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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수필

토곡산(吐谷山),그리고 낙동강의 아름다음

 

가을이 오면,허구 많은 산 가운데서도 원동에 있는 토곡산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토곡산은 단풍이 아름다운 산도 아니요 그렇다고 산세가 빼어나지도 않다. 물 구하기가 어렵고 산등이 가팔라 부산 근교에서는 악산(惡山)으로 소문 난 산이다. 그런데도 토곡산을 맨 먼저 떠올리는 것은 내가 홀로 영남알프스 종주를 한 첫 산이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던지 맨 처음에 만나는 사람이나 어떤 사물을 결코 잊지 못하는 법이다. 벌써 햇수로 25여년이 지난 일이 되었지만,지금도 허위단심 올랐던 그때의 토곡산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살아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정수리에 올라 낙동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내려다본 기분은 말로 이를 수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낙동강을 사랑한다. 깨끗했던 70년대의 낙동강이나 오염된 지금의 낙동강이나 나는 한시도 낙동강을 잊어본 일이 없다. 지금도 이따금 기차를 타고 원동을 지나칠 땐 일부러 창쪽에 앉아, 원동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내게 가장 아름다운 강을 들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낙동강을 들 터이고 그 가운데서도 이곳의 아름다움을 제일 먼저 손 꼽겠다.


 물금에서 활처럼 휘어져 들어오는 철길 바투 아래로 낙동강이 흘러가고 손을 뻗치면 낙동강 물이 금방이라도 잡힐 것만 같다. 원동을 빠져나가 삼랑진으로 들어가는 그 구간은 언제보아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강폭은 원동 건너 용당마을 어름에서 갑자기 좁아지다가 다시 휘어져 돌아 밀양강을 받아들이며 넓어진다. 낙동진을 보며 기차는 삼랑진 시내로 스며들지만, 물금에서 이곳까지의 풍광은 정말로 환상적이다. 그러나 이곳의 풍광을 제대로 보려면 삼랑진에서 부산으로 내려와야 한다. 몇 개의 터널을 빠져나와 내내 산만 바라보고 오다가 시야가 툭 터지며 나타나는 낙동강 물줄기,창문으로 스며드는 강내음,원동 건너편의 하얀 모래사장,용당에서 삐걱거리며 오가는 거룻배,새벽녘에 강 한복판에사 피어오르는 물안개,무척산과 금동산,그리고 토곡산 산 그림자가 강물에 어리는 모습,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15전 가을이었던가. 영축산 연봉 가운데 막내봉우리,시살등에서 원동 토곡산까지 종주를 마치고 원동초등학교로 내려서는 순간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낙동강 강물은 황금빛 부스러기들을 마음대로 흘리고 있었다. 노을 지는 강물 위로 갈가마귀가 날고 갈대밭은 검푸른 산 그림자에 감겨 바람에 흔들렸다. 눈 앞의 금동산 산자락과 용당 나루터 너머로 하늘까지 맞닿은 무척산은 검은 베일에 쌓여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두런거렸다.


 이윽고 태양의 꼬리가 사라지면서 강물은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사위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잠기고 낙동강이 형언하기 어려운 은빛싸라기로 바뀌는 장엄한 시간,나는 그 황홀경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그저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삼라만상이 어둠과 빛으로 뚜렷이 나뉘는 모습에 나는 어쩔 줄을 몰라 몸을 떨었다. 내가 어둠인지 아니면 은빛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경계에 서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빛은 사라지고 오직 두 빛깔만이 남겨진 풍광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하겠다. 나는 한 마리 짐승인양 숨죽이며 그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이 깊어가는 가을 나는 다시 토곡산에 올라 낙동강의 그 황홀한 모습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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