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일곱에 오른 관악산 연주대(遊冠岳山記)
채제공(蔡濟恭 1720-1799)
내가 일찍이 들으니 미수眉 허목許穆 선생이 여든 셋에 관악산 연주대戀主臺에 오르는데 걸음걸이가 나는 듯하여,사람들이 이를 쳐다보고 신선으로 여겼다고 한다.관악산은 서울의 신령한 산이요,선현들이 일찍이 유람한 곳이기도 하다.한 번 그 위로 올라가서 마음과 눈을 씩씩하게 하고 산을 우러르는 마음을 깃들이고자 하여 오랫동안 간절하게 계획을 품어왔지만,속세의 때를 벗지 못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병오년(정조 10,1786) 봄 노량진 강가에 우거하고 있었다.관악산 푸른 빛이 눈으로 들어올 듯하였다.가고 싶은 뜻이야 너울너울 춤을 추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4월 13일 남쪽 이웃에 사는 이숙현李叔賢(이름은 廣國)과 약속하고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아이들과 종도 너댓 명이 되었다.10리쯤 가서 자하동紫霞洞으로 들어갔다.한 칸 규모의 정자에 올라 쉬었다.정자는 곧 신씨申氏의 전장이다.계곡물이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데 숲이 뒤덮고 있어 그 근원을 알 수 없다.물길이 정자 아래에 이르러 바위를 만나게 된다.날리는 것은 포말이 되고 고이는 것은 푸른빛을 이루다가 마침내 넘실넘실 흘러 골짜기 입구를 에워싸고 멀리 떠나간다.마치 흰 비단을 깔아놓은 듯하다.언덕 위에 철쭉꽃이 막 피어, 바람이 불면 그윽한 향기가 때때로 물을 건너 이른다.산에 들어가기도 전에 시원하여 멀리 떠나온 흥취가 일었다.
정자를 경유하여 다시 10리쯤 갔다.길이 험준해서 말을 탈 수가 없었다.여기에서 말과 마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서 넝쿨을 뚫고 골짜기를 지났다.앞에서 길을 인도하던 자가 절이 어디 있는지를 잃어버렸다.동서남북도 알 수 없었다.벌써 해가 질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길에 나뭇꾼이 없어 물어 볼 수도 없었다.하인 중에 어떤 놈은 앉았고 어떤 놈은 서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갑자기 숙현이 날 듯이 끊어진 낭떠러지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이리저리 번쩍번쩍하는 모습이 보이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편으로 괴이하고 한편으로 괘씸하였다.조금 있으니 흰 중옷을 입은 사람 4∼5명이 어디선가 나타나 빠르게 산을 내려왔다.
하인들이 모두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며 "스님이 왔습니다."하였다.숙현이 멀리서 절을 보고 먼저 가서 승려들에게 우리 일행이 여기에 있다고 일렀던 것이다.이에 승려의 인도를 받아 대략 4∼5리쯤 떨어져 있는 절에 이르렀다. 절 이름은 불성암佛性庵이었다.절은 삼면이 봉우리로 둘러쌓여 있는데 한 면만 탁 트이어 막힘이 없었다.문을 열면 앉으나 누우나 천리 먼 곳까지 눈 안에 들어왔다.
다음날 해가 뜨기 전에 밥을 재촉하여 먹고 연주대라는 곳으로 찾아가려 하였다.건장한 승려 약간 명을 골라 인도하게 하였다.
승려들이 나에게 말했다.
"연주대는 여기서 10리쯤 됩니다.길이 매우 험하여 나뭇꾼이나 중들도 쉽게 넘을 수가 없습니다.기력이 못미치실까 걱정됩니다."
내가 말하였다.
"천하만사는 마음에 달렸을 뿐이다.마음은 장수요,기운은 졸개다.그 장수가 가는데 그 졸개가 어찌 가지 않겠는가?"
마침내 절 뒤편의 가파른 벼랑길을 넘어섰다.길을 가다가 끊어진 길과 깎아지른 벼랑을 만나기도 하였다.그 아래가 천길 절벽이므로 몸을 돌려 절벽에 바짝 붙어 손으로 늙은 나무뿌리를 바꿔 잡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현기증이 나서 옆으로 눈길을 보낼 수가 없었다.혹 큰 바위가 길 가운데를 막고 있는 곳을 만날 때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오목하여 그다지 뾰족하지 않은 곳을 골라 엉덩이를 거기 붙이고 두 손으로 그 주변을 부여잡으며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고쟁이가 뾰족한 부분에 찢어져도 안타까워할 틈이 없었다.이와 같은 곳을 여러 번 만난 다음에야 연주대 아래에 이르렀다.
이미 정오가 되었다.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놀러온 사람들 중에 우리보다 일찍 올라간 이들이 만 길 절벽 위에 서서 몸을 굽히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흔들흔들 마치 떨어질 듯하였다.이를 보자니 모골이 다 송연하여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하인을 시켜 큰 소리로 "그만 두시오,그만 두시오." 하였다.
나 또한 심신의 기력이 다하였다.엉금엉금 기어서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정상에는 바위가 있는데,널찍하여 수십 명이 앉을 만하였다.그 이름은 차일암遮日岩이다.예전 양영대군讓寧大君이 왕위를 피하여 관악산에서 살 때,가끔 이곳에 올라 궁궐을 바라보았는데,햇살이 너무 뜨거워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작은 장막을 치고 앉아 있었다.바위 귀퉁이에 네 개의 구멍을 오옥하게 파서 장막의 기둥을 고정하였다.그 구멍이 지금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다.이 때문에 연주대戀主臺라 하고 차일암이라 한 것이다.
연주대는 구름 속까지 우뚝 솟아 있다.내 자신을 돌아보니 천하 만물중에 감히 높이를 다툴 만한 것이 없어 보였다.사방의 봉우리들이 자그마해서 헤아릴 수도 없었다.오직 서쪽에 거뭇한 기운이 쌓여 뻗어 있는데 마치 하늘과 바다가 이어져 있는 듯하였다.그러나 하늘에서 보자면 바다고 바다에서 보자면 하늘처럼 보일 터이나,하늘과 바다를 누가 분간할 수 있겠는가? 한양의 성궐이 밥상을 대한 듯이 바라보였다.일단의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에워싼 곳이 경복궁 옛터임을 알 수 있다.비록 수백 년이 지난 일이지만,양영대군이 배회하면서 그리워 바라본 그 마음을 지금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나는 바위에 기대어「시경詩經」에 나오는 노래를 외웠다.
산에는 개암나무 있고
언덕에는 도꼬마리가 있네
누구를 생각하는가?
서쪽의 미인이라
저 미인이여 서쪽에 계시겠지
숙현이 말하였다.
"노래소리에 그리움이 있군요.임금을 그리워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어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내가 말하였다.
"임금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륜인지라,고금에 무슨 차이가 있겠소.다만 내 나이 아직 예순 일곱이라.미수 어른이 이 산을 오를 때 그때 나이에 열 살하고도 여섯 살이나 미치지 못하오.그런데도 미수 어른은 걸음걸이가 날 듯하였는데,나는 기력이 쇠진하고 숨이 차서 온갖 것이 괴롭다오."
도학과 문장에 고금의 사람이 서로 같지 못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지만,근력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 것은 어찌 이리 차이가 나는가?
"천지신명의 힘을 입어 내가 여든 셋이 된다면 비록 남에게 들려 업혀 오더라도 반드시 이 연주대에 다시 올라 옛사람의 발자취를 잇고 싶구려.그대는 이를 기억하시오."
숙현이 말하였다.
"그때 저도 따라오겠습니다.저 숙현의 나이도 65세가 되겠지요."
함께 크게 웃고 산행을 마쳤다.이날 불성암으로 돌아와 하룻밤을 머물고 이튿날 노량진 집으로 돌아왔다.함께 유람한 이는 이숙현과 생질 이유상李儒尙, 집안의 동생 서공敍恭,아들 홍원弘遠,종질 홍진弘進,손자 뻘 되는 이관기李寬基,겸인 김상겸金相謙이다.
《주》 채제공蔡濟恭은 정조 10년(1786) 이익李瀷의 정신을 배우려 관악산을 올랐다.자하동紫霞洞 곧 오늘날 서울대학교에서 신림동으로 흘러내리는 그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이익의「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에 따르면 당시 동서남북 네 곳의 자하동이 있었는데,남자하 南紫霞는 안양 쪽이고,서자하西紫霞는 삼성산三聖山의 삼막사三幕寺 일대며,북자하北紫霞는 서울대학교 쪽이며,동자하東紫霞는 과천 쪽이다.그 가운데 동자하가 가장 아름다웠으며,관악산 전체로는 연주대의 경관이 빼어났다.그리고 채제공이 북자하로 오를 때 만난 정자는 신위申緯(1769-1847)가 지은 것이다.시,서,화 삼절로 빼어나 조선조 4대 문장가였던 그는,아호를 자하紫霞라 했는데 관악산의 아름다운 계곡,자하동천紫霞洞天 또는 자하동紫霞洞은 그의 아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연주대戀主臺는 영주대靈珠臺,또는 영주대影炷臺라고도 한다.채제공은 양녕대군의 자취가 서린 곳이라 하였지만,그 후학 홍직필洪直弼은 고려 말 사천沙川 남을진南乙珍·송산松山 조견趙 번당樊塘 서견徐甄 세 현자가 세상을 피하여 머리를 깎고 이곳에 삼막三幕을 지어 멀리 개성의 곡령鵠嶺을 바라보며 통곡하였기에 연주대戀主臺라 하였다 한다.
채제공은 여든 셋의 나이에 날 듯이 관악산을 오른 허목을 생각하고,그의 체력과 학문을 따르고자 하였다.채제공은 허목처럼 여든 셋에 관악산을 오르고자 하였으나,여든 셋의 나이를 채우지 못하여 관악산과 인연을 잇지 못하였다.
채제공(1720-1799)은 조선 정조때의 재상으로 자는 백규(伯規),호는 번암(樊巖),시호는 문숙(文肅)이다.본관은 평강(平康)이다.영조 19년(174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다.재임중 호서암행어사(湖西暗行御史)가 되어 균역(均役)과 감세(感稅)의 실시에 대한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올렸고,[열성지장(列聖誌狀)][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였다.
정조가 즉위 후 임금을 살해하려는 사건이 일어나자,자진하여 창경궁의 수궁대장을 겸임하였으며,여러 차례에 걸쳐 벽파의 음모를 적발하여 난국을 타파하였다.채제공은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화성유수(華城留守)로 있으면서 수원성을 축성할 때 모든 설계 및 경영을 지휘하였던 경륜은 지금까지 높게 평가되고 있다.특히,천주교도들에 대하여 온건 정책을 유지하였는데,그가 10여년간 재상으로 있는 동안에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확대되지 않았다.문집으로 [번암집(樊巖集)]이 있으며, 용주사에 있는 [부모은중경 (父母恩重經)]경판은 그가 쓴 것이다.
미수 허목(1595-1682)은 17세기 남인의 영수였으며 조선조 5백년 동안 임금으로부터 거택居宅을 하사받은 정승은 황희 정승,오리정승 이원익 그리고 미수 허목 세 사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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