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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운문산(雲門山)에 올라 은빛 구름문 열다.

  [꿈 꾸는 듯 눈속에 갇힌 상운암]

   

1.운문산으로 가며


                 구름문 열고 정수리에 서면,

                 만학천봉(萬壑千峰)의 영남알프스 

                 그 장관이 눈에 가득하네


오늘은 2001년 새해 들어 첫 산행날이요,시산제를 지내는 뜻 깊은 날이기도 하다. 운문산(雲門山 1,188m)! 구름문 여는 산이라.이 얼마나 멋들어진 산이름인가. 언제 들어도 옷깃을 여미게 하는 산이 운문산이다. 그 산에 들면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서려있을 듯한 산. 늘 산 만당(滿堂)은 구름에 잠겨 속세의 기운을 훌훌 털어버릴 것만 같은 산. 맑은 날 운문산 고스락에 올라 치맛자락처럼 얽힌 골짜기와 끝간 데 없이 펼쳐나간 영남알프스의 묏부리와 하늘금을 보라. 그럼 운문산이 예사롭지 않은 영산(靈山)임을 알게 되리라.

 

그 운문산을 첫 산행지로 택한 것은 우리에겐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웃 가지산이나 재악산은 이미 섭렵했는데도 무슨 연유인지 쉽사리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 산인데다가 이날따라 눈 속에 흠씬 빠진 심설산행(深雪山行)의 산이었으니 우리의 기쁨은 그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백두대간의 태백에서 갈라져 나온 묏부리따라 남쪽으로 줄달음쳐 오던 낙동정맥이 경주,건천의 비산비야(非山非野) 지대를 지나 경남,경북의 접경지대에 이르러 거대한 산군(山群)을 빚어놓았으니 이 산괴를 흔히들 ‘영남알프스’라 일컫는다.

 

이들 산 가운데 맹주인 가지산(伽智山 1,240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문복산(文福山 1,013.5m)과 고헌산(高獻山 1,032.8m),서쪽으로는 운문산,남쪽으로는 간월산(肝月山 1,083m),신불산(神佛山 1,208.9m),영취산(靈鷲山 1,058.9m) 그리고 운문산의 마주보기, 재악산(載藥山 1,189m) 등 1,000m가 넘는 수려한 연봉이 솟구쳐 있으니 이들이 흔히 말하는 영남알프스이다.

 

낙동정맥의 주맥은 가지산 상봉에서 남진하지만 또 하나의 지맥은 서쪽으로 활개를 펼쳐 아랫재에서 잠시 자지러들다가 운문산을 일으켜세우고, 그 여세를 몰아 억산(億山 944m),구만산(九萬山 785m),육화산(六花山 675m)을 차례로 세우니 이 장쾌한 산줄기가 바로 경남과 경북을 가르는 도계(道界)를 이룬다. 하지만 이 산줄기는 밀양에서 청도로 빠지는 ‘긴늪유원지’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킨 산기운이 낙화산(落花山 597m)과 용암봉(龍岩峰 686m),육화산(六花山 675m),구만산(785m),억산(億山 944m)을 솟구친 뒤 운문산(雲門山 1,188m),가지산(伽智山 1,240m)을 향해 달려간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마치 꽃 피고 꽃 지는 세속의 질펀한 인간사를 털고 구름문(雲門) 열어 천상(天上)의 부처님 세계로 들어가는 그것처럼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운문산 산행은 언제 가 닿아도 신선하면서도 숙연한 그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성채처럼 이어진 연봉(連峰)엔 백설이 잦아들고


밀산교를 지나자마자 오른쪽 긴늪유원지 소나무군락의 빼어난 자태에 마음을 빼앗기고 24번 국도를 따라 밀양시 산외면을 지난다. 이어서 산내면 용전으로 스며들자 왼쪽으로 용암봉과 오치령,앞쪽에 흰 눈으로 뒤덮인 장대한 묏부리와 골짝이 벌어지니 구만산과 통수골이다. 대절버스는 어느덧 송백에 이르고 억산과 가인계곡 아래 봉의저수지가 차창을 스친다. 진례,수산을 거쳐 조상호 내외를 태우고 밀양으로 들어오는 차안에서 오늘 운문산 산행은 필시‘눈 산행’이 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는데, 운문산에 눈이 없다면 이 어찌 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마냥 마음 조렸는데 “혹시나?”는 “역시나!” 였다. 이맘때의 계절이면 해발 900m가 넘는 산에는 대개 눈이 쌓여 있는 법이라 운문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거대한 성채처럼 둘러쳐진 연봉(連峰)에 쌓인 눈을 보니 숙연함마저 들었다. 가슴은 마냥 곤두박질치며 발길은 벌써 상운암계곡을 더터나가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버스는 오른쪽 곤지봉(359.6m) 자락의 땅뫼마을과 도촌마을 사이의 밭에 들어선 선바위를 지나치고 회목마을에 다다른다. 이 회목마을에서 산내천을 건너면 문바위 산행들머리인 운곡(구름실 雲谷)마을인데 폭포골을 거쳐 문바위(927.6m)에 오를 수 있다. 문바위 남서쪽 봉우리는 북암산(806.6m),동쪽의 큰 바위가 수리듬이 부르는 수리봉(766.8m)이다. 문바위에서 돌아나와 북동쪽으로 고도를 높이면 사자바위을 거쳐 억산에 이르게 된다. 

 

2.석골사-상운암계곡-상운암


                  -백설의 찬란함 그리고 장엄미(莊嚴美)-


잠시 뒤 10시 50분, 산내면 원서리 주차장에 닿았다. 일행 25명은 박재곤 기사의 대절버스에서 내려 운문산 산행들머리 석골사로 다리품을 팔기 시작한다. 주차장에서 치올려다보는 북암산,수리봉,억산,운문산 전위봉 함화산(含花山 1,107.8m) 그리고 운문산은 온통 흰 눈을 뒤집어 쓴 채 장엄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장엄 그 자체였다고나할까. 이들 봉우리 가운데서도 운문산은 그 꼭대기에 운무가 감돌고 있어 더더욱 신비감을 자아냈다.

 

눈 온 뒤의 산은 더 높아 보이면서 수려한 자태를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 평소에는 인가(人家)로 내려와 사람들의 애환(哀歡)을 들으며 어울려 지내다가도 결빙의 계절이 되면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치장하는 저 당당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때로는 뒷동산이 되어 넉넉한 품으로 우리를 감싸주고 시원한 계곡물 흘려 우리의 미망(迷妄)을 적시다가 홀연 정수리로 기어올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낮은 곳에 있고 산은 높은 곳에 있는 저 절대성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생각에 잠기면서 산내천(山內川)을 가로지르는 석골교를 건넜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다 함화농원을 지나쳐 석골사 입구,부도군 아래 석골사와 주차장으로 나뉘는 곳을 지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열린 가파른 산길로 붙으면 수리봉으로 오르게 된다. 우리는 석골사 아래의 석골폭포를 보며 11시 5분,궁색하기 짝이 없는 석골사에 다다랐다.

 

신라말 고려초의 고승인 비허선사가 수도한 곳으로 본래의 절이름은 석굴사였다 한다. 6.25 당시 빨치산의 은거지를 소실한다는 이유로 불을 질러 사찰내 많은 문화재가 불타 없어졌으며,지금의 건물은 1965년 마을 주민들의 시주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러나 사세가 워낙 빈약해 큰절의 사암(寺庵)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성싶다. 오히려 지금은 운문산이나 억산을 산행하는 등산객들에게 이정표 노릇을 해주고 목마른 자에게 갈증을 추겨주는 감로수와 같은 친근한 장소로 더 유명하다.

 

 [치마바위]

 

우리는 석골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잠시 다리를 푼다.수통에 물을 채우기도 하고 배낭을 고쳐매기도 했다. 석골사 마당에서 서쪽으로 빤히 쳐다보이는 눈 덮인 수리듬은 더욱 더 현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석골사는 때마침 다른 산행객들이 함께 들이닥치는 바람에 일순 정적이 깨지며 시끌벅적해진다. 날씨는 생각밖으로 포근하고 바람도 잠잠했다. 폭풍전야의 그것처럼 너무나 고요하다. “이렇게 포근한 날은 눈이 내리기 십상인데...”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지나간다. 아무튼 산행하기에는 안성맞춤의 날씨였다.

 

석골사를 뒤로하고 상운암계곡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산길은 상운암계곡을 따르지 않고 발밑 아래로 계곡을 내려다보며 왼편 산자락으로 이어진다. 석골사를 떠나 10분 가량 오르니 리본이 반기는데 억산으로 오르는 능선 갈림길이 왼쪽 산비알로 트여 있다. 우리는 곧장 다리품을 팔아 가쁜 숨을 고르기에 좋은 전망바위 바위턱에 올라섰다. 상운암계곡 건너편으로 치마를 두른 듯한 치마바위가 장관이었다.


전망바위를 돌아내리자 또다시 왼쪽으로 대비골 갈림길이 나온다.대비골을 따르면 운문산-억산 종주길에 다다르게 되고,오던 그대로 넘어서면 비구니의 도장(道場)인 청도의 대비사(大悲寺)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상운암」은 대비골을 가로질러 직진길이다.

 

마침내 하얀 백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지난번 내린 폭설의 잔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사위(四圍)는 시나브로 어두워지면서 찬바람이 불어온다. 석골사를 떠난지 30여분 지나 또다시 갈림길이 왼편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딱발재로 오르는 길이다.딱발재를 넘어서면 천문지골로 빠지게 된다. 상운암으로 가려면 왼편으로 열린 갈림길은 모두 지나쳐야 한다.

 

쌓인 눈은 깊이를 더해갔다. 상운암계곡의 물길을 건너 오른쪽 비알에 다가선다. 이 오르막 눈길은 여간 미끄러운게 아니었다. 여기서 친구들은 스패츠를 차고 크램폰(아이젠)을 비끌어매느라 시간이 늦어진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크램폰이 없는 친구들에게는 재화와 내가 준비해온 4발짜리 소형 크램폰을 차안에서 나눠주었으므로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당초 우리의 산행코스는 상운암-운문산-딱발재-범봉-팔풍재를 거쳐 억산에 오른 다음,가인계곡을 타고 봉의저수지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그러나 평소 같으면 몰라도 이렇게 많은 눈이 쌓였으니 도시 무리일 성싶었다. 재화도 내 생각과 같아서 우리는 상운암을 거쳐 운문산 정상에 오른 뒤 아랫재로해서 남명으로 하산키로 일정을 바꿨다.

 

산에서는 무리하게 산행을 밀어붙이는 것을 금기(禁忌)로 여겨야 한다. 산악사고는 세심한 배려를 하지 않고 덜렁대다가 일어나는 법이다. 산행코스를 바꾸고나니 이제 우리가 가야 할 코스가 훤히 눈에 들어온다. 그 코스에 좀더 강렬하게 집중하면서 어려운 구간을 몇 번이나 슬라이드를 보듯이 비춰보고 이미지트레이닝을 해본다. 그렇다. 상운암으로 오르는 까꿀막진 비탈과 운문산에서 아랫재로 하산하는 두서너 군데의 가파르기 짝이 없는 경사만 극복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산에서는 한 사람의 실수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산행리더는 무엇보다도 대원들의 안전을 제일로 쳐야 하기 때문이다..


행장을 갖추고 걸음을 옮긴다. 산길은 응달인데다가 사람들의 발길로 눈이 다져저 있어 무척 미끄러웠다. 커다란 바위 앞 계곡 밑 비로암폭포의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이 폭포 위에 고인돌 모습의 커다란 바위가 정구지바위이다. 그 옛날 마고할미가 이곳을 지나다 지고 가던 정구지를 모두 쏟았다 하여 정구지바위라 한다.

 

이곳에서 직진하며 상운암 가는 길. 그러나 경사도가 심한 오른쪽 산길을 오르면 ‘얼음굴’로 간다. 30분 가량 가풀막진 오름길을 오르면 커다란 바위군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1992년 세상에 알려진 밀양 제2 얼음굴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는 얼음굴은 석굴과 수직동굴 등 모두 3개의 굴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 석골사에서 이곳의 얼음을 거져다 사용했다 하며 허준의 스승 유의태의 시신을 해부한 곳이 이곳이 아니냐는 추측도 남기고 있다. 이 얼음굴에서 바로 치오르면 운문산 앞봉인 함화산(含花山 1,107.8m)으로 갈 수가 있다. 얼음굴 탐사는 뒷날을 기약하고 정구지바위에서 후미를 기다리다 선두는 다시 발품을 팔기 시작한다.

 

  [눈 내리기 직전,상운암계곡에서]

 

주위가 점점 어슴프레해진다.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다. 정구지 바위를 뒤로하고 계곡길을 더터오르면서 막연하나마 이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선두그룹에 끼여 상운암계곡을 더듬어 올랐다. 다시 한번 눈으로 덮인 계곡을 건너서자 제법 너른 평지에 다다랐다. 여기서 선두는 후미를기다렸다. 홍진이와 재식이 부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 뒤따라 오려니 생각하고 일행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산길은 여기서 오른쪽 산비탈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르막에 올라 막 산비탈을 벗어날 무렵 드디어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한다. 춘설(春雪)이었다.  

 

눈송이는 처음에는 떨어지는 꽃잎처럼 사뿐사뿐 내린다. 그러다가 눈발은 춤추듯 나풀거리며 내린다. 점점 드세지기 시작하던 눈발은 삽시간에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내린다. 머리며 팔이며 얼굴이며 가릴 것 없는 눈 세례에 우리는 고스란히 눈사람이 된다. 모든 것이 백색으로 변하는(white-out) 백설(白雪)의 세계에 우리는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눈가루가 온 산을 뒤덮는다. 바람이 조금 거세지자 눈가루는 해일처럼 능선을 쓸고 지나간다.

 

나는 한참동안 선두에 서서 발품을 팔다 후미의 홍진이 생각이 났다. 나는 다시 후미쪽으로 되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물길을 건너는 지점에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계곡을 오르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하마 이 순간을 놓칠세라 카메라를 들이대며 눈 내리는 광경을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친구들의 얼굴은 환희(歡喜)와 두려움이 교차되어 숙연해보였다. 다들 아무 말이 없었지만 눈을 맞으며 산행을 해보기란 부산 근교산행에서는 실로 흔치 않은 일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그러니 마음 속으로는 쾌재(快哉)를 불렀으리라.

 

  

  

 

 

 [폭설이 내리는 상운암계곡을 오르는 친구들]

 

마지막으로 후미대장인 현기를 만났으나 홍진이는 그곳에 보이지 않았다. 현기한테 홍진이 소식을 물어보니 컨디션이 좋지 않아 재식이 내외와 함께 하산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현기에게 후미를 맡기고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상운암계곡을 더터오른다.  

 

눈발이 퍼붓는 상운암계곡을 오르다보니 97년 1월 3일 낙동정맥을 타던 옛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영천과 아화의 경계인 산줄기를 종주했는데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10시간이나 눈이 내렸다. 그 구간 가운데서도 관산(冠山 393.5m)은 비록 높이는 낮았으나 어찌나 까꿀막지고 미끄럽던지 내 평생 그렇게 힘들게 눈산행을 해본 일도 드물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 속을 한 발짝 오를라치면 뒤로 하염없이 미끄러져 고도 200미터를 오르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게다가 강풍이 몰아쳐 정상에 섰을 때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뿐인가. 화이트아웃(white-out)현상으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환상방황(링반데룽)처럼 왔던 길을 뱅뱅 돌고 돌았으니 지금에 와서 그때의 일을 돌이켜봐도 끔찍했다.

 

허나 어렵사리 관산에 올라서서 하산길에 들었을 때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청명한 날씨로 바뀌어져 있었다. 자연의 조화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건천의 아화로 내려온다는게 영천시 북안면 신촌마을로 내려와, 무려 6km에 이르는 마을길을 걸어 여싯골재 넘어 아화(阿火)에 도착한 일을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온다. 처음엔 눈 내리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으나 10시간 가량 눈이 내리니 나중에는 눈이고 뭐고 지겹기 짝이 없었다.  

 

 

눈이 오면 한순간에 세상이 뒤바뀐다. 물구나무서서 거울 속의 세상 보기다.그러므로 눈이 오면 마냥 흥겹고 기쁜 감정이 북받쳐오른다.하여 우리는 눈 오는 것을 꿈 꾸고 감히 그 꿈에 빠지기를 기원한다. 


상운암계곡에는 우리말고도 산객들이 상당수 보였으며 심지어는 벌써 하산하는 산객들도 있었다. 그러나 겨울철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산보하듯 산을 찾은 사람들의 낭패스런 모습을 보면 남의 일만 같지는 않았다. 의선이는 하산하는 부부에게 재화가 나눠준 크램폰을 건네줘 그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고 한다. 짠하던 마음이 훨씬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산에서는 아무리 경미한 사고일지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자칫하다가는 인명사고로까지 발전하기 십상이다. 특히 겨울철에 심심찮게 일어나는 하이포써미아(저체온증)와 동상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장비를 충분히 갖추지 않고 무턱대고 입산하는 것 만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산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대부분은 미리 예견되기 때문에 조심하면 결코 예방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가파른 상운암 오름길,숨을 고르는 최수명]

 

이제 가파른 오르막을 톺아오른다. 이 고비만 넘기면 상운암이 지척인데,여기 오르막 오르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한바탕 비지땀을 쏟은 뒤에라야 돌탑군에 다다랐다. 정구지 바위를 떠난지 거의 1시간 반이나 흘렀다. 돌탑군에 올라서자 때마침 눈발도 차츰 약해진다. 돌탑군을 보며 산허리길을 가로질러 계곡을 건넜다. 이 계곡 밑에는 30미터 높이의 선녀폭포가 있는데 겨울철에는 인근 클러이머들이 빙벽 훈련장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산허리길이 멈춘 곳에서 산등성을 향해 비스듬히 열린 눈길을 더듬어 오른다. 산죽(山竹) 잎새에 얹힌 백설이 소담스러운 길을 힘겹게 올라 오후 1시 55분,온통 흰 눈 세상인 상운암(上雲庵) 마당에 섰다. 찬바람이 코끝을 세차게 때린다.

 

상운암은 신라 화랑도의 수련장이라 전해지는 유서깊은 곳으로 해발 1,100미터에 터잡은 최고의 명당자리로 전해지고 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 상운암에 들어 산죽밭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를 한 모금 들이키는 그 맛은 도저히 말로 형언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상운암 마당에서 건너편 산줄기에 솟은 범바위며,사자바위,수리바위,문바위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옛날 화랑들의 힘찬 기합소리가 상기 들려오는 것만 같다.

 

구름이 낮게 깔리는 날이면 마치 구름 위로 솟은 상운암이 별천지와 같은 착각마저 들게 되니 천하의 명당이 따로 없을 것이다. 한 사나흘 여기서 머리 식히며 세속에 찌든 머리를 쉬기에 이만한 장소도 흔치 않을 것이리라. 새벽녘 그 약수터로 다시 가 한 바가지의 정갈한 물을 마시면 운문산의 약초내음 진하게 입안에 배어나오니 흐려진 정신 번쩍 트이리라. 그러면 스님이라고 보기에 뭔가 찜찜한 얼굴의 그 화상도 정다워지고 말리라.

 

2채의 요사채밖에 없는 상운암에는 미리 온 산객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미처 방으로 들어가지 못한 한 무리의 산객들은 마당에서 점심을 들고 있었다. 발 넓고 넉살 좋기로 이름난 의선이는 스님이래야 고작 한 사람밖에 없는 그 화상을 불러 세운다. “이봐,동생 방 하나 마련하고 찌개 끓이게 물 좀 줘!” 반 명령조였다. “잠간만 기다려요.”하더니 그 화상은 날렵한 솜씨로 물통을 가져왔다. 잠시 뒤 방안에 있던 산객들을 내보내고 점심을 들면서 술추렴을 했다.현영이가 끓여 내놓은 라면을 끝으로 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왔다.  

 

  [상운암 앞마당에서]

 

  [상운암에 눈사람을 만든 이는 누구일까?]

 

 [뒤늦게 상운암에 합류한 후미그룹]

 

주위는 온통 설국(雪國)이었다.마당의 채마밭도,지붕도,소나무도 두툼하게 눈이 쌓여 눈부시게 빛났다. 건너편 함화산 산등도 새하얀 눈으로 치장했다. 어느새 눈은 멎어 시계(視界)는 훨씬 양호했다. 나는 친구들을 소나무가 있는 상운암 앞마당으로 불러 모아 이 절호의 기회를 카메라에 담고 운문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3.상운암-운문산 고스락

 

선두는 어느새 상운암을 빠져나가 산죽(山竹)밭으로 들고 있었다. 현기,금구,익수 부부와 현영이 그리고 나는 장비를 챙기느라 뒤에 처져 있었다. 천하일품의 산죽밭 약수물은 꽁꽁 얼어 있어 청량한 그 물맛을 볼 수 없는게 유감이었다.

 

  [꿈 꾸듯 눈속에 갇힌 상운암]

 

 [은세계를 이룬 운문산 오름길,산죽밭]

 

산죽밭으로 들어서자 그야말로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림같은 눈세계가 펼쳐진다.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스미지 않아서인지 탐스러운 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뭇가지에는 눈꽃(雪花)이 만발하였다. 곧은 나뭇가지보다 꾸부정한 나뭇가지일수록 눈꽃을 더욱 찬란하게 피워올리고 있었다. 어떤 가지는 눈무게로 말미암아 가지가 부러질 것만 같아 위태롭게 보인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면 은빛가루가 흩날려 얼굴을 적신다. 정신은 더없이 맑아지고 숨결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이곳에 내 숨소리 하나,내 사랑 하나 남겨두고 가고 싶다. 하얀 눈 위에 그렇게 적고 싶다.

 

 [백설천지의 운문산 오름길,산죽밭을 지나며]

 

  [운문산 오름길에 핀 설화]

 

이곳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하다. 운문산으로 한발 한발 다가갈수록 눈은 더 깊이 쌓여 있있고 바람은 점점 더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평평하던 눈길은 서서히 가팔라지면서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가쁜 숨을 애써 다스리며 한마장 다리품을 판다.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오,운문산 정수리여!

 

운문산 정수리로 오르면서 나는 으슴프레한 햇빛과 그 빛을 반사하는 눈 빛의 싸늘함 속에서 시인 조정권의 <산정묘지>를 한 줄 한 줄 떠올렸다.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어둠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로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은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이 침묵 속에서

        손뼉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신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 밑에서 들려주리.  

 

  [꿈결같은 눈길을 걷는 익수 아지매]

 

  [금구 홀로 산죽밭에서]

,

운문산 오르막길에서 나는 따뜻했고 하늘의 품에서 내 마음은 평온했다. 이렇게 우리는 겨울 산행의 진수를 만끽했다.  

 

우리는 쉼터와 헬기장을 지나 표지석이 우뚝 선 운문산 정상에 올라섰다.오후 3시 35분,상운암을 떠난지 30분만에 운문산 정수리에 다다른 것이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펑퍼짐한 정상에는 새하얀 눈이 뒤덮고 있었다. 바람이 몰아쳐 한기가 몸속으로 배여들어온다. 오래 정수리에 머물기는 어려웠다.시계가 불량한 탓에 먼 곳의 조망은 시원치 않았다. 그러나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가지산 정상을 비롯,영남알프스 연봉(連峰)은 은세계(銀世界)의 장관을 이루었으니 절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역시 운문산이었다.

 

 [은빛 구름문 열고 정수리에 올라] 

 

4.운문산-아랫재-남명리

 

우리는 제물을 준비해놓은 다음,금년 한해의 무사 산행을 기원하는 시산제(始山祭)를 지낸다. 일행은 무릎을 끓고 정영천 회장이 제문을 일어내려간다.

 

유세차(維歲次) 신사년(辛巳年) 정월 28일 이일산우회 회장 정영천은 운문산 산신령께 엎드려 고(告)하나이다.

 

저희 동기 일동은 지난 한해에도 산신령님의 후덕함으로 아무 탈없이 산행을 이루어왔습니다. 평소 산을 좋아하고 산행을 즐겨온 저희 일동은 산의 너른 품 안에서 그 넉넉함을 배우고,그 변하지 않음을 벗해왔습니다. 더러는 누항에서 지친 우리에게 말없는 가운데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며 용기와 기운을 불러넣어주었고 더러는 질풍노도와 같은 후련함도 주시었습니다. 힘들게 정상에 오르면 눈을 시원하게 해주었고 또한 마음을 넓혀 우리에게 호연지기를 기르게도 했습니다.

 

꽃 피는 봄에는 온갖 조화로 우리의 마음을 일깨워 아름다움을 베풀어주시었고 여름에는 뭉게구름 아래 천둥치는 격렬함을 보여주시었으며 온 산을 물들이는 가을에는 숙연함과 장엄함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아울러 백설로 뒤덮인 겨울에는 온갖 추함을 감추어 끝내는 우리의 가슴을 청정하게 해주었습니다.

 

이같은 갖가지 후덕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만 때때로 산을 가볍게 보거나 만용을 부릴 때는 엄격한 질책을 내려주기도 하니 이제 우리는 이 자리를 빌어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며,작은 나를 버리고 큰 나를 취해야 하리라 봅니다. 그러므로 산행은 산으로 나아감을 말하니 모름지기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야 할 것이며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정도(正道)를 가야할 것입니다. 산(山)과 산행(山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거기엔 오직 실천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자연을 보호하고 아끼는 자세가 바로 이를 구현하는 길이라 다짐해봅니다.


산신령님이시여, 올 해에도 우리 동기들을 굽어살피시어 한 사람의 잘못도 없게 해주시고 동기들의 몸과 마음에 평안이 넘쳐흐르며 우리들의 가정에도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모쪼록 간소한 제물이나마 저희들의 소박한 뜻으로 알고 기쁘게 흠향하옵소서.

 

  [운문산 정수리에서 한해의 무사산행을 기원하며]

 

가지,운문,억산을 하나의 맥으로 놓고 보면, 밀양 쪽은 양산(陽山)이며 청도 쪽은 음산(陰山)이라고들 한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은 이곳에 수도승들이 찾아 수도를 하였으나 음산 쪽은 여성적인 산으로 수도승이 맹렬히 정진하여 마음을 단단히 할 만하면 꼭 여자가 나타나 십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운문사,석남사,대비사가 모두 비구니들의 수도장인 것과 비교하면 어떤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같은 풍수설은 지형과 지세(地形 地勢)가 은연중 사람의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는데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시산제를 마치고 우리는 서둘러 하산에 들어갔다. 통상 40분이면 아랫재에 너끈히 도착할 터이나 눈 덕분에 20여분은 더 걸릴 것이리라.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6년전 여름,서울로 간 강화중,이강남,최희춘 동기와 함께 가지~운문~억산~구만~육화산 종주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정오 무렵,아랫재에서 운문산으로 톺아오르고 있었는데 오르막이 어찌나 까꿀막지고 날씨는 후덥지근하며 땡볕이 작열하던지 우리는 초죽음이 되고 말았다. 1시간이면 충분한 아랫재~운문산 코스를 1시간 30분이나 걸려 겨우 운문산 정수리에 설 수 있었다. 타는 목마름 때문에 우리는 상운암으로 직행하여 산죽밭의 그 약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댔다. 아,그때의 물맛은 천상의 감로수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곤 상운암 앞마당 나무그늘에서 꿀맛 같은 단잠을 30분이나 즐기고 말았다. 어쩌다 서울의 화중이를 만나 그 일을 회상하노라면 우리는 하나같이 죽는 시늉을 하면서 넌더리를 내곤 한다. 그런 코스를 이번에는 눈 속에서 하산해야 하니 나는 걱정부터 앞섰다.

 

  [운문산-아랫재 하산길 다시 폭설에 파묻혀]

 

아랫재로 내려간다. 얼마 안 가서 한량없이 가파른 비알이 나타난다.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 한 구비 내려서면 또다시 어려운 구간이 나선다. 너무 미끄러워 엉덩방아를 찧기에 아주 좋았다. 그래서 산에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오르막에서는 힘은 들지언정 넘어지는 법은 없으나,내리막에서는 자칫 중심을 잃으면 넘어지기 쉽다. 그러므로 하산할 때에는 늘 주위를 살펴 넘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하산에 자신이 붙으면 산행 자체가 매우 즐겁게 된다. 산악사고의 대부분은 하산할 때 일어나며 그 후유증으로 산과 영영 이별해야 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따라서 하산을 할 때는 넘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걸음짓이 느려지기도 하나 이에 개의치 말아야 한다. 어느 정도 이력이 생기면 하산 속도도 향상되기 때문이다.


 한바탕 가파른 눈길과 씨름을 하고나서 제법 평평한 산길에 이르렀다. 운문산 정수리에서 하산할 때부터 영락없이 운무(雲霧)가 끼이더니 이곳에 오자 운무는 더욱 더 짙어졌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바람이 세차다. 거의 5시가 다 되어서야 일행 모두 아랫재에 모였다. 미끄러운 눈길에 엉덩방아를 찍은 친구들도 없지 않았으나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랫재에는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움막이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살림살이까지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상주하는 듯했다. 오늘은 자물쇠가 잠겨 있어 출타중이었고 연락처까지 적어놓은 걸 보니 제법 사람들이 찾아드는가보다. 전부터 아랫재는 밀양 사람들이 운문사나 사리암으로 넘나드는 고갯길 요충지였다. 그리고 산꾼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야영지로 이름이 난 곳이기도 하다. 식수는 아랫재 200미터 남쪽이나 심심이계곡 북쪽 100미터 지점에서 구할 수 있다. 아랫재는 운문산이나 가지산 그리고 심심이계곡을 거쳐 가지산 학심이골 또는 가지 북릉을 타는 데 중요한 이정표 노릇을 하는 곳이다.


이제 아랫재에서 남명리 상양을 거쳐 중양으로 하산해야 한다. 빠른 발품으로도 30분은 걸리는 거리다. 매양 그렇듯 나는 뛰다시피하여 걸음을 재촉했다. 15분쯤 내려오자 눈이 사라지고 흙길이다. 질펀한 흙길을 밟고 상양마을을 거쳐 중양마을에 다다랐다. 이곳 중양은 얼음골 사과 집산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얼음골 사과를 처음 재배한 것은 1972년인데,이곳 주민 김문섭 씨는 ‘사과는 일교차가 심한 곳에서 잘 된다’는 말에 착안하여 사과를 심었다 한다. 오늘날 그는 사과 추진위원장으로 매년  10월이면 남명초등학교에서 얼음골 사과축제를 열고 있다. 얼음골 사과는 당도가 높고 품질이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지금은 600여 농가에 사과단지를 이루어  연간 40만 상자를 생산,100억원의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박 기사의 대절버스는 밀양에서 석남터널로 이어지는 24번 국도변에 있었다. 나는 박기사의 버스로 다가가 차를 돌려 중양마을 마을회관 앞 빈터로 되돌아왔다. 10분 가량 기다린 뒤에야 일행을 만났다. 마을회관에서 치올려다보는 백설의 운문산은 거대한 성채처럼 웅장하고 견고해보였다.


5.에필로그


산책을 하되 완전하게 하라.완전한 산책자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걸으며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바라본다.

                                                        -열자(列子)-

 

열자는 산책에서 관찰하는 기쁨을 찾지 않고 명상하는 기쁨을 찾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라보는 것에서 기쁨을 얻지만 그는 정신적인 것에서 기쁨을 얻었다.바쁘게 혹은 이를 악물고 정복하기 위해서 오르는 산이 아니고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 바람결을 따라 나서는 듯한 산책처럼 산을 오른다면 그 역시 아름다운 산행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기쁨을 끌어내는 완전한 산책 같은 산행을 의해 예비된 산이 있어 그것이 운문산이라면 과찬일까?  산을 오르는 행위를 이처럼 진솔하게 토로한 말이 달리 또 있을까!

 

친구들이여,언제 타는듯한 여름날 다시 상운암에 올라 산책하듯 우리를 풀어놓고 시원한 약수 한 잔에 즐풍과 거풍을 함께 즐겨보지 않으리요? 

 

12/12 2006 청산.

 

[산행정보]

 

때: 2001년 1월 28일 (넷째주 일요일)


참가자: 정영천 회장 부부,김익수 부부,송재식 부부,조상호 부부,이재화 총무

        권오균,김홍진,김현기,김황세,박병진,박순양,배일,신남석,안채식,이성집

        장수생,전우성,정길영,최금구,최수명, 초대손님,손의선(25명)


08:45 교대역 한양프라자 앞       10:50 산내면 원서리

11:05 석골사                            12:13 정구지바위

13:48 상운암                            13:48-15:03 점심

15:35 운문산 정상                    15:35-15:50 시산제

16:55 아랫재                           18:18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중양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