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산-단지봉-가야산 종주
[가야산에 여명이 들기 직전 두리봉에서 본 일출]
1.들어가면서
[6년 전의 해묵은 산행기인 이 글은 블로그 이웃인 이쁜아줌마님이 올린 흰대미산-양각산-수도산 종주기를 읽은데 고무되어 묵혀두었던 글과 사진을 꺼내 쓰게 되었습니다.하지만 그때 찍은 사진이 턱없이 모자라 이쁜아줌마님의 호의에 힘 입어 사진을 곁들이게 되니,비로소 산행기가 자리잡았습니다.이 기회를 빌어 이쁜아줌마님께 심심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지난해 9월 4~5일 삼척 용소골 기획산행에 이어 올 정월 29~30일에는 심설산행을 겸한 수도-가야산 종주산행를 마련했다.경상도 서부를 남북으로 가르는 산줄기,수도-가야산 능선은 경북 김천시와 성주군,경남 거창군과 합천군을 아우르며 1,000m급이 넘는 연봉들이 장장 24km에 걸쳐 나우리치고 있다.
이 장거리 종주는 수도산에서 가야산으로 가는 것과 반대로 가야산에서 수도산으로 오는 두 가지 방법이 있지만 조선 8경의 하나요,영산(靈山)인 가야산을 바라보며 가는 길이 좋다.수도산 쪽으로 하산할라치면 달리 귀환차편이 마뜩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중의 하나일 터이다.그래서 수도리 마을에서 1박을 하고 이른 새벽부터 산행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안내산악회에서는 무박산행이라 하여 새벽 2시쯤 수도리에 도착,차 속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곧장 새벽산행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산행시간만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코스인지라 하산지점인「해인사」나「백운동」에는 늦어도 4시안으로는 가 닿아야 부산으로 돌아오는 차편이 수월하다.행여 산행시간이 늦어져서 제때 가야산에 오르지 못할 경우에는 중간 탈출지점을 확인해둬야 실수가 없을 것이다.
장쾌하기로 이름난 이 능선에 봄이 오면 살아 꿈틀거리는 푸른 초원이 되다가 가을이면 억새천국으로 바뀐다.또 겨울이면 천상으로 오르는 하얀 구름다리로 변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색다른 감흥을 안겨준다.그리고 가야산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가면서 즐기는 조망은 덕유산의 그것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다. 거창의 아름다운 산들은 물론이요 구미의 금오산,대구의 팔공산까지 물결쳐오고 덕유 연봉과 지리산이 아스라한 산그리매를 세우는 한가운데 서 있게 되니 하산하고픈 마음이 싹 가셔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좌일곡령 넘어 목통재에 이르면 지금은 가고 없는 독문학자 조필대의 말이 아니더라도 거기에 텐트를 치고 유독 그 풍정에 빠져들고 싶어지는 것이다.그것도 한 겨울 찬바람 몰아치는 목통재의 그 적막경에 한 사나흘 빠져들고 볼일이다. 나로서는 이미 봄,여름 그리고 가을철에 종주를 한 적이 있기에 이번 겨울 종주산행은 그만큼 흥분과 그리움이 더했다.
2.수도산 아랫마을-수도리를 찾아서
별빛 내리 쏟아지는 청정마을 수도리
이 뜻깊은 산행에는 마산의 김현기,최민석 부산의 김황세,손원조,이인백,이재화,조현영,정익주,최금구 부부와 나까지 11명이 종주팀을 이뤘다.부산 동기들은 김천까지 열차로 온 다음,김천서 거창행 시외버스를 타고 저녁 9시 대덕에 닿아 거기「추풍령식당」에서 허기를 채웠다.
여기서 수도산을 찾는 이들을 막아서는 것은 가랫재이다.세칭 아흔아홉고개라 불리는 험한 가마목재(釜項峴) 다음으로 이 가랫재가 뚫려 교통편이 조금은 나아졌다고는 하나 김천에서 성주로 달리는 지방버스도 여기 청암사 아래 증산면 평촌을 거쳐 갈 뿐이다.그래서 수도리 마을에 닿으려면 그 청암사 아래 장평마을에서 남쪽으로 뻗어 오르는 길을 더 밟아나가야 한다.자갈돌이 근 15리에 걸쳐 깔려 있어 소담스럽던 예전의 개울길-지금은 시멘트 포장길을 얼마 안 가다보면 조선조 때 이웃 성주 출신의 선비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은거했다는 무흘서재(武屹書齋)가 나타나고,더 더터올라가면 왼쪽 길 아래로 천둥소리 같은 물소리가 울리니 거기가 이른바 용솟골이다.수도산 남동쪽 비알을 흘러내리는 물은 물론 그 건너 산들의 물까지 외통수로 쏟아 붓는 여기 골짜기 안에, 아래 위 폭포가 두 개씩이나 떨어지고 그 어간에 고인 시퍼런 늪이 그것이다.용소를 지나면 아스팔트 도로가 서쪽으로 꺾여지면서 금세 왼쪽에 몇 채 안 되는 수도리마을에 이른다.
[수도산 남동쪽 고샅을 적시는 용솟골 계류]
그러나 이 수려한 수도계곡을 한밤중에 찾은 우리는 필시 정구의 무흘서재도,용소폭포의 장관도 보지 못할 것이니 밝은 날 답사일정을 그대들의 몫으로 남겨놓을 따름이다.여기서 내친걸음이라면 가야산 북쪽 자락을 휘감아 도는 대가천(大伽倻川)따라 고령,성주 그리고 증산으로 이어지는 25km의 지방도로(997번 도로와 30번 국도)로 스며들어 평촌,수도리로 드라이브를 즐겨볼 일이다.경상도 서부지역에 이만한 풍광이 내비치는 곳도 흔치 않을 것이라.깎아지른 가야산 자락의 협곡을 굽어 도는 연변엔 이름난 명소가 즐비하여 며칠 세상 모르고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리라.
[용소폭포/출처:가고파 플래닛]
저녁 식사를 들고 일행은「그린다방」김종출 사장의 갤로퍼로 저 험준하면서도 컴컴한 가랫재를 넘고 평촌리 장평에서 다시 차를 돌려 10시 30분,수도리 마을에 닿았다.한 여름에도 더위가 가신다는 해발 700m의 수도리 마을에 내리자 날씨는 뜻밖에도 포근했다.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본 순간, 주먹만한 별들이 찬란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니 그건 마치 용소골 덕풍마을에서 본 바로 그 하늘, 그 별빛이었다.우리는 전혀 딴 세계에 온 듯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아! 우리가 빛나는 별들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 빛나는 별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일까.”그 풍광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우리는 한동안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정말이지 오길 잘했구나 하는 느낌은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처음 잠자리를 예약했던 마을 들머리,조성목씨 집은 난방이 시원찮아 윗마을 김종태씨의 대평민박으로 자리를 옮겼다.마산의 민석이와 현기는 민석이의 승용차로 와 먼저 온 자의 느긋함을 즐기고 있었다.일주일 전,천성산 시산제 때 마산에서 득달같이 달려와 함께 한 친구들이지만 그래도 우정 반가웠다.
민박집을 통째로 빌린 우리 일행 앞에는 천연덕스럽게 술판이 벌어졌다.자정이 가까워질 무렵,“12시가 되면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재화의 경구와 함께 술자리를 파하고 잠을 청했다.하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산행에 대한 기대와 기쁨 그리고 북받쳐오르는 그리움에 선뜻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늘상 그러하듯 나는 내일의 산행코스를 이미지 트레이닝하고 있었다.산행은 발로 하되 머리로 가슴으로 하라는 말처럼 수도-가야산의 능선을 마음속으로 더터나가고 있다.
[너그러운 산세에 터잡은 수도암/출처;청암사 홈피]
3.수도암으로 오르며
새벽 4시,잠자리에서 일어났다.엊저녁 서로 짐을 나눠 배낭 무게를 조절하였다고는 하나 그래도 다시 한번 점검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나는 6리터들이 물백을 배낭에 넣은 뒤,「크램폰(아이젠)」과「스패츠(행전)」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4시 30분-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기쁨과 두려움이 함께 밀려온다.그렇다면 가야산까지는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두억사니처럼 몰려온다.하지만 이미 내친 걸음을 어찌하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면 되리라.산 속에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좋은 법.딱히 어디까지 가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랜턴을 켜들고 마을 고쟁이로 난 가파른 포장도로를 따라 수도암으로 치오른다. 길 양 켠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전나무와 장송이 흡사 금강역사인양 버티고 서 있어 가뜩이나 가쁜 숨길을 도래질한다.눈발은 차츰 굵어지면서 골바람을 타고 흩날린다.올 들어 처음으로 눈 세례를 맞으며 걷는 산행이 결코 싫지는 않았다.25분쯤 다리품을 팔아 5시, 요사채에 걸린 불빛이 환한 수도암에 다다랐다.
우리들은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가쁜 숨길을 가다듬었다.이어 묵직한 배낭 무게에 짓눌린 어깨를 풀고 이마에 솟은 땀방울을 훔쳤다.
4.어둠에 묻힌 수도암에서‘밝은 날의 수도암’을 생각한다.
도선국사가 감탄한 명당터의 수도도량
수도암(修道庵)은 도선국사가 저 아래 평촌의 청암사(靑巖寺)와 함께 6.25때 불타 없어진 쌍계사(雙溪寺)를 일군 이듬해인 신라 헌강왕 3년(859)에 지은 절이라고들 알고 있다. 청암사가 수도산의 600m 중턱에 걸쳐 있는데 비해 수도암은 정상 근처(1,080m)에 들어앉아 있어,속기(俗氣)를 떨쳐 내고 용맹정진을 다지는 이라면 오히려 이 절을 윗절로 칠 만하다.
그렇잖아도 도선국사는 청암사 건립의 대역사를 끝내고 나서 스스로의 수행터로서 암자를 하나 지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시간 나는 대로 이곳저곳을 물색하던 중 우연히 이곳까지 왔었다고 한다.그 터를 중심으로 정면에서 바라보면 뒤에는 수도산이 멀찍이 내려다보고 있고 툭 트인 오른쪽으로는 단지봉이 어디 가린 데 없이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이 그만이었다.거기다 아주 더 멀리 가야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준령이며 그 바위들이 내뿜는 신령스런 기운이 사철 그 터를 에워싸고 있는 게 도선 국사의 마음을 한순간에 끌어당겨 놓아줄 줄 몰랐다.주변을 에돌아 감싸는 개울과 계곡도 한껏 신비경을 더욱더 보태주었다.그때의 그 기쁨과 흐뭇함이 어떠했던지 대사는 7일 동안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지냈다는 말이 근동사람들의 입을 통해 아직도 전해온다.
[눈 덮인 수도암의 3층석탑과 석등]
수도암은 근자에 사세(寺勢)가 커지면서 수도사(修道寺)로 불리기도 하니, 거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흔히 수도암의 큰절이라 알려지고 있는 청암사에는 문화재랬자 고작,1912년에 대운 병택(大雲 丙澤) 스님이 중건한 대웅전(경북 문화재 자료 제120호)과 이 역시 근년에 세워진 다층석탑(동,제 296호) 정도뿐이지만, 여기 수도암에는 약광전(藥光殿) 석불좌상(보물 제688호)을 비롯하여,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보물 제307호)에 또 뜨락의 쌍3층석탑(보물 제297호)까지 합하여 보물급이 모두 3점이나 되기 때문이다.
정상과 가까운 높이에 올라앉아 있을뿐더러, 경내만 해도 청암사의 그 조밀한 품에 비하여 훨씬 넉넉해 보인다. 절 둘레에는 또 온통 아름드리 전나무와 장송이 하늘을 찌르고 서 있는 널따란 마당가에 샘물까지 풍성하여, 스님네들 말대로 여기가 그대로 옥녀직금(玉女織錦)의 명당터라 한다는 것이다.
대적광전 마당에 서면
한 떨기 연꽃으로 얼비치는 가야산
이만한 깊이에 들앉아 있으면서도 후미지기는커녕 오히려 정갈하고,그만한 높이에 올라앉았으면서도 뽐내는 구석이 없어 상냥하고 또 명랑하다.요사채가 놓인 아랫마당에서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있는 윗마당으로 돌층계를 밟고 올라,수도산 정수리의 목덜미 아래 앞이 탁 트이는 마당가에 서서 쳐다보면, 저 멀리 가야산이 한 떨기 연꽃으로 얼비친다.
스님네들은 그 모습을 두고,철따라 빛깔을 달리하는 연꽃이라 이르니,봄에 황련(黃蓮)이요 여름에 청련(靑蓮),가을에 홍련(紅蓮) 그리고 겨울에는 눈이 덮인 백련(白蓮)이라 한다.그 가야산으로는 여기서 해 안에 가 닿을 수 있다고도 한다.새벽에 길을 나서서,절 아래 용솟골을 거슬러 목통재 너머 또 한 고개 개금재만 넘어서면 거뜬히 해인사 저녁공양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적광전의 석조비로자나불]
대적광전 부처님인 비로자나불은 높이만 해도 2백51cm나 되는데,거기 받침대 높이가 또 1백 19cm,하여 도합 4m에 가까우니,합장하고 서서 우르러도 고개가 치켜질 판이다.지권인(智拳印)을 한 모습이라 쉽게 비로자나불임을 알 수 있지만,연대는 대강 9세기 전반의 작품이라 한다. 황악산 직지사의 그것과 함께 한 날 한 시에 발광(發光)하여 그 영험함에 기대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같은 시기의 것으로 또 마당가에 쌍탑으로 서 있는 3층석탑이 아름답다.
산사라면 으레 심산유곡에 갇힌 그 놓임새로 하여,대개는 호젓하기는 할망정 어둑한 느낌부터 앞서는데,여기 수도암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이 오히려 활달하고 쾌활하다.앞뒤로 깎아지른 암벽이 막아서기는커녕 너그럽게 기운 산비탈에 넌저시 의지하여 남향해 앉아 우리네 마음에 불심(佛心)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3층석탑 곁에 서서-카메라에 잡힌 눈송이가 이채롭다.]
5.수도산으로 오르며
하지만 어쩌랴. 어둠에 갇혀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니 어찌하랴.새벽 산사(山寺)는 적막경이었다.적막해서 바람 소리,눈 밟히는 소리가 더 크게 가슴을 울릴 뿐이다. 요사채 아랫마당에서 돌계단을 딛고 윗마당으로 올라선다.거기의 대적광전과 삼층석탑에 잠시 합장하고 오른쪽 한산교를 건너 산길로 접어드니 가파른 산비알이 가로막는다. 북서쪽의 그 가풀막진 산비알을 더터오르다보니 눈은 발목 깊이까지 빠져들고 미끄럽기는 한량이 없었다.
5시 25분,청암사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는 곳(1,170m),거기의 소나무 근처에서 다리를 풀고,크램폰과 스패츠를 비끌어맨다.친구들 태반이 처음 해보는 심설(深雪)산행인지라 장비를 다루는데 20분이 훌쩍 지나갔다.
크램폰을 채우고 나니 걸음짓이 한결 수월하다.때맞춰 길도 순탄해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됐다.산죽밭을 지나 수도암으로 내려서는 잘루목(1,120m)에 다다른다.여기서부터 산길은 오던 그대로 남서쪽으로 완만하게 열리지만 장단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은 하냥 걸음걸이를 붙잡는다.
산행에 좋은 계절이 따로 있으랴만 나는 겨울 산행이 좋다. 눈 덮인 겨울 산, 찬바람 몰아치는 그 정수리에 오르기를 좋아한다.‘산란하던 정신이 한 순간에 번쩍 트이는’황량한 겨울 산을 나는 사랑한다.삭막하고 살벌한 것은 우리네 인심이지 자연이 아니다.자연은 황량하여 오히려 더 인심을 가꾸어 주는 것이다.그대 삶에 지치고 외로울 땐 겨울 산을 찾아보아라.그리하여 정녕 순백의 세계에 갇혀볼 일이다.
허위단심 눈을 헤치며 오른다. 해묵은 눈 위에 요 며칠 새 내린 눈이 산등길을 덮어 여간 미끄럽지가 않다.친구들은 희뿌연 입김을 연신 토해내고 있었다. 랜턴 불빛이 눈 위를 스칠 때마다 하얀 눈이 은시루처럼 반사되어 황홀하다.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심설산행이 주는 고통이자 기쁨일 것이다.금구 아지매는 저번 용소골 산행 때처럼 내 뒤를 바짝 따랐고 이어 재화와 황세,인백이가 선두그룹을 이뤘다.중간에는 익주와 민석이 원조가,후미에는 늘 그러하듯 금구,현기가 현영이와 한 조를 이뤄 올라오고 있다.
우리는 대자연이 연출하는 장엄하면서도 스산한 광경에 아무 말도 못하고 수도산을 향해 묵묵히 더듬어 오르고 있었다.
7시,수도산 앞 암봉(1,300m)에 올라섰다.칼바람이 불어온다.세상은 온통 모노톤.피사체는 검고 칙칙한 어둠과 희끄무레한 눈의 연속이다. 단지봉과 가야산은 잿빛 속으로 숨어버렸다.우리가 보는 것은 60년대의 어느 구석진 영화관에서 돌아가는 낡은 필름이다.그러다 정지화상처럼 멈춰서버리면 일순 어둠의 세계다.우리네 삶은 잠깐동안의 그 어둠도 차마 견디기 어려운 일,빛이 있어야 한다.오오! 우유빛 같이 따스하고 밝은 빛이여! 환한 대낮의 광채여!
암봉을 지나 이윽고 수도산 고스락(1,316.8m)에 다다랐다.돌탑이 서 있는 수도산 꼭대기에는 매서운 바람이 화살처럼 몰아친다.
6.수도산에 올라
묘묘한 안개속,여린 듯 너그럽고 신선한 산세
수도산(修道山)이란 산 이름은 물론 이 산 정수리 아래 기대앉은 수도암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초월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도 않고 완성된 것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여태 수행중인 사미승을 방불케하는 여리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안겨준다. 물론 산세도 거기 따라 요란스레 기암괴석이 널어서기는커녕 밋밋한 육산으로 너그러울뿐더러, 가파르게 치솟아 험악함이라고는 없는, 그저 숭글숭글한 인상이다. 그렇다고 이 산이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다. 높이가 우선 1,316.8m나 되어 국내에서도 중급을 넘는데다가 그 놓임새마저 한반도의 오장육부를 헤집고 들어앉은 덕유산과 가야산의 어간에 파묻혔으니, 그만큼 외지다 뿐 아니라 덩달아 또 속이 가멸차다.
정상에 올라서보면,사방으로 시야가 활짝 트인 가운데, 단지봉(1,326.7m)이 동남쪽으로 지척간에 놓이고,거기서 활개를 펴드는 산줄기 동쪽에 두리봉(1,134.4m)과 가야산(1,430m)이 가지런히 손짓을 한다. 남쪽으로는 양각산(兩角山 1,120m)과 흰대미산(1,018m) 산줄기가 거창으로 나우리친다. 다시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추풍령보다 더 높은 쇠머리재(牛頭嶺 587m)를 딛고,삼봉산(1,264m)과 대덕산(1,209m) 너머 덕유의 연봉이 남북으로 길게 나우리친다. 뿐인가. 북쪽으로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는 그 삼도봉(1,176m) 산줄기가 여기까지 휘감겼으니 돌아다보면 묘묘한 안개 속, 과시 한반도의 깊은 그 고쟁이 속을 헤쳐든 느낌이다.
[수도산 오름길에 바라본 가야산(중)과 단지봉(우)/출처:이쁜아줌마]
[수도산에서 바라본 단지봉 일원/출처:이쁜아줌마]
[수도산 북동쪽-왼쪽으로 가랫재,그 너머가 김천 지례면이다/출처;이쁜아줌마]
[수도산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백설의 덕유연봉/출처:이쁜아줌마]
[수도산 서쪽의 덕유산와 백두대간/출처:이쁜아줌마]
7.단지봉 가는 길
-누룽지와 커피로 아침을 때우고
고스락에서 뛰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킨다. 그리고 한 잔의 물로 갈증을 다스린다. 찬기운 때문에 수도산 꼭대기에 더는 서 있지 못하겠다.사진을 찍은 뒤 곧장 하산에 들어간다.7시 15분,정수리에서 무심코 왼쪽 암장 아래로 내려갔다.조금 내려가다 이상하다 싶어 방위를 확인하니 남동쪽이 아닌 남서쪽이 아닌가.‘아차’싶어 정수리로 다시 올라 정수리 앞 암봉(1,300m)으로 되돌아 왔다.세 번이나 찾은 수도산이지만 깜박할 사이에 엉뚱한 길로 들어섰으니 내 잘못이었다.우리는 암봉 오른편 허리를 타고 내려가다 산날등에 올라섰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단지봉까지는 동남쪽 산등을 타고 가야 한다.하늘에는 여전히 구름이 덮여 있지만 사위는 조금씩 어둠을 살라먹고 있었다. 이제 랜턴을 배낭에 접어 넣을 만큼 밝아오고 있다.
7시 30분,오른쪽 불석,심방마을로 빠지는 갈림길(1,070m)에 다다랐다.안내표지판에는 수도산 1,2km,가북면 심방 3.5km라는 이정표가 적혀 있다.이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내려서면 수도리.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 산등의 눈은 더욱 깊다.맨 앞에서 눈을 헤치며「러셀」을 하다보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그래도 며칠 전 먼저 간 이들의 오롯한 발자국이 적잖이 도움이 되었다. 40분쯤 지나자 가북면 수재,심방마을로 내려가는 두 번째 갈림길인「바른재」에 다다랐다.종주길은 굴곡이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으나 배낭 속의 6리터들이 물백의 무게는 걸음짓을 더디게 했다.굴참나무에 싸리와 억새가 뒤섞인 나지막한 봉우리 두 개를 넘었다.
길은 외줄기,헷갈릴 염려야 없지만 때로는 잡목숲이 우거져 여름철 산행에는 고생깨나 할 것 같다.한 30분 가량 다리품을 팔자 제법 널찍한 억새밭(1,070m)이 나타났다. 9시. 눈발도 서서히 잦아들고 아침 햇살도 조금씩 내비치기 시작했다.우리는 여기 억새밭에서 아침을 들기로 했다. 눈이 없는 곳에 배낭을 내려놓고 아침밥을 짓는다.
[ 흰 눈 그리고 황금빛 억새.꿈결같이 신비로운 길을 걸어가는 친구들.
누가 꿈꾸기(Dreaming)와 꿈꾸는 자(Dreamer)를 구분하리요.]
현영이와 내 버너에 불을 지피고 포장용 누룽지를 넣어 숭늉을 만들었다. 일행은 구수한 숭늉을 들며 허기를 면했다.누룽지로 아침을 때운 다음,현영이가 끓여 내놓은 구수한 ‘된장 커피’를 마셨다. 뜨끈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니 속이 엄청 부드럽다. 9시 45분, 행장을 챙겨 우리는 단지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가서 왼편 수도리로 빠지는 갈림길이 나왔다. 하지만 그 갈림김에는 눈이 엄청 채여 길인지 아닌지 분간키 어려울 정도였다.
이윽고 시나브로 구름이 벗겨지면서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침을 먹은 데다 햇빛마저 드니 추위에 움츠려들었던 몸이 눈 녹듯이 풀린다. 그렇지만 단지봉 의 북동릉인 이 산등에 쌓인 눈은 오히려 깊이를 더해갔다. 10시 20분께가 되자 오른쪽 고비마을에서 은점골을 타고 오르는「작은재(1,170m)」를 만났다.
[은점골 갈림목으로 가며 눈밭에서 포즈를 잡은 정익주]
이 갈림길에서 단지봉(1,326m)까지는 표고 150미터를 톺아올라야 한다. 오늘 산행중의 클라이맥스로 가장 힘든 구간이 틀림없을 것이리라. 나는 친구들에게 “대단히 가파른 구간이니 힘을 적절히 안배하라”고 일렀다. 은점골 갈림길에서 단지봉에 이르는 이 40분간의 고통스러운 역투는 아마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눈은 무릎까지 빠지고 가풀막진 비알은 크램폰을 차고서도 어찌나 미끄럽던지 상상을 초월했다. 한 발짝 오르고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또 가쁜 숨을 고르고.... 이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힘들면 내가 앞에 설까?”라며 재화가 거든다. “아냐. 거진 다 왔어. 조금만 가면 돼.” 라며 나는 재화의 권유를 뿌리쳤다. 오른쪽 고비마을로 빠지는「큰재」를 지나 11시, 드디어 백설로 빛나는 단지봉에 올라섰다.
8.다시 단지봉(丹芝峰)을 생각하며
수도산 일몰과 가야산 일출의 황홀경
정상 초원에서 막영하며 즐기기
전국의 산 가운데서 아마 단지봉만큼 정상부가 널따란 평원을 이룬 산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웅장한 봉우리 꼭대기에 널따랗게 펼쳐진 평원은 봄부터 여름까지는 푸른 초목과 야생화로 덮여 있고, 가을이면 억새가 서걱거리며 시정(詩情)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곳이기도 하다.
[단지봉에서 가야산을 등지고]
[단지봉에서 수도산을 등지고]
거창 산꾼들이‘민봉’이라 부르는 단지봉은 수도산과 가야산의 유명세에 밀려 그 산세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한 채 늘 두 산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단지봉은 두 산에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고 웅장한 산세를 지니고 있다. 높이 면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히 정상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들은 단지봉의 산세를 한껏 뽐내고 있다. 그래서 늦여름이나 초가을 초원 능선에서 하룻밤 지내기에 제격인 산이다. 푸른 기운이 감도는 단지봉 정수리에 텐트를 치고 수도산 일몰과 아침 가야산 일출을 보라. 특히 어스름 날이 밝아오면서 층을 이룬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아침해는 그 어느 산에서 바라보는 일출보다도 뛰어난 황홀경을 연출한다.
뿐인가.지는 해와 장엄한 저녁놀과 밤하늘의 신비한 풍경은 말로 형언키 어려울 것이다.수많은 별들이 보석을 박아놓은 듯 반짝이고,풀벌레들이 나지막이 울어대며 서늘한 바람이라도 몰아치기라도 하면 분위기는 절정에 이른다.멋진 텐트를 쳐놓고도 텐트를 버리고 밖에 나와 잘 수밖에 없는 분위기인 것이다.
단지를 엎어놓은 듯하다 해서 단지봉이라 붙여진 이름만큼이나 정수리는 펑퍼짐하고 포근하다. 단지봉 정상은 몇 해까지 만해도 억새 일색이었지만, 지금은 싸리나무와 잡목이 억새와 뒤섞인 채 광활한 평원을 이루고 있다.그래서 나무든 풀이든 허리께 이상 자라지 못할 정도로 늘 바람이 몰아치는 곳이다.
9.단지봉에서 좌일곡령으로
오,가야산! 하늘로 치솟은‘마법의 성’이여
흰빛 기운이 감도는 단지봉 정수리에 올라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나는 할 말을 잊었다. 하얀 ‘마법의 성’처럼 하늘로 솟구친 가야산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철옹성, 돌불꽃(石火星)을 피워 올린 가야산. 이제까지의 산행이 부드러움의 연속이었다면 지금부터 산행은 난해하고 견고함의 연속일 터. 맨 주먹으로 구름장을 깨듯 정진해야 하는 두타행(頭陀行)이다. 그건 출렁이는 바다가 일순 고요해지며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경지에 드는 일이다.
운평선(雲平線) 너머 거친 바다 속 해인을 찾으러 가는 구도자의 길이리라. 그렇다. 가야산은 쉽게 허락하는 산이 아니다.소뿔처럼 단단해서 잡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다.가야산의 별칭,우두산(牛頭山)이 암시하듯 상왕봉이 머리라면 그 아래 바위샘,우비정(牛鼻井)은 코에 해당한다.그대여! 오늘 가야산을 향해 가며 선(禪)의 바다에 빠져볼 일이다.
[마법의 성인가? 한 떨기 연꽃인가? 가야산이 성채같다.]
그렇게 넋을 잃고 가야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현기와 금구, 현영이가 정수리 헬기장으로 힘겹게 올라선다. 고개를 돌리니 흰 눈으로 단장한 수도산과 그 너머로 장쾌한 덕유 연봉, 그리고 대덕산이 하얀 얼음산처럼 장엄하게 치솟아 있다. 그리고 수도산 정수리 아래 턱, 숲에 파묻힌 수도암과 그 아래 수도마을에서 수도암으로 오르는 하얀 길이 눈에 선연하다.우리 일행은 주변 조망을 끝내고 사진을 찍었다. 11시 10분.건너편 북동쪽에 솟은 좌일곡령(1,257.6m)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8시쯤 단지봉에 도착하게 될 거리지만 적설량 때문에 무려 3시간이나 지체되었다. 새벽에 염려한 대로 가야산까지는 아무래도 무리일 듯하다. 속보로 걷더라도 잘 하면 목통재(木桶嶺)까지가 고작일 것이다.
단지봉에서 좌일곡령 잘루목으로 내려서는 산등성이에는 예의 그 작달막한 싸리와 억새,그리고 간간이 소나무가 뒤섞여 있었다. 제법 가파른 구간도 있었으며 눈도 엄청 깊이 쌓여 있었다.그렇지만 하산길은 비교적 완만하게 잘루목(1,240m)까지 이어졌다. 단지봉에서 잘루목까지 치내려오는데 40분쯤 걸렸다. 우리는 좌일곡령 암봉을 넘지 않고 산허리길을 따라 갔다. 이편 산허리는 양지쪽이어서 인지 눈이 많이 녹아 있었다. 바람이 안 불고 햇볕 잠풍한 데를 골라 점심을 지어먹기로 했다.
12시를 조금 넘어섰다.새벽녘부터 산행한 시간만 줄잡아 7시간.그 즐겁고 힘든 각고의 시간을 누룽지 하나로 때운 탓에 속이 허하다.여기서 점심시간을 갖는다면 목통재까지 가기도 힘들 것 같았다.사정이 이쯤 되자 이번 종주산행에 어렵사리 참가한 황세는 그래도‘목통재’까지 시도해보잔다.산(山)사람, 황세한테는 거기까지도 힘들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덕유산에서 조망한 가야산 연봉의 파노라마-맨 뒤 마법의 성처럼
솟은 가야산 상왕봉,제5선 좌일곡령능선,제4선 단지봉능선,
제3선은 수도-양각-흰대미산능선이 춤추듯 나우리친다.]
10. 쪽빛 묻어나는 하늘 아래,화려한 점심시간
술에 취하고 산에 취하고
쪽빛 하늘이 푸르름을 더해 가는 여기 좌일곡령(座壹谷嶺) 아래 산허리춤.‘빈바랑골’이 남으로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곳(1,170m)에 짐을 풀었다.낙엽 위에 둘러앉은 친구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쪽빛 하늘로 번져나간다.적막하던 산 속이 갑자기 소란스럽다. 한없이 쏟아지는 양광(陽光)이 따사롭다.마치 봄날 같다.
점심 메뉴는 현영이가 준비한 꼬리곰탕과 오뎅탕. 친구들이 나눠 짊어지고 온 꼬리곰탕 통조림 4개를 따서 떡국과 함께 2개의 버너에 넣고 불길을 당긴다.‘마이더스의 손’,현영이의 화려한 손놀림은 눈부시다.어느새 파와 마늘, 상추에 양념간장까지 내놓는다. 빈틈이 없다. 또 한 군데의 버너엔 나라 안에서 제일이라는 오뎅탕이 끓고 있다.산중에 이만한 식단이 어디 있으랴. 마침내 현기가 자랑하는‘솔주’가 나오고 술잔이 돌아간다. 허물없는 친구끼리 술에 취하고, 산에 취하는 즐거움,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그것도 티끌 하나 없이 밝고 맑은 투명한 공기 속에서.
몇 순배 술잔이 돌아가는데 느닷없이 산꾼 한 사람이 다가온다. 뜻밖의 조우였다. 우리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50대 후반인 그는 거창의 한전에 근무한다고 했다.부산 알파인클럽 회원이라는 그는 홀로였다.오늘도 가북면 홍감마을에서 여기를 거쳐 단지봉에 오른 뒤‘빈바랑골’로 내려갈 참이란다.마을 사람들의 은밀한 코스라는 빈바랑골.그 빈바랑골이 궁금했다.
”빈바랑골요?. 물론 계곡도 좋지만 물맛은 정말 기가 차죠.”라며 그는 빈바랑골 칭찬에 여념이 없다.“일전에도 부산 알파인클럽 회원들을 거기로 안내했어요.”빈바랑골 물맛이 그리워지면 여길 찾아온다는 그. 우리가 권하는 술도 마다하고 단지봉으로 떠나려 한다. 우리와 헤어지기에 앞서 그는 자기 발자국만 따라 내려가면 홍감마을로 해서 가북면(加北面) 소재지로 갈 수 있다고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 햇볕 잠풍한 좌일곡령 산허리-멋진 점심을 들고/큰 배낭 뒤엔 청산이..]
현영이와 나는 친구들에게 꼬리곰탕과 오뎅탕을 번갈아 대령했다.하지만 얼마 안 가서 코펠은 거덜이 나고 말았다.친구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우린 흐뭇했다.“술 안주가 모자란다, 오뎅 국물이 모자란다.”고 친구들이 푸념을 늘어놓자 현영이는“이 불쌍한 흥부 자슥들을 멕이 살릴라꼬...” 라며 신파조의 말투로 능청을 떤다. 5번째 코펠,곰탕국물에 떡국,오뎅,양념을 넣은 마지막 요리는 정말 진국이었다.이를 두고 원조는 “바로 이 맛이야. 이제 제 맛이 나는군.”하며 빈정대다 주방장 현영이의 따가운 눈총을 맞기도 했다. 이렇게 웃고 즐기는 가운데 시간은 오후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기념사진을 찍고 서서히 떠날 채비를 했다. 원래 하산은 목통재까지 간 다음 증산면 황점리로 내려갈 참이었다.그러나 아무래도 그곳까지는 무리일 것 같다.그래서 아까 그 거창의 산꾼이 가르쳐준 가북면 홍감으로 하산코스를 바꿨다.그러자 민석이는 자기 차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애당초 약속한 증산면 황점리를 취소하고 가북면 홍감으로 승용차를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11.두무강골을 타고 홍감마을로 하산
2시 10분,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산에 들어간다.거창 산꾼이 밟고 올라온 발자취를 따라간다.3분쯤 가자 발자국은 산허리길에서 90도 방향으로 꺾이더니 좌일곡령의 남릉으로 이어진다.100미터 가량 그 남쪽 산줄기를 따라가다 산길은 왼편 골짜기로 사뭇 치내려간다.이 산비알을 타고 내려가면 이곳 사람들이 두무강골이라고 부르는 계곡 윗부분에 다다르게 된다. 햇빛이 깃들지 않는 산비알은 온통 신설(新雪) 일색이었다.희다못해 푸른 기운의 백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세상에 똑같은 모양의 눈은 결코 내리지 않는다고 한다.그만큼 눈은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눈은 빛을 반사하거나 빛을 꺾이게 하는 면이 무수히 많아 자신에 부딛히는 모든 빛을 반사시킨다.그래서 눈은 희고 깨끗하다. 눈은 우리에게 찬란한 아름다움이다.그렇다.두무강골 하산길은 아름다움으로 눈부셔 오히려 가슴이 시렸다.
두무강골로 내려서는 산길은 훤히 트여 있다. 하지만 이따금 바위가 나타나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웠다.30분쯤 눈을 헤치고 내려와 계곡 상단부에 다다랐다. 얼어붙은 개울을 건너자 제법 널따란 임도가 남쪽으로 이어진다.두무강골을 오른편에 두고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20분 가량 다리품을 팔자 눈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흙길이 시작된다.여기서 우리 일행은 다리쉼하며 거추장스러운 스패츠와 크램폰을 벗어버렸다.그런 다음,10분 가량 오후의 정일(靜逸)에 흠뻑 빠져들었다.
임도 오른편은 아찔하리만큼 깎아세운 비탈. 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두무강골은 검푸르스레한 어스름 이내에 잠겨 장관이었다. 동쪽으로 굽어드는 임도 곡각지점에 접어들자 저 아래로 홍감마을의 인가가 보인다.고랭지 채소밭을 빙 돌아 마을 위 언덕배기에서 잠시 다리쉼을 했다.
12.가조온천에서 산행의 피로를 풀다.
오후 4시,10여 채 인가가 있는 산비탈 마을로 들어섰다.마을 할머니한테 가조행 차편을 알아보니 목통재 아랫마을,용암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금방 내려올 것이라 한다.우리 일행은 10여분을 걸어내려와 버스 정류소에 닿았다.조금 있으니 민석이의 차가 올라왔다.가조의 제일온천에서 우리와 다시 만나기로 하고 민석이와 현기 그리고 금구 부부가 승용차로 먼저 떠났다.5분쯤 지났을까 말까 거창행 버스가 홍감정류소에 멈춰 섰다.
4시 15분. 장장 12시간의 산행은 이렇게 끝났다. 줄곧 세찬 바람을 맞은 친구들의 까칠한 얼굴엔 비로소 안도의 빛이 역력하다.가북저수지를 지나 가북면 면소재지에 다다랐다.석가천(石加川) 오른편에 솟은 작은용아릉 보해산(普海山 827m), 이어 거창벌의 봉화대 금귀봉(金貴峰 911.7m)이 모습을 드러냈다.가을철 단풍 산행지로 제격인 산들이다. 잠시 후 거창군 가조면(加祚面) 소재지에 닿았다. 우리 일행은 가조온천의 유일한 원탕이라는 제일온천탕으로 직행했다. 가조온천은 강알칼리의 유황천으로 당뇨병,위장병,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가조의 별유산(別有山 1,046m),의상봉이나 여체를 빼닮았다는 미녀봉(935m)을 산행한 뒤 가조온천을 찾는 것이 일반이다.오늘도 가조온천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오후 5시,산행에 지친 심신을 온천욕으로 달래고 나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가조에서 부산으로 직행하는 차편은 없었다.마산팀은 민석이의 승용차로 바로 마산으로 가면 되겠지만, 부산팀은 우선 거창으로 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귀환해야 한다. 하지만 재화와 현영이는 저녁 식사도 하지 않고 헤어지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계획을 바꾸자고 했다.그래서 부산행 봉고를 120,000원에 대절했다.이렇게 시간을 벌자 일행은 가조의 명물식당이라는 축협 앞 할매추어탕으로 자리를 옮겼다.겉으로는 초라해보이지만 할매집의 미꾸라지조림과 추어탕은 별미였다.특히 미꾸라지 조림은 천하일미였다.미꾸라지조림을 내놓으시며 할매는 “오늘밤 아지매들 잠자기 어려울껄”하는 것이었다.그 다음날 아침이면 이 말의 진의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되리라 한다.
이번 수도-가야산 종주산행은 비록 가야산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심설산행을 만끽했으니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었다.조선시대 최고의 등산칼럼니스트(?) 정구(鄭逑)는 그의「가야산기행문」에서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 넓히기를 힘씀이지 안계(眼界) 넓히기를 위함이 아니다.”라고 했다.아울러 가야산에 오른 감회를“천년처사의 마음 말없는 가운데 합하네(默契千年處士心).”라 읊었다. 오늘도 한치 틀림없는 명언이다. 그리고 가야산의 선적 분위기를 더할 나위 없이 잘 꿰뚫었다.
친구여!. 봄나무 물오르기 전 아직 갈대빛 띤 가야산에 다시 올라보지 않으리오.
12/7/2006 청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