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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이 깃든 소쇄원을 찾아서

청산신남석 2006. 7. 4. 01:10

 [대봉대로 가며 건너다본 광풍각과 제월당]

 

 

지난 6월 25일,추월산 합동산행을 마친 우리는 서둘러 소쇄원(瀟灑園)으로 발길을 옮겼다.담양읍을 지나 창평을 거쳐 고서에서 887번 지방도로로 접어든다.장쾌한 메타쉐쿼이어 가로수 길을 따라 소쇄원으로 가는 길 곳곳에는 정자와 원림을 알리는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담양은 서북에서 솟은 골짜기의 물들이 흘러 영산강을 이루면서 휘돌아나간 탓에 그 평지의 크기가 넓고 땅이 비옥하여 예부터 경제적 풍요를 이룬 곳이다.그 경제력은 당대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바탕이 되어 숱한 학자들을 배출하였고,중앙 정계에서 은퇴하거나 각종 사화로 인해 밀려난 선비들은 이곳으로 다시 낙향하여 학문에 힘쓰게 된다.


수양과 학문뿐 아니라 선비문화의 형성 또한 중요한 일이었으니 그것들을 위한 터전인 정자나 별서를 가꾸는 일은 그들 정신세계의 총체적인 산물이었다.소쇄원을 비롯하여 면앙정,명옥헌,송강정,식영정 등이 대표적인 것들인데 그 중에서도 소쇄원은 주거기능을 갖춘 별서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정원건축으로 평가받는다.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에 자리잡은 소쇄원.1981년 국가사적 304호로 지정된 한국 민간정원의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와 순응,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서 경관의 아름다움이 빼어난 문화유산의 보배이다.

   

전체 공간은 1,400여평에 지나지 않으나 그 안에 조성된 건축물,조형물은 상징적 체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조화를 이뤄내며,그 안에 조선 선비들의 심상(心象)이 오롯이 묻어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땅에 남아 있는 우리의 문화유적들은 거지반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누가 언제,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나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까운데 소쇄원은 그렇지가 않다.누대에 걸쳐 원림을 조성하면서 만든 "소쇄원도"가 지금껏 전해오며,많은 관련 자료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내가 소쇄원을 주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문헌과 기록에 있다 하겠다.이러한 기록의 계승은 바로 전통이며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있는 소쇄원 안내도-맨 뒷쪽 건물은 제월당,그 앞

   쪽 건물이 광풍각이며,소쇄원계곡이 동족에서 광풍각 앞을
    관통하며 남서쪽으로 흐른다.소쇄원 들머리는 사진 왼쪽
아랫 부분에 있다.]  
 
 
무등산 북쪽에 있는 광주호를 끼고 가사문학관과 이웃한 소새원에 다다랐다.소쇄원 입구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없던 허름한 매표소에서 종가집 사람들이 입장료를 받고 있었는데 세계문화유산을 신청했다는 소쇄원의 위상에 전혀 걸맞지 않아 눈쌀을 찌프리게 했다.

 

매표소를 지나면 죽향의 고장답게 환상적인 대나무 숲이 반긴다.“새로운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휴대폰 광고에 등장했던 바로 그 숲이다.그렇지만 광고에서처럼 대나무 숲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큰 길’이 나버린 '현대적’입구.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원림을 조성한 뜻을 살려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하는 대숲이다.

 

 [하늘로 쭉쭉 뻗어오른 청정 대숲]

 

  [어두침침한 대숲 터널을 따라 길은 이어지고]

 

[대숲을 빠져나오면 문득 밝고 맑은 별천지가!]

 

울창한 대나무 숲이 만드는 울타리와 물길 사이로 난 좁고 길다란 길은 속세를 빠져나와 선계로 오르는 순례길이어서,흐르는 물소리에 대나무 숲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얼비춰 만드는 그 오묘한 분위기에 이미 우리의 마음을 씻는다.

 

대숲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홀연,역동적인 풍경의 계곡이 밝은 햇살을 받으며 열리는데 그 생김새가 매우 오묘하다.북쪽 계곡에서 흘러온 물길이 크고 작은 바위 틈과 위를 지나며 부딪치고 모아져서 서로 다른 소리를 만들어 계곡 안을 가득 채운다.

 

처음으로 연못을 만난다.연못 왼쪽 밑으로 계곡이 있고 그 건너편에 광풍각과 제월당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옛집이 있으며 곧장 가면 담장과 대봉대가 나온다.

 

                                                                          [대나무 홈통으로 물을 흐르게 하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물레방을 돌렸다는 연못에 수목의 그림자 비껴] 

 

소쇄원(瀟灑園)을 만든 양산보(梁山甫;1503∼1557)는 연산군 9년에 태어나 열다섯살 때 아버지를 따라 한양에 올라가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생이 된다.2년 뒤에 과거에 1차 급제하였다.그러나 바로 이 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돼 스승이 능주에 유배되고 이어서 사약을 받게 되자 장례를 치르고 자신이 성장했던 이곳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마음에 담아왔던 이곳 산기슭에 계곡을 중심으로 자연미를 살려 조성한 것이 소쇄원.언제부터 작업을 시작했는지 분명치는 않으나,여러 기록으로 미뤄 1530년대에 시작해 3대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여기서 그는 처남 김윤제(金允悌),외사촌형 면앙정 송순(宋淳),사돈 김인후(金麟厚)를 비롯,당대의 쟁쟁한 선비들과 교류하며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세파의 표면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라는 뜻의 처사공(處士公)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소쇄(瀟灑)란‘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로 쓰였다고 하며 아예 양산보를 소쇄옹으로 부르기도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봉대와 광풍각,제월당이 있고,긴 담장이 동쪽에 걸쳐 있으며,북쪽 산비탈에서 흘러내린 물이 소쇄원 중심을 관통하여 흐른다.


소쇄원의 주요 조경수목은 대나무와 매화,오동,동백,배롱,산사나무,측백,치자,살구,산수유,홍매화 등이 있으며,초본류는 석창포와 창포,맥문동,꽃무릇,국화 등이 있다.조경물로는 너럭바위,우물,탑암과 두 개의 연못이 있으며,계곡을 이용한 석축과 담장이 어울린 곳이다.

 

 

소새원은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탓에 이곳에 훌쩍 둘러본 탐방객들은 소새원을 단순한 은둔처나 정자 몇 채가 들어서 있는 정원으로 보기 쉽다.그러나 퇴계와 논쟁으로 유명한 기대승(奇大升),송강 정철,고경명 등 숱한 명사들은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김인후 같은 이는 소쇄원 48영(詠)을 지어놓고도 후에 10편의 시를 추가했으니 단순한 원림이나 경치 좋은 곳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소쇄원은 이처럼,세상과 이치를 놓고 고담준론하던 선비들의 학맥(學脈)이 숨쉬고 정신이 깃들어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원림(園林)이다.사진은 대봉대(待鳳臺)로 그 옛날의 모습은 찾을 길 없지만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정자였다고 한다.

 

[예스런 맛은 사라졌지만 손님을 맞아했다는 대봉대]

 
일본에서 들어온 정원(庭園)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주택에다 인공 조경을 해 동산이나 꽃밭을‘연출’한 것에 붙여진다.우리나라의 원림(園林)은 동산이나 숲의 자연적인 상태를 조경의 기반으로 삼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적절한 위치에 정자와 같은 건축물을 배치한 것이다.

 

광풍각 온돌방에 걸려있는 소쇄원 전경을 보아도 예전에 있었던 건물과 계곡 그리고 나무들의 배치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소쇄원으로 들어서면,입구 왼쪽 계곡에 간격을 두고 두 개의 연못이 있다.계곡물이 내려와 위쪽 못을 채우고 그 넘친 물이 다시 내려오며 지금은 없지만 물레방아를 돌려 이 흐름을 건너편에서도 감상하도록 설계됐다.대체적 모습은 계곡 물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이자 비대칭적인 산수원림이다.

 

[부모의 사랑을 기린다는 애양단(愛陽壇)]


기와 지붕을 덮고 흙으로 새막이를 한 ㄱ자의 흙돌담은 은근하게 외부와 경계를 이루고 있지만 완전히 막혀있지 않아 별도의 출입문이 있는 것은 아니다.바깥쪽과 자연스럽게 차단한 지혜가 돋보인다.이 담장과 경계를 이룬 부분까지 현재 실제로 등록돼 있는 면적 1천 400평 정도가 현재의 소쇄원 규모지만,‘소쇄원사실’이라는 문헌이나,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담 밖의 영역,즉 외원까지 포함해 그 범위가 만여평에 이르는 것으로 돼 있다.사진은 소쇄원 동편의 담장인데 애양단(愛陽壇)이란 글씨가 씌여 있다.

 

아래에 보이는 사진은 대봉대를 지나 제월당으로 가는 다리에서 굽어본 광풍각의 모습으로 며칠 전부터 비가 와 개울물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담밑에 널찍한 돌을 괸 두 개의 구멍을 통하여 흘러 들어오는 계곡물도 절묘한 연출이다.자연을 거스리지 않으려는‘인공’의 겸손함이 그대로 배어 있다.김인후는 소쇄원 48영에서‘담장 밑을 통해 흐르는 물(垣竅透流)’을 통해 학도(學道)의 근원은 모르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상 인심을 안타까워했다.

“걸음걸음 흘러가는 물결을 보며/ 시를 읊조리니 생각은 더욱 그윽해 /참 근원을 거슬던 사람은 없고 / 헛되이 물 흐르는 담장 밑만 보네.”

 

                                       [소쇄원계곡에서 바라본 오곡문(五曲門):사진-한국일보]

 

두 개의 구멍이 뚫린 담장 밑으로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내원과 외원을 구분짓는 멋진 공간-원림의 바깥에서 오곡문을 바라본 풍광이다.

 

 

애양단에서 제월당으로 건너는 윗다리.계곡을 가로지른 외나무 다리를 보면 익살 맞은 의미까지 느껴진다.대패질하지 않은 통나무를 걸쳤었다니 얼마나 아찔했을까?소쇄원을 찾은 점잖은 선비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건너야 할 관문이었을 것이다.나무홈대로 물길을 만들어 연못으로 끌어들인 것에서는 일상적이지 않은 변화와 번뜩이는 재치를 느끼게 한다.

 

처사공은 자손들에게 소쇄원을 남에게 팔지 말 것과 돌 하나 계곡 한 구석이라도 상하지 않도록 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그 자신이 효(孝)를 몸소 실천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며,소쇄원가의 효 또한 특별히 남다른 때문에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4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쇄원이 보존돼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애양단에서 제월당으로 건너는 다리]

                  

제월당으로 가는 마당에서 뒤돌아본 노송-선비의 고고한 기품을 연상케 해준다.

 

[제월당 마당을 거니는 답사객] 

 

오곡문(五曲門)에서 제월당으로 가는 길 담장에 있는 소쇄원 제영(題詠). 

 

양지바른 언덕에 세워진 제월당(霽月堂)은 주인의 서재를 겸한 사랑채로 이용됐다.현판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글씨.특히‘월(月)’자는 유연하고 힘차 서예가들도 칭찬을 마다 않는 필체라고 한다.

 

부근에는 갖가지 꽃과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소나무 매화나무 대나무는 국화와 함께‘사군자’를 이뤄 마음을 다스린 것.자손의 번성을 상징하는 회화나무와 대추나무, 건강에 조심하며 오래오래 살라는 뜻의 살구나무도 있다.측백나무는 그 열매가 먹을 만드는 원료여서 깊은 학문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정면에서 바라본 제월당-우암 송시열의 현판 글씨가 돋보인다.]  

  

[옆에서 본 제월당과 동기들]

 

 [소쇄원 해설사의 설명을 경청하는 동기들]

 

 [제월당 안쪽 담장]

 

[제월당과 광풍각을 가르는 담장]

 

 [광풍각 쪽에서 본 제월당과 담장]

 

제월당 아래쪽에 있는 광풍각(光風閣)-'제월’과‘광풍’은 송나라 황정견이 유학자 주돈이의 사람됨을 평해‘흉회쇄락여광풍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이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가슴 속에 품은 뜻이 맑고 깨끗해 마치 비온 뒤의 햇빛과 청량한 바람 불어 맑은 날 밝게 비추는 달빛’에 스승 조광조의 인물됨을 비유해 지은 건물 이름이라는 것이다.이렇게 이름 하나하나에도 나름대로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의미로'각(閣)’은 석축이나 단상에 높게 지은 집으로 다소 격식이 있는 건물.'당(堂)’은 주거형식의 건물로 방이나 대청이 있는 건물을 말한다.‘정(亭)’이란 정자의 약어로 포괄적인 의미.'대(臺)’는 높이 쌓아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정자 형태다.

 

광풍각도 계곡 위로 축대를 여러 겹 쌓아 지은 것.물소리를 제대로 들으려고 축대 높이까지 조절한 것이라 하니 마루에서 들리는 조그만 소리도 예사롭게 넘길 수 없다.겨울철 난방을 위한 온돌방 한 칸을 가운데에 두고 사방이 여덟 칸 마루로 구성된 특이한 양식이다.온돌방의 세 방향으로 난 문을 열면 원림이 한눈에 들어온다.그 자연친화적인 설계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광풍각 옆모습-손님들의 사랑채였다.]

 

 [광풍각에 남아 있는 소쇄원도]

    
광풍각에서 묵어간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소쇄원가의 14대 종부도 새댁시절 이 물소리 때문에 몇 날을 한숨도 못잤다고 한다.물소리가 마치 빗소리처럼 들려서다.지금은 물이 적어 비가 많이 내린 뒤에야 제대로 들을 수 있지만,옛사람들은 소쇄원을‘소리의 정원’이라고 표현했다.물소리,새소리,대나무 바람소리,은은한 사찰의 종소리를 비롯,심지어 빗방울이 파초에 부딪는 소리까지 청각적인 요소가 많이 배려됐기 때문이며,이 소리를 그저 지나가는 자연의 소리에 그치지 않고 어떤 의미를 두어 시로써 승화시켰다.

[광풍각에서 올려다본 소쇄원 폭포]

 

[광풍각에서 건너다본 연못 일대]

 

[광풍각 앞 계곡]

 

                                                                                          [광풍각에서 올려다본 제월당]

 

[광풍각 아래에 있는 다리] 

 

한국의 정원을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과 견주어 한 수 아래로 치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기암괴석을 축조하여 화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중국 정원의 형식도 우리에겐 없고,일본의 정원에서 만나는 그 아기자기하고 섬세하여 숨막힐 듯한 정적인 아름다움 또한 우리가 갖지 못했다.그리하여 이 땅에는 정원의 수준이 현저히 낮다고 폄하하는 게 일반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고도로 세련된 지적 감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우리 선조들이 가진 자연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명료함을 넘어 지혜로움 그 자체였다.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아 인위적으로 과장된 표현을 하는 것을 금기로 여겼으며 놀이의 대상으로 자연을 농락하는 일을 경망스러운 것으로 알았다.자연은 그 자체가 선(善)이요 공존의 대상이어서 함께 어우러지는 우리 자신인 것이다.그 실증이 바로 이곳 소쇄원에 있는 것이다.

 

소쇄원 속에 이뤄진 공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위 사이에는 다리도 있고 징검돌도 있으며 세족할 공간도 있다.물레방아도 있고 연못도 있으며 경사진 지형을 오르기 위한 계단과 석축 등이 어울려 있는데 이들이 예사롭지가 않다.이들은 모두 인공 건조물이다.


그런데 이들이 앉음새를 보면 대단히 교묘하다.주인이 사는 높은 곳에 있는 제월당은 꽃과 나무와 담장과 수평으로 연결되는 정적 요소들로 이뤄져 있고,풍류의 손님들이 드나드는 광풍각은 그 모양도 활개치듯 오르는 처마선이 흐르는 물과 변화무쌍한 바위와 그들이 만드는 소리들과 함께 대단히 동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그 두 건물 사이에 주된 통로가 트여 있는데 이 길은 때로는 단을 디디고 때로는 바위를 건너며 때로는 물길을 돌아 서로를 이으면서 교류하게 하고 부딪치게 하여 일체를 이루게 하는 공간인 것이다.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바위는 더러 인공으로 절단되었으며 물길은 간혹 바꿔지기도 하고 지형은 조작되어 있다.그렇다면 어찌 이 공간을 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도 볼 수 있다.그러나 그 모든 조작의 결과가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여기에는 자연을 지배하려는 오만이 있는 것이 아니며 자연을 희롱하려 드는 어리석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이는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려는 자세이며 자연과 나를 동화시키는 지식인의 창조적 태도이다.이것이 진정한 소쇄의 정신 아니겠는가.그것은 오로지 양산보라는 인문학자가 지닌 작가정신이며 소쇄원은 바로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광풍각 아래 다리를 거쳐 다시 대숲 길을 더터 내려오면서 우리 선조들이 지녔던 자연과 사람에 대한 성찰의 깊이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이다.

 

[자료:소쇄원 홈페이지 http://www.soswaewon.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