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에 숨어 살며
가야산에 숨어 살며
겹겹이 싸인 돌 사이로 미친 듯 흐르며
물줄기는 봉우리를 거듭 울리는데,
사람의 말소리는 가까이서도
알아듣기가 어렵구나.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
귀에 들릴까 늘 두려워서
짐짓,흐르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둘러싸게 하였다네.
최치원(崔致遠 857~?)
고운(孤雲) 최치원은 젊은 시절 넓은 세계에서 자신의 재주를 펼치기 위해 당나라로 건너갔다.자신의 표현을 빌면 졸지 않으려고 머리를 천정에 묶고 다리를 바늘로 찔러가며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6년 만에 빈공과에 급제하여 벼슬도 얻었다.
그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고운은 황소를 꾸짖는 격서를 보냈다.황소는 자신을 꾸짖는 치치원의 글을 읽다가,"천하의 사람들이 너를 죽일 생각을 할 뿐 아니라,땅 속의 귀신들까지도 몰래 너를 죽이자고 벌써 의논하였다."라는 귀절에 이르러서는 깜짝 놀라 침상에서 떨어지기까지 하였으며 결국 항복하였다.이것이 그 유명한 고운의 <토황소격문>이다.이때가 그의 나이 23세였으며 그로 인해 천하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라는 벼슬을 받아 궁궐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다.그러나 그는 변방의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끊임없는 소외와 고독을 느껴야 했다.그에게는 뛰어넘지 못할 장벽이 있었고,그는 다시 고향 신라를 그리워하였다.
마침내 그는 희종황제가 내린 사신의 자격으로 귀국하였다.그러나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국정은 극도로 문란해져 민란이 연이어 일어났고 국운은 이미 기울어버렸다.그는 마지막에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려 나라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진성여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운은 가야산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불교의 교리를 두고 정치적인 알력으로 갈라져 늘 시끄럽게 다투었다.산 밖에서 들려오는 세상의 다툼은 산속의 물소리로 막을 수 있었지만 바로 산속에서 벌어지는 스님들의 정치적인 싸움은 달리 피할 수가 없었다.이곳에서까지 고운은 조용하게 살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고운은 밖으로 나가 관과 신을 벗어둔 채 그는 영영 돌아오지를 않았다.전하기를 그가 사라진 곳은 남산제1봉으로 오르는 돼지골이라고 한다.가야산 일대에는 고운의 발자취가 흥건하다.청량사를 비롯,말년의 그가 머물렀다는 고운암,홍류동계곡-지금 홍류동 계곡에 있는 농산정 근처에 고운이 썼다 하는 이 시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세상에서는 그가 신선이 되어 갔다고 하지만 아마도 역사의 변환기에 대처하지 못하는 지식인으로서 고민 때문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