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그리움으로 걷는 백두대간-14구간<신의터재-비재>

청산신남석 2006. 7. 7. 19:43

 

 

                  산의터재-무지개산-윤지미산-화령재-봉황산-비재(2004.1.14)

 

 

지난 구간 하산지점인 신의터재에 다다랐다.점심도시락과 무거운 장비를 봉고에 내려놓고 스패츠를 신으며 산행채비를 하고 있다.

 

 

백두14차 끊어타기의 화두는 단연 심설산행이었다.신의터재 일원에 눈은 내리지 않았으나 지난번에 내린 눈이 녹지 않아 사위는 은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신의터재 빗돌과 대간분수령을 등지고 종주팀이 출발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 왼쪽부터 전기환,신남석,이재화,김익수,김황세, 김현기 대원이 자세를 잡았다.오늘 종주에는 손의선,강호철,최금구 회원이 불참해 못내 아쉬움을 남겼다.특히 지난해 4월부터 대간을 끊어타면서 눈 산행은 처음이었는데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다니...아마 금년 12월쯤 돼야 심설산행을 다시 할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아쉬울 것인가.!

 

이번 구간도 상주의 중화지역을 지나는 만큼 대체로 야트막한 야산을 밟아나가야 한다.오늘 구간 가운데 가장 높은 봉황산(740.8m)을 제외하곤 거의 300~500미터급의 야산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사진은 기묵 아우의 전송을 받으며 신의터재를 떠난 종주팀을 카메라에 담았다.동기들 뒤로 상주시 내서면 낙서리에서 신의터재를 거쳐 상주시 화동면 면소재지로 이어지는 지방도로,그 뒤쪽에 의사(義士) 김준신을 기리는 빗돌과 낙동강과 금강의 물가름 표지판이 보이고 논과 밭,산자락에는 잔설이 새하얗다.

 

 

 

 

8시 10분,신의터재에서 도로를 건넌 뒤 10미터 가량 농로를 따라 가다 오른쪽(북동)으로 붙으면 묘지가 나오고 완만하게 이어진 능선을 타고 329.6봉을 넘어서자 농로가 나온다.작은노루골 농로다.성긴 나뭇가지 사이로 대간 왼편의 화동면 선교리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농로에서 완만한 능선을 넘자 밭이 전개되면서 두 번째 농로가 나온다.노루골 농로다.여기서 제법 가파른 능선을 짧게 치올라 370봉을 넘어서면 곰터골이다.사진은 곰터골 잘룩이에 펼쳐지는 밭(300m)에 다다라 눈밭을 배경으로 선 종주팀의 모습이다.

 

 

 

 

8시 58분,곰터골 밭두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2분쯤 발품을 팔자 오른쪽 장자골로 빠지는 갈림길(310m)이 나온다.대간은 계속해서 동진한다.완만한 능선을 타고 가다 9시 13분,대간이 북진하는 봉우리(350m)에 이르렀다.

 

이제 무지개산으로 올라간다.9시 30분,무지개산 어깨쭉지인 390미터 지점에 이르자 대간은 무지개산 정상(438.2m)으로 오르지 않고 왼쪽(북서) 산줄기를 따라 방향을 틀어 내려간다.360봉을 거쳐 10분 뒤,310m 잘룩이로 내려섰다.야트막한 봉우리를 오르내려 10시 8분,대간이 북서진하다 북동진하는 360봉에 다다랐다.그 분기봉인 360봉을 내려오다 선두의 재화와 황세를 카메라에 담았다.

 

 

대간이 북동진하는 360봉 비알을 내려서다 조금 있으니 후미의 익수,기환,현기가 들이닥친다.재화는 먼저 떠나버리고 황세를 비롯,익수,기환,현기가 함께 했다.

 

 

대간이 북서진하며 북동쪽으로 방향을 트는 360봉을 내려와 10시 20분,오른쪽 무지개폭포로 빠지는 갈림길에 다다랐으나 그 하산길은 눈이 덮여 분명치 않았다.얼핏 산데기못이 가늠될 뿐이었다.그런데 지형도에 따르면 이 근처에서 대간마루 왼편 바투 아래로 판곡저수지가 보인다고 돼 있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저수지가 보이지 않았다.나중에 윤지미산에 올라 살펴보니 판곡저수지의 규모가 매우 축소되어 있기 때문에 저수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이제 흰 눈을 뒤집어 쓴 꼬깔처럼 뾰족한 윤지미산이 보인다.대간분기봉인 437.7봉에 올라선다.10시 37분이었다.사진은 437.7봉 지난 능선에서 종주팀이 함께 했다.

 

 

대간이 북서쪽으로 갈래치는 437.7봉을 지나자 대간마루에는 점점 눈이 깊게 쌓여 있다.소나무 가지마다 하얀 눈송이를 이고 있어 경치가 좋았다.사진은 대간분기봉인 437.7봉을 지난 종주팀이 윤지미산으로 가다 멋진 설경을 한 컷트 했다.

 

 

10시 58분,드디어 윤지미산 정수리에 다다랐다.멀리서 볼 때는 가파른 모양새였으나 막상 정수리에 오르자 펑퍼짐하다.정수리에는 그 흔한 빗돌도 안내판도 없었지만 양철판을 나뭇가지에 걸어놓아 이곳이 윤지미산임을 알리고 있었다. 윤지미산은 그 산이름이 참으로 독특하다.김지미산도 아니고 왜 윤지미산일까? 친구들은 다들 그 묘한 이름에 한마디씩 내뱉는다.우리는 배낭을 벗어놓고 갈증을 축이며 8분 가량 다리쉼을 했다.

 

 

김익수 동기가 윤지미산 정수리에서 자세를 잡았다.산행에 프로가 되면 입심도 세어지고 술심도 좋아지는 모양이다.2년 전 낙남정간 완주에 이어 대간 종주의 정예멤버로 성장했으니 산행도 산행이려니와 이에 못지 않게 입심과 술심 또한 한 차원 높아졌으니 이는 딱히 익수를 두고 이르는 말일 터이다. 

 

 

부산시의사회 산행클럽인 "인봉회"의 산행대장을 맡고 있는 김황세 동기가 포즈를 잡았다.

 

 

이일산우회의 영원한 총무,이재화 동기가 윤지미산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2003년도 우리 이일산우회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활약을 보여 자타가 공인하는 MVP감인 전기환 동기가 윤지미산 정수리에서 자세를 잡았다.

 

 

이일산우회의 후미를 맡고 있는 김현기 동기가 윤지미산 정수리에서 포즈를 잡았다.무슨 상념이 그리 깊은지 두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다.

 

 

11시 6분,윤지미산(538m)에서 내려간다.하산길은 매우 까꿀막지고 미끄럽기 이를 데 없었다.표고 538미터에서 440미터 지점까지 400미터의 거리를 한없이 치고내려가야 한다.윤지미산 정수리를 떠나자마자 하산길이 가파르기 시작하여 등산로가 나 있는 곳으로 내려올 때는 몸의 중심을 잘못 잡으면 사정없이 나뒹굴 형편이었다.이럴 때는 될 수 있으면 등산로 옆을 따라 나뭇가지에 의지하거나 스틱을 써서 내려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일행이 막 하산길에 접어들었을 때 한무리의 대간꾼들이 윤지미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약 30명은 됨직했다.그들가운데 어떤 이는 배낭도 없이,운동화 차림으로 그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어 처음에는 그냥 윤지미산 산행을 하는 등산객이겠거니 생각했다.그러나 내가 가파른 내리막길을 빠져나와 완만한 능선을 가고 있을 때 옷차림이며 걸음걸이가 여늬 등산객과 다른 산꾼을 만났다.그는 대전의 장비점,바위산장을 운영하며 대간을 인솔하는 리더였다.화령재에서 신의터재를 거쳐 지기재까지 종주한다는 것이었다.이제 종주방법에 따라서는 백두대간도 얼마든지 완주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 같아 씁쓰레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헤어지고 소나무 잡목구간을 지나 360봉 근처에 오니 근사한 묘지가 나온다.그곳에서 일행을 기다리며 우리가 하산한 윤지미산을 바라보니 윤지미산은 희끄무레한 눈 속에 쌓여 있고 가파른 하산길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사진은 360봉 근처의 묘지에서 윤지미산을 등진 일행을 카메라에 담았다.

 

 

360봉 정수리 근처에 있는 묘지에서 우리가 하산한 윤지미산을 좀더 클로즈업했다.정상에서 왼쪽 하얗게 띠가 열린 산줄기를 타고 내려서다 그 산줄기 오른쪽으로 희미한 하산길이 열려 있다.윤지미산은 비록 높이(538m)는 낮을망정 그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그 묘지에서 윤지미산 오른쪽을 조망한다.저멀리 무지개산이 아스라하게 잡힌다.

 

 

절반은 백설이 덮고 있고 절반은 눈이 녹은 묘지에서 김현기,김익수,전기환 동기가 윤지미산을 등지고 포즈를 잡았다.
 

 

11시 33분까지 360봉 묘지에서 윤지미산과 무지개산 일원을 살펴보고 대간길을 잇는다.360봉을 넘어 2분쯤 가자 농로가 나오고 밭두렁길을 걸어나간다.420봉을 넘어서자 임도와 마주친다.화서면 신봉리 수청거리와 화동면 판곡리 전대를 이어주는 신봉임도다.사진은 임도 삼거리에 다다른 동기들을 한자리에 모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봉임도에서 봉우리 하나를 넘어서니 화령재가 지척이다.12시 4분,화령재에 다다르니 기묵 아우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화령재에는 화령재를 알리는 표석과 팔각정 정자가 있었다.그러나 한겨울에 화령정에서 점심을 들기에는 마땅하지 않았다.한 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우리는 기묵 아우의 봉고안에서 라면을 끓여 가져온 도시락과 함께 점심을 들었다.사진은 점심을 들고 오후 산행을 하기에 앞서 화령재 빗돌을 중심으로 선 종주팀의 모습이다.

 

 

화령재(火嶺)는 상주에서 보은으로 이어지는 25번 국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다.한문 그대로 풀이하면 불재로 고갯마루 부근에는 화산재처럼 보이는 시꺼먼 재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화령재에는 해발 320미터로 빗돌이 있고 뒷면에는 화서의 연혁이 적혀 있으며,풍류를 즐길 수 있는 화령정 정자와 대형차량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물은 25번 국도 옆 자연부락인 수청거리 마을에서 준비를 해야 한다.

 

오후 종주에 들어가기에 앞서 화령정과 화령재의 빗돌을 중심으로 종주팀이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을 찍고나자 아침에 지기재에서 만났던 대간종주팀 5명을 또 다시 만났다.이들은 인천에서 온 젊은 대간팀으로 화령재에서 종주를 끝내고 비재로 하산키로 한 일행의 다른 팀을 만나기 위해 떠난다고 했다.우리는 서로 대간종주의 성공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오후 1시 9분까지 점심을 들고 봉황산으로 떠난다.화령재(330m) 고갯마루에서 25번 국도 따라 화령(왼쪽)으로 3분 정도 걸으니 상곡1리 마을 표석과 하송으로 빠지는 지방도 바로 옆 도로표지판 뒤 잣나무 능선으로 붙어 잡목을 헤쳐나간다.산불감시초소가 있는 570봉까지는 조망이 트이지 않은 울창한 숲속길이다.대간은 거의 북서진하며 그 왼편은 화서면 상현리,그 오른편은 화서면 하송리를 지나게 된다.

 

화송 골짜기 일대는 한국전쟁 개전 초기 국군 수도사단 17연대가 북괴군 15사단 주력부대를 궤멸시켜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의 영광과 낙동강 교도보를 확보하는데 최대공헌을 했다는 화령장전투 지역이다.이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전적비가 화서면소재지인 신봉(화령)으로 들어가는 삼거리 오른쪽 산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1시 46분,460봉을 지나면서 대간은 서서히 고도를 높여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570봉에 이르게 되는데 눈은 발목까지 빠지고 가풀막진 오르막길이다.점심 때,화령재에서 기묵 아우의 쌍안경으로 산불감시초소를 살펴보니 나뭇가지에 눈이 많이 쌓여 있어 온통 은세계를 이루고 있었다.그래서 봉황산을 내려갈 때는 크램폰을 차야 할 듯했다.2시 8분 산불감시초소에 올라섰다.

 

드디어 조망이 트인다.속리산 형제봉 일원이 얼핏 보이고 견훤산성이 있는 대궐터산과 청계산,그리고 봉황산이 눈에 들어왔다.사진은 산불감시초소에서 바라본 봉황산의 모습이다.

 

 

산불감시초소에서 형제봉과 속리산 일원을 조망했으나 날이 어두워 흐릿하다.

 

 

정북으로 대궐터산 그 뒤로 두루봉 암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옛 후백제의 견훤이 상주에 나라를 세우고 대궐과 성을 쌓았다는 산으로 대궐터산으로 부르나 이 산 전체는 청계산이다.대궐터산은 견훤산성이 있는 앞쪽 봉우리를 일컫고 그 뒤의 암봉을 두루봉이라 한다.앞으로 가야 할 능선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구름을 이고 있는 형제봉 그 뒤 속리산 암릉연봉이 장관을 이루지만 어두워 그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대궐터산을 클로즈업한다.단풍이 아름답고 암릉이 아기자기하여 만추의 산행지로 이름 높다.

 

 

화서면사무소가 있는 화령(신봉리)은 고개 들머리에 놓인 작은 산읍이다.신라가 답달비( 達匕)라 하다가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친 것을 훗날 현으로 바꾸어 상주목 아래 두었다.택리지에는,"상주 서쪽은 화령(火嶺)이요 고개 서쪽은 충청도 보은인데 화령은 소재 노수신(1515-1590)의 고향"이라 하였다.오늘날에는 25번 국도가 지나지만 딱히 들어 내세울만 한 물산이나 풍습이 없는 탓에 여전히 한적한 시골을 면치 못한 곳이다.굳이 들자면,고려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화령 장터가 아직도 소문난 닷새장으로 유명하다.

 

 

산불감시초소에서 윤지미산의 모습을 뒤돌아본다.

 

 

2시 20분까지 산불감시초소(570m)에서 인근의 산들을 조망하고 봉황산으로 오른다.첫 번째 봉우리를 지나 두 번째 봉우리에 이르러 봉황산을 살펴본다.2번째와 3번째 소나무가 서 있는 봉우리는 암봉으로 그 암봉 왼쪽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네 번째 암봉 오르는 길은 매우 가팔라 이마에 땀이 흐른다.눈은 더 깊어 발길을 옮기기가 힘이 들 지경이었다.그런데 4번째 봉우리에 올라서면서 눈이 나풀나풀 내리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주위가 어두워진다.봉황산 정상으로 오르기 전 70미터 지점에서 왼편으로 갈림길이 나 있다.반송 또는 백운사로 내려가는 봉황산 남릉길이다.

 

 

봉황산 정상에 거의 다 올랐을 무렵 봉황산 동릉인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570봉을 뒤돌아본다.

 

 

2시 53분,봉황산 정수리에 올라섰다.시나브로 내리던 눈은 이제 세차게 쏟아져 모자며,배낭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설국(雪國)으로 만들었다.우리는 배낭커버를 씌우고 하산에 대비했다.1,300여년 전 봉황새가 이 산에 날아들어 30여년 가량 살았다는 전설에서 산이름이 비롯됐다는 봉황산-인근에서는 "정상을 봉황머리처럼 원만하게 빼어 올리고 좌우 양 날개를 길게 펼친 형국이 봉황새 같아서"라고도 한다.


화령은 행정구역으로는 화서면이지만 지역 사람들에게는 화령으로 더 알려져 있다.옛날 화령현 소재지였던 까닭이다.중종의 태를 묻었다는 전설에 힘입어 마을에서 태봉산(胎封山)이라 부르는 봉황산은 송천을 발원시키는 화령의 진산(鎭山)이다.송천이란 황간 백화산 일원을 휘감아도는 석천이 황간에서 몸을 섞는 금강의 지류다."증보문헌비고" 의 기록에는"송천은 상주의 구봉산(九峯山)에서 발원하여 화령(化寧)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른다."고 하였다.

 

여기서 구봉산은 봉황산을 잘못 지칭한 것으로 보이며,봉황산에서 발원하는 이소천이 석천을 거쳐 황간의 송천에 이르기 때문이다.물론 봉황산 동쪽,즉 대간 분수령 오른편으로 흘러드는 이안천은 상주벌을 적시다가 낙동강으로 스며들어 그 물에 제 몸을 섞는다.

 

 

봉황산에서 비재로 내려간다.눈이 쏟아져내리면서 주위를 다 묻어버린다.눈 앞에 보이던 형제봉도,청계산도,산불감시초소도 아예 사라져버렸다.모든 색을 다 앗아가버리기 때문에 흰색은 위대하다.고요하다.너무 고요해서 발밑에 밟히는 사그락거리는 눈소리에 가슴이 철렁 울린다.조용히 눈 내리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눈이 내리면 마음이 이토록 편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봉황산에서 하산길에 들어 왼쪽으로 암릉을 돌아내린다.친구들은 등산화에 크램폰을 차 미끄러짐을 방지한다.그러나 빙판길이라면 몰라도 눈이 내릴 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체력이 많이 소비돼 나는 가능하면 크램폰을 사용을 절제한다.암릉 두 곳을 돌아내리고 또 하나의 암릉을 게걸음 것듯 통과하여 완만한 능선에 다다랐으나 친구들은 첫번째 암릉구간에서 옴짝않고 있는 게 보였다.바위를 돌아내려오면서 익수의 크램폰이 바위 틈서리에 끼여 그랬다는 것이다.발목까지 빠지던 눈은 종아리까지 파고 들고 사위는 어슴프레하다.710봉에 다다르자 하산길은 완만하다.사진은 660봉으로 내려가는 선두의 황세와 재화를 화인더에 담았다.

 

 

660봉에 다다랐다.660봉은 서진하던 대간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북진하는 분기봉이다.이제 비재까지 약 2km가량 남았다.사진은 660봉 내리막길에서 종주팀이 함께 했다.

 

 

660봉 내리막길에서 종주팀을 다른 각도에서 화인더에 담았다.눈이 내려 사람의 발자국을 지운 산길은 신설(新雪) 그 자체였다.이대로 2시간가량 지나면 등산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오후 3시 30분,660봉을 지나 완만한 능선을 쏜살같이 치내려온다.대간은 북쪽으로 내려서다가 서서히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4시 20분,잘 단장된 묘지에 이르자 대간은 왼쪽 봉우리(500m)로 오르지 않고 오른쪽(북)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꺾는다.4시 27분,해발 330미터의 비재에 내려섰다.잠시 뒤 재화가 비재로 내려서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에서 화남면 평온리로 넘어가는 지방도로가 고갯마루를 지나간다.재화 오른편 나뭇가지에 울긋불긋한 대간종주 리번이 보이고 우리는 그 산비알을 타고 비재로 내려섰다.

 

 

재화가 내려온 다음 잠시 뒤 황세가 비재로 내려서고 있다.
 

 

2분 뒤,후미의 기환,익수 그리고 현기가 비재로 내려서면서 종주를 마감했다.오늘 종주는 눈길을 밟은 심설산행으로 무척 감회가 깊었다.특히 봉황산 정상으로 오르면서부터 내린 눈은 비재에 도착하고나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우리를 기쁘게 했으니 뿌듯하게 가슴속에 차오르는 이 환희를 무어라 이를 것인가?

 

 

우리는 눈 범벅이 된 신발을 털고 기묵 아우의 봉고에 탑승,부산으로 직행하여 문경약돌돼지에서 백두대간 신년회를 가졌다.오늘 불참한 의선이와 전기환 동기의 안사람인 박영란씨도 신년회에 동참했다.의선이는 불참한 죄로 양주 한 병을 가져왔으며 영란 씨는 양주 2병을 선선히 내놓아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아뭏튼 2004년 신년 백두대간 첫 종주는 이렇게 막을 내렸고 오는 3월 말 또는 4월 초 속리산 산행을 기다리게 되었다.벌써부터 우리의 발걸음은 백두대간 속리산(俗離山) 마루금을 밟고 있으니....우리를 이속(離俗)케 하는 속리산(俗離山)은 속세를 떠나는 산이 아니다.이름하여 산은 결코 속세를 떠나지 않는다.다만 풍진 사바가 늘 산을 버리고 어름더듬 속세의 경계를 짓는다.속리산은 항용 속세에 머무는데 정작 속세는 유별하여 자꾸만 속리산을 떠난다.산문(山門)이란 본래 오는 이 가로막지 않고 가는 이 부여잡지 않는 곳.산이 또한 거기 있기 위하여 오래 전 아주 먼 곳을 떠나오고,거기 있으되 늘 어디론가 마음 실려가고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속세에 머물되 속되지 않고, 속되지 않되 늘 속세에 머무는 산.속리산이 우리를 기다린다.친구들이여!

 

[종주정보]

 

08:10 신의터재(280)......<0.75km>......329.6봉.....<0.19km>....08:30 농로(290m)....<1.31km>....09:00 갈림길(310m)...<0.81km>....09:30 390봉[(무지개산 438.2 어깨)]....<0.55km>....09:40 310m 잘룩이...<0.87km>.....10:08 360봉(북동진 분기봉).....<0.87km>....10:22 360봉.....<0.83km>....10:37 437.7봉....<0.8km>.....10:58-11:06 윤지미산(538)....<1.25km>.....11:27 390봉....<0.25km>.....420봉...<1.28km>....11:44 임도삼거리(350)....12:10-12:09 화령재(330).....<1.75km>....13:46 460봉.....<0.95km>......14:08-14:20 570봉(산불감시초소).....580봉.....643봉....<1.25km>....14:53-15:00 봉황산(740.8).....710봉.......<1.4km>.....15:35 660봉(대간 분기봉).....460봉...<1.95km>...16:20-16:25 묘지(420m).....16:30-16:35 비재(330)

*종주거리:17.06km
*종주시간:8시간 2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