개'라 하여 새재(鳥嶺)로 불렸다는 설이 첫째이며,하늘재 대신,'새로난 고개'라는 뜻의 새재가 그 다음이다.셋째는 조령산과 주흘산 사이.'새'로 난 길이라 하여 '샛재' '새재'이고 넷째는 경상도에서 '쌔'라고 부르는 억새가 특히 많아 '새재'라 불렸다는 설인데,새재골의 마을이 초점(草岾 푸실)인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그러나 이가운데서도 "새도 쉬어간다."는 새재가 가장 운치가 있지 않을까 한다. 


조선시대 10대로 가운데 제4대로가 부산과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로 지도상에 서울과 부산을 일직선으로 그은,바로 새재를 넘어가는 길이다.지금의 경부고속도로가 428km인데 비해 영남대로는 380km에 지나지 않았으니 짧아도 한참은 짧은 길이다.오로지 발품에 의존해야 했던 옛날에는 한 발자국이라도 짧아야 했음을 물론이다.경부고속도에 대전을 포함시킴에 따라 서울서 부산가는 길은 멀어지게 되었고 또 영호남길이 모두 대전을 거치게 됨으로써 심각한 교통체증을 불러왔다.이의 해소책으로 2005년 여주와 구미를 잇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렸는데,이 길이 바로 지난날의 영남대로를 고속도로화한 셈이다.


 [조령관 새재 3관문]

 

조령1관문에서 2관문까지는 3km,2관문에서 3관문까지는 3.5km로 1관문에서 3관문까지는 20리 정도다.그러나 옛 새재길은 1관문에 진입하는 길과 3관문을 지나서도 작은 새재를 더 넘어야 했으므로 전체적으로 50여리의 길을 걸어야만 완전히 새재를 벗아날 수 있었다.

 

[새재 3관문-조령관 앞에 선 답사팀] 

 

[성벽을 에두른 나무엔 연초록 잎새가 내비치고..] 

 

[마사토로 다져진 새재길-답사여행 최적의 장소로 손꼽힌다.] 

 

하늘재로 이어지는 조령산성은 1708년 제3관문(조령관)과 제1관문을 축성할 때 함께 쌓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임진왜란 이전에 쌓여졌던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새도 쉬어 넘는다."는 문경새재는 옛날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고갯길이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쭉 미끄러진다." 했으니 누가 이들 고개를 넘으려 했으랴. 반면 새재는'늘경사스러운 소식이 들려오는 행운의 과거길'이 되어 고을 이름마저'문경(聞慶)'이라 불려졌다.문경은 경상도 북쪽 울타리이자 관문이다.

 

백두대간이 문경을 지나면서 주흘산,조령산 같은 일 천 미터 안팎의 명산을 곳곳에 일으켜세워 영남과 기호지방을 갈라 놓았지만,사람들은 그 험난함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숲을 헤치고 바위를 깨뜨려 길을 개척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156년,문경 관음리에서 충주 미륵리로 넘어가는 하늘재(鷄立嶺)가 뚫렸다.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열린 고갯길이다.길은 문화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외침의 길목도 되어 그때부터 교통의 요충지인 문경 땅은 치열한 격전장으로 변하였다.누가 이 길목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삼국의 세력 판도가 바뀌었고,후삼국 쟁패기에는 왕건과 견훤이 서로 이곳을 차지하려고 수차례 출정을 단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새재(鳥嶺)가 열려 내국인은 물론,사신과 우마차들의 발길까지 묵묵히 받아내는 대동맥 구실을 하였다.그러나 1592년,신립(申砬) 장군이 새재를 막지 못하므로써 우리의 국토는 왜군의 말발굽에 처참하게 유린되어야만 했다.그렇게 하여 쌓은 것이 조령산성이다.하나로도 부족하여 세 겹으로 관문을 둘러쳤다.

 

문경 땅의 사람살이는 이처럼 길을 내고 그길목을 지켜온 사람들의 역사로 점철되었다.그러나 살을 베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이 빚어낸 무형의 문화유산이 없을 리 없다.길목 길목에는 지나간 사람들의 애환과 자취가 서려 있고 괴기한 전설과 민담도 돌멩이처럼 곳곳에 딩굴고 있다.문경을 지나는 백두대간의 청화산,대야산,희양산,조령산,주흘산,포암산,대미산,황장산 등은 듣기만 해도 산꾼들의 마음을 설레게하는 명산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화령을 넘어온 것을 "새재"를 넘어왔다고 말하지만 이화령과 새재는 다른 길이다.조선 초 새재가 국도로 뚫리면서 신라 때 개척된 하늘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영남대로(嶺南大路)의 500년영화를 누렸던 그 새재길도 1925년 이화령(548m)에 신작로가 닦이면서 그 수명을 마쳐야 했다.그런데 1977년,이화령 고갯길 밑으로 다시 이화령터널이 뚫리면서 한 세기동안 3번 국도의 애환을 몸으로 안았던 이화령 고갯길마저 더 이상 차들이 찾지 않는 옛길이 되었다.이처럼 길도 세월과 시대의 변천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것이다. 


[조령약수 쪽에서 본 3관문 옆모습]  

 

 [조령산성 안쪽에서 본 성벽]

 

 [바야흐로 연초록 파스텔톤이 숲을 물들이고...] 

 

임진왜란 때,신립이 왜적을 천험의 요새인 새재에서 방어하지 않고 충주 달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다가 패한 것이 계기가 되어 새재는 국방의 요충지로 새롭게 부각되었다.그리하여 1594년 새재 정상에서 동쪽 10리쯤 내려오면 양쪽 절벽이 매우 험준하여 매바우(鷹岩)라 부르는 곳에 성을 축성하기 시작하여 1년만에 완성했다.이것이 조령2관문이다.

 

임란 이후에도 일본의 재침에 대비한 성 축성 문제가 논의되어 1708년 11월 조령 축성이 허가되고 이듬해 축성이 이뤄졌다.당시 초곡성(草谷城,1관문)과 정상의 성(3관문)이 새로 축성되었고 신충원이 쌓았던 중성(2관문)은 개축하였다.이리하여 오늘날의 3관문 체계가 이루어졌다.축성 당시 초곡성의 현판은 '진남(鎭南)'이라 달았다가 1752년 조령진(鳥嶺鎭)이 설치될 때 밖의 현판은 주흘관(主屹關),안쪽은 영남제1관(嶺南第一關)으로 바꿔 달았다.

 

왜적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조령산성은 그러나 외침의 방어에는 한 번도 쓰이지 못했다.관문 축성은 결국 '소 잃고 지은 외양간'이었던 셈인데 현재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성은 제1관문(主屹關)이다.양옆으로 이어진 성축도 비교적 온전하며 개울물을 흘러보내는 수구문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1981년 이 일대가 문경새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관문은 사적 제147호로,주흘산 조령관문 일원은 경북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제3관문(조령관)은 1708년 1관문 축성시 현재의 모습으로 쌓은 것이나 그 이전인 임란 당시 이미 하늘재로 이어지는 고개의 산성이 쌓여졌던 것으로 보인다.문루는 1907년 의병전쟁 때 불탔고,지금의 홍예문과 그 위의 누각,그리고 좌우의 석성은 1976년 복원한 것이다.동쪽으로 이어진 성에는 현재 북문(북암문)과 동문(동암문)이 있다.제3관문을 기준으로 남쪽은 문경 땅이고 북쪽은 충주 땅이며,영남(嶺南)이란 말도 바로 이 새재(鳥嶺)의 남쪽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벌써 오후 1시를 넘어선다.답사팀은 3관문 앞 평상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바로 곁에 조령약수가 있으니 금상첨화다.친구들이 요기를 하는 동안 나는 조령산성과 3관문 문루를 한 바퀴 둘러본다.축성 당시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은 몇 군데뿐이고 거의 다 개축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지만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내려앉은 성벽을 둘러보며 숨바꼭질하던 역사의 뒤안길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임지에 부임하기 위해 고개를 넘던 관리들과 숱한 시인묵객들의 애환을 떠올려 본다.3관문 곁에는 새재를 노래한 서거정과 김종직의 시가 바윗돌에 새겨져 있다. 대구가 본관인 조선 초기의 문인 서거정이 어버이를 보러 가는 길에 쓴 시가 눈길을 끈다. 

 

대구 어버이를 뵈러 가는 길,새재를 넘으며


꾸불꾸불 새재 길 양장 같은 길

지친 말 부들부들 쓰러질듯 오르네.

길 가는 이 우리를 나무라지 마시게.

고갯마루 올라서 고향 보려함일세


점필재 김종직도 새재를 지나며 시 한 편을 남겼다.


새재를 지나는 길에


나라님 부름 받아 새재를 넘자니

봉우리 꼭대기에 겨울 빛이 차갑구나.

벼슬길로 돌아가는 부끄러운 이 마음

개울 바닥 뒹구는 마른 잎 같아라.

대궐 안에 아부꾼들 멀어지면

조정엔 오가는 말 화락하리라.

근심과 걱정으로 십 년을 보냈건만

날 뛰는 금수무리 잡아내지 못하였네.  

 

[마패봉 쪽 산성에서 바라본 조령관] 

 

 [세월의 이끼가 내려앉은 산성 성벽]

 

 [조령관 앞쪽의 고목-연초록 새순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마패봉 오름길 들머리에 핀 진달래와 성돌] 

 

마패봉으로 오른다.조령관 오른편 군막터를 지나 성벽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허물어진 성벽은 그 흔적만 남았고 성벽을 쌓았던 성돌은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그 성벽을 따라 핏빛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기온이 차고 고도가 높은 이곳에는 이직도 진달래가 지지 않고 만개하고 있었다. 산정으로 오를수록 진달래의 때깔은 곱고 선명하다.부드러운 산길을 따라 오르는 곳곳에 진달래가 바람에 꽃잎을 나풀거리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가까이 당겨본 성돌과 만개한 진달래]

 

[느긋하게 마패봉으로 오르는 답사팀] 

 

[흐드러진 진달래를 등지고 선 용효,덕준,윤득] 

 

 

 

 

[답사 산행에 처음 온 부산의 용효] 

 

 

그렇게 발품을 팔아 20분쯤 유순한 산길을 오르자 문득 가파른 바윗길이 막아선다. 나는 바위 오른편 깎아지른 벼랑으로 기어올라서니 친구들은 밧줄을 잡고 바위를 올라서고 있다.이제부터는 가파름의 연속이다.  한바탕 바위와 씨름을 하고난 뒤, 정수리에 올라선다. 3관문에서 출발해 35분가량 걸렸다. 정수리에서는 시계가 어두워 조망은 신통치 않았다. 건너편 신선봉도 구름이 드리웠고 주흘산과 부봉도 검은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으니 유감스럽다. 애시당초 조망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시계가 나쁠 줄이야.

 

[가파른 오르막길-한바탕 힘을 쏟아야 한다.] 

 

 [마패봉 정상 어간에 만개한 진달래]

 

[정상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덕준,용효,윤득]  

 

윤득이와 덕준이,용효와 함께 후미를 기다렸으나 15분이 지났지만 순길이와 현기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그러는 사이 수원에서 왔다는 화성산악회 일행이 정상을 점령해버린다. 시야가 불순한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선두를 따라 올라온 그들은 쏜살같이 사진을 찍고는 내게 길을 묻는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동화원으로 간단다. 그래서 북문과 동문의 위치를 일러주고 그들과 헤어졌다. 전해오기로는 어사 박문수가 마패를 벗어놓고 쉬어갔다고 해서 마패봉이라 한다는데 정상 빗돌에는 마역봉이라는 생소한 산명이 적혀 있다.  

 

[용효 뒤로 백두대간의 산 부봉(釜峰)이 흐릿하다.]    

 

[수묵화처럼 구름 비낀 신선봉] 

 

 [마패봉 빗돌과 함께 다정한 포즈를 잡은 언니(우)와 동생(좌)]

 

조금 있으니 난데없이 분홍색 상의를 입은 중년의 두 여인과 함께 현기와 순길이가 정상에 올라선다. 영문을 몰라 하는 우리들에게 현기가 입을 뗀다. 우리가 조령관에서 마패봉으로 떠난 뒤, 두 여인이 어디로 갈 바를 몰라 서성이더라는 것이다. 현기가 그럼 우리를 따라 마패봉으로 오르자고 해서 두 분을 모셔왔다고 한다. 그리고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언니는 몸이 성치는 않다고 했다. 수술 전에는 산을 무척 좋아했다는 언니,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안달이 나 새재로 기분전환을 나왔다는 것이다.   

 

청주에 사는 언니,서울 청계산 산자락에 산다는 동생 언뜻보기에도 닮았을 뿐만아니라 사이도 좋아 보였다.언니를 보러 청주로 온 동생은 언니 아들이 승용차로 새재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한다.우리는 이렇게 뜻밖의 장소에서 예기치못한 사람을들 만나게 되었다.세간사에서는 좀체로 있을 법 하지 않은 일이 산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 또한 산이 베푸는 덕목은 아닐까 한다.     

 

[순길이와 현기,그리고 진달래를 빼닮은 두 자매의 환한 웃음] 

 

[답사팀과 함께 한 두 자매-밋밋하던 사진에 생기가 넘친다]  

 

[잠시 모습을 드러낸 부봉]  

 

[줌으로 당겨본 아름다운 부봉의 여섯 봉우리]  

 

 

부경합동산행 코스에 들어 있는 신선봉으로 가는 것을 접고 우리는 하산을 서둘렀다. 몸이 완전치 않는 언니를 위한 배려도 없지 않았으나 당초부터 신선봉 답사는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하산은 마패봉으로 내려서다 오른쪽으로 갈래치는 산줄기를 타고 내려간다. 이 하산길이 완만하고 부드러운 길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 자매와 함께 내려오다 진달래가 만개한 곳에서 두 형제를 카메라에 담았다. 동기들 말마따나 분홍색 상의가 정녕 진달래를 연상시킨다. 꽃보다 아름다운 게 원숙한 여인네라 하지 않던가. 언니는 현기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배낭이 축 늘어져 있었는데 군말 없이 배낭끈을 조여주니 한결 편하다고 털어놓는다. 배낭을 메는 법과 걸음걸이,스틱을 쓰는 방법에 따라 산행은 수월해지기도 하고 불편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현기는 산행을 하면서 동기들에게 아주 세세한 것들까지 지도해주곤 한다. 후미를 맡아 남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니 나는 늘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가 있기에 나는 안심하고 산행을 안내한다.

 

[새재 옛길에서 만난 장승]  

 

하산 길은 바위가 없는 흙길이었지만 더러 가파른 구간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두 자매를 현기에게 맡기고 나는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저 아래쪽에 조령관으로 오르는 보도가 보인다.


보도가 가까워지자 <새재 옛길>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소담스런 오솔길이 열려 있다. 이제 이 땅에는 옛길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아스라한 추억이 서린 옛길은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리고 있다. 옛길은 직선의 길이 아니다. 완만한 곡선의 길이다. 빠르고 편한 직선의 길이 우리네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이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우리의 정신도 이것과 다르지 않다. 느릿느릿 살아간다는 것은 이제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지 않았는가. 그런 뜻에서 새재 옛길은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우리네 정신을 살찌우는 좋은 처소로 생각된다. 이 길에도 아주 개선할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길손들이 쉬어가기 좋은 쉼돌과 약수터]

 

[복원을 새로 한 탓에 생경한 느낌을 주는 성황당] 

 

 

약수터가 있는 쉼돌에서 거의 20분가량을 기다렸는데도 후미는 오지 않았다. 길 잃을 염려가 없기에 선두의 용효와 덕준이,윤득이와 함께 옛길을 밟아 조령산휴양림을 거쳐 새재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신선봉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담묵의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이곳 풍광을 담으면서 신선봉으로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본다.


 

나는 후미를 배웅하러 9인승 스타렉스를 몰아 조령산휴양림 매표소로 달려갔다. 내 우려대로 언니가 몸이 예전만 못하여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바람에 늦어졌다고 한다. 나는 일행을 모두 태우고 수안보로 직행했다. 이곳에서 두 자매와 작별의 인사를 했다.언니의 빠른 쾌유를 빌며 우리는 낙천탕에서 산행의 피로를 달랬다. 이어서 낙천탕 주인이 소개한 큰집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합동산행 때 시킬 메뉴를 시켜 음미했다. 그런데 답사 때는 음식도 맛도 나무랄 데가 없지만 정작 대규모 인원이 등장하는 합동산행 때는 음식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걸 겪은 나로서는 꼬치꼬치 캐묻고 점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당 주인은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한번 믿어보란다.


수안보와 부곡은 한때는 인파가 물밀듯이 밀려드는 바람에 호황기를 구가한 온천지역이었다.그런데 바가지요금에다 불성실한 업주의 태도로 말미암아 악명을 떨치더니 마침내 사람들이 기피할 곳으로 전락하고만 대표적인 유흥지였다. 그래서 이들 지역을 산행할 때는 아예 그러려니 하는 게 마음 편하다. 오늘도 비록 평일이었지만 수안보 일대는 사람들의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았다. 상차림과 밑반찬,주인의 자상한 배려로 볼 때 큰집식당은 나를 실망시킬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제발 이 기대가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는 답사산행의 마지막 술잔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