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으로 걷는 백두대간-28구간<댓재-두타,청옥산-연칠성령>
댓재-두타산-박달령 갈림길-문바위-청옥산-연칠성령(2004.12.5)
2004년 백두대간 납회산행에 부쳐
백두대간 28구간 끊어타기는 올해 백두대간을 마무리하는 납회산행이다.그래서 댓재~두타~청옥~고적대~갈미봉~이기령~원방재~백복령에 이르는 27km가운데 댓재~두타산~청옥산~연칠성령(9.85km)까지 한 마디만 끊어타고 무릉계로 하산키로 했다.몇년 전부터 침이 마르도록 벼르던 두타~청옥산 산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작년 14번,올해 14번 백두대간 마루금을 타며 중도에 대간을 탈출한 것은 두타.청옥산이 처음이었다.백두대간 마루금에 있는 두 산은 높고 깊으며 신비롭고 조망까지 두루 갖춘 명산이다.
두 산을 상징하는 골짜기,무릉계(武陵溪)는 한마디로 선경(仙景)이다.무릉계 들머리에 있는 무릉반석 너럭바위에 새겨진 숱한 시인묵객들의 각자(刻字)를 비롯해서 안으로 파고들면 들수록 비경이 속출한다.박달골과 바른골은 합쳐지기 전 제각기 깊은 산 속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깊은 소로 떨어뜨리면서‘쌍폭’이라는 신비로운 폭포와 바른골 쪽 폭포 위로는 학등 능선과 신선대 사이에 절묘한 소가 연이어지는 협곡과 더불어‘용추폭’이라는 웅장한 폭포를 만들어놓고 있다.그러고도 만족치 않고 위로 너른 반석과 크고 작은 폭포를 빚어놓아 절경이 끊이지 않는다.어디 그뿐이랴,온통 숲으로 우거진 산 곳곳에 보석과 같은 기암절벽과 암봉이 솟구쳐 있고,그 사이사이로 열린 산길을 따라 오르노라면 눈 앞에 펼쳐지는 선계(仙界)와도 같은 풍광에 빠져들어 황홀감을 맛보게 한다.
조망 또한 기차다.특히 두타산 정수리에서 사위를 바라보는 즐거움은 실로 대단하다.두타~청옥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대간마루금,그 동쪽으로 깊이 질러진 무릉계,무릉계 양옆으로 능선을 향해 뻗고 치솟은 암릉과 기암괴봉,동쪽으로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가 하면,반대쪽으로는 함백산을 비롯하여 가리왕산에 이어 오대산에 이르기까지 강원 내륙의 고봉준령이 파도가 일렁이는 듯 바라보이기 때문에 조망만으로도 명산의 반열에 드는 산이다.두타,청옥을 잇는 백두대간의 오른편이 억세고 현란한데 반해 그 왼편은 수더분한 산세를 지녀 더욱 다양하고 아늑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28구간 끊어타기에 온 김황세 동기와 처녀출전한 권용효 동기는 대간팀으로부터 뜨거운 박수세례를 받았다.작년만하더라도 선두를 지키던 황세는 허리 때문에 장거리 산행을 자제해오다 두타.청옥에 반해 지팡이를 잡고 몸을 추슬렀다.권용효 동기도 꿈에 그리던 두 산을 보러 행장을 차렸다.평소에 자주 보는 얼굴인데도 반가움의 농도는 묽어지지 않는다.아울러 차량은 대간 지리에 빠삭한 오기묵 동문(23회)이 다시 지원했으니 한결 든든했다.
12월 4일 밤 10시,부산을 떠나 장쾌한 7번 동해안국도를 타고 간다.영덕을 지나 울진에 이르니 동해안고속도로 개통이 목전에 다다랐고 또 삼척~동해~속초 사이에 건설하고 있는 동해안고속도로도 개통을 서두르고 있었다.이들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적어도 30~40분쯤 운행시간이 단축될 듯했다.그렇게 되면 부산에서 태백산은 물론이요 오대산과 설악권 접근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동해시를 빠져나온 기묵이의 봉고는 종주들머리 댓재로 가기 위해,태백행 38번국도로 스며들어 삼척시 미로면 하거노리에서 오른쪽 424번 지방도로로 꺾어든다.도마평을 지나 삼거리(三巨里)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삼척시 미로면 상사전리 돌고개에 다다른다.해발 200미터의 돌고개를 넘어서면서 424번 지방도는 댓재 오른편에 치솟은 햇댓등(960m)에서 동해로 뻗어나간 산줄기의 산자락을 이리 구불 저리 구불 감아돈다.때로는 오른쪽으로 틀어나가다 산등에 이르면 왼쪽으로 올라붙어 산허리를 가로지르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나간다.돌고개에서 댓재에 이르는 12km의 산간도로는 구절양장이 따로 없었다.
새벽 3시 조금 지나 댓재(805m) 고개만당에 올라서니 어둠 속에서도 삼척시와 동해시의 불빛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날이 밝았다면 동해의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올 텐데 아쉽다.동해안의 해돋이 명소로 자리잡은 댓재-새해 첫날 백두대간의 고개 댓재에 서서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장소로 더없이 좋은 전망대 노릇을 한다.우린 차안에서 잠시나마 눈을 붙인 뒤,새벽 5시 종주에 들어가기 위해 장비를 챙긴다.5시 12분,댓재 산신각 앞 도로에서 다함께 사진을 찍었다.뒷줄 왼쪽부터 김황세,권용효,이재화,신남석,앞줄 왼쪽부터 김현기,김익수,전기환,최금구 모두 8명의 차림새는 산맥(山脈)을 탈 산꾼이라기보다 오히려 금맥(金脈)을 캘 광부를 연상케한다. (05:12)
[댓재에서 종주를 하기에 앞서]
댓재 만당(805m)에 칼바람이 분다.동해에서 불어오는 샛바람이 여간 아니다.윈드스토퍼에 오버트라우저를 입고 단단히 채비를 한다.새벽 5시 112분,댓재 산신각 오른편으로 열린 대간 길을 따라 오른다.숲 속으로 들어서자 산죽과 철쭉이 나타나더니 아름드리 소나무도 반긴다.그윽한 솔향이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기온은 쌀쌀하지만 무척 상쾌하다.오늘은 음력 10월 24일(양력 12월 5일)이어서 사위는 어둡다.헤드랜턴에 불 밝히고 오르는 대간 길은 오로지 불빛이 비치는 작은 공간만 보일 뿐,그밖은 어둠이다.
5시 28분,햇댓등(960m)에 올라선다.댓재에서 북동진하던 대간은 햇댓등에 다다르자 사정없이 거의 서쪽(왼편)으로 머리를 틀어나간다.오버트라우저를 벗어 배낭에 넣는다.가만히 한 자리에 있으면 추워도 발품을 팔면 춥지는 않았다.한겨울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아직은 곁옷을 벗고 산행을 해도 괜찮은 날씨다.930봉에 이르자 대간은 북서쪽으로 뻗어내려간다.5시 43분,명주목이(860m)로 내려섰다.명주목이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삼척시 하장면 번천리 거무소,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삼척시 미로면 삼거리 구룡소로 빠지게 된다.이제 가파른 오름길이다.10여분 발품을 팔아 980미터 오름에 올라선다.
선두는 재화와 황세다.역시 황세였다.백두대간 종주에 거의 1년 가까이 불참했지만 그래도 걸음짓은 전혀 녹이 슬지 않았으니 필경 그는 타고난 산꾼이다.5시 55분,산길은 차츰차츰 고도를 높이면서 북쪽으로 나간다.6시 8분,1,030봉에 다다라 4분 가량 발품을 파니 1,028봉에 이른다.여기서 3분 동안 다리쉼을 한다.6시 22분,산죽길의 1,010봉에 다다르자 바윗돌이 나타나며 잠시 돌계단이 나온다.북진하던 대간은 이 봉우리를 깃점으로 통골목이 앞 봉우리까지 북동진한다.다시 990봉에 이르자 이정표(햇댓등 2.5km,통골목이 1.1km)가 세워져 있다.대간 길은 오르내림이 거의 없어 부드러웠다.
6시 44분,1,014봉에 닿았다.산죽밭을 지나 6시 53분,통골목이 바로 앞 봉우리인 1,000봉에 닿으니 해돋이가 시작되려 한다.선두의 재화는 벌써 통골목이로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는다.우리는 이 봉우리에서 막 동이 트려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06:54)
[통골목이(960m)로 가는 능선에서 동 틀 무렵]
1,000봉에서 6시 57분,통골목이(960m)로 내려섰다.통골재라고도 하는 통골목이 일대는 온통 산죽밭이다.통골목이 왼쪽 골짜기가 통골 또는 산죽골인데,통골로 빠지면 삼척시 하장면 번천리 거무소로 가게 되며,통골목이 오른쪽으로 열린 하산길은 삼척시 미로면 삼거리에 있는 구룡소로 내려가게 된다.산죽이 우거진 통골재는'자연이 부르는 대로 하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그렇게 차례대로 자연의 부름에 따라 속을 비운 뒤,다함께 모여 사진을 찍었다.모처럼 함박웃음을 띈 환한 얼굴은 보기에도 다정스럽다.특히 세상의 짐을 혼자 진 것처럼 잔뜩 찌프린 듯,성낸 듯한 재화(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사진으로 보면)도 주름살을 펴고 활짝 웃으니 더욱 화기애애하다.(07:09)
7시 9분,통골목이(960m)를 뒤로하고 두타산 앞 1,241봉으로 오른다.오늘 종주가운데 가장 힘이 드는 까꿀막진 구간이다.통골목이에서 대간은 잠시 북쪽으로 오르다 이내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1,241봉에 다다르면 다시 북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북동쪽에 치솟은 두타산으로 이어진다.통골목이를 떠나자 날이 훤히 밝아지면서 해돋이가 시작되었으나 깊은 숲속인 이곳에서는 해돋이를 보지 못했다.1,241봉을 오르다보니 처음으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1,241봉에 다다를 즈음 20대로 보이는 등산객을 만났다.3명의 소녀와 한 명의 청년이 쉬고 있었다.그 청년은 백복령까지 종주를 할 요량이며 소녀들은 무릉계로 하산할 것이라 한다.7시 31분,1,241봉에 오르니 이정표가 서 있고 봉우리는 펑퍼짐하다.통골목이에서는 멀쩡했는데 나도‘자연의 부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7시 45분이 되어서야 후미와 합류하게 되었다.
우리는 1,241봉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7시 53분,두타산으로 떠났다.사진은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뵈는 두타산을 등진 동기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보았다.사진을 찍기 전만하더라도 청명하던 두타산은 일순 가스가 오락가락하여 희부윰하다.(07:56)
[두타산 앞봉우리(1,241m)에서 두타산을 등지고]
1,241봉에서 대간은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1,200미터 잘룩이까지 북진하다가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두타산(1,355.2m)으로 곧추 오른다.일행이 1,200미터 잘룩이에 다가가자 청년과 소녀들이 힘겹게 두타산(頭陀山)으로 오르고 있다. 그들과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무리가 되어 두타산정으로 오른다.비록 거리는 짧고 등산로는 흙길이라 부드럽지만 이 역시 힘든 오르막길이다.
8시 13분,두타산 정수리에 올라서자 홀연 안개가 산정을 덮어버려 우리는 꼼짝없이 안개의 포로가 된다.산정에는 정상빗돌과 이정표,산행안내판이 있고 커다란 산정묘지가 눈길을 끈다.두타산에서 멋진 조망을 기대했던 우리는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어디 바람이 잠풍한 곳을 찾아 아침식사를 해야 했다.94년 10월 하순경 토요일,나는 한밤중에 두타산을 홀로 찾은 적이 있었다.무릉계를 거쳐 두타산성과 깔딱고개를 넘어서서 밤 10시쯤 산정에 올랐을 때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운 동해의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그 바람을 맞으며 정상 남쪽에 있는 벙커속으로 기어들어 텐트를 치고 한밤을 넘긴 생각이 들어 그 벙커를 찾으러 나섰다.
그러나 벙커는 온데간데 없고 그 자리는 조림지역으로 바뀌어 있었다.그래도 우리는 움푹 들어간 벙커터로 내려와 시락국을 데워 아침식사를 한다.오늘 처음 대간종주에 온 용효는"정 회장과 현영이가 온다 해서 마음 편히 왔는데..."하며 말문을 열더니'골때리는 산(頭打山)'으로 악명 높은 두타산 산행은"장난이 아니네."하며 고개를 젓는다.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출발한 댓재기점에서 두타산 오르기는 두타산으로 오르는 여러 갈래의 등산로가운데 가장 순하고 부드러운 산길이다.부드러운 등산로라는 코스가 3시간 가량이나 걸렸으니 용효의 푸념도 일리는 있었다.(08:59)
[두타산(頭陀山 1,355.2m) 정상에 올라]
두타(頭陀)란 불가에서 말하는 두타행(頭陀行)을 일컫는 말이다.두타산은'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깨끗하게 불도를 닦는 수행처'라는 유래를 지닌 산으로 불교와 인연이 깊다.현재는 삼화사와 관음암,천은사만이 남아 있지만,불교가 흥했던 시기에는 중대사,상원사,대승암,내화암,성로암 등 십여 개가 넘는 절집이 있었다.
두타산을 중심으로 북동쪽 박달골 계류와 바른골 계류가 합처져 장장 14km에 이르는 무릉계곡을 거쳐 살내가 되어 동해로 흘러들고,남쪽 번천리계곡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골지천과 합류하여 한강이 되고,동쪽 내미로리와 고천리에서 발원한 계류는 오십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들러든다.멀리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미로면 경계에 있는 두타산(1,355.2m)은 백두대간이 동해안을 따라 뻗어내려오다가 삼척 지방 해안가에서 크게 용트림하며 솟구친 산으로,무릉계곡을 중심으로 청옥산(靑玉山 1,403.7m)과 쌍둥이처럼 서 있는 산이다.두타산과 청옥산은 거의 연결된 것처럼 보이나 3km 가량 떨어져 있으며 그 생김새는 매우 대조적이다.두타산은 동해시 쪽으로 바위절벽들이 날렵한 산세를 자랑하는데 반해,청옥산은 완만하고 묵직한 생김새를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두타산은 삼척 지방의 영적인 모산으로 숭상되었다.동해안 지방에서 볼 때 두타산이 서쪽 멀리 우뚝 솟아있기 때문에 산정기를 발하는 산으로 민중들의 삶에 근원이 된다고 여겨졌던 산이다.그래서일까.조선 선조 때 김효원은 “두타산일기”에서 금강산 다음으로 아름다운 산을 두타산으로 꼽았다.(09:00)
[두타산 정상 빗돌을 중심으로]
두타산 정상 이정표에 보이는 산성터로 가려면 두타산 북동릉을 거쳐야 한다.약 2시간 가량 북동릉을 따르면 두타산성과 만난다.두타산성은 조선 태종 때 천연적인 산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부분적으로 쌓은 성으로 둘레 2,500m,높이 1.5m에 이른다.성을 한바퀴 도는데 약 7일이 걸린다고 하며 성벽이 그렇게 견고하지 않으나 천연의 요새로서 손색이 없다.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삼고 의병들이 허수아비로 병사를 만들어 남쪽 15리 절벽에 도열시켜 적에게 위세를 보이자 왜적들이 공격을 포기하고 백복령을 향해 퇴각했는데 빨래하던 노파가 이 산성의 사정을 제보하듯이 일러주었더니 적병은 이기령으로 돌아와 침공했으나 계략에 빠져 성안에서 전멸했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일설에는 이 산성에서 관음암 사이에 허공다리가 있어 임란 때 사용했다고 하나 이는 낭설인 듯 싶다.두타산성에서 무릉계로 하산하지 않고 내쳐 북동릉을 타면 쉰움산(688m)이 나온다.쉰움산에는 50개가 넘는 돌무울이 있어 오십정산(五十井山)이라고도 부르는데,이곳에는 산제당을 두어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으며,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기우제도 지냈다.
이 산 아래에는 천은사란 옛절이 있고 이 절에서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이었던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스스로 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 또는 동안거사(動安居士)라 부르며 은둔생활을 하면서"제왕운기(帝王韻記)"를 지었다 한다.(09:01)
[ 두타산 정상 이정표를 중심으로]
두타산 정상 아래 벙커터에서 아침식사를 끝내고 정상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었다.9시 두타산을 뒤로 하고 청옥산으로 떠난다.하산길에 들자마자 잔뜩 찌프린 날씨는 기어이 싸락눈을 흩뿌린다.일순 눈 앞이 캄캄해지면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다.어쩌면 심설산행이 되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반 염려반으로 가슴이 방망이질한다.9시 20분,1,120m 잘룩이에 다다르니 대간 오른쪽으로 소등골계곡이 내려다보인다.소등골 들머리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칡넝쿨과 다래덩쿨이 얽혀 있고 바윗돌에는 짙푸른 이끼가 두툼하게 끼여 있으며 바닥에는 낙엽이 깔려 있어 원시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09:21)
[두타산 하산길 1,120m 잘룩이에서 바라본'소등골'입구]
소등골계곡 들머리를 지나 박달재로 발품을 판다.바람을 타고 내리던 싸락눈이 그치는가 싶더니 다시 내리고 대간마루에는 안개만 자욱하다.그런데 대간 오른쪽 아래 무릉계곡으로는 햇빛이 찬란하다.
대간 영마루를 중심으로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는 이토록 기후가 확연히 다른 것이다.동해의 샛바람을 장벽처럼 막아선 대간은 기후뿐만 아니라,언어,섭생,습속,주거방식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백두대간 의 영동지방,일테면 강원도 동해안과 함경남도의 언어는 경상도 지방의 언어와 유사하지만,영서인 내륙지방의 그것은 다같은 강원도이지만 현격한 차이가 난다.
교통이 불편하던 그 옛날 대간은 커다란 장벽이어서 서로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다.또 울진은 지금은 경북 땅이지만 예전에는 강원도(1896년~1962년) 땅이었다.도청소재지가 춘천에 있었던 탓에 주민들이 백두대간을 넘나들어 우회해야 하는 생활의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이에 울진 주민들이 청원을 내기에 이르러 마침내 1963년 경북 땅으로 편입되었다.울진은 대간의 영동에 있으므로 그 생활권이 동해안을 따르는 경북지방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09:31)
[ 박달재 가는 길의 대간 풍경]
소등골들머리에서 박달재에 이르는 대간 길에는 푸르름을 자랑하는 산죽이 많이 보였다.9시 30분,1,169봉을 지나 5분 가량 발품을 팔아 1,157봉에 다다르니 이정표가 나온다.두타산 1.3km,박달재 0.9km라 씌여 있다.두타산에서 청옥산에 이르는 대간 오른쪽(동)은 바투 가파른 산사면이 이어지고 왼편은 완만한 산세다.9시 50분,박달재(1,135m)에 이르니 이정표가 반긴다.
박달재에서 왼편 갈림길은 문바위골을 거쳐 삼척시 하장면 거무소로,오른편 갈림길로 빠지면 박달폭포와 쌍폭을 거쳐 무릉계로 내려서게 된다.두타~청옥산을 잇는 종주 코스는 두타~청옥산을 대표하는 코스이자 가장 힘든 코스다.골 때리는 산(頭打)이란 악명도 이 코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산행기점인 동해시 삼화동 무릉계 주차장의 해발 고도가 180m이다보니 표고차 1,200m 이상을 올라쳐야 산정에 올라설 수 있기때문이다.게다가 두타산과 청옥산 2개를 이을 경우 산행거리는 5km 늘어나 무려 20km가 넘는 긴 산행이 된다.그렇기 때문에 해가 긴 여름철에도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해가 지기 전에 산행을 마칠 수 있다.산행은 무릉계에서 시작,산성터~대궐터를 거쳐 두타산 정상에 오른 뒤,청옥산을 거쳐 연칠성령에서 칠성폭포와 바른골을 지나 다시 무릉계로 내려서든지,또는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의 박달재에서 박달골을 거쳐 무릉계로 내려서거나,청옥산 학등 능선길을 따라 문간재 위 바른골로 내려선다.완전종주는 9시간 이상 걸리고,박달골과 학등 길로 내려서더라도 7시간은 잡아야 한다.(09:51)
[박달재(1,135m)에 다다라]
박달재(1,135m)를 뒤로 하고 청옥산으로 걸음을 옮긴다.대간마루에는 산죽이 빼곡히 들어차 산죽천지다.이제 대간은 문바위(1,230m)를 겨냥하여 차차츰차츰 고도를 높여나간다.사진은 짙푸른 산죽밭 운무(雲霧) 떠도는 문바위 오름길 풍경이다.(09:56)
[문바위 오름길 산죽밭에 들어]
끝없이 이어지는 산죽길을 따라 오르자 검푸른 색조를 띈 거대한 암장 밑에 다다랐다.이곳이 문바위(1,230m)다.이정표에는 문바위재라 표기되어 있으나 고개라고 하기에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이 문바위에서 왼쪽으로 열린 하산길을 따르면 문바위골로 해서 삼척시 하장면 번천리 거무소로 내려가게 된다.바위를 타고 문바위로 오르면 멋진 조망이 기다리겠지만 사위가 어두운 바람에 우리는 문바위 오르기를 생략하고 대간 길을 재촉하여 청옥산으로 오른다.사진은 문바위 바로 밑 이정표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10:05)
[문바위에 다다라]
문바위 이정표에서 문바위(1,230m)로 오르지 않고 문바위 아래의 등산로를 따라간다.말하자면 대간마루금 왼쪽으로 난 길을 더터오르는 셈이다.청옥산(1,403.2m) 오름길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능선 날등을 왼쪽으로 비켜 오르기 때문에 아주 죽을 맛은 아니었다.
드디어 산비탈을 돌아오르던 길과 만나는 산등에 다다라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오르니 마침내 대간마루와 만난다.그곳(1,370m)에는 묘지 1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이제 청옥산이 그리 멀지 않았다.청옥산 산정에 가까이 갈수록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그 바람 속으로 다시 싸락눈이 휘날린다.10시 30분,대간 오른쪽으로 열린 학등 갈림길을 지난다.이 하산길로 빠지면 문간재 바로 위 바른골에 이른다.조금 더 발품을 팔아 10시 34분,청옥산 남쪽 50미터 지점에 있는 샘터 갈림길에 다다랐다.한여름철이라면 필시 그 샘터를 찾았을 테지만 우리는 샘터 갈림길을 지나쳐 청옥산으로 곧장 오른다.청옥산 정수리에 가까워지자 벌거벗은 나뭇가지에는 눈꽃이 장관을 이루고 그 사이로 운무가 자욱하다.실로 1년만에 보는 빙화(氷花)였다.두타산을 떠나면서 싸락눈이 내리더니 세찬 바람이 불어대는 청옥산 주변을 배회하던 운무가 그냥 그대로 나뭇가지에 얼어붙어 눈꽃을 만들어놓은 것이다.(10:34)
[청옥산 정상 주변의 빙화(氷花)]
눈꽃 터널을 지나 10시 40분,청옥산 정상에 올라섰다.정상에는 정상빗돌과 삼각점,이정표와 이동통신 안테나가 세워져 있다.먼저 오른 재화와 황세가 안개 자욱한 정상에서 후미를 기다리고 있었다.3분 뒤에는 후미가 속속 들이닥친다.
오늘 종주에 처녀출전한 용호는 청옥산 오름길에 힘이 들었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정옥이와 청옥이는 점 하나 차인데 오르기 힘드네...”하며 배낭을 부린다.안사람이 정옥이인 용효의 정감어린 묘한(?) 위트에 우리는 배꼽을 쥐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러자 익수는 님자에 점 하나만 붙이면 남이라고 받아넘긴다.두타~청옥산이 예사로운 산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농담이 오고간 것이리라.솜털같은 신설이 청옥산 정수리를 덮고 있지만 바람이 불어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청옥산은 청옥(靑玉 사파이어의 일종)과 약초가 많아 청옥산이란 산이름을 얻었다 하고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기개가 죽지 않았다고 해서 청옥산이라고도 한다.사진 왼쪽 앞줄부터 최금구,청옥산에 대한 유머로 이목을 집중시킨 권용효,전기환,김현기 동기와 뒷줄 왼쪽 김황세,김익수,이재화 동기가 청옥산 빗돌을 중심으로 둘러섰다.(10:46)
[청옥산(靑玉山 1,403.7m) 정상 빗돌을 중심으로]
10시 46분,청옥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연칠성령으로 내려간다.그런데 청옥산 정상에서는 대간마루금 찾기에 유의해야 한다.여러 가닥으로 하산길이 트여 있어 엉뚱한 길로 잘못 들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우선 정상 표지석 뒤 비석이 있는 서쪽 길은 솔고등을 타고 흰적골로 해서 하장면 중봉리로 내려서는 길이고,비석 못미쳐 오른쪽으로 열린 희미한 길도 흰적골 하산길로 사람들의 왕래가 뜸하다.연칠성령으로 내려가는 대간 길은 정상 표지석 앞 이동통신 안테나가 있는 곳을 지나 왼쪽(북서쪽) 능선길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연칠성령으로 하산하는 청옥산 북서릉은 음달이라 눈도 제법 쌓였고 곳곳에 눈꽃도 만발했다.사진은 청옥산 하산길 대간마루에 멈춰 서서 눈꽃 속에 든 동기들을 카메라에 담았다.(10:52)
[청옥산 하산길 만발한 빙화를 배경으로]
빙화 만발한 숲속에서 오늘 종주의 두 히어로 권용호,김황세 동기와 김익수 동기를 클로즈업한다.앞에서 세번째 익수 뒤로 기환이가 눈꽃가지 사이로 빼꼼히 보인다. (10:54)
[청옥산 하산길 만발한 빙화를 배경으로]
청옥산(1,403.7m)에서 연칠성령(1,180m)까지 거리는 약 1km.연칠성령으로 내려오는 대간 길은 생각밖으로 부드러운 흙길이었다.연칠성령에 선두가 내려온 시각은 11시 13분이었다.오늘 종주의 날머리인 연칠성령 고개마루는 난출령(難出嶺)이라고도 하는데 험준하여 빠져나가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이다.
이 고개에서 오른편으로 열린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칠성폭포에 다다르게 되며 호계(虎溪,바른골)을 거쳐 무릉계(武陵溪)에 이르게 된다.5분 뒤에 후미와 합류하여 잠시 숨을 돌린 뒤,기념사진을 찍었다.연칠성령에서 300미터 더 오르면 그 정상에 망경대(望京臺 1,244m)가 나오는데,이는 조선조 인조 원년(1,623) 택당 이식(李植)이 중봉산 단교암에 은퇴하였을 때,이곳에 올라 서울을 사모하여 바라본 곳이라 한다.요즘은‘서울에 계신 임금을 바라보았다.’하여 망군대(望君臺)라고 일컫고 있다.(11:21)
[종주날머리,연칠성령(連七星嶺 1,180m)에 다다라]
금년 백두대간 끊어타기는 연칠성령까지.내년 5월쯤 백두대간을 재개할 때 여기 연칠성령에 다시 오를 것이다.11시 18분,연칠설령을 뒤로 하고 칠성폭포로 내려간다.칠성폭포로 내려가는 하산길은 망군대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내린 산등을 따른다.등산로는 연칠성령 왼쪽 사면을 가로질러 망군대 북동릉으로 붙는다.그런데 여기서부터 내리막길은 어찌나 가파르던지 상상을 뛰어넘는다.잠시라도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 그대로 저 아래 골짝으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다.한발 한발 내딛는 걸음짓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싸락눈이 그쳤기 망정이지 계속 퍼부었다면 이곳 하산길은 말 그대로 초죽음이 되었을 것이다.내가 선두에 서서 내려오고 그뒤를 재화와 금구,익수가 뒤따른다.
사진은 망군대 북동릉을 내려오면서 건너편 고적대에서 갈미봉으로 이어지는 대간마루를 카메라에 담았다.사진 왼편으로 보이는 암릉은 1,282봉이며,오른편은 갈미봉(1,272m)이다.다음 구간 우리가 밟아야 할 대간마루다.그리고 사진 왼편 윗쪽 나뭇가지에서 비스듬히 내려뻗은 산줄기는 1,282봉 못미쳐 대간에서 사원터로 빠지는 능선이다.(11:39)
[연칠성령 하산길에 건너다본 갈미봉 일원]
연칠성령 하산길에 갈미봉과 대간마루를 조망하고 칠성폭포로 내려서는 내리막길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곧추선 산비알이라 발디딤에 유의해야 했다.그런데 절반 가량 내려왔을 때 재화가 엉덩방아를 찍는다.뒤를 돌아보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평소 오름길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화지만 내리막길에서는 종종 넘어지는 바람에 하산길에 약하다는 징크스가 있어 우리는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12시 8분,금구와 내가 망군대 북동릉과 바른골이 합쳐지는 지점(600m)에 내려와 한참을 기다려도 재화와 익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7분쯤 기다리자 재화와 익수가 내려왔다.재화는 또다시 발을 헛디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고 한다.그때 손을 잘못 짚는 바람에 손목이 꺾여 퉁퉁 부어 올랐다며 볼멘소리를 한다.재화의 손등을 보니 제법 부어올랐다.손수건으로 손목을 동여매 응급조치를 취했으나 이 깊은 산중에서 뭐 신통한 방도가 일을쏜가.
12시 25분,후미의 용효와 기환,현기가 바른골로 내려왔다.용효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청옥이는 끝도 안좋네...”하며 일갈한다.청옥산에 올랐을 때 그가 내뱉은 말과 이 말이 함께 메아리가 되어 우리는 또다시 폭소를 터뜨렸다.연칠성령에서 예까지 표고 580미터를 치내려오는데 1시간 남짓 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우리는 바른골의 계류(호계 虎溪)에 손을 담그고 얼굴을 ?는다.물은 맑고 시원하면서도 부드러웠다.그리고 잠시 다리쉼을 했다.이제 바른골을 내려간다.망군대 북동릉과 바른골이 만나는 지점에서 20미터쯤 내려서자 칠성폭포가 보였으나 워낙 협곡인지라 칠성폭포의 전모는 볼 수 없었다.나는 암반 위로 올라서서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칠성폭포를 감상했으나 7미터쯤 돼 보이는 칠성폭포가 돌아앉은 바람에 사진을 찍기에는 무리였다.사원터로 간다.등산로는 바른골 왼쪽 산자락을 따라 이어진다.
12시 43분,사원터에 다다라 점심을 들 바람 잠풍한 곳을 찾는다.사원터는 제왕운기를 지은 고려 때 문신 이승휴가 낙향하여 은거하던 상원사(上院寺) 절터인데,절은 사라지고 지금은 팔각정이 세워져 있는데 무인대피소로 쓰이고 있다.팔각정에는 바람이 불고 사방이 트여 있어 그 아래 양지 바른 마른 초지로 옮겨 감자면을 끓여 도시락과 함께 점심을 들었다.
오후 1시 48분,점심을 끝낼 무렵 청옥산 너머로 태양이 숨어버리자 우리가 앉았던 자리는 어느새 찬바람이 불어 싸늘해진다.그만큼 청옥산은 높고 깊었다.우리는 서둘러 배낭을 꾸리고 바른골을 내려간다.조금 발품을 팔자 산기슭으로 나 있던 산길이 끊어지고 맑은 계류가 흐르는 백옥같이 하얀 반석에 다다랐다.이제부터 바른골의 비경이 속출하기 시작한다.사진은 바른골이 협곡을 이루는 지점에 다다라 친구들을 카메라에 담았다.사진 오른편에 보이는 천애만애한 벼랑은 청옥산 정상 못미쳐에서 바른골로 뻗어내린 학등능선이다.(14:09)
[사원터에서 문간재로 가는 바른골 암반에서 다리를 풀고]
바른골 협곡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나자 친구들은 서둘러 문간재로 발품을 판다.그 협곡을 막 벗어나서 후미에 오는 현기와 용효,기환이를 불러 세워 바른골을 등지고 한 컷트한다.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암장이 단체사진을 찍을 때 왼쪽으로 보이던 그 바위며,바른골의 너럭바위는 이미 해가 져서인지 푸른 색조를 띄고 있다.등기들 뒤로 갈매빛 산줄기가 보이는데 이 능선은 연칠성령에서 바른골로 뻗어내린 망군대 북동릉이다.
10년 전 홀로 두타~청옥을 종주할 때 이곳에 이르니 미국인 몇 명이 무당개구리의 생태를 조사하고 있어 깜작 놀란 적이 있었다.뒤에 들으니 그 교수는 그때부터 무릉계곡에 드나들며 무당개구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도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연구중이라고 한다.그들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며 세계적으로 분포범위가 그리 넓지 않은 무당개구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다.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인에 의해 우리의 소중한 자원인 무당개구리 연구가 먼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14:10)
[문간재 가는 길,바른골에서 청옥산을 등지고]
바른골 너럭바위를 밟고 문간재로 내려간다.사진은 문간재가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서 바라본 바른골 풍경이다.오른편의 가파른 벼랑은 학등 능선의 지릉이며 그 뒤 보석처럼 빛나는 암릉이 학등 능선의 주릉으로 문간재 바로 위로 그 맥을 떨군다.그리고 세번째 뾰족한 암봉은 두타산성에서 뻗어내린 북릉이다.(14:19)
사원터~문간재 사이 바른골의 협곡]
바른골 주변의 풍광을 카메라에 담는 사이,선두의 재화는 벌써 문간재로 줄달음을 치고 현기와 용효,익수는 바른골 건너편 등산로로 빠져버린다.나는 금구와 황세,기환이와 함께 바른골 너럭바위를 돌아 2시 23분,문간재(390m)에 올라서니 다친 손 때문에 재화는 신선봉으로 오르지 않고 무릉계로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문간재에는 해방 전까지 석문(石門)이 있었다고 한다.문간재에서 신선봉은 오른쪽 바윗길을 올라야 한다.두타~청옥산 산행에서 아름다운 풍경이 어디 한두 군데일까.눈 가는 곳마다 절경이요 멋들어진 풍광이다.그 가운데서도 나는 여기 신선봉에서 조망을 으뜸으로 친다.물론,신선봉 장군바위 밑의'쌍폭'이나 무릉계곡 최고의 비경이라는'용추폭포' 그리고 두타산성과 대궐터 오름길의 산성 12폭도 아름답고 신비롭지만 신선봉에서 바라보는 산세는 그야말로 황홀경 그 자체이며 선경(仙景)이 아닐 수 없다.
신선봉 암릉에 올라서면 건너편 수백길 되는 학등의 깎아지른 벼랑과 두타산성 북릉의 단애,바른골 오른편 능선의 기암괴석이 한데 어우러져 선계(仙界)를 이룬다.그러므로 두타산과 청옥산에 오면 다른 곳은 몰라도 신선봉은 빼먹지말고 꼭 올라봐야 한다.나는 금구와 기환이,황세를 부축여 신선봉으로 오른다.가파른 바윗길을 돌아 올라 제일 먼저 만나는'사랑바위'에 선 동기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신선봉은 동석산(動石山)이라고도 하는데,산꼭대기에 세 겹으로 된 층대가 있어 밟으면 움직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안을 동석산성(動石山城)이라 하며 문간재의 석문은 바로 이 산성의 정문인 셈이다.그런데 그 동석(動石),즉 흔들바위는 굴러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간재를 중심으로 아래쪽 골짜기를 무릉계(武陵溪)라 하고 윗쪽 골짜기를 호계(虎溪)라고 부른다.(14:29)
[신선봉 사랑바위에 올라]
신선봉 사랑바위에서 우리는 문간재로 오른 익수와 현기 일행을 소리쳐 불러보았으나 웅성거리는 소리는 들렸지만 끝내 신선봉(438m)으로 올라오지 않았다.우리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신선봉 최고의 전망터인 장군바위 끄트머리로 다가가 주변 경관을 감상한다.
신선봉의 앉음새는 기이하다.신선봉 오름길은 사방이 벼랑을 이루고 있어 갈미봉 남동릉의 잘룩이이자,신선봉 북서쪽에 있는 문간재에서 오르는 길 밖에 없다.문간재(390m)와 청옥산에서 뻗어내린 학등 능선과 갈미봉 능선 사이에 질러진 바른골은 120미터 이르는 신선봉(438m)이 남서쪽에서 가로막고 있다.그리고 학등 능선의 마지막 봉우리(해발 550m) 또한 직벽으로 신선봉을 마주보며 바른골을 에워싸고 있다.학등 능선의 이 봉우리와 신선봉이 서로 마주보는 두 절벽 아래에는 무릉계 최고의 비경이라는'용추폭'이 감춰져 있다.말하자면,바른골의 물이 신선봉과 학등의 봉우리 사이를 뚫고 솟구쳐 내리는 셈이며,용추폭 아래 박달골과 만나는 지점(해발 310m)에는 또 하나의 절경,'쌍폭'을 일궈놓고 있다.쌍폭 오른쪽 절벽은 바로 장군바위와 병풍바위가 있는 신선봉이다.
신선봉에서는 쌍폭이나 용추폭은 내려다보이지 않는다.그러나 쌍폭에서 올려다보면 신선봉과 학등능선의 절벽은 까마득하게 하늘로 솟구쳐 그 당당함과 빼어난 자태에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해발 310미터의 쌍폭에서 바라보는 신선봉 장군바위의 높이는 130미터,용추폭 위 학등 능선의 절벽은 그 높이가 줄잡아 240미터에 이른다.사진은 금구,기환,황세가 두타산성 북릉을 등지고 신선봉 장군바위에 앉았다.(14:34)
[신선봉에서 두타산성 북릉을 비켜 앉아]
신선봉 장군바위에서 문간재 건너편,갈미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보석처럼 빛나는 기암절벽을 카메라에 담았다.이 기암절벽 오른편으로 보이는 계곡이 피마늘골인데,피마늘골 들머리에서 기암절벽에 철계단이 길게 놓인‘하늘문길’을 거쳐 관음암으로 오르는 길이 열려 있다.이 하늘문길은 아마추어 등산객이나 무릉계곡 탐방객들이 최고로 꼽는 등산로다.삼화사~관음암~하늘문길~문간재 갈림목~쌍폭~용추폭~쌍폭~박달재 갈림목~무릉계~삼화사로 돌아오는 하늘문길코스는 2시간 30분 가량 걸린다. (14:34)
[신선봉에서 바라본 문간재 건너편 갈미봉 동남릉의 기암절벽]
이제 신선봉 최고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사진 앞쪽에 보이는 깎아지른 절벽이 학등 능선 마지막 봉우리인 550봉에서 수직으로 곧추선 240미터 가량의 벼랑이며 그 앞쪽으로 오후의 햇살이 노송에 투명하게 쏟아지는 암릉이 신선봉의 병풍바위군이다.사진 앞쪽에서 두번째 노송을 지나 둥그스럼한 암릉 아래에는 무릉계 최고의 비경이라는 웅장한'용추폭'이 있고,용추폭 위쪽에는 설악산 12선녀탕의 백미인 복숭아탕을 연상케하는 협곡 비경을 볼 수 있다.
신선봉 병풍바위에 앉아 주변을 감상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화인더에 담았다.학등 능선 위로 오후의 눈부신 햇살이 오랜 세월동안 풍상을 견디며 서 있는 병풍바위 암릉의 노송에 한량없이 쏟아진다.한 사나흘 이곳에 텐트를 치고 지내고픈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금구는 학등 능선의 거대한 벼랑을 응시하고,기환이와 황세는 갈미봉 동남릉의 기암절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14:35)
[신선봉의 기암절벽과 암릉,햇빛 깃든 노송,그리고 친구들]
신선봉에서 두타산성 북릉을 바라본다.북릉 오른편 골짜기는 박달좌골이며 북릉 왼편의 뾰족한 봉우리는 두타산성터가 있는 786.7봉으로 무릉계곡 들머리,금란정에서 오르는 산길이 열려 있으며 암릉산행으로 유명한'베틀리지'와'미륵봉'을 거치면 이 봉우리에 올라설 수 있다.(14:42)
[신선봉에서 바라본 두타산성 북릉의 기암절벽]
[신선봉에서 두타산 북릉의 기암절벽을 등지고]
신선봉에서 주변 산세에 취해 20분 동안 머물다 2시 43분,문간재로 되내려간다.문간재에서 무릉계로 내려서는 가파른 철계단 길을 내려와 갈림목에 다다른다.왼쪽 길은 관음암행'하늘문길'들머리를 거쳐 무릉계로 내려가는 길,오른쪽 길은 쌍폭을 거쳐 용추폭으로 가는 길이다.우리는 쌍폭을 보러 왼쪽 길로 접어든다.3시,쌍폭에 다다르니 많은 유산객(遊山客)들이 보였다.
두 물줄기가 우렁차게 쏟아져 쌍폭이란 이름을 얻은 쌍폭은 왼쪽 물줄기는 박달골에서,오른쪽 물줄기는 바른골에서 솟구쳐 용추폭을 거쳐 깊은 심연으로 곤두박질친다.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왼쪽 물줄기가 무척 가늘어져 뜻밖이었다.이런 모습의 쌍폭을 보기는 처음이었고 쌍폭의 비경이 반감되는 순간이었다.두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떨어지는 쌍폭을 기대했는데 몹씨 실망스러웠다.그래도 쌍폭을 구경하러온 사람들은 다들 탄성을 지르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우리는 가까스로 자리가 나서 사진을 찍고 무릉계 최고의 비경이라는 용추폭포로 올라가자고 하니 일행은 헤어진 동기들이 걱정된다며 그만 하산하자고 한다.(15:02)
[쌍폭을 배경으로]
쌍폭을 뒤로 하고 철계단을 건너 본격적인 무릉계곡 탐방에 나선다.박달골 갈림길을 지나 12분 가량 발품을 팔자 두타산으로 오르는 산성 갈림길이 나온다.이 갈림길에서 오른쪽 산성길을 따라 오르면 두타산성을 거쳐 두타산정에 가 닿는다.두타산 오름길이 무척 가파르고 힘들어‘골 때리는 산’이란 악명을 떨치는 곳도 바로 이 오름길이다.하지만 힘든 만큼 풍광이 빼어나 땀흘린 보람을 느끼게해준다.
산성 갈림길을 지나 무릉계를 건너니‘허공다리’다.일설에는 임란 때 관음암에서 이곳을 지나 두타산성까지 허공다리가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계곡 왼편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걷는다.조금 더 발품을 팔아 3시 23분,학소대에 다다랐다.오른쪽은 벼랑이고 왼쪽은 거대한 암벽이 골짜기를 에워싸고 병풍처럼 펼쳐져있다. 바위 벼랑엔 4단 폭포가 그림처럼 걸려 있고 송림이 그 주변을 감싸듯 우거져있으니,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다.세조의 왕위 찬탈에 읽던 책을 다 불태우고 조선 팔도를 떠돌던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들러‘물소리 솔바람과 화음을 이루니 솔밭 사이로 돌들이 깨끗하다.’고 예찬한 대로 풍치가 좋다.
그곳에는 용효와 익수가 바위턱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익수한테“현기는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현기는 용추폭을 보러갔다.”고 한다.그러니까 우리가 쌍폭을 구경할 즈음 현기는 용추폭에 있었기 때문에 길이 엇갈린 셈이었다.나는 학소대를 등진 친구들을 카메라에 담았다.(15:24)
[학소대에 다다라]
학소대를 떠나 삼화사로 가는 산길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활엽수 거목이 우거져 호젓한 분위기를 자아낸다.잠시 뒤 관음암 갈림길과 마주쳤다.왼쪽 산비알을 거슬러 관음암으로 오르는‘하늘문길’등산로다.이 길로 해서 관음암에 올랐다가 가파른 하늘문길 계단을 내려서면 문간재 갈림목이 나온다.하늘문길 코스는 아마추어 등산객이나 유산객들이 무릉계곡 탐방로로 애용하는 코스다.관음암은 인기 영화‘오세암’이나‘달마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의 촬영지로서 조망이 뛰어나면서도 요즘 보기 드물 정도로 아담한 비구니 절집이다.
관음암 갈림길을 뒤로 하고 발품을 팔아 삼화사에 다다랐다.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삼화사는 요즈음 한창 불사가 진행되고 있어 어수선했다.특히 최근 몇년간 태풍과 폭우의 여파로 무릉계곡 들머리 일원이 엉망이 되는 바람에 그 피해가 컷다.
삼화사를 지나쳐 태풍으로 무너져 다시 개축한 다리를 지나 거대한 무릉반석(武陵磐石)으로 내려섰다.천여명이 앉아도 너끈할 너럭바위를 흐르는 물줄기는 곳곳에 담을 이루고,그 너럭바위 위에는 숱한 시인,묵객들의 글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단종 폐위 이후 산천을 주유했던 매월당 김시습의 글도 있고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사람인 봉래 양사언의‘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달필들 속에 무슨‘계’,무슨 계하며 계원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그 이름들 속에는 이 산에 숨어들었던 사람들을 잡기 위해 왔던 토포사(포도대장)들이 새겨놓았던 이름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이 일대 무릉반석을 비롯하여 무릉계곡은 국민관광지 1호로 지정되어 피서철이 되면 수많은 인파로 몸살을 앓기도 한다.(15:42)
[무릉계(武陵溪) 들머리,무릉반석의 각자(刻字)]
삼화사는 선덕여왕 11년(642)에 자장율사가 이곳 두타산에 이르러 절을 짓고 흑연대라고 한 것이 효시였지만 경문왕 4년에 구산산문 중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국사가 중창하여(829) 삼공암(三公庵)이라고 한 때부터 뚜렷한 사적(寺跡)을 갖는다.일설에는 신라 말에 세 선인이 회의를 하고,그 뒤 불일대사가 불사를 지어 삼불사라고 했는데,고려 태조 원년에 삼창되면서 삼국을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고 하여 삼화사(三和寺)라고 이름 지었다.
그 뒤,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효종 때 중건하였으며 1905년 의병(義兵)이 이곳을 근거지로 활약하다가 1907년 왜병의 공격으로 또다시 불타버린 것을 이듬해 중건하였다.1977년 이 일대가 시멘트 공장의 채광지로 들어가자 중대사(中臺寺) 옛터인 무릉계곡의 현위치로 옮겼다.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약사전(藥師殿)과 적광전 그리고 요사채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대웅전 안에 안치된 신라 시대의 철불(鐵佛)이 있다.대웅전 아래 마당에 있는 삼화사 3층석탑(보물 1277호)은 높이 4.95m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고려 시대의 탑이다.일설에는 이승휴가 이 절 가까이에 객안당을 짓고 거처하였다고 한다.이밖에도 대사들의 비(碑)와 부도(浮屠)가 있다.삼화사(三和寺)는 현재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다.
두타동천(頭陀洞天)의 들머리 무릉반석에 앉고 선 동기들이 삼화사를 등지고 기념사진을 찍었다.동기들 뒤로 삼화사 일주문으로 들어가는 새로 놓은 다리가 보이고 그 곁에 삼화사가 보인다.사진 왼쪽의 축대가 있는 숲 속에는 금란정과 마모되어 알아보기 어려운 무릉반석의 양사언 각자(刻字)를 탁본하여 원형을 복원한 바위가 있다.(15:41)
[무릉반석에서 삼화사를 등지고]
무릉반석에서 무릉교로 가기 위해 등산로로 올라서자 금란정이 보인다.금란정(金蘭亭)은 이 고장 선비들의 모임인 금란계(金蘭契)의 뜻을 기리고자 세운 정자다.1903년 유림제현들이 향교 명륜당에 모여 학문에 전념하던중 한일합방의 국치를 겪고 향교의 문이 닫히자 이에 분개하여 금란계라는 모임을 만들어 울분을 달래며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정자를 세우려 했다.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45년 그 자손들에 의해 북평동 단봉 석경지에 세워졌다가 1958년 무릉계로 옮긴 것이다.금란정 앞에는 이 고장 북평 출신 최인희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시비에 있는 <낙조>가 무릉계 들머리를 지키며 지나는 길손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소복이 산마루에는 햇빛만 솟아오른 듯이
솔들의 푸른빛이 잠자고 있다
골을 따라 산길로 더듬어 오르면
나와 더불어 벗할 친구 없고
묵중히 서서 세월 지키는 느티나무랑
운무도 서렸다 녹아진 바위의 아래위로
은은히 흔들며 새어오는 범종 소리
백암이 씻겨가는 시낼랑 뒤로 흘려보내고
고개너머 낡은 단청
산문은 틔었는데
천년 묵은 기왓장도
푸르른 채 어둡나니
[무릉교에서 무릉반석을 등지고]
오후 3시 45분,우리는 무릉교 난간에 기대어 삼화사와 무릉반석을 등지고 기념사진을 찍고 산행을 마무리했다.3시 46분,무릉계곡 매표소에 다다르니 재화가 한참이나 먼저 와 있었고 기묵이가 환한 얼굴로 우리를 반긴다.
우리 일행은 백두대간 납회산행 뒷풀이를 위해 목욕도 생략한 채 부산으로 줄달음쳤다.9시경 부곡동 "문약"에서 정영천 산우회 회장을 비롯,김유건 백두대간 베이스캠프 조장(?)과 함께 저녁식사를 들며 갑신년 백두대간 종주를 자축하였다.이어서 인근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흥겨운 노래와 춤으로 분위기를 달군 뒤,2004년 백두대간 끊어타기를 마감했다.
[종주정보]
*때: 2004년 12월 4-5일(무박종주)
*참가자: 권용효,김익수,김현기,신남석,이재화,전기환,최금구 7명
*차량지원: 오기묵 동문(23회) 봉고
*.종주시간/거리 및 지점
05:10 댓재(805m)....0.75km....05:28-05:30 햇댓등(960m,북동-서/이정표)...930봉(남서-북서).....0.75km.....05:43-05:56명주목이(860m)....1,030봉....1,000m 잘룩이....1.15km....06:12-06:15 1,028봉(삼각점/북북서-북).....06:22 1,010봉(북-북북동).....990m 잘룩이.....990봉.....06:30 970m 잘룩이....06:44 1,014봉.....1,000봉(북북동-북북서).....1.35km.....06:59-07:05 통골목이(960m,좌-통골,번천계곡,거무)....0.87km....07:31-07:45 1,241봉(북서-북)...1,200m 잘룩이...1.13km...08:13-08:55 두타산(1,355.2m 삼각점,북동-서북서/북동-타산성,쉰움산)...0.65km...09:20 1,120m 잘룩이...0.32km....09:30 1,169봉....1,157봉....09:50 박달재(1,135m 좌-문바위골/우-박달폭포)....1.25Km....09:57-10:05 문바위(1,230m,문바위골,전나무골,번천계곡,거무소)...10:30 1,390m 지점 갈림길(우-학등,문간재)....0.63km...10:40-10:43 청옥산(靑玉山 1,403.7m 삼각점/대간-북서,솔고등-서 샘터-청옥산 남사면 50m)....1.0km...11:13-11:18 연칠성령(連七星嶺 1,180m)----12:08-12:25 칠성폭포(600m)---1.75km---12:43-13:48 사원터(530m)---1.0km---14:23-14:43 문간재(440m/우-신선봉)---용추폭포---0.5km---14:30 박달골 갈림길---15:23 두타산 갈림길----삼화사---15:45 무릉반석---금란정---1.8km---15:50 매표소
*도상거리:댓재~두타산~청옥산~연칠성령:9.85km/6시간 8분
*탈출거리:연칠성령-사원터-문간재-박달령 갈림길-매표소:5.05km/4시간 32분
*총산행거리:14.9km/10시간 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