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공리 시인의 마을~백련사-향적봉
때:2007년 2월 4일(첫째 주 일요일)
참가자:김익수,김현기,이재화,청산,조현영 5명
산행코스:삼공리-백련사-향적봉-설천봉-스피츠 코스-설천하우스(5시간)
일주일 전 29명의 동기와 가족들이 곤돌라를 타고 향적봉을 다녀왔다.그날 설천봉에서 허리춤까지 빠지는 적설 때문에 하산코스로 염두에 두었던 스피츠 슬로프 코스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모처럼 눈꽃산행에 동참한 아내들과 심설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동기들을 고려한 결정이었다.설천봉과 향적봉 일원에 펼쳐진 눈부신 상고대와 바람이 빚은 연금술이라는 눈꽃은 짧은 산행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오래토록 살아 있을 것이란 위안을 삼으며...
그런데 이날 눈길을 헤치며 심설산행을 잔뜩 기대했던 재화와,현영이,익수는 곤돌라를 타기 위해 기다렸던 하릴없는 시간이 아깝다며 부산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연신 볼멘소리를 했다.그래서 나는 또 다시 주력 좋은 동기들한테 연락을 취하고 말았다.저번에 포기한 스피츠 코스에 재도전하자고 하니 지난 일요일 친구 딸 결혼식으로 불참했던 마산의 현기가 흔쾌히 와주어 모두 5명이 현영이의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그러고 보니 현영이만 빼곤 모두 대간 팀이 아니던가.현영이는 첫 구간에서 천왕봉에 오른 다음 세석에서 거림으로 하산했을망정 자신이 마지막 구간에 참여하면 처음과 끝을 종주한 셈이라며“반쯤은 대간꾼”아니냐(?)며 익살을 떤다.허허,그도 그럴 것이라며 우리는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덕이 만물을 기르고 윤택하게 한다(德潤身)’는 옛말처럼,덕이란 바로 산의 속성을 일컬은 말일 것이다.‘산은 베푼다.기를 베풀고 퍼지게 할 수 있어 만물을 살린다’고 했으니,그렇다면 덕유산이란 이름은 산의 본성을 오롯이 담고 있는 산이름이 아니던가.덕스럽고 넉넉한 산,덕유산(德裕山)은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아련한 고향과도 같은 산이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이 전화를 피해 이곳에 들어왔는데,신기하게도 왜병들이 지날 때마다 짙은 안개가 드리워 산속에 숨었던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전설이 전해오니 얼마나 덕유산을 겨레를 살리는 신령스런 산으로 존숭하였는지 알 수 있다.이런 연유로 덕유산에는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은거하였고,덕유산 지역은 전란이 미치지 않는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꼽혀 왔다.
덕유산은 백두대간의 산줄기에서 위로는 삼도봉과 아래로는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과 연결해주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남한에서는 한라,지리,설악에 이어서 네 번째로 높은 해발 1,614m의 향적봉을 주봉으로 삼고 있다.일찍이 미수 허목 (許穆·1595-1682)은 덕유산기(德裕山記)에서‘남쪽 지방의 명산은 절정을 이루는데 덕유산이 가장 기이하다(南方名山絶頂, 德裕最奇)’고 찬탄하기도 하였다.
산줄기로 치면 덕유산은 무풍의 삼봉산에서 시작하여 수령봉,대봉,지봉,거봉, 덕유평전,중봉을 넘어 향적봉에 올랐다가 다시 중봉,덕유평전을 거쳐 무룡산, 삿갓봉,남덕유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달리는 100리의 큰 줄기를 형성한다.물길로 보면 덕유산은 낙동강의 지류가 되는 황강과 남강의 발원지가 될 뿐만 아니라 금강의 상류를 이루는 하천이 발원함으로써 낙동강 수계와 금강 수계의 분수령을 이룬다.
오늘날 덕유산은 그 산세와 위치로 보아 흔히 북덕유와 남덕유로 구분되기도 한다.북덕유는 이름처럼 넉넉하고 웅장한 육산(肉山)이고,남덕유는 장쾌하고 힘찬 골산(骨山)이다.그런데 대동여지도에서는 원래 덕유산은 현재 무주의 북덕유를 일컫는 것이었고,남덕유산는 조선시대에는 봉황봉이었다고 전한다.
[구천동계곡 들머리 풍경]
삼공리매표소에 이르니 국립공원 입장료 폐지와 함께 예전의 그 매표소는 시인의 마을로 바뀌어 있었고 공단 직원들의 위압적인 자세도 많이 부드러워 보였다.이제 무주 구천동계곡을 따라 향적봉으로 오르기 위해 백련사로 걸음을 옮긴다.
흔히 구천동계곡의 빼어난 경치를 구천동 33경이라 일컫지만 그 시작은 설천의 나제통문에서부터다.나제통문~삼공리~백련사를 거쳐 향적봉에 이르는 약 21km 구간이 바로 그것이다.그 제1경은 나제통문.하지만 나제통문에서 삼공리까지13km에 이르는 도로를 끼고 있는 계곡에는 구천동 33경 중 14경이 있는데,실제 이정표가 되어 있는 것은 제1경인 나제통문과 제12경인 수심대뿐이다.
그런데 무주 구천동 33경은 오래 전부터 선현들이 명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1963년에 들어서 명명된 것이니 그 유래가 참으로 일천하다.그 가운데서도 제1경이라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으로 끊임없는 쟁탈전이 벌어졌던 요충지라고 무주군청 관광안내도에 적혀 있으나 이는 역사를 날조한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 굴은 일제 때 일본인들이 금과 임산물을 운반하기 위해 석모산을 뚫었다는 것이다.이는 무주 군청지인 <적성지>에도 기록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인데도 말이다.구천동 33경을 명명하면서 느닷없이 나제통문이 등장하고,교과서에도 버젓이 올려지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그러다가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뜻있는 분의 항의로 교과서에서 나제통문은 이젠 사라지고 말았지만 잘못된 역사의 오류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나제통문이란 용어는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과 학생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나제통문을 지나며 역사의 허구를 실상으로 받아들일 지경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 않겠는가!
[잔설이 남은 구천동 등산로를 따라...]
구천동계곡은 백담사계곡이나 대원사계곡처럼 골이 깊고 큰 계곡은 아니다.그러나 울창한 숲 사이를 흘러내리는 계곡의 자태는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급하게 바위 사이를 휘돌던 물살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또 바위들 사이로 부채살처럼 여러 갈래로 펼쳐지기도 한다.특히 계곡의 물소리는 계곡의 크기에 비해 훨씬 웅장해 귀를 시원하게 해준다.길은 높낮이가 그리 심하지 않아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다.6km를 구천동계곡과 함께 걷기 때문에 마음만 편히 한다면 지루하지도 않다.이같은 구천동 길,그 길에는 탕탕 기세좋게 흘러내리는 물살도 이젠 결빙이 되어 적막하다.눈 덮인 길을 걸어 오른다.우리의 산하를 두고 사람들이 편의에 따라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거는 바람에 조금은 안쓰러웠지만 자연은 늘 그대로 아니던가.변함없이 맞아주는 구천동계곡을 더터오르며 이내 줄지어 선 등산객들의 틈서리에서 허정허정 발품을 판다.
[구천동 골짜기에 백설이 뒤덮고 나무 그림자가 드리웠다.]
[기세좋게 흘러내리던 물살도 결빙되어 숨을 죽이고...]
이럴 땐 대야영장 뒤로 해서 칠봉으로 오른다면 호젓해서 좋을 텐데 휴식년제로 내처 막아 놓았으니 아쉽다.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월하탄(月下灘).계류가 큰 바위를 타고 두 갈래로 시원하게 떨어지는 곳이다. "달빛 아래의 여울"이라는 시적인 이름과 걸맞지 않게 물살이 아주 가파른 곳이다.월하탄을 지나 조금 걸으면 인월담(印月潭)을 만난다.이름은 담이지만 넓은 반석이 있어 잠시 쉬어가 도 좋으리라.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어 다리를 건너 정자나 정자 아래 너럭바위에 자리를 잡으면 되지만 삭풍이 몰아치는 지금은 다리 위로 두툼하게 쌓인 백설만 분분하다.
[두툼하게 쌓인 바위 위의 신설이 소담스럽다.]
인월담을 지나면 사자담(獅子潭)과 청류동(靑流洞)이 연이어 나타난다.그리 경치가 빼어나거나 절경을 이루는 곳은 아니나 이 청류동의 위쪽으로 펼쳐지는 계곡이 아름답다.이 구간은 가능하면 계곡을 따라 걸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청류동을 지나 상류로 더 오르면 비파담(琵琶潭)이다. 커다란 암반 위를 달려 내려온 계류가 담을 이루는데,구천동계곡에서 가장 큰 담이 이 비파담일 것이다.비파담이란 이름은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이곳에서 비파를 뜯으면서 놀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다리가 놓여 있어 다리 위로 올라가면 비파담의 멋진 모습을 잘 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잔설이 덮고 있어 눈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비파담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구월담(九月潭)이다.이렇다할 특징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숲속을 빠져나오는 계류의 모습이 선경을 연상케 하는 곳이다.구월담을 지나 신대휴게소와 송어양식장을 거쳐 조금 더 오르면 금포탄(琴浦灘)이다.바람 소리,새 소리,물 소리가 가야금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금포탄이 매표소에서 백련사까지의 중간 지점이 되는 곳이다.금포탄을 지나면 한참을 이정표 없이 올라야 한다.1km 정도 가면 돌다리를 건너 안심대(安心臺)가 나오는데, 바위가 유난히 많아 바위 사이를 흐르는 안심대 주변의 계곡이 아름답다.
[물길과 너럭바위가 모두 숨죽이는 듯한 은빛 세상]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찬란히 빛나는 때묻지 않는 백설-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
[백설의 츰서리에서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는 물길]
안심대를 지나면서 구천동계곡은 조금 더 솔아지며 물살이 빨라진다. 안심대를 지나 바위 틈을 어지럽게 달리는 계곡을 따라 오르면 구천폭포를 만나게 된다.워낙 높이가 낮아 폭포라고 하기에는 어색하지만,소담스런 2단 폭포이다.구천동계곡은 골짜기가 뱐화무쌍한데 비해 뜻박에도 폭포다운 폭포는 없다.이 구천폭포와 월하탄 정도가 그나마 폭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그러나 오늘 등산로에서 내려다보는 구천폭포의 모습은 골짜기를 덮은 눈더미로 그 모습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구천폭포를 지나 계속 계곡 길을 따라 오르면 돌무지가 있는 성황당을 거쳐 드디어 백련사의 일주문과 부도밭이 나온다.벌써 12시 반이 넘었다.향적봉에 오른다면 점심 때를 놓칠 것이니 우리는 이 어름 어딘가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을 들기로 한다.안내이정표 주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아내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덥혀 내놓으니 현기는 자신이 제조한 솔송주를 꺼낸다.이제 소주 원액을 구할 방도가 없으니 솔송주도 이것이 마지막이라며 아쉬운 듯 한 순배씩 돌린다.솔송주에 김치찌개,알싸하면서도 향기로운 솔내음이 입안에 그윽하다.백설이 눈부신 백련사 일주문을 등지고 우리는 아름다운 시간을 마셔댔다.취기가 감돌아 오수자굴을 거쳐 중봉 쪽으로 오르기는 아무래도 무리일 성싶었다.
사실 백련사는 일주문에서 조금 더 걸어 올라야 한다.일주문을 지나 백련사에 닿기 전에 이속대(離俗臺)를 만나게 된다.이름 그대로 속세를 떠난 곳이라는 이속대는 평안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이곳까지 오르느라 지친 나그네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에 충분하다.벌써 시계는 오후 2시,서둘러야 향적봉에 올라 하산길에 들 수 있을 것이다.
[1973년 최현수 스님이 일구었다는 백련사 일주문-단청이 아름답다.]
[백련사 일주문의 현판과 정교한 단청]
[매월당 설흔스님의 부도밭-호가 같은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는 아니다.]
구천동계곡의 끝자락인 해발 약 900m 지점에 위치한 백련사는 신라 신문왕( 681-692) 때 백련선사(白蓮禪師)가 은거하던 곳에 백련이 솟아나왔다 하여 절을 짓고 백련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또한 830년(흥덕왕 5년)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설립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은 찾을 길이 없다.하지만 구천동(九千洞)이라는 이름을 통해 백련사가 있는 이 지역이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구천동이라는 이름은 1552년 덕유산을 기행했던 임훈(林薰,1500-1584)의「덕유산향적봉기(德裕山香積峯記)」에“옛날에 이 골짜기에서 9천명의 성불공자(成佛功者)가 살았으므로,구천인(九千人)의 둔지(屯地)’라는 뜻에서 구천둔(九千屯)이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그뒤 구천둔이라는 지명이 구천동으로 바뀌어 불려지게 되었으며 수행을 위한 은둔지로 신라시대 이래 근대까지 수많은 선사들과 수도승들의 수도처로 알려져 있다.
아쉽게도 구천동계곡에 있었던 사찰들에 대한 고려와 조선 초기의 기록은 찾을 수 없고 조선중기 이후의 기록만이 전하지고 있다.임훈(林薰)이 1552년 덕유산을 기행하며 쓴 「덕유산향적봉기(德裕山香積峯記)」에는 향적봉을 향해 길을 떠나며 들른 삼수암(三水庵)과 향적봉의 탁곡암(卓谷庵)ㆍ향적암(香積庵)ㆍ북암(北庵) 등 수많은 암자에 대해 적고 있다.1672년에 덕유산을 기행한 윤증(尹拯)의「유여산행기(遊廬山行記)」에는 구천동 암자들에 대한 감상이 서술되어 있는데,여산(廬山)은 덕유산의 별칭으로 정토신앙의 성행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덕유산에서 출가하여 여러 납자들을 이끈 고승으로는 청허유정(淸虛休靜)의 스승 부용영관(芙蓉靈觀)을 비롯하여 부휴선수(浮休善修)ㆍ정관일선(靜觀一禪)ㆍ벽암각성(碧巖覺性)ㆍ임성충언(任性忠彦) 등이 있으며,그 가운데 정관일선과 임성충언은 백련사에서 입적하여 그를 추모하는 부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근대에 들어와 1900년 당시 무주부사인 이하섭(李夏燮)에 의해 가람이 중수되면서 그 맥을 이었는데,일제시대에 구천동 일대가 일본 북해도제국대학의 대학림(大學林)이 되면서 사찰의 전통가옥이 일본식 건물로 바뀌었다가, 6.25 때 건물 모두가 불에 타는 참화를 겪게 되었다.
이후 10여 년간 폐사가 되다시피했다가 1961년에 5칸 규모의 인법당 설립을 시작으로,구천동을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행정당국의 정책과 함께 백련사의 복원불사가 시작되었다.당시 주민들은 덕유산 구천동의 중심사찰이었던 백련사를 회상하며 가람의 복원을 위해 발원하였다.
근대 백련사 복원의 중창주라 할 수 있는 당시의 주지 최현수(崔賢首) 스님은 복원불사에 앞장서서,1973년 일주문 건립,1974년에 대웅전을 신축하여 삼존불과 후불탱을 봉안하였으며,1977년에 원통전,1986년에 명부전을 건립하여 백련사를 구천동의 대찰로 복원해 내었다.이후 주지 평상(平常) 스님은 범종각ㆍ백련회관을 조성하였으며,국립공원사찰답게 정갈한 가람으로 정비하였다.1998년에는 세계적인 신문재벌 로드미어의 부도를 이곳에 조성하여 백련사가 자리한 구천동이 명당임을 보여주었으며,계현스님은 삼성각 건립 및 요사의 증축 등을 통해 자연과 호흡하는 대가람의 불사를 이어가고 있다.
[백련사 경내를 지나 향적봉으로 오르는 산길 어귀]
백련사 천왕문의 높은 계단을 딛고 올라 잠시 경내를 살펴보고난 뒤,등산로로 접어들었다.많은 등산객들이 오르내리는 향적봉 오름길에는 일주일 전과 달리 눈이 녹아 질척거렸다.산등에 올라서자 나무데크가 나타난다.
[본격적으로 가파름이 시작되는 오르막길 풍경]
8년 전 여룸의 일이었다.덕유종주를 하기 위해 나 홀로 한밤을 도아가며 이 가파른 길을 따라오르고 있었다.향적봉 산장에 이르는 절반 지점에 이르자 나무데크를 설치하기 위해 LPG 가스통을 울러메고 와 이곳에서 지지대를 용접하는 일꾼들과 마주쳤다.그때 내 후랏쉬는 건전지가 다 소모되어 눈 어림짐작으로 오를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나는 그 일꾼들을 만나 잠시 숨을 고르며 이야기를 했다.나도 놀랐지만 그들도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당시 나는 맨발로 산을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 야심한 밤에 향적봉으로 오르다니요? 그것도 맨발로요?”
“그렇답니다.1시간이면 오를 수 있지 않나요.노상 맨발로 걸어오른답니다.”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어쩔 셈이예요?”
“이젠 이골이 났지요.산장에서 자고 내일 새벽부터 육십령까지 갈 참입니다.”
늙스그레한 일꾼이 나에게 막걸리를 건네주며 내 행색을 살피더니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용접봉 불빛이 섬광처럼 파어나는 틈사이로 서로를 쳐다보며 목이나 축이라고 건네주는 막걸리 한 사발,정말 기가 막혔다.
“고맙습니다.막걸리 맛이 일품이네요...
그런데 낮에 공사를 하시면 될 텐데,어찌 이 밤중에...?”
“내일은 일정이 빠듯해 그렇지요.”
“이 무거운 가스통은 어떻게 지고 오셨나요?”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무거운 가스통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요,이젠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처음엔 힘들었지만
하다보니 별 거 아니더군요.”
“대단하십니다.그건 그렇고 이곳에는 나무계단을 설치할 장소가 아닌데요”
“우리야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죠.먹고사는 일이니까요.
정말 그때는 그분들이 얄밉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그런데 이제 덕유산에는 곳곳에 나무테크가 설치되어 있었으니 등산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는 괜찮지만 무분별하게 이런 구조물을 설치하여 산을 훼손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날 밤,산장으로 오르는 마지막 1km를 올빼미처럼 눈을 밝히며 올랐다.산장에 다다르자 그대로 곯아 떨어져 잠속에 빠지고 말았다.이튿날 나는 맨발로 남덕유를 거쳐 육십령까지 종주를 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일주일 전엔 심설을 짐작케하는 눈길을 하산객들이 내려온다.]
[나목의 그림자가 얼비치는 순설의 세계]
[향적봉 대피소 아래의 주목]
연이어 나타나는 나무데크를 오르는 등산객들과 하산하는 등산객들이 뒤엉켜 걸음은 자꾸만 지체된다.내가 사진을 찍는 사이에 선두의 재화와 현기는 휑하니 줄달음 치고 익수와 현영이는 뒤로 처진다.조금 오르니 멋들어진 구상나무가 모습을 보여준다.숲속을 걸어오르기 때문에 전혀 조망이 되지 않다가 이 구상나무에 다다르자 나무 사이로 투구봉이 눈에 들어온다.이어서 돌무지가 나오고 주목이 짙푸른 하늘 아래 고고하게 서 있다.가파른 오르막길이라 숨길이 차츰 거칠어진다.가슴을 펴고 허리를 곧추 세우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이제 그동안 고통스럽던 허리 통증은 사라진 듯 하다.등산로 옆에는 아직도 때묻지 않은 백설이 푸르도록 시릴만큼 빛을 발한다.
[향적봉에서 바라본 산그리메-대덕산과 삼도봉이 아스라 하다.]
드디어 향적봉대피소 갈림길에 다다라 잠시 배낭을 벗고 다리쉼을 했다.이제 한마장 발품을 팔면 정상이다.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향적봉 정수리 나무데크를 밟고 오르며 뒤돌아보니 주변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대간마루금의 봉우리인 지봉과 대봉,그 앞쪽의 투구봉,대덕산과 저 멀리 구름 속으로 솟아오른 가야산과 민주지산과 삼도봉이 아스라하게 너울거린다.
[향적봉에서 바라본 앞쪽의 칠봉과 민주지산이 흐릿하다.]
[향적봉에서 바라본 대봉과 투구봉,그리고 중첩된 산그리메]
[향적봉에서 조망한 덕유연봉-지봉과 투구봉이 백설의 관을 쓰고 있다.]
[중봉에서 향적봉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객들]
[향적봉 정상에서 바라본 무룡산과 남덕유]
정상에 다다르니 바람이 세차다.재화와 현기는 한참이나 기다렸다며 하산을 재촉한다.그러나 익수와 현영이가 아직도 올라오지 않았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백련사에서 향적봉까지 오르는데 1시간 20분이 걸렸다.10분쯤 기다려 익수가 올라오고 또 다시 20분을 기다리자 현영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수리에 올라섰다.
대간 첫 구간,천왕봉에 올랐을 때 현영이는 3보 1배했는데,이번에는 5보 1배가 아니냐며 계면쩍게 웃는다.주력이야 차이가 없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걸음으로 북덕유에 오른 것만도 대견한 일이었다.현영이는 하산길에는 자신이 있다며 오르막길에 누를 끼친 것을 만회할 테니 걱정하지 말란다.워낙 자연을 사랑하는 현영이의 진지한 자세에 우리는 웃음으로 화답하고 말았다.일주일전에 덕유에 오고 다시 재도전하는데 동참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향적봉 정수리 데크를 힘겹게 오르는 현영이-이번에는 5보 1배의 걸음으로...i
[북덕유 향적봉에 선 현영,익수,재화와 현기]
덕유산은 사시사철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산이지만,특히 덕유산의 겨울은 시리도록 아름다운 설경이 일품이다.향적봉에서 중봉에 이르는 구간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구상나무와 주목에 피어난 설화는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무주리조트 스키장이 말해주듯이 덕유산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눈이 많은 곳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이처럼 덕유산 일대에 눈이 많이 내리는 이유는 덕유산이 바로 백두대간의 산줄기로 한반도 남부의 한복판을 동과 서로 가르며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겨울철 시베리아 고기압의 확장으로 황해를 건너며 수증기를 흠뻑 머금은 대기는 빠른 속도로 내륙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때 높은 장벽을 이루는 덕유산맥의 산사면을 타고 강제 상승한 대기는 단열·팽창(斷熱 膨脹)하여 냉각됨으로써 눈이 되어 내리는 것이다.그러나 이날은 눈이 다 녹아 상고대와 눈꽃은 볼 수 었어 유감스러웠다.일주일 전에는 진경산수를 자랑하던 덕유산이었는데...
덕유산(1,614m)dl은 면적 229㎢로 전북 무주군과 장수군,그리고 경남 거창군과 함양군 등 4개 군에 걸쳐 있다.지리산,소백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육산(肉山)을 이루며 한라산(1,950m),지리산(1,915m),설악산(1,708m) 다음으로 남한에서 네 번째 높은 산이다.
덕유산 정상 향적봉에서부터 남덕유산까지 약 30km에 달하는 능선을 걸어보면 지리산에 뒤지지 않을 만큼 육중하고도 장쾌함을 알 수 있다. 덕유산(德裕山)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처럼 산세가‘덕이 넘쳐나리 만큼 넉넉하며 여유로워 보이는 모산(母山)’과 같은 모습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덕유산이 이처럼 유려하고도 장대한 산세를 이루게 된 것은 덕유산의 고산부를 이루는 지질인 선캄브리아기 변성암류인 편마암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덕유산의 편마암은 지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편마암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원생대 중기 약 20~18억 년 전의 것들이다.
우리나라의 약 30%를 이루고 있는 화강암은 보통 암석의 수평 또는 수직으로 발달한 절리면을 따라 침식과 풍화가 활발히 진행되어 복잡하고도 기괴한 암석 경관을 이루고 있다.그 대표적인 예를 주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북한산, 설악산, 월출산 등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면에 편마암은 화강암과 달리 수평적으로 단단한 암석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절리 발달이 저조하다. 따라서 암석의 침식과 풍화를 이끄는 주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수분 침투가 어렵기 때문에 특이하고도 다양한 암석 지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편마암이 주를 이루는 덕유산 고산부 전 사면에서는 오랜 세월을 두고 수평적으로 표층에서 침식과 풍화가 이루어져 두터운 피복물로 덮여 있다. 따라서 덕유산은 바위가 많은 골산(骨山)이기보다는 펑퍼짐한 육산(肉山)의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다.
덕유산은 생태·지리학적으로 남부권과 북부권을 연결, 그 중요성이 매우 높은 곳이다. 원시림에 가까울 만큼 풍성한 삼림을 형성하고 있는 덕유산에는 검독수리,까막딱따구리,사향노루 등 휘귀종을 비롯해 약 6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식물분포학적으로도 한반도의 북방계와 남방계의 식물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독특한 생태 구조를 가진 곳이다.
특히 정상인 향적봉에서 남쪽 중봉에 이르는 8부 능선에는 약 1,000그루가 넘는 300~500년 생 주목과 구상나무가 천연 군락을 이루고 있어 태고적 신비를 자아내고 있다. 이는 한국의 식생 경관 중 보존가치가 가장 높은 고령의 극상림 지구에 속한다.
그러나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를 위해 1988년부터 시작된 스키장, 골프장 등을 포함하는 무주리조트 개발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이곳 덕유산의 자연 자원 및 생태계를 크게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개발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해발 850~960m 부근에 골프장이, 그리고 향적봉 바로 아래인 설천봉 부근 1480m까지 스키 슬로프가 건설되었다. 산자락을 헐어내고 산정까지 파헤치며 관광곤돌라를 만들며 많은 동·식물들이 서식처를 빼앗기고 쫓겨 갔으며, 건설 현장 주변의 많은 주목과 구상나무들이 말라죽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덕유산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하고 있다. 2014년 동계 올림픽 개최 후보지 선정에 실패한 무주군은 다시금 동계 세계대회 유치를 위한 밑그림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만약 동계 올림픽이 이곳에 유치된다면 지금 시설을 몇 곱절 뛰어넘는 추가 개발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완만하고도 밋밋한 덕유산의 지형적 특성상 필요한 급경사지의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산 정상부에 최소한 40~50m의 인공 구조물을 건축해야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봅슬레이 및 루지와 같은 특수 경기장 건설을 위해서는 덕유산 국립공원 내의 또 다른 부지에 손을 대야만 한다. 그야말로 덕유산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인 셈이다.
지리산과 함께 한반도 남부 생태계의 보고를 이루는 덕유산의 운명이 개발과 보존이라는 극한 대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금부터 대안을 찾는 데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80년대 경험했던 무원칙적이고 비효율적인 난개발로 인하여 다시금 덕유산이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
<하편에서는 향적봉-설천봉에서 스피츠 슬로프로 내려온 하산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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