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다시 찾은 용소골 비경<이일산우회 기획산행>

청산신남석 2006. 12. 27. 02:09

                                                                                [위에서 내려다본 용소골 최고의 비경-제1용소]

 

 

                 

                                    산을 내려온 지 하루도 채 못 되었건만

                                    한 해가 다 지난 듯이 산이 그리워라.

                                    다시 또 올라볼까 생각도 했지만

                                    세상 그물에 얽힌 몸을 어쩔 수 없어라.


                                    허균(許筠 1569-1619)의‘벗과 헤어지고 산을 내려와서’에서


교산(蛟山) 허균은 1603년 여름,사복시정(정3품)의 벼슬이 떨어지자 평소에 꼭 가보고 싶었던 금강산을 거쳐 몇 마지기의 땅이 있는 고향 강릉으로 내려간다. 이 여행길에서 쓴 시가 바로 이 시이다.교산은 벼슬길에 올랐다가 파직당하여 낙향하고 다시 벼슬에 복귀하고 유배당하기를 거듭하다 끝내 처형당한 불우한 인물이다.우리 역사에서 허균만큼 우여곡절을 겪은 인물을 찾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홍길동전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이상세계를 꿈꾸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지만 현실은 극복할 수 없는 차가운 좌절의 대상이었다.그는 낙향하면 고향을 찾듯 산을 찾았다. 무슨 열병처럼 산을 그리워하면서도 세속에 얽매여 가지 못하는 교산의 심정이 잘 배여 나온 시이다.누항(陋巷)이 자신을 속박하면 속박할수록 두고 온 산에 더욱 가고 싶었을 것이리라.         

 

때:2000년 9월 30일~10월 1일(1박 2일)

산행코스:덕구온천-온정골-응봉산-용소골-덕풍마을

참가자:12명


1.대낮에 꿈꾸는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들,

 -눈을 부릅뜨고 그 꿈을 현실로 바꿀 테니까...


지나간 5개월은 산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나날들이었다.내 생활의 방편 때문이었다. 내가 산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일터 앞마당에 서서「금정산」을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가슴이 미어지도록 답답할 때는 앞마당에 나와 눈으로 금정산 산바라기를 할 뿐이었다. 세상 그물에 갇혀 ‘옴짝도 못하는 내 심사를 교산의 시는 어찌 그리도 잘 짚어냈는지 무릎을 치곤 한다.삶의 무게에 짓눌린 나는 곁에 산을 두고도 모른 척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밤마다 꿈꾼다.저「설악」의 깎아지른 바위벼랑에 오르는 꿈을! 아니면 푸르디푸른 지리연봉을 발이 부르트도록 더터나가는 꿈을! 그러나 밤에 마음의 먼지 낀 구석에서 꿈꾸는 사람은 아침에 깨어나 그것이 덧없는 것이었음을 깨닫는다.그러나 T.E.로렌스의 말처럼 대낮에 꿈꾸는 사람들은 위험한 인간들이다. 눈을 부릅뜨고 그 꿈을 현실로 바꿀 테니까.

 

응봉산 용소골!

 

그「용소골」을 꿈꾼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지난해 9월 4~5일 우리 산우회가 용소골을 다녀온 직후부터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기는 했다.일테면,재식이는 고무보트를 지고 가 용소골을 타고 내려오는 래프팅이라야 제 멋이라 했고,현영이는 아예 물 속을 헤쳐 걸어야 참 멋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마산의 현기도 은근히 용소골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모두들 다시 가고 싶은 열망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용소골 답사는 갈 데까지 가 더는 물러설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었다.그러나 정작 7월이 오면서 나는 그 꿈을 실현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눈앞에 닥친 새로운 일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기 때문이었다.자신으로부터「자유」를 얻어내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음을 뼈저리게 실감했다.그것도 자신을 스스로 가둔 다음에는 더욱 그랬다. 8월이 지나고 9월이 오면서 어떻게든 용소골의 품에 안길 방책이 필요했다.

   

2.갇힌 자의 자유를 찾아

   -오! 한 잔의 우유빛 광채 또는 빛나는 햇살


9월 24일,천신만고 끝에 나는「천성산」정기산행에 참여했다.드디어『갇힌 자의 자유』를 맛보게 되었다.「백동」을 지나「법수원」에 올라섰다.평소의「혈수용폭포」는 수량이 미미했으나 이 날의 거대한 물줄기는 거침없이 떨어지면서 물보라를 흩날리며 지축을 흔들고 있었다.며칠 전 전국을 강타한 태풍 사오마이가 휩쓸고 간 뒤의 폭포는 장엄한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가슴속을 파고드는 신선한 공기와 부드러운 바람결,「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한 여름날의 마지막 뙤약볕,그래서‘조금만 더 햇볕을 대지에 주게 하소서’라고『가을날』에서 기도하던 위대한 여름을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내 살갗의 숨구멍은 열리고 내 심장은 전율하였고 맨발에 와 닿는 대지의 감촉은 형언할 수 없었다. 갇힌 창살을 뚫고 자유인이 되어 대자연의 품에 안겼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한 방을 쓰던「한다빈」이란 소설가 지망생이 내게 말했던 “어두컴컴한 골방,거기의 작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우유빛” 햇살은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그 광채는 찬란하다 못해 눈이 시렸다.

 

오! 위대한 광채여. 

이 날 재화의 친구이자 멋쟁이 산사나이 의선이를 만났고,여기 천성계곡에서도 어김없이 용소골을 안주 삼아 술잔을 돌렸다.열일 제쳐두고 9월 30일에는「덕구온천」으로 가고야 말리라.우린 이렇게 다짐을 했다.이제 내가 세상 그물에서 빠져나올 일만 남았으니...

            

 아내한테는 출발 이틀 전까지도 용소골 산행계획을 말하지 않았다.고생하는 아내에게 무거운 짐을 오래 지우기 싫어서였다.번민은 짧게,기쁨은 오래-이것이 내 방책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잽싸게 처리하는 것이 상책(上策)임을 어디 한두 번 겪었겠는가.하루 전날 새벽 장을 보러 부전시장에 갔다.장을 보고 나오다가 내가 좋아하는‘말린 무화과’를 고르는 걸 본 아내는 갑자기 얼굴빛이 변한다.“아니, 또 산에 갈려고! 정신 나갔구먼?” 하며 절대 용납하지 못하겠단다. 그제서야 나는 용소골 산행일정을 털어놓았다.“하루도 아니고 이틀씩이나 비운단 말야.말도 안 돼...” 펄쩍 뛰는 아내의 기세는 좀체 수그러들지 않았다.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돌아오는 차안에서 나는 모종의 거래(?)를 제시했다. 이렇게 승낙을 받아냈지만 내심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래도 잊어버리자! 도시를,세간을 탈출한다는 기쁨을 위해서, 위대한 타협을 위해서!


3.덕구온천을 향해


마침내 출발이다.9월 30일 토요일 정오,「교대역」한양플라자 앞에 일행 11명이 모였다. 정영천 회장을 비롯 이재화 총무,마산의 최민석,박병진 그리고 초대손님 손의선이 이번 산행에 첫 선을 보였고 나와 조현영,최금구,김평오,박순양, 마산의 김현기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참여했다. 여기에 덕구에서 합류키로 한 서울의 이동채 동기를 합쳐 12명이 용소골 답사에 나서게 되었다.당초에는 20명이 참가를 희망했으나 막상 출발 당일이 되자 7명이나 불참했다.아쉬움을 뒤로하고 12시 20분 박재만 기사의 31인용 버스는 출발했다.


토요일인데도 경부고속도로에는 차량이 붐비지 않았다.경주를 지나고 포항까지도 일사천리로 달렸다.부산서 포항을 거쳐 동해안을 달리는 7번 도로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였다.부산서 고성의 통일전망대까지 뻗어나가는 이 7번 동해고속화도로는 서울~목포간 1번 도로보다 더 긴 버스길이 아닌가 싶다.게다가 나라 안에서 이 7번 도로만큼 장쾌한 도로는 달리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저 동해안의 짙푸르고 시원한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해안선은 일상에 찌든 서해안의 그것과 견줄 수가 없다.탁 트인 수평선의 팽팽한 긴장감과 청량감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그래서 동해안의 풍광은 늘 신선함과 상쾌함의 연속이다. 서해안은 일몰(日沒)이 백미(白眉)라면 동해안의 그것은 일출(日出)이다.하여 숱한 사람들이 일출을 보러 동해 바닷가로 찾아든다.해운대의「달맞이고개」,서생의「간절곶」,감포의「이견대」,구룡포의「장기곶등대」,「강구등대」,「축산등대」,「후포등대」,평해「월송정」,「망양휴게소」,죽변의「용추곶」그리고 삼척의「추암」..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해수욕장과 등대가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들인다.


동해의 해돋이를 두고 흔히 강릉의「정동진(正東津)」을 제일로 치지만,오히려 나는「간절곶」이나「용추곶」을 더 사랑한다.70년대의 정동진이라면 또 모르겠지만,값싼 저널리즘의 흥행터가 된 오늘날의 그곳은 이미 오염천국이며 훤소(喧騷)가 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반면 간절곶은 나라 안에서 제일 먼저 해가 뜨는 곳이요,저 유명한‘만파식적(萬波息笛)의 바다’,‘연오랑 세오녀의 바다’이며‘처용랑의 신화의 바다’이기도 하다.또 용추곶은 한반도의 요추로 그 문화와 역사의 자취가 깊게 서린 곳이다.그래서 삶에 지치고 의문이 들 때면 나는 유독 간절곶이나 용추곶을 찾곤 한다.   

 

서해에서 가장 뾰죽한 돌륙(突陸)이「장산곶」이라면 동해에서는 호랑이 꼬리「장기곶」이다.반면 응봉산의 산뿌리 죽변「용추곶(龍楸串)」은 이 땅 등허리에서 가장 튀어나온 3번 요추(腰椎)다.사람으로 치자면 숨길이 드나드는 명문(命門)이 바로 이곳이다.그래서 이 일대는 강기(剛氣) 드센 고장으로 멀리는 삼국시대부터 가까이는 일제 때에 이르기까지 항일정신에 풀무질을 해대던 그런 곳이다.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난 1896년에는 죽변항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어선을 공격,뒷날 일본군함의 함포사격과 상륙작전으로 쑥대밭이 되었을지언정 31명을 잡아죽였다.이때 폐허가 된 장평 출신 전명기는 1920년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17명을 사살,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3.1운동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혁명당.조선독립공작단 사건에도 응봉의 싸울아비들은 빠지지 않았다.

 

자락 사람들이「매봉산」이라 부르는「응봉산(鷹峰山)」.기(氣)가 대단한 산이라고들 한다.흔히 육산(肉山)은 속에 뼈를 감춰 단단하고,골산(骨山)은 속이 부드러워 보기보다는 허한데 이도 저도 아닌 응봉에서는 무시 못할 힘이 뻗친다고 한다.이 엄청난 힘이 서린 응봉에 한 번 빠진 자,그는 영원히 응봉의 찬미자가 되는 법이다.이것이 응봉의 진면목이요,사랑이리라. 


일행은「망향휴게소」에 내려 잠시 휴식을 취했다.그때 서울서「덕구」로 오고 있는 동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막 덕구에 도착했다며“온천장 부근의 숙소가 어디냐.”고 물어온다.온천장 아래 뼈다귀해장국 건너 덕구장 모텔을 숙소로 예약해놨으니 먼저 가거들랑 자리를 잡아달라고 동채에게 부탁했다.여간한 산꾼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홀로 그 먼길을 올 수 있겠는가? 그의 걸림 없는 모험심과 산사랑에 박수를 보낸다.


4.응봉산을 안고 한 숨도 못 잔 그 날밤


5시 10분.「불영계곡」갈림길을 지나「울진」에 닿았다.울진(蔚珍)이란 지명은 김유신 장군이 대군을 거느리고 이곳 우진(于珍:울진의 옛이름) 땅에 이르니 삼림이 울창하고 갖가지 진귀한 물산이 많아 감탄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울진교를 건너자마자 박재만 기사는 7번 도로를 버리고 남대천을 따라 왼쪽 917번 도로로 꺾어든다.덕구온천으로 가려면 대개「부구」까지 올라간 다음,거기서 왼쪽 384번 도로를 타고 10km를 더 들어가는 게 일반이다.그러나 새로 열린 이 917번 도로는 덕구온천 지름길로 좋이 20여분은 단축할 수 있다고 한다.


5시 30분,덕구온천 아래 삼거리.거기 뼈다귀해장국집 앞에 그리운 동채가 보였다.그는 벌써 덕구온천물에 몸을 씻고 하릴없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지난해 우리는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나라 안에서 제일이라는 덕구온천 물에 손도 담그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았던가.그게 얼마나 아쉬웠으면 이번 용소골 산행에는 아예 덕구온천의 목욕을 0순위로 잡아놓았겠는가! 그래서「덕풍」쪽을 버리고 여기 덕구온천을 산행들머리로 잡아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불원천리 달려온 동채를 모른 체하고 한가롭게 목욕이나 즐길 수 있으리요! 우린 덕구장 모텔에 행장을 풀고,약속이나 한 듯 뼈다귀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한바탕 술잔이 돌고 얼큰한 해장국으로 속을 채우고 나서도 시간은 아직 7시 반이었다.우리는 울진의 송이축제가 열리는 덕구온천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겼다.가설무대에는 화려한 조명에 사물놀이가 흥겹게 벌어지고 있었지만 축제는 이미 파장이었다.파장마당의 축제를 둘러보고 송이 전시장으로 갔다.응봉산과 울진 주변의 산들에서 캐낸 송이가 선을 보였다. 팔뚝만한 송이도 전시되고 있었는데 내 평생 그렇게 큰 송이는 처음 보았다.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물(大物)이었다. 코를 갖다대니 송이 향기가 그윽했다.응봉산 일대에는‘버섯중의 버섯인 송이'가 그득했다’던 말이 실감이 났다.    


밤 10시,덕구장으로 되돌아왔다.내일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하기에 일찍 잠을 자둬야 했다. 한 방에 4명씩 들었다.‘코 고는 사람들’은 알아서 한 방으로 들어가라는 재화의 의미 있는 주문에 의선과 나,그리고 금구가 한 방에 모였다.그런데 조금 있으니 재화가 배낭을 들쳐 메고 투덜대며 우리 방으로 건너왔다.잠시 방을 비운 사이에 다른 친구가 자리를 꿰고 누워 어쩔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이것이 불행의 단초가 될 줄은 어디 짐작이나 했겠는가!.

 

의선이 곁에 나, 금구 그리고 재화가 나란히 누워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10분쯤 지났을까 말까. 탱크가 굴러가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이제 시작이구먼.미쳤지 미쳤어” 재화의 넋두리였다.그러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잠잠해졌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다시 땅이 꺼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온다.나도 제법 코를 고는 편인데도 곁에 누운 의선의 막무가내 골아 젖히는 콧소리에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새벽에 일어나 의선이 실토한 말이지만,얼마나 무지막지했으면 고속버스 기사가 엔진고장이 난 줄 알고 버스를 세우기조차 했다나 어쨌다나.듣고 보니 의선이의 코골이 이력은 정말 화려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재화는 아예 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나가고 말았다.

 

나는 금구 쪽으로 몸을 돌려도 보았지만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이렇게 전전반측하다가 잠시 눈을 붙일라치면 잠이 깨이고,다시 방문이 열렸다.도대체 잠이 오지 않았다.새벽 3시 반쯤 재화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불을 밝혔다.저절로 기상이었다.입에서는 욕이 나왔지만 다시 잠을 청할 수는 없는 일.옆방의 동기들을 하나 둘 깨웠다.영문을 모르는 옆방 친구들의 입에서도 고운 말이 나올 리 있겠는가.

 

현영이가 가져온 꼬리곰탕에다 떡국을 넣어 아침을 지었다.내 생각에는,온정골 원탕까지 간 다음,새벽 어둠이 사위는 걸 보며 아침밥을 지어먹으면 좋으련만 굳이 방안에서 요리를 하는 게 못마땅했다.그러나 잠을 설친 친구들의 면면을 보니 강요할 수는 없었다.그래도 뜨끈뜨끈한 곰탕국물에다 맛있는 떡국을 먹고 나니 허한 속이 든든했다.


5.새벽 온정골의 아름다움


5시 35분.산행에 들어간다.지난해에는 응봉산 고스락 동쪽의「옛재능선길」로 내려왔으나 이번에는「온정골」을 거슬러 원탕에 다다른 다음,응봉산 최대의 폭포(80m)를 품은「폭포골」을 치고 응봉산 고스락에 올라선다.고스락에서는「작은당귀골」로 하산,「용소골」을 더터「덕풍」의 이희철 반장댁에 짐을 풀기로 했다.산행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오후 3시쯤에는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그렇다면 5시쯤 이반장댁을 출발, 6km 거리에 널부러진 또 하나의 비경,「덕풍계곡」을 걸어「풍곡주차장」에 닿을 것이다.우린 이렇게 응봉 산자락의 온정골,폭포골,용소골과 그 발치 아래 덕풍계곡,이 네 골짜기를 한꺼번에 답사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워놓았으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이른 새벽,어둠을 뚫고 온정골 들머리로 향한다.산행 들머리는 온천장 바로 밑 식당가의 왼편 계곡.5시 44분,물을 가두어 둔 둑 위의 다리를 건너 계곡 왼편 산길로 붙었다. 온정골 산행은 초입부터 절경을 연출하며 산객들을 압도한다.둑에 갇힌 온천장의 물은 어쩌지 못하고 깎아지른 바위 벼랑 밑의 검푸른 탕에다 세찬 물줄기를 연신 쏟아 붓고 있었다.원탕에서 뽑아져 나온 온천수는 온천 송수관을 통해 온천장으로 공급되는데 그 송수관의 길이가 무려 4km에 달한다고 한다.최초의 온천수는 이 노천 송수관을 통과하면서 0.8˚가량 수온이 낮아진다고 한다.


랜턴에 불을 밝히고 산길로 들어섰다.경사는 느슨하고 새벽 산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싱그럽다. 그리고 사위는 너무나 고즈넉하다.우린 이 정일(靜逸)에 빠지기 위해 여길 오지 않았던가.일상(日常)을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느낀다.그래, 떠나본 자만이 알게 되리라.일탈한 자의 자유를!

   

골바람 한 올 없는 온정골은 더웠다.너무 후덥지근하여 등줄기에 이내 땀이 배여 나온다.일행 가운데 몇 명은 벌써 겉옷을 벗어젖힌다.나는 아무래도 좋았다.코끝을 스치는 상큼한 공기 속에는 수목에서 내뿜는 신선한 피톤치트 향기가 섞여 나온다.나는 또다시 맨발이 되었다.새벽이슬로 축축하게 젖은 땅과 풀이 내 맨발을 간지른다.이 간지러움이 일순 잠자던 내 뼈와 살을 흔들어 깨운다. 등뼈와 팔다리에 갇혀있던 뻣뻣함이 풀린다. 비단자락을 깔아놓은 것처럼 산길은 부드럽다.아! 현영이와 금구,현기도 약속이나 한 듯 맨발이 되어 있었다. 맨발은 대지의 숨결을 느끼는 유일한 접촉점이자,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촉매다.

 

5시 53분,2번째 다리를 건너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었다.산길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며 경사 또한 느슨했다.온천 송수관이 길 안내를 해준다.4분 뒤 다시 다리를 건넜고 6시 6분, 선녀탕과 마주쳤다.선녀탕 아래로「용소폭포」가 보였다.용소폭포는 2단으로 두 개의 탕이 검푸른 물을 담고 있었다.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니 모골이 송연했다.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어둠 속에서도 흰빛을 내며 세차게 내려꼿힌다.아직은 모든 게 잠들어 있는 시각.흐르는 물만이 깨어나 저희들끼리 쉼 없이 도란거린다.그러다 폭포나 벼랑을 만나면 천둥보다 더 격렬함으로 다투고 작은 돌멩이를 만나면 솜털보다 더 부드럽게 살랑거리며 귀엣말로 속삭인다.10분쯤 다리품을 팔자 또다시 다리를 건너야 했다. 얼마 가지 않아 쉼터가 나온다.여기서 7분 가량 다리 쉼을 한다.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거친 숨길도 추슬렀다.

 

6시 36분「신선샘」(또는 효자샘)에 다다른 뒤,4분 뒤에는 팔각정에 닿았다.차츰 어둠이 사위어가고 있었다.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 같이 어둠이 풀리기 시작한다.또다시 4분쯤 훤해진 숲길을 걸어가니 다리가 나온다.다리를 건너 오른편 산길로 들어서자 골 안은 내쳐 헤벌어지면서 드디어 새벽하늘이 보인다.완연한 아침을 맞는다.저 앞쪽으로 새벽 이내인지 안개 같은 게 자욱하다.가까이 다가가자 온천수 송수관에서 뿜어내는 물보라가 주위 일대를 감싸 그렇게 보였다.그 곁에는‘응봉산 20번’이라 쓴 119구급대의 위치안내표지기가 보였다. 

 

6시 49분,마침내 나라에서 유일한 노천온천이라는 원탕터에 다다랐다.콘크리트로 계곡에 만든「노천온천탕」은 84년 여름 폭우로 유실되어 흔적만 남아 있었다.표지판에는 전씨 성을 가진 사냥꾼이 600여 년 전에 이 골짜기에 들어왔다가 온천을 발견했다고 적고 있다.온천수를 뽑는 송수관에 진짜 온천수인가 싶어 손을 대보니 뜨거웠다. 40도가 넘는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그 곁에 새로 단장한 산신각은 너무 깨끗해 흔적만 남은 노천 온천장과 사뭇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원탕터에서 세수를 한다, 배낭을 고쳐 맨다 하며 8분 가량 지체했다.친구들은 예까지 너무 수월하게 왔다며 흥겨워한다."웬일이지. 신 대장이 이렇게 편한 길을 안내하다니!.”하며 선뜻 수긍이 안 간다는 눈치다.그랬다.얼마 가지 않아 이 기쁨은 고통으로 변하고 말았으니...


6.응봉산 고스락으로


한동안 평탄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계곡 왼편의 오르막으로 이어지고 물을 건너 잠시 능선을 돌아서니 물길이 등산로를 끊어버린다.7시 12분,물을 건너 급경사의 북서쪽 비탈길을 갈지자로 오른다. 둔덕 마루에는‘정상 2km'라는 표지기가 걸려 있다.

 

여기 이 마루턱에서 바로 치오르면 응봉산 정상이고,왼쪽으로 잠시 내려섰다가 계곡을 따라 오르면「폭포골」이다.그런데 둔덕 마루에 맨 먼저 올라간 재화가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날등을 타고 저만치 내려가 버렸다.일행은 하나같이 재화를 따라 합수나들인「사두목」으로 내려오고야 말았다.거기엔 4m 높이쯤 되는 아담한 폭포가 숨어 있었다.폭포 아래 탕에 햇볕이 오롯이 내리꽂히면서 폭포는 더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산중미인(山中美人)이란 바로 이런 숨겨진 폭포를 말하는 것이리라.


이 사두목에서 왼편 계곡은「성우골」,오른편 계곡 그러니까 둔덕의 왼쪽 계곡이 이른바「폭포골」이다.나는‘아차’싶어 다시 그 둔덕으로 치고 올랐다.일행을 둔덕 마루에서 기다리게 해놓고 다시 왼쪽 계곡으로 내려서서 폭포골 초입을 살펴보았다.그러나 잡목에 덩굴까지 얽혀 등산로는 우정 희미했다.설령 계곡을 차고 오르더라도 시간이 너무 걸릴 것이 뻔하다.그렇다면 용소골 하산에 문제가 생길 뿐만 아니라 덕풍계곡 답사는 또 후일을 기약해야 할 것이리라.나는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둔덕으로 되올라와 응봉산 정상으로 곧장 올라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7시 40분,응봉산 정상까지 2km 거리의 가풀막진 산등 길을 더터오르기 시작한다.이 오르막 비탈은 햇볕이 잘 드는 동쪽이어서 아름드리 적송(赤松)이 즐비하다.우리나라의 산 어디를 가더라도 마주치는 그 흔한 소나무. 그 가운데서 적송만큼 아름답고 빼어난 자태를 지닌 나무는 없을 것이다.경주 계림에 있는 구부러진 안강형(安康形)의 소나무가 아니라 하늘로 쭉쭉 뻗은 적송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그래서 동양 삼국에서도 우리의 적송은 질이 뛰어나고 품격이 높아 예부터 그 우수성은 정평이 나 있다.소나무의 송(松)은 木公,즉‘나무의 공작’이라 하여 중국에서 비롯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그러나 적송은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대규모 남벌이 자행되는 바람에 이제는 주로 봉화,울진,태백과 정선,영월,삼척의 산들에 남아 겨우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적송 군락지로 찾아볼 만한 곳은 울진의 서면「소광리(小光里)」와 성창합판의 산지인 봉화군 회룡면「사전(沙田)마을」의 적송 조림지역을 꼽을 수 있다.언제 시간이 허락한다면,다시 용소골을 거쳐「큰당귀골」의 임도를 따라「작은빛내(小光川)」의 소광리를 찾아가리라.아니면 용소골보다 더 길고 깊다는 덕풍의「문지골」을 거슬러「삿갓봉」에 올라‘장쾌하게 하늘로 치솟아 굳센 기개를 펼치는’소광리의 적송을 만나보리라.


경사가 느슨하기만 하던 온정골과 영 딴판인 이 산길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꼬박 1시간 30분을 한결같은 된비알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주력이 남다른 재화는 선두에 서서 바람같이 치오른다.우리 산우회의 영원한 회장,영천이는 줄곧 선두에서 다리품을 파는데 걸음짓이 한결 안정되어 믿음직스럽다.산행의 성과는 무엇보다도 얼마나 열정을 갖고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는 법.어디 그뿐이겠는가.산을 타지 않을 때에도 산(山) 서적이나 여러 산행정보를 섭렵하는 것 또한 산행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방법이다.아무튼 정회장의 걸음걸이가 상당한 수준에 와 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그래서 뒤쳐지는 사람한테는“회장만 맡으면 주력이 늘게 돼 있어.”하는 우스개 소리가 오간다.

 

오늘의 초대손님인 의선이는 엊저녁의 숨소리처럼 연신 가쁜 숨을 몰아세운다.평오도 선두그룹에 끼여 있지만 오늘따라 걸음이 무거워 보인다.순양이의 산행 실력은 이미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어떤 경지를 넘어서 있다. 오늘 처음 온 병진이의 걸음짓이 뜻밖에도 가볍다.앞으로 우리 팀의 주전으로 전혀 손색이 없을 것만 같다.마산의 민석이는 백두대간을 종주한 베테랑으로 장거리 산행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력의 산꾼이다.지난번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갔다가 손목에 금이 가는 바람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이번에 혼자 서울서 온 동채도 준족이었다.걸음도 날렵하지만 걸음짓이 여간 안정돼 있지 않았다.틈만 나면 산으로 찾아든다는 동채 역시 프로에 가깝다.후미의 현영,금구,현기는 우리 팀의 자랑이다.세 사람 다 맨발 산꾼으로 산행 실력 또한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수준급이다.

 

벌써 온몸은 땀으로 흥건하다.7부 능선 부근에 다다르자 비로소 바람이 불어와 시원하다. 아무튼 그 된비알을 더터오르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산행다운 산행을 했다. 걸음걸이는 그 사람 내면에서 우러나는 리듬이다.사람마다 신체 리듬이 다르듯이 걸음걸이도 사람마다 같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걸음걸이는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불안한 자세는 불안한 걸음걸이를 낳는다.우리는 제 몸에 맞는 보행기술을 체득하여 자신만의 걸음짓을 만들어나가야 한다.헌데 베테랑 산꾼의 걸음걸이를 보면 무언가 공통분모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그것은 바로 중심이 아래로 내려가 있다는 점이다.산에 다니면 다닐수록 중심이 내려가게 된다.역삼각형의 산을 생각할 수 없듯이 중심이 잘 잡힌 걸음걸이는 우리가 오르내리는 산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산행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중심을 잡아나가는 과정이요 훈련이라 하겠다.산같이 끄떡 않는 부동심(不動心)을 얻기 위하여.


정상 아래턱의 헬기장을 밟고 응봉산 고스락에 도착한 시각은 9시 10분. 1시간 40분 가량 다리품을 팔아 정상에 오른 셈이었다.조금 있으니 경기도에서 왔다는 40대의 여성 두 사람이 올라왔다.이들은 덕구온천에서 출발하여 옛재능선길을 타고 일행보다 먼저 올라왔단다.이런 인적 드문 산중에서 산꾼을 만나는 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리라.  

 

                                                                          [코발트빛 하늘을 등지고 응봉산(999m) 정수리에 올라]

 

일행이 다 모이자,나는 응봉산 서쪽에 둘러쳐진 낙동정맥(洛東正脈)의 하늘금을 친구들에게 소개한다.응봉산(999m)에서 12시 방향이「용인등봉(1,124m)」,그 오른쪽 곁으로는「석포」로 넘는「석개재」의 절개된 도로가 보인다.이어서 시계방향으로「면산(1,245m)」과「토산(974.1m)」이 아스라하다.그 어간 어디에 한 많은「한개고디」가 있을 텐데 어두워 가늠이 안 된다. 용인등봉 바로 뒤에 숨어 고양이의 발톱처럼 내민 산은「묘봉(猫峰 1,167.6m)」.그리고 9시 방향으로는「삿갓봉」(대동여지도의 곤립산(袞笠山 1,119.1m))이 운무를 뚫고 솟구쳐있다.그리고 낙동정맥보다 더 동쪽에서 동해의 샛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장대한 산줄기가 여기 응봉산 산괴다.


「응봉산(鷹峰山 999m)」일대는 수려한 계곡을 많이 품고 있다.응봉산 동쪽으로는 덕구온천으로 이름난 온정골과 폭포골,성우골 북동쪽으로는 재량밭골,북서쪽으로는 버릿골,그리고 남서쪽에서 발원 북서쪽으로 흐르는 장대한 용소골이 버릿골과 합수하며 덕풍계곡을 이룬다.또 용소골 들머리에서 남쪽으로는 용소골보다 더 긴 문지골이 낙동정맥의 삿갓봉과 맞닿아 울진과 경계를 둘러쳤다.게다가 덕풍마을 아래서 동남쪽 석개재로 이어지는 괭이골이 실핏줄처럼 얽혀 있으니 과연「풍곡(豊谷)」이라는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또한 덕풍계곡의 반대쪽에 있는「동활리」계곡의 물이 나팔관처럼 흘러 들어와 풍곡에서 아우라져,동해의「호산」으로 젖줄을 대고 있으니 이 동류수(東流水)「가곡천」은 예부터 좋은 물로 쳤던 것이다. 동활리 계곡의「춘밭골」사람들은 6.25를 몰랐고 이 일대 버섯 중의 버섯이라는 송이와 고기중의 고기 송어가 그득했다 한다.지금은 송이는 나지만 송어는「외삼방」의 잠깐 캐다만 아연광산으로 하여 사라졌다고 한다.

 

 7.작은당귀골을 치내려 그리운 용소골로!


9시 20분.응봉산 정수리에서 왼편으로 열린 남서쪽 산줄기를 타고 내려간다.만일 정수리에서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면 또 하나의 헬기장이 나오고 옛재능선길로 빠지니 유의해야 한다.또 북서쪽으로 난 산길을 택하면 용소골을 거치지 않고 능선을 타고 덕풍마을로 가게 된다.이 등산로는 덕풍 사람들이 송이나 약초를 채취하러 다니는 길로 초심자는 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왜냐면 삿갓봉에서 응봉산에 이르는 이 일대는 쾌청한 날씨에도 갑자기 운무(雲霧)가 끼는 일이 허다하여 길을 잃고 조난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하여튼 용소골로 빠지는 남서쪽 산줄기를 찾으려면 반드시 응봉산 표지석 뒤,거기서도 왼쪽으로 열린 길을 택해야 한다.


산길은 순하고 경사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20분 가량 산등을 타고 내려오자 갈림길이 나온다.‘응봉산 17번 ’이란 표지기 곁에 오른쪽으로‘덕풍가는 길’이란 푯말이 서 있다.바로 이곳이 우리가 포기했던 폭포골을 거슬러 오르면 만나게 되는 그 지점이다.그리고「덕풍」으로 빠지지 않고 정상서 내려오던 그대로 능선을 따라가면 울진군 서면「소광리」로 갈 수가 있으며, 내쳐 낙동정맥의「삿갓봉」으로 종주도 가능하다.    


일행은 오른쪽‘덕풍가는 길’,즉 남서쪽 길을 따라 쏜살같이 내려간다.산길에는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고, 골바람이 산등으로 치올라와 텁텁하기만 하던 머리가 시원하기 그지없다.선두와 후미 간격이 벌어진다.이럴 때 우리는‘야호~’를 외쳐 후미를 확인하는데 그럴라치면 뒤쪽에선 영락없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동물 성대묘사에 일가견이 있는 현영이가 내는 소리다.아니나다를까 오늘도 현영이가 먼저‘까악까악’까마귀 소리를 질렀는데 어디에선가 진짜 같은 까마귀 소리가 화답가로 들려왔다.그러나 우린 그저 그렇겠거니 하고 지나치고 말았다.


15분쯤 내려오자 남서쪽으로 향하던 산등이 끝나면서 등산로는 남쪽으로 머리를 튼다. 여기서도 무심코 오른쪽 능선으로 붙으면 887m봉으로 가게 되고, 끝내는 천길 만길 깎아지른 벼랑을 만나게 되니 주의해야 한다.그렇게 되면, 용소골에 들어섰을 때 공룡지느러미 같은 험준한 오른쪽 능선이 보이는데 이 능선이 바로 887m봉의 산등날이다.아무튼 이 분기점에서 길이 희미하다 싶으면 잘못된 등산로이니 반드시 뚜렷한 길을 찾아내려서야 한다.


왼편 발 아래로「작은당귀골」상단이 숲 사이로 언뜻언뜻 내비친다.산길은 여전히 순탄했지만 경사는 서서히 급해지기 시작한다.펑퍼짐한 잘룩이를 지나 둔덕 같은 봉우리에 올라섰다.여기서 등산로는 남동쪽,즉 왼편 작은당귀골 쪽으로 휘어져 내려간다. 갑자기 산길은 가팔라지더니 갈지자로 흐른다.산허리를 타고 내려갈수록 경사도는 더했다.이런 길을 한참 내려오니 작은당귀골이 에돌아 용소골로 빠져드는 골짝이 훤히 트인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짙은 수풀이 시야를 가린다.여기서부터 사정없이 까꿀막진 된비알을 타고 내린다.드디어 작은당귀골의 상단부에 다다른 것이다.물소리다.반가운 물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이어 흰 깁의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가 나타난다.나는 등산로를 벗어나 물가로 걸어 내려갔다.청태(靑苔)가 낀 폭포 위에 서서 저 아래를 굽어본다.10m 폭포였다.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사정없이 물 속에 들이밀고 열기를 식혔다. 살 것만 같았다.

 

6분쯤 기다려본다.친구들이 폭포에 거의 다 다다를 무렵,나는 바위벽을 타고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작은 폭포와 탕이 연이어 나타났다.그러자 용소골이 시야에 들어왔다.개울을 건너 비닐 모듬터를 지났다.저번의 태풍이 할퀴고 간 비닐 텐트 모듬터는 흉물스러웠다.드디어 용소골의 너른 품속에 다다랐다.10시 55분이었다.

 

                                                                  [용소골과 작은당귀골의 합수점에서 50미터 위의 제3용소]

 

8.용소골-3용소의 황금빛 물에 발 담그고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면 사람들은 할 말을 잊는다.눈이 커지고 가슴이 열리면서 뿌듯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름다움이 주는 미덕일 것이다.용소골에 들어섰을 때 나는 일순 목욕을 하고 난 뒤의 그것처럼 개운함을 느꼈다.물가에 억새가 듬성듬성 서 있는 사이로 황금빛 물은 흘러 넘쳤다. 단풍이 들기 직전의 나뭇잎들은 연하디 연한 노랑으로 물들어 있었다.대기는 유리알처럼 투명하다.햇빛은 하얀 바위에 내려꽂히면서 시퍼런 스펙트럼을 분출한다.


계곡물을 건너 3용소로 걸어 올랐다.작은당귀골과 용소골의 아우라지에서 50m 위쪽에 있는 3용소.지난해 빠듯한 일정 탓에 빼먹은 3용소를 오늘에야 찾아 나섰다.3용소는 생김새가 2용소와 흡사했다.5m 가량의 폭포는 시퍼런 소에 제 무게를 풀어놓으면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소 가장자리는 황금빛 물결 이랑이 층을 이루며 물밑의 자갈은 훤히 드러난다.저 아래 2용소는 오른쪽 절벽을 타고 오르지만 3용소의 오른쪽 절벽은 사람의 발길을 거부한다.그래서 왼쪽으로 난 에움길을 질러 올라야 한다.폭포 위에 올라 20분 가량 더 가면 또다시 두물머리에 이르는데 오른쪽 계곡이「원골」이요 왼쪽 계곡은「큰당귀골」이다.큰당귀골로 들어서서 조금 가면 울진군「큰빛내」로 드는 임도가 나오고 오른쪽 원골을 따르면 응봉의 마주보기 삿갓봉에 오르게된다.

 

                                                             [황금빛 물살 일렁이는 3용소에 발을 담근 현영이]

 

3용소를 둘러보고 작은당귀골과 용소골의 두물머리로 다시 내려왔다.용소골은 여느 계곡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우선 골짜기 좌우가 깎아지른 협곡으로 이루어져 탈출구가 없다는 점,계곡 바닥이 암반으로 이루어져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지 않는다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다.따라서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수량이 순식간에 불어나서 계곡 답사 자체를 어렵게 한다.그리고 골짜기가 동남쪽으로 열린 탓에 수온이 그리 차갑지 않다는 점도 또 하나의 장점이다.아울러 크고 작은 소와 담이 즐비해 자칫 지루하기 쉬운 산행에 재미를 배가시켜주기도 한다.

 

그 가운데서도 물론,세 용소가 용소골의 백미이긴 하나 어디 그뿐이겠는가.옷을 입은 채로 물 속을 걷는 즐거움,절벽을 가로지르거나 타고 넘는 스릴, 암반을 건너뛰는 짜릿함. 봅슬레이 코스 같은 통바위벽,하늘을 찌를 듯한 병풍 바위.용소골은 이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으니 용소골 산행을 처음 하고 나면 온몸이 결리고 근육이 당기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그러나 이런 아픔은 필시 용소골이 주는 보상이니 실망은 금물이다.그저 한사나흘 지나고 나면 저절로 결림이 풀리면서 용소골의 후덕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왼쪽 물가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내려간다.무릎까지 오는 산죽밭을 지나서 가녀린 억새가 서 있는 물가로 내려갔다.바위가 서덜을 이룬 곳에 배낭을 내려놓고 점심을 들기로 했다.11시 19분이었다.라면에 오뎅을 넣어 가볍게(?) 식사를 한다.현기의 트레이드마크인 솔주가 선을 보인다.‘이제 산을 올라갈 일은 없으니 한 잔씩 하자’며 현기가 술잔을 돌린다.나는 물 속에 발을 집어넣어 탁족(濯足)을 했다.시원하고 상쾌하기 그지없었다.아,이래서 우리 선조들은 마음 맞는 사람끼리 계를 만들어 탁족을 하며 시회(詩會)를 즐겼는가보다.

       

요즘의 우리가 등산클럽을 만들어 산행을 하듯,예전의 사대부들은 벗과 더불어 자연을 유람하며 풍류를 즐겼던 것이다.그 같은 장소로 부산 인근에서 가장 유명한 곳 가운  데 하나가 바로 배내골의「농암대(籠岩臺)」이다.깎아지른 바위벽을 기어올라 너른 반석에서 시를 지으며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풍류터가 농암대인데, 영남 유학의 큰 물줄기였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자주 찾아‘지팡이를 놓고 갓을 벗어’후학들과 노닐던 곳이다.이제 밀양댐이 담수를 시작했으니 머지않아 그 농암대마저 물 속으로 잠겨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3용소를 배경으로-유리알처럼 투명한 대기,연록의 잎새가 만추를 예고한다.] 

 

9. 통바위 붉은 하늘벽 위,공룡 지느러미처럼 이어지는 능선


친구들의 유쾌한 웃음소리는 하늘로 번져나간다.권커니자커니하며 술추렴에 시간을 뺏기다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12시 22분이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배낭을 울러 메고 본격적으로 용소골 탐사에 나선다.

 

다시 왼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내려간다.물 가장자리에 군데군데 모래사장이 나타난다.은빛 하얀 모래가 황금빛 물과 어우러져 묘한 대조를 이룬다.계곡은 대체로 완만하고 물길은 유장(悠長)하게 흘러간다.물길이 산길을 끊어 두어 번 계곡 물을 건넜다.작은 폭포와 소를 지나자 왼편 산비탈에서 10m 가량 됨직한 폭포가 시원스레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오후 1시 10분,그 폭포를 보러 다시 산길을 벗어나 물을 건넜다. 폭포 아래는 자갈마당에 모래사장이었다.폭포의 수량은 지난해보다 훨씬 많아진 듯했다.우리 일행은 물을 건너기도 하고 암반을 건너뛰기도 하면서 한바탕 땀을 쏟은 탓에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기로 했다. 

 

       [눈부신 햇볕,반짝이는 모래밭,하얀 속살을 쏟아내는 폭포,그리고 환한 웃음]

 

날씨는 여름날의 땡볕처럼 매웠다.햇빛이 화살인양 몸 속을 파고든다.또다시 계곡 물에 얼굴을 디밀고 세수를 해보지만 시원하지가 않다.재화가 가져온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니 갈증이 한결 가신다 이번 우리의 기획산행에 처음 참가한 깡마른 병진이가 잘 걸어내 여간 미덥지 않았다.이때까지만 해도 예정된 시간 안에 이 반장집에 다다를 것만 같았다.그러나 하류로 내려갈수록 걸음짓은 더뎌지고 다리쉼 하는 시간이 의외로 많아졌다.  

 

1시 16분.다시 물길을 건너 산길로 들었다.이제 골 안은 서서히 솔아지면서 완만하게 흐르던 물살도 제법 소리를 내며 빠르게 내닫기 시작한다.물가를 따라 이어지던 등산로도 이따금 희미해지다가 커다란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기도 했다.


정 회장과 평오는 작은당귀골의 폭포에 다다르면서부터 등산화를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그런데 찰고무 스페리창이 아닌 일반 고무창의 실내화는 암반을 딛고 타기에는 마뜩하지 않았다.그러니 걸음걸이가 짐짓 부자연스럽다.작년에도 물신을 신어 보았지만 비 온 뒤의 미끄러운 계곡에서는 별반 소용이 없었다.아예 등산화를 신은 채 물 속을 걸어 내려가는 편이 훨씬 나을 성 싶었다.그러나 이번의 용소골 암반은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작년만큼은 미끄럽지가 않았다.잘만하면 물 한 방울 적시지 않고 덕풍까지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었다.그러나 용소골은 호락호락한 계곡이 아니었다.

 

                                              [통바위 협곡인 용소골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붉은 하늘벽 아래,물바닥 찰랑이고 지나가 하늘을

                                                  보면,능선 위의 공룡지느러미같은 바위벽 봉우리들이 연이어 하늘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10m 폭포를 벗어나서 6분쯤 가자 유유히 흐르던 물이 두 번 맺히다 포말 일으키며 풀어지는 20미터 길이의 와폭(臥瀑)을 만났다.흡사 흰 깁의 살풀이수건 휘두르는 도살풀이춤을 보는 듯하다.용소골은 이렇게 크고 작은 폭포의 너울을 수도 없이 간직하고 있다.

 

와폭을 이룬 암반은 하나의 통바위.연회색 빛을 띄고 있는 그 암반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삭고 닦이고 물길에 닳고닳아 반질반질하다.비라도 오는 날이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실실이 풀린 물굽이는 치마폭을 휘감듯 잦아들면서 90°로 에돌아나간다.그러다가 또다시 폭포를 만들어놓고 물굽이는 다시 반대쪽으로 물꼬를 튼다.와폭 끄트머리에서 우리는 물길을 건너뛰어 오른쪽 암반을 타고 가다 물 건너 왼쪽 암반으로 건너갔다.이윽고 병풍을 둘러친 듯 깎아지른 협곡이 앞을 막아선다. 

 

                                             [유유히 흐르던 물이 두 번 맺히다 포말을 일으키며 풀어지는 20미터 와폭,-흡사 흰 깁의 살풀이 수건

                                                 휘두르는 도살풀이춤을 보는 듯하다.용소골은 이런 크고 작은 너물을 수도 없이 가지고 있다.]  

 

1시 44분. 봅슬레이코스 같은 계곡 짓누르는 붉은 하늘벽이 맞는다. 물바닥 찰박이며 지나 올려다보면 능선 위에 공룡지느러미 같은 바위벽들이 연이어 하늘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이곳이야말로 용소골의 특징인 통바위 협곡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붉은 하늘벽이 둘러쳐진 곳이다. 

  

   [공룡지르러미 같은 바위 봉우리를 등진 서울서 온 동채] 

 

            [붉은 하늘벽 주변의 공룡지느러미 같은 암봉]

 

마치 설악산 가야동의 통천문을 지나는 기분이었다.칼비늘 단 용이 살풀이 몸부림을 치면서 뚫고 나간 듯한 이 일대의 빼어난 풍치는 현란스러울 지경이었다.절묘하고 수려한 하늘벽이 물길의 양쪽을 에워싼 채 철옹성처럼 버티어 섰고,황금빛 물살에 씻기고 패이고 깎이면서 견디는 물 속의 돌덩어리들은 야릇하고 희한했다. 리고 공중묘기처럼 암벽에 늘어선 늙은 소나무들,산날 위의 쪽빛 하늘에 걸려 있는 하얀 구름 조각들...

 

붉은 하늘벽을 270°에돌아 나오면서 친구들은 이 놀라운 자연의 조화에 감탄사를 늘어놓았다.암반을 건너 뛰어 물길이 180°로 꺾이는 지점에 이르자 폭포 없는 용소가 반긴다.1시 56분.먹물 풀어놓은 듯 으스스한 용소의 왼쪽을 돌아나가자 지계곡에서 가느다란 물줄기를 흘러나오고 있었다.「난채골」이었다.난채골 지계곡을 통과해서 물을 두 번 건너자 또다시 좌측으로 지계곡이 나타났다.오후 2시 20분이었다.

 

 10. 암벽 오름길을 타고넘어 2용소로

  

후미와 선두의 간격이 점점 벌어진다.후미에는 믿음직한 현기와 금구가 있으니 걱정할 일은 없지만 초행길인 친구들이야 암반을 타고 넘나드는 것이 어디 수월하겠는가! 그뿐인가.9시간에 이르는 발품으로 피로가 쌓였으니 오죽했으랴.평소 같으면 벌써 산행을 끝내고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고 있을 텐데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어이구, 지겨워.”가도가도 끝이 안 보이는 계곡을 두고 주력 좋은 재화마저 넌더리를 낸다.그러자“내 평생 이렇게 멋진 계곡은 처음이야. 정말 오길 잘 했어!” 하며 곁에서 걷던 의선이가 점잖게 일갈한다.재화와 절친한 친구인 의선이는 용소골 산행 이야기가 나돌자 “아마, 다음 달까지 못 살지도 모르니 용소골은 꼭 가보고 죽어야겠다.”고 반으름장(?)을 놓더라는 것이었다.그리고는 용소골 답사에 필히 끼워달라고 눈에 불을 켜더라 한다.우리 산우회 멤버도 아닌 그가 얼마나 용소골을 보고 싶었으면 친구를 꼬득여 예까지 왔겠는가! 그런 의선이를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자다가도 산 이야기가 나오면 벌떡 일어난다는 의선. 아무튼 의선이의 산사랑은 그의 장대한 몸집만큼이나 대단했다. 

 

          [물 가운데가 검푸른 먹물을 풀어놓은 듯한 담(潭)을 굽어보며]

 

평평한 너럭바위에 배낭을 부리고 잠시 다리쉼을 한다.다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친구들은“이제 얼마나 남았느냐”며 갈 길을 묻는다.산에서 제일 어리석은 질문 가운데 하나가 바로“하산 지점이 얼마나 남았느냐.”는 물음일 것이다.


산에 들면 느긋하게 그리고 천천히 자연을 음미해야 한다.황급히 설치면 사고의 위험도 높고 또 산행의 참 맛도 놓치는 법이다.그러다가는 그저 앞사람의 뒤꿈치만 쳐다보고 온 셈이니 산에서 서두르는 것은 금물이다.산행이란 제 발로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서 목적지에 이르는 행위다.따라서 남이 속보를 내든 말든 제 스스로의 걸음과 보폭을 지켜나가야 한다.이 리듬이 깨지면 무리하게 되고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산행을 하다보면 이런 원리는 저절로 와 닿는다.산행에 가장 좋은 훈련은 바로 산행 그 자체란 말이 있다.그러므로 산행을 위한 산행이 아니라 산행 그 자체를 즐겨야 한다. 나는 산길의 완급(緩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그저 산 속에 있는 것 그 자체를 즐기는 편이다.어쩌다 일정이 늦어지더라도 나는 우정 고맙게 생각한다.왜냐면 대자연의 품속에 그만큼 더 오래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풀 한 포기,나무 한 그루,돌 하나,바람 한 올,한 줄기의 물 그리고 내 마음 한 자락-우리에겐 음미할 것이 너무나 많다. 어쩌면 우리 몸도 이런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향(反響)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울림이요 떨림이다.메아리처럼 울리고 그 울림을 받는 것이리라.    

 

이런 생각에 잠기면서 계곡을 한 굽이 더 돌아 오른쪽 산길로 붙었다.지난해 이 어름에 다다랐을 땐 커다란 통나무다리가 가로놓여 거기를 지나다 물에 빠지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올해는 그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3시 35분 흰바위를 지나자 오른편으로 지계곡이 나타났다.지계곡 들머리에는 큼지막한 너덜겅이 펼쳐진다.


큰터골 입구다.예전에 이 골짝 안에 수십 채의 민가가 있어 큰터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지금은 덕풍 사람들이 응봉산에 송이나 약초를 따러 다니는 은밀한 길로 골 안에는 길 흔적이 거의 없다.큰터골 입구를 지나자 깊은 담(潭)에 암벽지대가 나타나며 길이 끊긴다.암벽을 타지 않고 물 속을 걷는다면 허리춤까지 빠질 것을 각오해야 하리라.바위지대에는 안전을 위해 밧줄이 새로 설치되어 있었다.민석이는 바위 오름짓을 하면서 몹시 힘들어한다.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다친 손목이 아직 아물지 않은가 보다.평오도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그러나 우리 모두 그 암벽지대를 무사히 통과했다.


일행은 오른쪽 암반을 타고 내려가다 다시 물을 건너뛰었다.계곡은 점점 더 굽이를 하고 협곡으로 변해갔다.그렇지만 경사는 여전히 완만했다.우리는 널따란 암반에 앉아 잠시 다리쉼을 하며 과일을 깎아먹었다.다들 말이 없었다.용소골의 빼어난 경치에 취해서일까? 아니면 용소골을 타고 내려오면서 진이 빠져서일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사실 이런 풍광 속에서 자연미에 취하다보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친구들에게 괜찮으냐고 일일이 확인한 뒤 2용소를 향해 무뎌진 걸음을 옮긴다.


오른쪽 지계곡인 작은터골이 가까워지자 시커먼 소가 기다린다.소를 돌아나가자 등산로는 암반을 가로질러 가파른 둔덕으로 기어오른다.나무줄기를 잡고 허우적거리며 올라서자 다시 암벽지대다.처음부터 물 속을 걸어간다면 아무 문제도 없겠지만 이 암벽지대는 너무 곧추서서 가파르기 짝이 없다.그리고 짙푸른 이끼가 끼어 있어 발을 잘못 디디면 균형을 잃을 것 같았다.

 

험하기는 할망정 밧줄까지 매여 있어 타고 넘을 만했다.모두 다 조심조심 균형을 잡아가며 계곡 가장자리로 내려섰다.그런데 맨 뒤에 처진 평오가 암벽지대를 통과하면서 애를 먹는다.우리는 평오한테 다음 발은 거기를 짚고 또 그 다음 발은 저기에 놓으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그러나 몸이 지친 평오는 오히려 어쩔 줄을 모른다. 평오 나름으로는 발 디딜 곳을 제대로 찾고 있었는데 우리가 밑에서 치올려다보니 위태롭게 보였던 모양이다.할 수없이 나는 잽싸게 바위를 타고 평오가 멈춰선 곳 건너편으로 올라갔다.가까이 가보니 거기서 더 올라가면 바위를 타야 할 지경이었다.평오는 조심스럽게 바위 사위를 더듬어 무사히 우리와 합류했다.짧은 순간의 소란이었지만 산악사고란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침이 없는 법이다. 


물을 건너자 골 오른쪽으로 큰 바위 하나가 정자처럼 그늘을 만들어 놓았다.성대장바위였다.용소골에 진을 쳤다는 구한말의 의병장 성대장의 바위였다.성대장바위를 지나 다시 한번 물을 건너 암반 위에 올라섰다. 아! 물길이 끊기고 앞에 훤해지면서 천둥소리 같은 물소리가 천지를 뒤흔든다.오후 4시 4분, 이윽고 2용소에 닿았다.   

 

11.폭포처럼 곤박질치고 싶은 유혹-2용소

 

          [멀리서 잡은 제2용소 구도-둥근 직폭 물받이는 소름이 돋을 만큼 검푸르다]

 

 2용소는 좌측의 암벽을 타고 내려서야 한다.일단 밧줄을 잡고 암벽 턱으로 내려선 다음 조도(鳥道)같은 에움길을 조심해서 돌아내려야 한다.2용소는 8m쯤 되는 정사각형 모양의 소(沼)로 내리쏟는 직폭도 8m 높이다.직폭 물받이는 타원형의 탕인데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니 탕 안은 소름이 돋을 만큼 검푸른 빛깔을 띄고 있다.폭포 위에서 건너다 뵈는 오른쪽 지계곡이 큰다래지기골인데 그 골 안으로 거슬러 오르면 20미터 폭포가 또 숨어 있다.


2용소의 폭포를 무사히 내려온 뒤 우리들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씻고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쉼 없이 쏟아지는 폭포수를 감상했다.거기엔 우리보다 먼저 온 산객 3명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오늘 용소골 계곡을 내려오면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등산복을 입지 않은 것으로 봐서 산꾼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마을 사람도 아닌 것 같다.

 

말을 건네자 그들은 용소골의 험한 곳에 철 구조물과 밧줄을 설치하기 위해 답사하러온 사람들이었다.1용소의 절벽을 가로지르는 밧줄하며 그 아래 방축소의 철 사다리도 자신들이 설치했다고 한다.“용소골은 자연 그대로가 좋은데,왜 사다리를 놓고 밧줄을 설치하는 거죠?.”“이러다간 용소골도 조만간 유산객(遊山客)들로 북새통을 이루겠네.”남한 땅에서 마지막 남은 비경(秘境)이라는 용소골 훼손을 불을 보듯이 뻔해 슬쩍 던져본 질문이었다.“하긴 그래요. 웬만하면 자연은 그대로 지켜야 하지요.하지만 용소골에서는 해마다 크고 작은 사고가 10여건이나 발생한답니다.작년에도 저 아래 마을의 70대 할아버지가 이 골짝을 오르다가 실족해 돌아가셨어요.사체를 운구할 길이 없어 산 능선을 타고 마을로 옮겠는데 13시간이나 걸렸어요.그러니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하다고 봐요.”  


용소골이 이나마 보존되고 있는 것은 접근이 어렵기 때문일터.그런데 휴양림을 만들고 도로를 넓히기 시작하면 차량이 홍수를 이뤄 1~2년 사이 유원지로 변모해버릴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용소골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대로 두는 것이 최상이다. 밧줄을 놓는다,안전장치를 설치한다 하면 계곡은 만신창이가 된다.그런 시설물을 설치하는 명분이야 사람들을 편하고 안전하게 해준다는데 있지만 사실은 상업적인 저의(底意)가 더 짙게 깔려 있다. 이제 이곳도 황금주의에 물들어 가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제2용소의 직폭을 등지고 앉은 평오,현기,민석]

 

산행이란 본래 길이 끝나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이미 나 있는 등산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 산행의 본질이라는 것이다.이를 서구의 알피니스트들은 등로주의(登路主義)라 하는데 일테면,같은 에베레스트라 하더라도 남들이 오른 루트를 따르는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루트를 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들이야 전문 산꾼도 아니요,더구나 암벽과 빙벽을 타는 알피니스트도 아니지만 좁은 의미의 등로주의는 산행의 깊이와 폭을 넓히는데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아무도 가지 않은 산길을 가보라. 그러면 거기서 전혀 새로운 세계와 자아(自我)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12.요강소를 지나 용소골 최고의 비경(秘境)-1용소


애당초 계획보다 2시간 가량 산행이 지체되었다.더는 2용소에 머물 시간이 없다.서둘러 1용소로 떠난다.간간이 산판길의 흔적이 나타났다.일제는 이 험난한 계곡에 산판길을 내고 많은 나무들을 베어 내갔다고 한다.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이따금 레일조각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구불텅대며 휘어지는 골짜기는 햇살을 받아 은빛물결이 번진다.그 물결이 암반을 타고 흐르다가 샛고랑을 이루기도 하고 더러는 크고 작은 너울을 만들기도 한다.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걷다보니 잠이 쏟아져 눈앞이 아른거린다.새벽잠을 설친 여진(餘震)이 이제야 몸 속에 녹아드나 보다.나 혼자라면 너른 암반에 벌렁 누워 한바탕 늘어지게 잤을 텐데...그러나 우린 아직도 가야할 길이 남아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콸콸 쏟아지는 빠른 물살에 얼굴을 씻어 잠을 내쫓는다.              


2용소에서 20분쯤 내려오자 용소보다는 작지만 둥그렇게 패인 소가 눈에 띈다.요강소다.예전에는 이 소가 정말 요강처럼 둥글기만 했다고 한다.오른편으로 산판길의 흔적이 또 나타났다.암반 위를 흘러가는 물을 두 번 건너 마지막으로 왼쪽 물을 건너갔다.4시 40분,마침내 용소골 최고의 비경이라는 1용소에 다다랐다. 

 

[3용소 품은 용소골의 첫 번째 용소.바위벽으로 막힌 정면이 남향이어서 하지 무렵 며칠만 빛이 든다.오른쪽 벼랑을 깎아내지 않았다면 지나갈 수 없는 막장이다.올려다보면 대롱 속 하늘보기이다.]  

 

아슬아슬한 벼랑을 딛고 서서 용소를 굽어본다.20미터 지름의 반달형 소와 4미터 짜리 폭포가 길을 막았다.바위벽으로 막힌 정면이 남향이어서 하지 무렵 며칠만 빛이 드는 먹물빛 깊이다.예전 기우제가 행해졌다는 용소.그 시꺼먼 심연(深淵)에 용이라도 숨어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한 번 빠지면 살아나지 못할 소.더 나아갈 데 없는 막장이다.그렇지만 왼쪽 절벽에 아슬아슬한 벼룻길이 보일 듯 말 듯 걸려있다.손 연장으로 벼랑을 깎아 잔도(棧道)로 만들었던 산판길의 자취다.그것 없었다면 감히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을 터다. 

 

[손 연장으로 벼랑 깎아 만든 벼룻길-밧줄을 타고 내려서야 한다.아니면 물속에 풍덩하던지.] 

 

바위벽 중간에는 하켄을 박고 슬링까지 걸어 밧줄을 가로질렀다.내려갈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고 오금이 저렸다.우리는 차례대로 밧줄을 부여잡고 바위벽 벼룻길을 조심조심 돌아 내린다.밧줄을 잡고 벼랑을 돌아서다 하늘을 본다.치올려다보는 하늘은 꼭 용소만한 크기,마치‘대롱 속 하늘보기’다.


벼랑 끄트머리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슬링도 없이 느슨해진 밧줄을 타고 내려오던 재화가 균형을 잃더니 물 속에 텀벙 빠졌다.이어 현기도,멀쩡하던 금구도,현영이도 차례로 물 속에 풍덩 빠지고 만다.예까지 잘 왔는데 마지막 코스에서 하뿔사! 물 속에 빠지고 말았으니 본인들도 겸연쩍게 웃었고 우리들도 덩달아 웃음꽃을 피웠다.


물 이랑이 나우리쳐 오는 용소 가장자리,바위에 걸터앉아 마지막 휴식을 취했다.이제 덕풍마을까지는 한 마장 더 발품을 팔아야 한다.응봉산 정수리에서 덕풍의 이반장댁에 전화를 넣어 놓았지만 워낙은 2시간이나 늦었으니 느긋하게 즐길 여유가 없었다. 친구들에게 천천히 오라는 말을 남기고 나는 배낭을 짊어졌다.


오후 4시 55분. 아주 빠른 속도로 1용소를 빠져 나왔다.늘 그러하듯,나는 마지막 구간을 달려야 직성이 풀린다.5분쯤 정신 없이 내달으니 용소골의 마지막 난관인 방축소가 보였다.작년에는 없던 철난간이 놓였다.사람의 편리를 위해 이곳도 서서히 그 때가 묻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방축소는 둥근 담이 목욕을 해도 될 정도로 넓고 넓다. 방축소를 지나자 계곡은 90도 서쪽으로 물꼬를 튼다.용소골 들머리에 이르자 골 안은 점점 더 헤벌어진다. 드디어 농로가 나오면서 덕풍마을이다.풍곡에서 시오리쯤 들어간 덕풍,거기서 다시 이십리 용소골,한마디로 그것은 신의 괭이로 판 샛고랑이다.하여 셀 수 없이 많은 폭포의 너울을 펼치고 있었다.


13.덕풍마을 그리고 풍곡(豊谷)


5시 5분 이희철 반장집에 닿았다.박재만 기사가 초조하게 기다리다 반갑게 맞는다. 팔각정에 배낭을 내려놓고 용소골과 문지골의 두물머리로 달려갔다.불같은 내 성미가 날 그냥 둘까.익숙한 솜씨로 옷을 벗기더니 차가운 물 속으로 밀어 넣는다.해거름의 계곡 물은 이빨이 떨릴 정도로 시렸다. 땀으로 쩌들고 더워진 몸을 씻어내니 날아갈 듯 가볍다.이 반장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30분이 흘렀다.웬일일까? 벌써 도착할 시간인데,왜 이리 늦는단 말인가.혹시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닐까? 작년의 기막힌 해프닝이 생각나서 용소골 들머리까지 나가보았다.땅거미가 내린다.사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일행이 들이닥친다.발걸음이 자꾸 느려져 어쩔 수 없었다는데야 할 말이 없었다.아무렴,그럼 그렇지.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축복이었다. 안도의 기쁨으로 앙가슴을 쓸어 내린다.


하루 종일 산행을 통해 몸도 마음도 건강함이 준 뿌듯함으로 꽉 찼는데도 왜 이렇게 허전해올까.저녁의 이미지 때문일까.문지골 두물머리의 그 시린 물살 때문일까.저녁은 이상하다.갑자기 외로움에 빠진다.저녁은 사람들에게 원초적인 외로움을 타게 하는 그 무엇이 있나 보다.그 놈의 외로움에 한번 걸려들었다 하면 도시 미치지 않을 수 없다.출출한 생각에 소주가 간절하리다.

 

우리는 팔각정에 둘러앉아 닭백숙으로 출출함을 달래고 소주로 외로움을 삼켰다.이 반장이 따온 송이의 그윽한 향기에 취해 연신 건배를 외쳤다.술자리를 물리고 밖으로 나왔다.「풍곡」주차장으로 나가기 위해 이 반장의 세렉스 뒤칸에 몸을 실었다.이 반장네도 도시물이 들었는지 지난해의 소박한 인심은 아니었다.씁쓸했다.게다가 젠장! 덕풍계곡 답사는 이번에도 물 건너가고 말았구나!.그러나 야박하고 황량한 것은 인심이지 자연이 아니다.시원한 바람과 풀벌레 울음소리,찍소의‘쏴아’하는 물소리에 머리가 울린다.머리 위에는 보석처럼 영롱한 별 그리고 적막한 어둠이 거기 있었다.

 

14.에필로그

        -산을 보고 물을 보고, 그리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


걷는 것만큼 사람을 경건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길을 걸음으로써 사람은 비로소 삶의 바른 길을 찾게 된다.오늘 우리의 삶이 혼돈으로 점철되고 있는 것은 길을 걷지 않음에서 오는 자연의 형벌이다.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차들이 종횡무진 하는 길이 아닌 진정 사람이 주인인 길,우리는 그런 길을 헤쳐 나왔다. 이십 리 용소골의 길 없는 길을!


친구들이여,우리가 밟은 그 길을 이제 잊어버리자.또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하여! 그리하여 올곧은 선비,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지리산 유람을 통해“산을 보고 물을 보고,그리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고 말한 것처럼.



2000년 10월 초순의 산행노트를 다시 고쳐 적다.

2006년 12월 27일

[디카가 없던 시절이라 사진이 부족하고 미려하지 못한 점 양해바랍니다.] 

청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