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옥(上玉),그리고 상옥사과에 대한 추억
[통점재에서 바라본 먹방골,향로봉과 동대산
산줄기가 두 마리의 고래를 연상시킨다.]
불볕더위가 물러가고 쪽빛 하늘이 눈동자에 들어오는 가을.그래서 릴케의 말처럼,지난 여름의 땡볕이 조금만 더 대지에 머물기를 바라는 가을의 문턱에 서면,어느덧 내 발길은 상옥과 상옥의 사과밭을 서성이게 된다.벌써 10년이 지난 일이지만,상옥의 청명한 하늘과 풋풋한 인정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으니...그리하여 상옥은 이제 내 가을사전의 첫 페이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지난 96년 10월 초순,친구들과 낙동정맥을 종주하면서 우리는 포항 땅에 들어섰다.그때 한 지인의 소개로 상옥리의 윤덕수 이장을 알게 되었다.그런데 상옥리 윤 이장은 오히려 고천에 살고 있는 이봉규 씨(당시 55세,고천산악회 회장)를 소개해줘 뜻밖에도 일이 슬슬 풀려나갔다.전화로 종주계획을 듣고난 이 회장은 대뜸 자기 집에 차를 두고 산행을 하라 한다.종주들머리 질고개와 가사령은 물론이려니와 성법령까지 종주하더라도 차를 내주겠으니 아무 염려 말라는 것이다.제일 큰 고민 하나가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캄캄한 갈밭재(가사령) 마루턱.우리는 차에서 내려 어둠 속에서나마 갈밭재로 흐르는 정맥을 잠시 살펴본다.저 아래 상옥에서 불빛 몇 개가 스며나온다.낯선 땅에서 우리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으로 흐뭇한 일이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내려와 갈림길에 멈춰서니 오른쪽은 성법령을 넘어 기북으로 가는 비포장 길이,왼쪽은 상옥리 고천으로 가는 비포장 길이 나온다.산골길이 다 그렇겠지만 조심조심 운전하지 않으면 돌멩이가 사정없이 차 아랫도리를 때린다.
[성법령에서 바라본 상옥리 전경-저멀리 팔각산이 얼비치고...]
어제 이봉규 씨와 통화하면서 자기 집이“정미소”라고 들었는데,마을로 들어서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정미소가 될 만한 집은 안 보인다.상옥교회(1919년 설립)가 있는 못안마을에 와서 다시 윗고래(상고천)로 오르락내리락하다 찻소리에 잠을 깬 어떤 아저씨의 도움으로 아랫고래(하고천) 이봉규 씨 집을 찾아냈다.이 씨 집은 “정미소”가 아니라 “정류소”에 있었다.발음이 비슷해서 웃지 못할 착오가 생긴 걸 어떡하랴.우리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이봉규 씨와 수인사를 건넨다.
충청도가 고향인 이봉규 씨.포항에서 첫 직장을 가진 인연으로 포항댁 아내를 얻었고,상옥이 좋아 포항-상옥 간 노선버스 10여 년의 기사 노릇을 청산하고,이곳에 아예 눌러앉은 것만 봐도 그의 성품은 소탈했다.3년 전 사들인 2,400평의 땅에다 사과밭을 일궈 올해 첫 결실을 보게 됐고,슈퍼마켓을 내 생활을 꾸리고 있다.또 새로 산 땅에서 500평을 떼내 고향에 있던 선영마저 이곳으로 옮겼으니 상옥은 이제 그가 묻힐 고향이 된 셈이다.그는 상옥 사랑이 대단해 지난해(1995년) 고천산악회를 만들어 회장이 됐는데 이 조그만 마을에 회원수가 30명을 넘는다고 한다.다들 도시로 꾸역꾸역 몰려드는 판에 도시를 버리고 산골로 들어온 용기가 부러웠다.
[성법령에서 당겨 본 상옥과 통점재,낙동정맥의 연봉]
질고개에서 가사령까지 낙동정맥 종주를 마치고 우리는 지나가는 갤로퍼에 얹혀 상옥리 고천마을로 내려왔다.상옥(上玉)은 저 아래 하옥(下玉),옥계(玉溪)와 더불어 지형이 매우 독특한 곳이다.옥같이 맑은 냇물이 흘러 영덕 오십천의 상류가운데 한 지류가 되니 흔히 옥계라 부르고,고래 또는 고내라고도 부르는 상옥은 높은 곳에서 냇물이 흐른다는 뜻으로 고천(高川)이라 즐겨 부른다.또 지형이 흡사 거대한 고래 같다 하여 고래라 일컫기도 한다는데,동쪽 산의 생김새가 암수 두 마리의 고래를 닮아 그렇다는 것이다.
상옥은 고산분지에 이루어진 마을이다.고래 주둥이라 가늠되는 성법령에서 볼 때 낙동정맥이 서쪽으로,향로봉.내연산줄기가 동쪽으로 에워싼 고샅에 넉넉한 분지를 이루어놓았다.고래 꼬리인 분지의 아래쪽,옥계에서 하옥을 거쳐 들어오는 길이 트였을 뿐,나머지는 모두 험준한 고개를 넘어서야 상옥에 들어설 수 있다.
청송 부남에서는 간장치(干長峙)와 통점재(通店峙),죽장면 입암에서는 가사령(葛田嶺),기계면 기북에서는 성법령(省法嶺),신광면 마북에서는 괘령(掛嶺),청하면 유계에서는 샘재(泉嶺)를 넘어야 한다.이가운데서 간장치와 괘령을 뺀 나머지 고개는 현재 차량이 다닐 수 있다.이 땅에서 한 마을에 고개가 이렇게 많은 곳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그리고 상옥을 둘러싼 분수령에서는 낙동강,영덕 오십천,형산강,금호강,곡강이 발원된다.
지형이 이런 탓에 일찍이 신라 말부터 사람들이 피난와 살기 시작하여 한때는 1,000여가구 넘게 살았다고 한다.그뒤 병화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과 화전민들이 터잡아 살았다고 한다.정감록 같은 비결서에도 길지라 하여 예부터 피난처로 쓰였고,구한 말에는 산남의진(山南義陳) 의병의 진지로,6.25 전쟁 때는 인민군 주력부대가 머물던 요새지로 쓰이기도 했다.특히 항일정신이 투철했던 이곳은 구한 말 일본 헌병대가 의병을 깨기 위해 포항보다 먼저 주둔했다니 그 중요성이 짐작된다.상옥은 1910년 청하군 죽북면,1947년에는 영일군 죽남면에 들어갔다.1954년에는 죽장면에 딸렸다가 지난 95년 포항시 죽장면으로 바뀌었다.
[하옥리 가는 길-가을빛 완연한 넘절 풍광]
현재 상옥에서 하옥까지는 차량이 다닐 수 있으나 하옥에서 옥계까지는 비포장 도로가 방치돼 승용차로는 다닐 수 없다.옥계는 생활권이 영덕에 가까운 탓에 지난 83년 영덕군 달산면으로 들어갔다.옥계계곡은 37가지 경치를 자랑한다는 곳으로 여름철이면 많은 피서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그가운데서도 1609년 손성을이 세웠다는 침수정(枕水亭)과 학소대,기암절벽의 병풍암,여의주 구슬같은 구슬바위가 눈길을 끈다.
[통점재에서 바라본 안개 빗낀 넘절 쪽 향로봉]
[옥계계곡 37경가운데 제1경인 침수정 일대]
우리는 이봉규 씨를 만나 새벽녘에 부탁한 사과 세 상자를 산다.심은 지 3년만에 처음 거둬들인 첫 사과는 보기에도 싱싱했다.우리는 맛배기로 사과 맛을 본다.상큼하고 달콤한 사과 맛이 입안에 녹아든다.나는 한 입 가득 사과를 베어물고,
“얼마나 쳐드리면 됩니꺼?.”하고 물었다.
“무슨 소린교.첫 물은 돈 받고 팔면 안 되니더.”
“아니,뼈빠지게 농사를 지었는데 무슨 소린교.첫 농사 아입니꺼.”
이 사장,사과농사 지어 처음 만져보는 돈 아이가.받아두래이.“
곁에 있던 마을 할아버지께서 끼어든다.
“예,그럼요.그렇구 말구요.”
우리는 사과값에다 질고개까지 태워다준 차삯을 건네준다.
“이러면 안 되는 긴데...”
이 씨는 마지못해 돈을 받아줘고서도 못내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이렇게 남편이 머쓱해 하자 사과를 박스에 담고 있던 포항댁이 나선다.
“이래뵈도 우리 사과 맛은 최고라예.”
하며 잽싸게 사과를 깎아 마을 사람과 우리한테 내민다.사과파티였다.우리는 사과 몇 개를 후딱 해치운다.포항댁 말이 아니더라도 사과 맛은 훌륭했다.‘죽장사과’라고 부르는 상옥의 사과 맛은 이곳 경치만큼이나 꿀맛이었다.마치 밀양 얼음골 사과처럼 한복판에 꿀(?)이 박힌 부사는 껍질이 얇으면서도 단단하고 물이 많았다.3년을 묵묵히 기다려온 결실의 순간이었다.
“농약도 별반 안 쳤니더.”
이 씨는 사과를 바지에 쑥쑥 문지르더니 내게 들이민다.그렇게 그는 자신이 심은 사과에 공을 들였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그는 이제 농사꾼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아뭏튼 우리는 그의 첫 손님이 됐고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그는 첫 수확의 기쁨을 맛본 것이다.그는 자꾸만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무척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그런 이 씨를 보자 우리도 덩달아 흐뭇했다.
우리는 사과를 트렁크에 실으며,“축하합니다.”“고맙습니다.”는 말을 거푸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이 씨는 떠나는 우리에게 “언제 꼭 다시 와요.향로봉 산행이나 같이 합시더.”하며 손을 흔들어준다.그의 등 뒤로 투명한 가을 햇빛이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상옥에 관련된 사진(상옥지도와 침수정을 빼곤)은 상옥에 살며,상옥을 사랑하는 상옥지킴이 "호젓한오솔길" 님의 호의에 힘입었으며,그가 그곳에 있기에 이 작은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히고 싶다.상옥을 더 알고 싶으면 "호젓한오솔길" 님의 블로그 blog.daum.net/htnam226을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