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기행(遊伽倻山記)-선인들이 오른 우리 산<2>
[가야산 원경]
가야산 기행(遊伽倻山記)
정구(鄭逑 1543~1620)
선조 12년 늦가을,나는 이백유(李伯愉) 형제와 시냇가 글방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하루는 내가“가야산이 우리 고을에 있는데,아름답기로 유명하다네.그런데도 나는 겨우 한 번 건성으로 다녀왔고,그대들은 아직 구경을 못 했으니 어찌 섭섭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국화와 단풍이 한참 어울러졌을 터이니 가야산 꼭대기에 올라가 눈을 식히고,가슴을 활짝 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하니,모두들 좋다고 했다.그래서 쌀 한 자루,술 한 통,반찬 한 합,과일 한 바구니를 꾸리고 책 몇 권을 챙겨 출발하니,9월 10일이었다.
12일,홍류동(紅流洞)에 이르러 시냇가 바위에 앉았다.중의 말이 올해 단풍은 푸르고 붉은 게 고르지 않아 지난해만 못하지만 그런대로 운치가 있어 감회를 풀만하다고 한다.구름과 산의 수석(水石)이 아름다우니 단풍의 좋고 나쁨이 무슨 상관이랴? 어떤 사람은 단풍이 아직 이르다 하고,어떤 사람은 제때를 만났다고 한다.그러나 때가 이르다면 옛 소강절 선생이 말한“꽃은 망울졌을 때 보는 것이 좋다.”는 말과 부합할 것이요,제철을 만났다면 더욱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또 이렇게 와서 구경하는 것만도 다행한 일이니 때의 빠르고 이름이 무슨 상관이랴?
시냇물이 어지러이 흩어진 바위 사이로 우뢰치는 소리를 내며 쏟아져 맑은 날씨에 숲 사이 외나무다리에다 비를 뿌린다.봉우리는 우뚝하고 골짜기는 깊숙하며 소나무,전나무가 우거진 곳에 바위 벼랑이 가파르다.
시냇물을 따라 오르내리기를 8~9리 했는데,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아름답고 신기한 경치가 눈을 놀라게 해 참으로 절경이다.바위 절벽에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름을 깊이 새겨 놓은 것이 뚜렷하다.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시 한 수가 폭포 옆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오랜 세월의 비바람에 깎여 지금은 알아볼 수가 없다.한참 닦으니 희미하게나마 한두 글자는 알아보겠다.
겹겹이 싸인 돌 사이로 미친 듯 흐르며
물줄기는 봉우리를 거듭 울리는데,
사람의 말소리는 가까이서도 알아듣기가 어렵구나.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 귀에 들릴까 늘 두려워서
짐짓,흐르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둘러싸게 하였다네.
[가을빛 완연한 홍류동계곡]
점심을 먹고 잠시 뒤 술 한 잔씩 나누었다.배동자가 미숫가루를 올리기에 맛보았다.몇 리 남짓을 가다가 말을 타고 홍하문(紅霞門)에 도착했다.신열이라는 스님이 나와 맞아 주었는데,그와는 전부터 아는 사이이기에 길 안내를 부탁했다.
저녁에 학사대(學士臺)에 올랐다.밤이 깊어지자 바닥이 차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뜰로 나왔다.달빛이 환하게 비추는 뜰에서 술 한 잔씩을 나눈 후 곧 잠자리에 들었다.
13일 맑음,아침 일찍 일어나 근사록(近思錄) 몇 장을 읽고 있는데,김 박사가 보기를 청하므로 학사대에 나가 잠시 만나보고는 뜰을 거닐었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때 창건하여 여러 번 고쳐지었다.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다운 게 백성들의 힘을 꽤 많이 허비했을 것 같다.
출발을 서둘러 산에 올랐다.돌비탈 길이 험하여 말을 타고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내원사에 도착했다.문 밖에 작은 비석이 보이고 비석 앞에는 사람 입만한 우물이 있는데 득검지(得劍池)라고 한다.비석 옆에 점필재 김종직,한훤당 김굉필,탁영 김일손 선생을 비롯하여 여러분의 시가 새겨져 있으나,마멸되어 읽을 수가 없다.
내원사는 화재를 겪어 새로 지어 산뜻하고 구름낀 산은 아름답고 바위 골짜기는 깊숙하여 기상이 솟구치고 안목이 탁 트인 게 해인사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한훤당 선생께서 일찍이 이 절에서 글을 읽으면서 덕과 도를 닦으셨으니,아마 이곳에서 성취된 바가 많으리라 여겨진다.우리는 하루도 이런 깊숙한 곳에서 글을 읽지 못했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다.
저 멀리 하늘 끝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있기에 물었더니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이라는 중의 대답이다.밤에 뜰로 나와 거닐었다.달빛이 대낮처럼 밝고 산은 고요한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개울물은 졸졸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14일 맑음,새벽에 일어나 앞마루에 앉아 근사록 몇 장을 읽다가 눈을 들어 구름 낀 산을 바라보니 온갖 상념이 지워져 버려 글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겠다.밥을 먹은 후 지팡이를 짚고 몇 리를 갔다.
종각암이란 암자가 있는데 위치가 높아 내원사보다 경치가 좋은 것 같다.어제 해인사에서 양정이 그 깊숙하고 그윽한 경치가 마음에 들어 훗날 다시 와서 글을 읽어야겠다고 맹세하더니,이곳이 그곳보다 더욱 좋다고 한다.그걸 본 공숙이“양정은 이곳에서도 글을 읽겠다는 맹세를 해야겠군.”하고 놀렸다.조금 쉬면서 피로를 풀려는데,중이 급히 오더니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고 독촉이다.그래서 우리는 놀라 채찍을 들고 일어났다.그러나 날은 저무는데,갈 길이 먼 경우가 어찌 이 산에서만 그러랴?
1리쯤 가서 성불암(成佛庵)에 도착했다.절간은 정각암만하고 별로 오래된 절은 아니다.중이 없어 마루와 방에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잠시도 머물 수가 없다.어제 심원암에도 중이 없어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제 이곳도 이러하니 흉년인데다가 부역이 번거로워 산승(山僧)조차 그런가보다.어찌 곳곳마다 지처를 비운단 말인가? 산의 중들이 이러하니 시골 백성들은 알 만하다.궁벽한 시골마다 비어 있는 집이 얼마나 될 것인가?
원명사(圓明寺)에 이르렀다.산봉우리를 끼고 절을 지어 깨끗한 게 내원사에 비길 바가 아니니,양정이 또 글을 읽겠다고 맹세해야 할 것 같다.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출발, 중들이 살지 않는 절 몇 개를 더 거쳐 상소리사(上蘇利寺)에 들어가 잠깐 쉬었다.
봉천대란 곳이 경치가 좋아 안목이 탁 트이며,수많은 봉우리와 봉우리들이 작은 언덕처럼 늘어서 있어,아득한 인간 세상이 마치 개미집 같고 곳곳에 보이는 촌락을 하나하나 셀 수 있다.
옥을 다듬어 놓은 듯한 산과 소나무 숲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이 허리를 구부려 손으로 움켜쥘 듯 완연하다.이런 가운데서 복건을 쓰고 조용히 지내면서 자기의 주견(主見)을 지키고 마음속에 터득한 바를 즐긴다면 어떻겠는가?
친구들을 이끌고 함께 와서 구경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지해는 억지로 따라오기는 했으나 이곳 경치가 이처럼 좋은 줄을 믿지 않을 것이니 제각기 분수가 있어,친구의 힘으로도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이다.그래서 논어에‘인(仁)을 행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남으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인가?
죽을 쑤어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이곳부터 길이 더욱 험준해서 걷기가 힘들다.그래서 절벽을 부여잡으며 험한 고개를 마치 고기가 궤미처럼 한 줄로 늘어서서 넘었다.앞서 가는 사람은 뒷사람의 이마 위로 가고,뒷사람은 앞사람의 발꿈치를 밟으며 갔다.
이렇게 6~7리를 가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사방이 탁 트여 끝이 없고,다만 하늘과 구름이 먼 산 저쪽에서 맞닿은 게 원명사나 봉천대의 경치와 비교되지 않는다.산 안팎이 푸르고 붉고 누렇고 흰색의 무늬를 이루었다.조물주의 지시에 따라 생성(生成)의 이치를 얻은 것이다.저 멀리에 사람이 있어도 보일락말락할 정도로 희미하게 북쪽으로 봉우리를 내민 금오산(金烏山)이 보인다.
고려 5백년 강상(綱常)이 그 산에 숨은 길재(吉再) 선생에 의지했는데 중국의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숨어 산 수양산과 함께 영원토록 이름을 남기고 있다.양정과 백유 일행은 산봉우리에 유유히 떠다니는 흰구름을 보고 있는데 나는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와 눈을 들어 볼 수가 없다.여러 사람들이 술 한 잔씩을 나누었으나,나는 오늘이 제삿날이기 때문에 들지 않았다.
구경에 지쳐 모두 바위를 베고 눈을 붙였다.자고 나서 다시 주위를 구경했다.중들이 시를 지어달라고 졸랐으나,나는 시를 지을 줄 모른다고 사양했다.전에 외종형들과 이곳을 유람할 때였다.우물가에 둘러앉아 술을 질탕하게 마시면서 시를 지었는데,모두 붓이 물 흐르듯 내려갔다.그런데, 나만은 하루 종일 한 수도 짓지 못해 여러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다.끝날 무렵에야 겨우 한 수를 지었을 뿐이었다.그때가 벌써 18년 전 일이었다.형님과 몇몇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그때 그 우물 역시 말라 버렸으니 슬픈 감회를 금할 길이 없다.
[돌불꽃(石火星)의 비경-가야산]
15일,새벽에 일어나 덕원(德遠)에게 편지를 보내려는데 지해(志海)의 편지가 와 여러 벗들이 어제 이미 산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그래서 답장을 보냈다.같은 산인데도 산 아래에 있는 사람과 위에 있는 사람의 정취가 같지 않아 편지 가운데 장난기가 섞였으니 이는 처소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그러니 위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 아니겠는가?
다시 봉천대에 올랐다.안개가 자욱하게 일어 햇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가득한 청·홍색이 갖가지 형태를 짓는다.
“저 속세 인간들이 오면 술을 빌어야겠다.”속세 인간이란 무엇이냐고 캐묻자,공숙은 말이 잘못 나온 것이라며,“안개 때문에 목이 말라서 한 말입니다.저 밑에 지해 일행이 막 속세에서 오고 있으니 속세 인간이라 한 것입니다.”한다.
오후가 되자 맑은 해가 나왔다.온 산을 덮은 안개가 걷히니 제 모습을 드러낸 산봉우리들이 눈 가득히 들어온다.어떤 것은 서 있는 사람 형상 같고,어떤 것은 짐승이 엎드린 듯하고,어떤 것은 칼을 꽂아 놓은 듯하다.붓을 세워 놓은 듯 모든 봉우리가 제각기 다른 모습이어서 그 형상을 다 표현할 말이 없다.
[수도산에서 바라본 여명의 가야산-한 떨기 연꽃이다]
이날 밤,봉천대에 올라 다시 둥근 달을 보기로 약속했는데,지족암으로 빨리 내려오라는 지해의 편지가 왔다.봉천대에 올라 달구경을 하려는 계획이 어긋나 섭섭하여 자꾸 뒤를 돌아다보면서 내려오자니 꼭 무엇을 잃은 심정이다.
해가 저무니 빨리 내려가자는 중의 재촉이다.그래서 우리는,“구경이란 너무 급하게 하면 군색스럽고 어색해서 산 구경을 다니는 기상이 아니네.해가 저물면 원명암에 들어가서 자고 내일 가서 만나세.”하고는 지해에게 편지를 보냈다.
처음 내원사에서 이곳에 오를 때 봉우리들이 모여 있어 경치가 아름답고 위로 오를수록 더욱 기이하고 새로웠다.그러다가 이제 봉천대에서 내려가니 가슴이 답답한 게 마치 높은 나무에 있다가 깊은 골짜기에 든 것 같아 자꾸 뒤가 돌아 보여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이 역시 처신을 삼가야 하고,보는 것도 비루해서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구름 때문에 달빛이 가려져 봉천대의 경치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해 불만스러운 게 차라리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서운하지 않았을 성싶다.마음이 평온하지 못해 밤이 깊었는데도 잠이 들지 않았다.율무죽을 쑤어 먹고 밤중에 문을 밀치고 틀에 나와 서성댔다.동남쪽 하늘에 뜬 놀이 서북쪽으로부터 밀려와 하늘 끝에 이르러 흩어져 사라지고 구름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새어 나와 촛불처럼 밝다.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고요한 산과 깊은 밤에 부는 바람 소리가 마음을 처량하게 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야산 설경]
16일 맑음,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앉아 어제 봉천대에서 내려올 때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지대가 낮아짐에 따라 마음이 평온하지 못했던 것은 수양이 덜 되어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마음가짐이 굳건하지 못해 걸핏하면 움직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또 요즈음 산 구경으로 마음가짐과 성찰(省察)이 해이해져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더욱 깊이 생각하고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밥을 재촉해 먹고 출발했다.아침 햇빛이 아주 밝아 숲이 아름답게 빛나는 게 볼만했다.오랜 안개가 걷히는데 아직 남은 습기에 짚신이 젖는다.돌길이 미끄럽지 않은 것도 산길에 도움이 되었다.길가 숲에 오미자가 돋았기에 몇 개 뜯어 손에 들고 구경하면서 가다가 한 손아귀에 가득 찼다.그래서 동자를 시켜 보따리에 넣어 산중의 선물로 삼게 하였다.양정이 백지(白芷 향초의 일종) 한 가지를 꺾어 씻은 후 기특해하기에 좀 보자고 했더니 아까워하는 기색이다.그래서 내가 웃으며 나무랐다.
“어찌 물건에 대해 인색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단 말인가?”“백지 하나를 아끼는데 해로울 게 무엇입니까?”“향기롭거나 더러운 물건을 막론하고 마음속에 두고 혼자만 좋아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네.” 양정은 내 말에 승복한다고 하였다.그러더니 몇 리를 더 가다가 문득,“아까 제가 승복한 것은 처음부터 본심 나온 말이 아니었으니 취소하겠습니다.”아니,이미 승복해놓고는 후회한단 말이가? 처음부터 승복한 게 아니고,말만 부드럽게 한 것에 불과합니다.취소하지 않으면 제가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겠습니까?“
18일,맑음.다른 사람들은 백운대 유람을 떠나고 덕원만이 기침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나와 함께 제월당으로 갔다.발을 옮길 때마다 쫄쫄거리는 시냇물 소리와 우거진 단풍나무,회나무의 말고 깨끗한 정취가 무척 마음에 든다.제월담 바위에 앉으니 내려 쏟는 폭포 소리에 서로의 말이 들리지 않아 귀에다 입을 대고 말을 해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술 몇 잔을 들고 일어났다.
덕원은 그의 제자들이 찾아왔기에 그들과 입암으로 가면서 내일 청휘정에서 만나기로 하였다.오래된 절인 심원사를 지났다.심원사는 대부분 퇴락하였다.옛날 여러 차례 이 절에 온 일이 있었는데,퇴락한 모습을 보니 감회가 깊다.문 밖 길에서 말에서 내려 초목을 헤치며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한창 헤매다가 중을 만나 길 안내를 부탁했다.
7리쯤 가 도은사에 닿았다.돌길이 고르지 못해 발을 떼어놓기가 힘들어 몇 걸음 가다가 쉬곤 했다.피곤하고 갈증이 심해 낭떠러지 아래에 있는 작은 샘가에 둘러앉아 물을 떠 점심을 먹기로 했다.이때 지해가 아이를 시켜 작은 통을 가져오라더니 손수 뚜껑을 열었다.
일행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짐짓 대답을 하지 않고 잔뜩 뽐내는 것이었다.일행 모두가 필시 그 속에 맛이 있는 별미가 들어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주목하고 있었다.그런데 꺼내는 것을 보니 밤을 쪄 가루로 만들어 꿀을 섞어 환약처럼 만든 것인데,여러 날 동안 싸매두어 쉬어서 냄새가 코를 찌른다.그가 산에 들어오던 날 집사람을 시켜 산중에 와서 별미로 먹으려고 만든 모양인데,색과 맛이 변한 것을 보고는 아까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그걸 본 여러 사람들이,보관한 방법이 틀린 것과 조금 전 뽐내던 것을 비웃었다.
절 문간에 도착하니 이미 초저녁이었다.밤중에 밖으로 나왔다. 환한 달이 중천에 걸려 흰빛이 온 누리에 깔리고,적막한 뜰과 조용한 밤이 더할 나위 없이 청량하다.앞뜰에 앉아 있노라니 찬 기운이 엄습해온다.지해가 율무죽을 쑤었다.
19일,맑음.새벽에 일어나 동문을 나와 바위 모서리를 타고 작은 언덕에 오르니 양정과 친우들이 와 있었다.멀고 가까운 곳의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눈 밑에 깔리고,감돌아 흐르는 시내와 자욱한 연기가 가슴을 상쾌하게 식혀준다.이런 경치는 이제까지 오른 봉천대 다음은 가겠는데,아늑한 맛은 그곳보다 오히려 낫다.
얼마 있으니 둥근 해가 먼 산꼭대기에서 떠오른다.영롱하게 빛나는 찬란한 햇빛에 눈이 부셔 똑바로 볼 수가 없으니,참으로 장관이다.돌 비탈과 높은 절벽을 애써 올라 백운대 아래에 도착했다.
걸린 절벽이 앞서 상봉에 오를 때와 같이 힘겹게 올랐다.탁 트인 조망이 봉천대 다음은 가는데,그윽한 맛은 도은사의 경치와 비슷하다.
백운대 북쪽의 동쪽 서쪽 양편에 칼날처럼 생긴 바위가 높다랗게 솟아있고,기암들이 제각기 아름다움을 다툰다.바위틈에 늙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어 기이하다.이곳 역시 소리사와 견줄 만한 경치이다.일행이 함께 노닐면서 한참 웃고 떠들다가,돌길을 타고 단풍나무 숲을 헤치고 내려왔다.흥에 정신이 흘려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것도 몰랐다.
21일,흐림.새벽에 일어나 해를 보았다.조반을 먹고 걸어서 시냇가 바위로 나왔다.음산한 구름이 걷히지 않고 가랑비가 흩뿌린다.말을 타고 사인암을 찾아보기 위해 나섰다.수석이 깨끗하고 산봉우리들이 높다랗다.옛날 사인(舍人) 벼슬을 지낸 중이 이곳의 아름다운 수석에 반해 바위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사인암이라 한다고 한다.또는 사신암(舍身巖)이라고도 부르는데,이곳에 온 사람이면 누구나 심신을 잊고 속세의 몸을 버리고 이곳과 인연을 맺기를 원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지만 모두 시골 사람들의 뜬 말이어서 믿을 수가 없다.
말을 재촉해 달려 시내를 따라 풀을 헤치며 나갔다.길이 희미하고 골짜기가 깊숙해 사람의 자취가 끊어진다.10여 리를 가니 묵밭이 나오는데 잡초가 우거졌다.그 안에 절벽이 있고 4~5길쯤 되는 폭포에 물이 쏟아진다.
정구(鄭逑 1,543~1,620)
자는 도가(道可),호는 한강(寒岡).본관은 청주.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일컬었다.7세 때 《논어》와 《대학》을 배워 대의를 통하였으며,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이 되어 《주역》 등을 배웠다.겨우 건(乾)·곤(坤)두 괘만 배우고 나머지는 유취하여 8괘와 64괘의 뜻을 쉽게 통하였다 하니 그의 재주가 얼마나 비상하였던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그 이듬해 상경하여 과장(科場)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귀향하였고,그 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구도의 일념으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수령직을 맡을 때마다 그 고장의 산천·물산·고적·인정·풍속 따위를 조사,수집하여 내용을 정리한 7종의 읍지(邑誌)를 간행하였는데,현존하는 것은 《함주지 咸州誌》 하나뿐이다.한강은 자유분방한 그의 기질대로 조선조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꼽힌다.가야산 기행(遊伽倻山記)도 그의 빼어난 에세이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