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대운산 시명계곡-물과 숲의 하모니

청산신남석 2006. 5. 29. 23:59

                                      [시명사 지나 시명계곡 들머리]

 

 

부산 근교산 가운데서 대운산만한 음산(陰山)을 어디에서 찾을까? 높이래야 고작 742m에 지나지 않지만 품이 넓고 계곡도 여러 갈래로 질러져 있는데다 험하지 않은 훍산이라 그윽한 맛이 유별난 대운산(大雲山).

 

동쪽 산자락의 장안천과 남창의 상대천,서쪽 명곡을 적시는 시명천,서창의 큰골,탑골...그 어느 때 찾아도 산자락 고샅마다 수량이 풍부해서 한나절 쉬어 가기에 더없이 좋은 산이 대운산이다.그래서 대운산 하면 물과 숲이란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흔히들 장거리 명산에 가려면 길바닥에 뿌리는 비용도 비용이려니와 짜증나는 차량의 정체를 감수해야 한다.그렇게 찾은 산이 당일 산행이라면 고작 대여섯 시간 산행에 그칠 뿐이니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그렇게 먼거리 산행의 빠듯한 일정에 질려버린 산꾼들은 하여 일년 내내 대운산만 찾아들곤 한다.대운산에 푹 빠져 대운산만을 고집하는 이들을 우리는 [대운산 마니아]라고 부른다.부산에서 전철과 시내버스만 타면 가 닿을 수 있는 지근거리니 대운산만 찾는 이들의 논리를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동기회 새 총무를 맡은 최금구와 김익수,그리고 나 세 사람은 오늘은 대운산파가 되기로 했다.조용히 머리를 식힐 겸 명곡(椧谷)의 시명계곡으로 간다.시명사에 차를 두고 홈통골이라는 시명계곡을 거슬러 오른다.풍광이 좋은 곳이 나오면 어김없이 그곳에 주저앉아 다리쉼을 했다.

 


 

 

시명사를 벗어나면 갈림길이다.왼쪽으로 열린 등산로를 버리고 오른쪽 시명계곡을 거슬러 오른다.저 아래 명곡에서 대운산과 시명산 사이에 이뤄진 이 계곡은 크고 작은 지계곡까지 합치면 아흔아홉 골짜기라고 한다.

 

더러는 돌확을 건너 뛰기고 하고,커다란 암장을 돌아나서기도 한다.연두빛 신록의 스펙트럼이 골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그 위로 한없이 맑고 밝은 양광(陽光)이 쏟아진다.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수백만 톤의 햇빛 속에서 저마다 생기를 띈다.계곡을 거슬러 오르다가 넓은 소(沼)에 다다랐다.나뭇잎의 갖가지 미묘한 색갈이 그대로 물 위에 투영되고 바람이 불어 부채살처럼 그 물살이 퍼져나간다.그 속에 내 친구들이 앉았다. 


 

예전에 사람이 살았던 집터에 이르니 길은 두 갈래길이다.왼쪽으로 오르면 시명좌골 따라 대추나무봉과 큰골이 만나는 삼거리가 나오고 오른쪽 길은 시명우골 따라 장안사로 넘는 길이다.그러니 이곳은 시명계곡 두물머리인 셈이다.

산행안내판이 가리키는대로 장안사길로 들어섰다.다시 등산로를 벗어나 계곡을 더터오른다.시명우골은 시명좌골보다 협소하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인지 때가 묻지 않고 훨씬 깨끗해보였다.

시명우골을 거슬러 오르자 폭포가 나온다.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우리를 유혹한다.그 물살에 손을 디밀어 얼굴을 씼는다.보드랍기 그지없다.물은 저 아래로 아래로 흐르고 우리는 저 위 산만당으로 오를 것이다.그러다가 물처럼 다시 아래로 내려올 것이다.물은 저를 낮추며 아래로 아래로 흐른다.그래서 우린 물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시명우골]

 

시명우골을 더터오르다가 등산로로 올라섰다.오름길은 가파랐다.30분쯤 발품을 팔아 시명산 아랫턱에 이르자 등산로는 왼쪽 산허릿길로 열려 있다.그런데 산중턱을 지날 때까지는 진달래꽃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연분홍 철쭉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대운산과 시명산 사이 잘룩이 전망바위에 올라서자 진달래가 만개해 있다.같은 산이라도 고도 차이에 따라 개화시기가 이렇게 다른 것이다.대운산에 올랐다가 가파른 하산길로 내려와 만나는 이 전망바위에 서면 동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장안사 일원의 삼각산과 뭇 봉우리들도 조망된다.우리도 이 바위에서 목을 축기며 20여분 다리쉼을 했다


 

전망바위를 뒤로하고 대운산으로 오르다 왼쪽 산허릿길로 들어섰다.이 길을 따르면 시명좌골과 만나게 된다.봄이 오면,산야에는 봄을 알리는 노란색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난다.도심의 도로가에는 노란 개나리,산속에는 노랑 생강나무,산자락이나 물가에는 동의나물이 노란 꽃망울을 터트린다.양지꽃도 봄을 알리는 전령사다.

양지꽃은 이른 봄철 양지 쪽에서 자라 노랗게 꽃을 피운다 하여 양지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양지 바른 풀밭이나 물가에서 흔히 자라며 잎 모양은 딸기 잎을 닮았다.줄기는 비스듬히 옆으로 서고 긴 털이 있다.노란색 꽃은 줄기 끝에 10개 정도 달리며 5∼6월에 핀다.양지꽃은 봄에 피는 꽃답게 꽃말은 봄을 나타내며, 봄에 나오는 어린 순은 먹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96년 4월 6일,낙동정맥 종주 첫구간,태백에서 만난 양지꽃은 큰 감흥이었다.그때 양지꽃은 잔설(殘雪)을 뚫고 꽃망울을 터뜨렸으니 참으로 놀라웠다.그래서 내 산행수첩에는 그때의 감흥이 이렇게 적혀 있다.

      

      [양지꽃]



바라만 보아도 찬란하다.

양지녘에 핀 진노랑 양지꽃.

곁에 서 있어도 가슴 두근거린다.

지상에서 가장 낮은 그대여.

그대 향기 취해 오르는 산길,

내 몸 낮추어 그대에게 입 맞추면

그대는 환한 웃음 머금고

홀연히 하늘로 오르다

어둠에 잠기면,

은하수 건너 별똥별 하나 

내 가슴에 떨어진다.

먼 발치에서 보아도 눈 시리다.

가장 낮은 자의 높은 정신을

곁에만 서 있어도 가슴 두근거린다.

그대 가슴에 파묻히면 폭포소리 들린다.


 

대운산 산허릿길을 따라 시명좌골 상단에 이르렀다.이곳에서 곧장 등산로를 톺아오르면 큰골과 대추나무봉 능선이 만나는 삼거리.우리는 시명좌골로 내려간다.계곡을 건넌 뒤,등산로에서 벗어나 왼쪽 계곡으로 다가간다.야영터가 나온다.

이곳은 시명계곡에서 풍광이 빼어난 장소 가운데 하나다.등산로에서 슬쩍 떨어져 있어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고,맑고 깨끗한 물이 쉼없이 흐르고 바위가 있어,쉬기에도 안성맞춤이다.어디 그뿐이랴.바위 뒤쪽으로 5미터가량의 폭포가 숨겨져 있으니 시명계곡 최고의 명당터라 할 만하다.

 

우리 산우회가 대운산에 오면 점심을 들곤 하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오늘은 익수의 요청대로 밥을 짓고 된짱찌개를 끓여 점심을 들었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얼굴을 씻고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동아고 15산우회 부부팀 15명이 내려온다.평소 안면이 있는 데다 몇 차례 합동산행을 가졌기 때문에 친한 얼굴이 대부분이었다.15산우회도 자기들 안방처럼 사용하는 식당터가 바로 이곳이다.우리 세 사람은 시명사로 가기 위해 하산길에 들었다.


 

시명좌골 따라 내려간다.등산로는 계곡 오른편 산자락으로 열려 있다.짙은 녹음이 눈을 시원하게 했고 청량한 물소리는 세파에 찌든 속진(俗塵)을 씻어내리는 듯했다.게다가 오늘처럼 이렇게 시간에 구애받지 않은 산행이 참 좋았다.지난 몇년 동안 백두대간을 끊어타면서 우린 얼마나 시간에 쫒기고 안달해왔던가.경치 좋은 곳이 나오면 잠시 다리를 풀고 쉬었다.

시명좌골과 시명우골의 두 골물이 만나는 두물머리로 가기 위해 시명좌골 계곡물을 건넜다.이내 장안사 갈림길 안내판을 지나 또 다시 숲속길로 들어선다.여기서 두 차례 계곡물을 건너 시명사가 가까운 지점에 이르자 너른 반석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이 기다린다.나는 두 손을 그 물에 한참동안 담그고 얼굴을 씼었다.

4시간 동안의 대운산 시명계곡 산행은 한마디로 느긋하게 산수(山水)를 즐긴 산행이었다.부산으로 돌아오는 7번 국도에 늘어선 자량의 물결도 오늘은 왠지 짜증스럽지 않음은 시명계곡의 그윽함 때문이던가? 광속(光速)을 추구하던 우리에게 대운산이 브레이크를 건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