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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石川) 물길 따라 걷기-상세정보

[석천 들머리,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신덕마을]

 

1.산행에 대한 명상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 뛰노나니/나 어릴 적 그러했고/다 자란 오늘에도.....”라고 영국의 낭만파 시인「윌리엄 워즈워드」는 읊었다. 스잔하고 불안한 이 시대, 아직도 내 가슴을 뛰놀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지의 산행이다. 놀라움과 신기함으로 가득 찬 세계로 다가서는 행위, 그것이 바로 산행이기 때문이다.

 

산행은 땀과 고뇌로 점철된 기다림의 세계이기도 하다. 쓰디쓴 시간이 지나면, 감로수와 같은 희열이 폭포수처럼 전신을 적시게 된다. 산행은 땀을 흘리며 걸어야 한다. 도심을 질주하는 광속(光速)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한발 한발 제 스스로 발품을 팔아 그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산행을 함께 하자고 하면 "집 떠나 불편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산에 가자고 하면 "힘든 일을 뭐 하러 고생하면서 하냐?" 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산에 가겠다고 약속해놓고서도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리면 뒷걸음질 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산행의 동참 여부를 명확히 하지 않고, 그때 "가 봐서..." 라고 버릇처럼 말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불편과 고생을 현실의 좌표로 삼고, 그것들을 잊고자 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들을 회피하려는 부류라 할 것이다.우리에게 다가올 황홀한 이 가을은 많이 남은 것 같지만, 기껏해야 몇 십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불편하지 않고 고생하지 않을 미래,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2.월유봉(月留峰)의 풍광에 취하고

 

[2001년 10월 28일,부경합동산행 때 월유봉을 등지고]

 

경부고속도로 추풍령을 지나 황간터널을 빠져나오면 눈앞에 낙타등 같은 묏부리가 얼핏 보이다 사라진다.이것이 한천팔경으로 이름난「월유봉」이다. 워낙 깜박할 순간이라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그 모습을 놓치게 된다. 이어 황간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굴다리를 빠져나오면 이내 황간 시외버스정류소다.

 

삼도봉(1177m)과 민주지산(1241.7m)에서 발원하는 물한계곡의「초강천」과「추풍령천」의 골물이 서로 몸을 섞는 어름의 동산 위에는 조선 태조 무렵에 처음 세웠다는 가학루(駕鶴樓)가 금세라도 날아오를 듯 추녀깃을 세웠다.

 

산수미(山水美)의 극치라는 월유봉으로 간다. 황간 시외버스정류소 앞의 소계교를 건너면 이내 갈림길이다. 여기서 곧장 가면 상주행 49번 도로, 왼쪽으로 틀면 보은행 579번 도로가 나온다. 월유봉은 579번 도로로 꺾어들어 2km도 채 안되는 지근거리에 있다.


황간 시내를 가로지르는 초강천(草江川)은 황간면에서 추풍령천을 받아들인 뒤,북서쪽으로 몸을 뒤척인다. 강의 양쪽으로 퇴락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들어찬 황간 시내를 지날 때의 초강천은 오히려 지저분하고 볼품마저 없어 보인다. 그런 황간 면소재지를 벗어나 원촌리(院村里)에서 다시 만난 초강천은 저 강이 아까 보았던 그 강이었던가 싶게 면모를 일신한다. 여기서부터 드디어 초강천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셈이다. 강물은 물감을 푼 것처럼 시퍼렇게 살아난다,


월유봉에 다다르자 낙타의 등혹 여섯 개를 나란히 이어 붙인 것 같은, 월유봉이라는 이름의 묏부리가,거기에서 미어져 나온 검푸른 거대 암괴가,제각각 초강천을 거울 삼아 그 멋들어진 면상을 비춰보고 있었다. 강물,산,바위,백사장이 이루어낸 완벽한 조화미,강렬한 개성....하나의 완전한 성취,자연의 완벽한 구도가 여기에서 재현되고 있는 듯했다.

 

월유봉 일대의 절묘한 풍치를 일찍이 옛사람들은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 이름짓고 찬미했다.월유봉을 비롯,산양벽(山羊璧)이니 용연대(龍淵臺)니 하는 여덟 곳의 경승을 표나게 내세웠던 것이다.우암 송시열도 한때 이곳에 머물러 공부를 하는 한편 신선 취미를 마음껏 즐겼다고 한다.강가의 한천정사(寒泉精舍)는 우암이 거처했던 옛터에 훗날의 유림들이 세운 기념물이다.하늘을 여행하던 달덩이조차 그곳에 머물고 싶어한다는 월유봉이 빚어놓은 초강천의 풍경은 가인(佳人)처럼 빼어났다.

 

금강의 상류인 초강천은 여러 지천을 거느렸다.그 가운데 준수한 물줄기는 단연「석천(石川)」이다. 속리산에서 발원,상주땅 모동면을 거쳐 영동군으로 들어오는 석천은 황간면 원촌리에서 초강천의 품에 얼싸 안긴다. 석천은 소담스런 물줄기이다.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거듭 숨어드는 물길의 그윽한 형세,고요하고 밝은 강 기운, 그리고 얌전하게 흐르는 물살이 소녀의 순진함과 수줍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여느 때의 이런 얌전함과 딴판으로 오늘 석천의 상류, 용추골의 거센 물살은 이 말을 무색케 하고 말았으니 자연의 오묘함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따름이었다.


3.오도치 넘어 석천 들머리로

 

월유봉과 헤어져 황간 쪽으로 돌아와  49번 도로로 접어들어 산행들머리인 상주시 모동면「수봉리」로 간다. 예전의 영동은 워낙 감으로 유명하여 ‘감고을’이라 했는데, 지금은 감보다도 포도가 주업의 자리를 꿰찬 듯 제철이 지났건만 곳곳에 포도밭이 지천이다. 난곡을 지나 우매리「독점」에 다다르니「반야사」표지판이 반긴다.

 

택시는 서서히 오르막길을 올라 고갯마루에 이른다. 이 고개가 충북 황간(黃澗)과 경북 상주시 모동면(牟東面)을 가르는「오도치(吾道峙 350m)」이다. 고갯마루에 우뚝 선 빗돌에 그 아래 상주쪽 수봉리(壽峰里) 지명을 따서 ‘수봉재’라 쓰였지만, 그것은 충북 영동군보다 재정이 나은 상주시에서 1990년에 이 길을 포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1992년판 이전의 국립지리원 지형도에서는 분명 오도치라 표기하고 있으나, 1997년판 25,000분의 1 지형도에서는 슬그머니 수봉재로 바뀌어 있다. 국립지리원이 일관성 없이 지명을 표기하는 바람에 시판되는 지형도마저 혼선을 불러일으킨 셈이다.


왼쪽으로「만경봉」과「헌수봉」을 감아돌며 고갯길을 내리면 길 왼편에 빗돌이 또 서너 개 뭉쳐 서 있는 수봉리「옥동」이 나온다. 여기서 하차하여 마을 안길을 걸어 들어가니 눈앞에 2층 다락 지붕밑에 회보문(懷寶門), 그 안마루에 청월루(淸越樓)라는 연액이 걸렸다. 조선조 태종으로부터 남다른 신임을 받으며 국가기반을 확립한 황희 정승(1363~1452)과 황씨 문중의 선현들을 1518년에 배향하여, 그 사이 백화서당이란 이름으로 지방교육에 이바지해온 그「옥동서원(玉洞書院 (경북기념물 제52호)」이다.

 

[신덕마을에서 바라본 백옥정(白玉亭)과 석천계곡]

 

[백화교에서 바라본 백옥정]

 

[백옥정에 올라]

 

옥동서원을 옆구리에 끼고 석천으로 다가가면 헌수봉 산줄기가 내리는「옥봉(玉峰)」꼭지에 절묘하게 올라앉은「백옥정(白玉亭)」이 쳐다보인다. 백옥정을 빙 돌아 그 안쪽의「세심석(洗心石)」과 함께 이 고장 풍류객들의 놀이터였던 모양이다. 백옥정 아래 절벽길을 에돌아 제법 널찍한 빈터에 멈춰선다. 한때는 여기서 석천(石川)을 출렁다리로 건너「금돌산성」으로 오르곤 했는데, 지금은 다시 한길로 돌아나가 백화교를 건너 신덕마을 앞으로 접어들게 되어 있다.

 

4.석천 물길 따라 걷기

 

석천(石川) 물길이 궁금하여 반야마을 사람들에게 길 형편을 물어보았으나 어느 누구도 물길을 타본 적이 없다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해야 반야사 너머 저승골 아래까지 가본 사람은 더러 있지만 “아이쿠, 잘못하다간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여!” “뭐 하러 그 험한 물길을 답사하는감유.”하며 반문한다. 반야마을 숲속민박식당의 강희표 사장도 마찬가지라며 전해 듣기로는, 다섯 차례 물을 건너 3시간 정도면 반야사에 닿을 거라는 말뿐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면 한 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이들이 내 상상력을 불타오르게 했다. 낯선 곳, 그것도 사람들의 발길을 거부하는 곳이라면 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직성을 삭이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지도를 펴놓고 예상되는 물길과 길을 그려보곤 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석천은 그렇게 내 마음 저 밑에서부터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이번에는 기어이 석천 답사를 마치리라 다짐을 했다. 그러나 황간의 반야마을에서 반야사를 거쳐 석천 거슬러 오르기는 절에서 출입을 막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상주시 모동면 신덕마을이 들머리가 된다.

 

[신덕마을에서 바라본 석천들머리와 백화산]

 

백옥정 건너 매표소에서 왼쪽 길을 따라 가면 조그만 언덕배기가 나온다. 거기 작은 농장을 지나면 그 언덕은 물가로 서서히 높이를 낮춘다. 그런데 사실 이 길은 지름길이다. 제대로 물길을 타려면 매표소 건너 백옥정 아래 강변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옳다. 그래야 옛 선인들처럼 세심석(洗心石)에 앉아 발도 담가보고 유연하게 흐르다 태극처럼 휘어져 돌아가는 석천의 물길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름길을 택한다.

 

[석천 들머리 풍광,첫 번째 강물을 건너는 지점은 오른쪽 물가에서 왼쪽 산모롱이로 건너야 한다.]

 

12시 반. 강가에 다다랐다. 햇빛이 스펙트럼처럼 강렬하게 온 누리에 쏟아지고 있었다. 강 건너편에는 헌수봉 줄기가 산그늘을 만들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강변에는 갈대가 듬성듬성 서 있고 물 냄새가 짙게 풍겨온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벽과 울긋불긋 수놓은 단풍이 절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강심(江心)은 깊지 않아 거울처럼 투명하며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강의 들머리부터 눈부신 풍광에 매료되자 마음은 황홀해지기 시작했다. 가을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아름다운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물은 수런거리고 있었다. 산 그림자 드리워진 강물의 수런거림이 비로소 마음을 흔들고 갔다.

 

그 흔들림 속에 부산의 세느강(?)이라던「보수천」의 하류나 감천 화력발전소가 들어서기 전 감천만으로 유입되던「감내(甘川)」의 해맑은 물이 생각났다. 내 유년은 물로부터 시작되었고 내 청년시절은 물의 그물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그래서 나는 죽도록 헤엄을 즐겼다. 그러다 강의 하류가 오염되기 시작하면서 그 물을 버리고 산에 몰입하였다.

 

사라진 유년의 행복처럼 옛 강의 풍경을 이제는 다시는 찾을 수 없다. 흘러간 세월이다. 어디 보수천과 감내뿐이랴. 많은 강들이 이미 본색(本色)을 잃은 채 신음하고 있으니. 멀리 갈 것도 없이「을숙도」와「사상」의 공장지대를 스치는 낙동강의 참혹한 정경을 보라. 많은 강들은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상류 쪽의 많은 강들은 여전히 순수하고 깨끗하다.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과 나무와 풀로부터 생명을 얻은 고즈?한 발원지의 울퉁불퉁한 산골짝을 솰솰 타고 내리는 심원한 계류, 산 깊은 벽지를 휘어지고 굽이쳐 흘러내리는 청정한 강물들은 보석처럼 눈부신 빛을 발한다. 헤아릴 수 없는 골물을 얼싸안기를 거듭하면서 하류로 나아가 드디어 오염의 강물에 편입될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탕탕 기세 좋게 산간을 굴러내리는 그 순진한 강물들은 우리에게 커다란 정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청결하고도 수려한 강들과 만남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그러므로 초강천(草江川)의 지류, 석천(石川)을 더듬어 내려가는 여정은 그 얼마나 힘들고 멋들어진 일인가. 여기라고 어디 오염의 주범이 없으랴마는 강물은 스스로 제 몸을 정화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법.「상주」의「화령」땅, 백두대간이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면서 크고 작은 오염원에 노출된 석천도 백화산 용추골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청정한 물에 의해 다시 한 번 제 몸을 맑게 다스리니 참으로 놀랍다. 석천이여!

 

석천은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강이다.차마 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소담스러운 물줄기다.백화산 산자락과 헌수봉,만경봉 사이를 뚫고 산태극 물태극처럼 흐르는 석천은 여름철이면 백옥정 일대를 유원지로 변모시킨다. 그렇지만 호젓한 산이 매양 그렇듯, 석천은 아직 사람들을 불러들일 만큼 흡인력이 대단하지는 않다. 인근 영동의「양산팔경」이나「물한계곡」,그리고「옥계계곡」이 그 유명세에 걸맞게 제철이면 사람들로부터 한바탕 수난을 겪지만 그래도 여기 석천은 여전히 한갓진 편이다.

 

또한 석천의 들머리에서 반야사에 이르는 6km 구간은 길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길이 있던 자취는 없지 않지만 물길을 따라 가노라면 길은 군데군데 끊기고 만다. 인가(人家)도, 사람의 출입도 없으니 숲은 절로 우거지고, 물가에는 갈대를 비롯하여 잡풀이 무성하다. 반바지 차림으로 나섰다가 혼쭐이 난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연의 복원력은 실로 놀랍다. 인간의 간섭과 편의로부터 해방된 자연은 신비 그 자체다. 사람들의 손길과 발길로부터 자유롭기에 더 한층 생명력이 충일한 강이 되고, 길이 없으니 원시의 오롯함이 절절이 배어 있기도 하다.

 

나는 석천을 따라가면서 이렇게 고즈녘하고 때 묻지 않는 강이 숨어 있음에 놀랐다. 물론, 경북 영양군 수비면의「장수포천」과「왕피천」이 만나는 왕피천 상류의「송방」에서「거리고」를 거쳐「속사」까지 20km 구간이 아직도 전인미답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는 워낙 오지인지라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므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석천은 그 들머리와 반야사 주변이 모두 유원지화 되어 접근이 쉬운 편인데도 생태계가 잘 보전되고 있으니 뜻밖이라 하겠다. 다슬기와 쉬리, 수달이 생명을 누리고 있는 석천의 물은 맑고 깨끗하다.

 

등산화를 벗고 첫 번째 물길을 가로질러 왼쪽 강가로 건너갔다. 종아리 근처까지 물이 차올랐으나 물살이 유순해서 건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맨발에 밟히는 강바닥은 물이끼와 진흙 탓인지 제법 미끄러웠다. 강물은 차지도 덥지도 않았다. 약간 서늘한 기운이 살갗에 몰려와서는 스멀스멀 내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강물과 해후했다.

 

내가 그토록 열중했던 강과 바다를 잊고 지낸지 몇 해였던가. 장성하여서는 그저 눈으로만 보아오던 강, 그 강을 이제는 이렇게 한복판에 서서 몸으로 느끼니 만감이 교차했다. 산을 타느라 뜨겁게 달구어진 몸과 관절이 서서히 풀리자 비로소 마음이 느긋해졌다. 강가에는 드문드문 자갈이 널려 있고 갈대가 키만큼 자라고 있었다. 산기슭에는 밤나무가 줄지어 선 것으로 미루어 예전에는 사람들이 제법 출입했던 것 같다. 갈숲을 헤치고 나가자 갑자기 시야가 트인다. 강물을 한 구비 돌아서인지 건너편의 갈숲이 보이고 강물의 흐름은 조금씩 빨라지는 듯했다.

 

왼쪽 강가를 따라 걸어갔다. 이제 지도를 보지 않아도 좋았다. 강변길은 이따금 갈리거나 끊기거나 했지만 그 역시 개의치 않아도 좋았다. 그저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그 흐름을 따르면, 내 감각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되니까 지도는 소용없었다. 더구나 아름다운 강변에서 길을 잃어도 괜찮은, 길을 헤맨 끝에 마침내 길을 찾아내는 그런 신선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강물 가에 실핏줄 같이 작고 호젓한 길이 숨겨져 있었다.

 

강가에 바짝 붙어 강물을 보며 더터 내려가는 것은 색다른 흥취를 자아냈다. 강물은 고요했다. 고요히 흐르는 강물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거기 왜소하게 웅크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도록 만든다. 강가를 걸으면 비로소 강의 성스러운 힘을 느낀다.

 

그러다 문득 길이 사라지는 곳에 이른다. 저 상류에서 홍수에 떠밀려 온 옷가지며 비닐봉투며 페트병 따위가 작은 나뭇가지나 갈대 우듬지에 걸려 흉물스럽다. 다시 길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다 이 길인가 싶어 들어가 보면 날카로운 잡풀이 허벅지와 정강이를 할퀸다. 반바지를 입은 게 후회스럽다. 다시 돌아 나와 물가로 갔다. 마침내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두 번째 물길을 건너야 했다. 강심(江心)은 첫 번째보다는 약간 깊었다.

 

[두 번째 강물을 건넌 뒤,뒤돌아본 석천 들머리의 경이로운 모습]

 

다시 오른쪽 강가로 붙었다. 오른쪽 산기슭은 깎아지른 절벽의 연속. 그래서 강물이 산기슭에 바짝 다가서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수 있었다. 찰랑거리는 강물을 밟기도 하고 듬성듬성 놓인 바위를 건너뛰기도 했다. 강폭은 점점 너비를 더해갔다. 강가 바위에 걸터앉아 여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조용히 꿈틀거리는 강물의 숙연한 흐름이 느껴진다. 그러다가 그 여울이 바위에 부딪히면서 연신 은빛을 뿌려댄다. 강변 산들은 말없이 삼엄하다. 하지만 가을 빛 영글어 더없이 화사하다. 강 건너 산자락의 불타는 가을빛이 강물에 무지개처럼 어려 장엄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짙은 숲 속으로 한 가닥 길이 보일 듯 말 듯 트여 있다. 잠시 강물과 헤어져 숲길을 간다. 숲길이라지만 잡목이 앞을 가려 허리를 구부린 채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한다. 또 한 굽이 강물을 돌아선 셈이었다. 다시 강변이 나타났다. 들머리에서 여기까지 1시간 20분가량 걸렸다.

 

[강 건너 산자락의 가을빛이 무지개처럼 강심에 어렸다.]

 

강변을 따라 무성하게 자란 갈대 위로 황금빛 햇살이 쏟아져내린다. 오후의 소담스런 황금 햇살이 내 얼굴에도 흘러내린다. 눈이 부시다. 강 건너 산기슭의 검푸른 거대 암벽이 둘러쳐진 사이로 짙푸른 이내가 서려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강물은 한층 짙푸른 쪽빛을 띄며 유유히 흘러간다. 석축을 쌓은 흔적이 연이어 나타났다.

 

세 번째 물을 건넜다. 강물을 징검다리로 느릿느릿 건너 강안으로 기어드는 중에 도취된 마음은 계속 끓는 물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몸 안으로 강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다.

 

[무성하게 자란 갈대밭 위로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

 

강 모롱이에 접어들자 수박덩어리 만한 돌멩이들이 강가에 지천으로 널렸다. 강돌들 사이로는 하얀 모래가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다. 강가로 다가서니 느릿느릿 흐르던 강물이 탕탕 기세 좋게 내닫는다. 흐르는 강물에 손을 디밀어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씻어낸다. 부드럽기 한량없다.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것이 물이요, 모든 것 다 품으면서도 끝내는 터럭만큼도 제 것을 고집하지 않는 것도 물이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인자요수(仁者樂水)라 하지 않았던가.

 

[저승골 앞 강가에 널린 강돌,여기서 순하던 물줄기는 갑자기 탕탕 기세좋게 내닫는다.] 

 

강물로 얼굴을 훔치고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돌아보았다. 아! 거기엔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저승골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세 번째 물을 건너기 전 길이 끊긴 거기에 곧바로 거대한 암벽(500m)이 흘립해 있었다. 암벽 왼쪽으로는 소나무가 띠를 이루며 골짜기를 만들었다.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이한 형상이다.

 

이곳이 상주 황령사의 홍지사(洪之射) 스님이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 절반을 섬멸시켰다고 전해지는 저승골이다. 결국 몽고군은 백화산성(또는 금돌산성)을 넘지 못하고 통한의 울분을 삼키며 퇴각했다. 그리하여 백화산 정수리를 한성봉(恨城峰)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 한성봉(恨城峰)은 훗날 한성봉(漢城峰)으로 달리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형도에는 이 골짜기를 통해 백화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이 표시되어 있어 궁금하기 짝이 없다. 내년에는 그 길을 더듬어 백화산 정상에 오르리라. 보기만 해도 섬뜩한 저승골을 뒤로하고 다시 강변을 걸어 내려갔다.

 

[높이 500미터에 이르는 저승골 난가벽의 기이한 모습과 석천의 푸른 물줄기] 

 

300미터쯤 내려간 지점에서 네 번째 물을 건너 오른쪽 강변으로 붙었다. 물길을 건널 때는 물살이 상당히 빠른데다 수심이 깊어 몸이 버드나무처럼 휘청거렸다. 강변에는 갈대와 말풀, 사초 그리고 마디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자 길이 사라진다. 날카로운 잡목이 앞을 막아 돌아가란다. 나는 막힌 길이 안겨주는 모종의 암담함에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리 인생의 어떤 길일지라도 용기 있게 돌아서기만 하면 길은 끝없이 펼쳐진다. 그러나 여기서 돌아간다는 행위는 최악의 패배를 뜻한다. 성가시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잡목을 들추어 길을 살핀다. 가시가 무성한 덤불을 헤쳐나가면서 아랫도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다. 드디어 오솔길이다. 제법 반듯하면서도 그윽한 소나무 오솔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자주 들락거린 듯 반질반질 윤이 나 있다. 오솔길이 끝나자 앞이 훤하게 열리면서 거대한 직벽이 다가온다. 그 꼭대기에는 조그만 암자가 바람에 날아갈 듯 위태롭게 얹혀 있다.

 

높이 60m 가량 되는 이 검푸른 직벽은 망경대이며 작은 암자는 문수전이다. 석천의 물길이 휘어져 망경대 아래에서 소(沼)를 이루니 그곳의 짙푸른 물이 ‘영천(靈泉)’이다. 말년의 세조가 치병 차 여기 반야사에 들렀을 때, 문수보살의 인도로 이 영천에서 목욕을 하고나자 등창이 나았다는 영험스런 물이다. 그 영천을 보며 망경대 쪽으로 물을 건넜다. 석천 들머리에서 여기까지 2시간 40분이 걸렸다.

 

[최고의 조망터인 망경대,문수전이 날아갈 듯 위태롭다.]

 

망경대 위의 문수전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사진에 보이는 절벽 오른쪽에 있는 또다른 바윗길을 더듬어 올라야 한다. 얼마 전 철도 침목을 지그재그로 놓아 사뭇 조도(鳥道)같은 에움길을 통해 문수전으로 올라간다. 어찌나 경사가 가파르던지 숨이 턱턱 막힌다.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비로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런데 등 너머 반야사에서 이 문수전으로 올라오는 옛길은 막혀 있었다. 하필 이 힘든 절벽 길로 올라야 하나. 구도자(求道者)에게는 일부러 난해한 길을 열어놓은 것일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마을 사람들에게 알아보니 문수전과 반야사는 별개의 절이라는 것이다. 문수전을 반야사의 사암(寺菴) 쯤으로 생각해온 나로서는 깜짝 놀랐다.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문수전 옛길을 막아놓았구나.” 그런데 반야사를 통하지 않고 문수전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없다. 한 가지 길이 있다면 그것은 석천 물길을 건너와 가파른 절벽 길을 타는 방법뿐이다. 문수전에서 내려와 반야사 선방으로 가는 도중에 강 건너편에 한 척의 보트와 이편 강 언덕으로 줄이 매여 있었다. 아하, 그랬었구나. 쓴 웃음이 절로 나왔다.

 

[문수전에서 바라본 저승골과 백화산,그리고 백화산 동릉]

 

마침내 문수전에 다다랐다. 문수보살을 모시는 문수전은 바람이 불면 쓰러질 듯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한 칸짜리 건물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건물 곁에는 요사채를 만들기 위해 구들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마당 끄트머리 절벽 난간으로 다다가 백화산과 주행봉, 저승골 그리고 석천을 굽어보았다. 이보다 더 멋진 조망터는 없을 듯했다. 과연 명당터였다. 누가 감히 문수전을 오르지 않고 백화산을 보았다 하겠느냐.

 

만경봉 서릉의 끄트머리에 둥지를 튼 문수전의 절벽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반야사로 발길을 돌렸다. 반야사는 천변(川邊) 사찰이다. 만경봉 서릉과 건너편 백화산 남릉이 석천에 뿌리를 담그는 발치에 절묘하게 터잡은 반야사. 문수전 아래, 영천을 지나는 물줄기가 백화산 남릉의 지세에 막혀, 반월처럼 휘어지는 천변에 위태롭게 터를 잡았다. 반야사 선방을 거쳐 경내로 들어갔다.

 

반야사 앞의 석천은 저수지를 이뤄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일주문을 통해 절을 빠져 나가는 대신 징검다리를 질러 석천저수지를 건넜다. 단아한 숲길이 이어졌다. 휴양림과 반야마을로 가는 잠수교에 닿았다.

 

[예전에는 흙길이었으나 지금은 시멘트도로로 변해 정취가 반감된 반야사 길-친구 뒤로 휘어져도는 강 구비 안쪽에 반야사가 있다]  
 

[반야사 가는 길과 석천의 풍광]

 

[황간면 반야마을의 석천 수중보] 

 

마침내 석천 물길 따라 걷는 여정은 여기서 끝났다. 3시간 동안 석천 강물에 내 몸을 맡겼던 황홀한 시간, 석천은 내 가슴에 오래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