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그리움으로 걷는 백두대간-5구간 <선바위고개-덕유교육원 갈림길>

청산신남석 2006. 4. 16. 00:37

                                [무령고개,백두대간 해설판을 뒤에 두고] 

 

 

선바위고개-영취산-육십령-합미봉-덕유교육원갈림길 16km(2003.8.3)

 

 

8월 3일,백두대간 5구간 종주날이다.오늘은 지난 구간 하산지점인 무령고개에서 영취산에 오른 뒤,깃대봉과 육십령을 거쳐 합미봉,덕유서봉,남덕유로 해서 영각사로 내려오는 21.7km 구간으로 일정이 잡혔다.


그리고 8월 셋째주 토요일 오후 영각사에서 남덕유에 오른 다음,삿갓골재대피소에서 1박,8월 17일 당일 빼재까지 끊어타기로 했다.(이를 위해 현기는 8월 16일 삿갓골재대피소에 12명을 미리 예약해놓았다)


그런데 8월 3일,새벽 2시 50분 한양프라자 앞에 도착하자 컴컴한 어둠 속에 기환이 홀로 종주팀을 기다리고 있었다.8월 16일은 제사 때문에 1박 2일은 곤란하다는 엊저녁 그의 전화를 받은 터라,오늘 구간을 어디까지 끊어타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남덕유로 해서 설령 영각사로 내려선다 해도,다음 구간 하산지점을 끊기가 영 마뜩하지 않고,그 다음 지옥같은 남덕유 700개 철계단 오름길에 초장부터 기력을 빼앗길 터이니 말이다.그렇다고 까꿀막진 남덕유 철계단을 피해 월성치에서 황점으로 내려선다 해도 다시 월성치로 올라붙으려면 거의 3시간 가량 씨름을 해야 하니,어느 곳에서 탈출하더라도 대간마루금에 올라붙는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나는 다소 무리해서라도 오늘은 삿갓골재대피소까지 끊어타도록 종주코스를 연장하고 말았다.그렇다면 1박 하지 않고 8월 17일 당일 산행으로도 빼재까지 넉넉히 갈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삿갓골재대피소에서 황점까지 탈출거리를 합치면,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구간은 25km가 넘는 장거리.쉼없이 걸어도 저녁 6시 30분쯤 황점에 다다를 것이니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그런데다 덕유서봉 오름길이 가파르기 그지없어 강인한 체력과 인내 없이는 완주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장수군 장계면 "대중식당"에 봉고가 도착한 시각은 새벽 5시 10분.대낮같이 훤히 불을 밝힌 대중식당에 들어서자 구면의 그 뚱보 아지매는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지난번에 압도적으로 인기를 끈 "보신탕" 다섯 그릇과 된장찌개 두 그릇을 시켜 먹었다.새벽 5시에 보신탕을 먹기는 우리 생애 처음이라며 아지매한테 거듭 고마움을 전하고 무령고개로 떠났다.기묵이의 봉고는 육십령행 26번 도로를 따르다 삼봉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오동리를 지난다.이어 주곡저수지가 나오고 말끔히 단장된 주논개 생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논개가 태어난 주촌마을은 주곡저수지가 생기는 바람에 물에 잠겼고 논개 생가도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해놓았다.이곳 장수 사람들이 충절의 여신이라 자랑하는 주논개(朱論介)는 장수삼절(長水三絶) 가운데 으뜸이다.그 다음은 임란 때 빼어난 기개로 장수향교를 왜구로부터 지켜내 왜장마저도 그의 충성심과 기상에 탄복했다는 향교지기 정경손.삼절 가운데 마지막은 순의리(殉義吏)이다.장수현감 조종면이 전주 감영으로 가는 길에 천천리 장척애라는 험한 벼랑길을 지나다 홀연 꿩의 울음소리에 말이 놀라는 바람에 현감이 절벽밑으로 떨어져 소에 빠져 죽었다.이를 본 마부는 손가락을 깨물어 꿩과 말의 그림을 바위에 그리고 "타루(墮淚)" 두 자를 써놓고 물에 뛰어들어 자결했다.나중에 주인을 따라 죽은 노비의 충절을 가상하다고 사람들은 칭찬하였다.그 노비의 본명은 모르지만 그 자리에 타루비를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타루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6시 19분,무령고개에 다다라,백두대간 해설판을 배경으로 이재화,전기환,김황세,김현기,손의선 그리고 신남석 모두 6명이 5구간 출발에 앞서 기념촬영을 했다.

 


종주들머리 선바위고개로 가는 산골짜기 물가에는 물봉선화 군락이 예쁜 꽃을 피워올리고 있었다.봉선화는 대체로 깨끗한 물이 있는 산골짜기 혹은 냇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한해살이 풀이다.주로 물가에 산다고 해서 물 봉선화 혹은 인가가 아니고 산야에서 잘 산다고 해서 야 봉선화라고도 부른다.


보통은 무리를 이루고 깨끗한 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오염되지 않은 산골짜기 물기가 축축한 곳을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요즘은 인가 주위의 야산에는 많이 오염되어 점차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하지만 조금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쉽사리 만날 수 있다.


보통 물 봉선화는 키가 60cm정도 자라며 줄기부분이 아주 유연하고 부드러워 쉽게 부러진다.그리고 줄기의 상단부에만 잎이 나 있기 때문에 줄기부분이 아주 깨끗해 보인다.가장자리에 예리한 톱니를 가지고 있는 6-15cm 정도의 잎은 넓이가 3-7cm 정도 된다.주로 8-9월경에 붉은 자주색의 고깔 모양의 꽃이 피며 꽃의 끝 부분은 안으로 말려들어가 있다.그리고 꽃이 진 뒤 여무는 열매의 크기는 1-2cm정도로 꼬투리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삭과 안에 씨앗이 들어있는데 잘 터지기 때문에 봉선화의 씨앗처럼 "Touch - me -not" 이다.즉,다가가면 터져서 멀리까지 씨앗을 퍼뜨린다.현철의 봉선화 연정에 나오는 "손 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봉선화라 부르리"처럼 꽃말도 "나를 만지지 마세요"다.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봉선화는 인도에서 들어온 외래종이지만,이 물봉선화는 그야말로 이 땅에서 자라는 우리의 꽃이란 점에서 더욱 애착이 가는 꽃이다.

 

[선바위고개-산죽밭 뒤로 영취산 오름길이 열려있다.]  

 
무령고개는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갈려나온 호남금남정맥이 잠시 수긋해지다 장안산으로 나우리치는 들목이다.무령고개(930m)에서 영취산(1,075.6m)으로 오르려면 영취산 서릉 즉,절개지를 바로 치고 오르는 대신,영취산 오른쪽 산허리길을 에돌아 선바위고개로 해서 올라야 한다.무령고개에서 영취산 서릉으로 오르는 능선은 가파르고 길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무령고개를 떠나 15분 뒤,선바위고개(1,040m)에 다다랐다.지난 구간 무령고개로 탈출했던 종주날머리가 바로 선바위고개이다. 
 

[금남호남정맥이 갈래치는 영취산 정상에서]  

선바위고개에서 산죽밭을 헤치고 영취산으로 오른다.첫 봉에 오른 뒤,헬기장을 지나자 길은 훤히 트여 있다.반바지를 입었는데도 비가 오지 않고 이슬도 내리지 않아 지난 구간처럼 바지를 적실 염려는 없었다.날씨는 먼 산에 구름이 끼여 있을 뿐,쾌청하다.요즘 같은 장마철에 맑은 날씨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6시 45분,영취산 정수리에 다다르니 돌탑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그러나 주위 조망은 숲에 가려 신통치 않았다.
 


영취산 정상에서 백두대간은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 도계(道界)를 분수령 삼아 북진(北進)한다.그런데 영취산에서는 또 하나의 정맥이 갈래쳐 서진(西進)하니 이름하여 호남금남정맥이다.호남금남정맥은 무령고개에 와서 숨을 죽이다가 장수 장안산(1,236.9m)을 일으켜 세우고 진안의 운장산(주화산)에 이르러 북으로 금남정맥,남으로 호남정맥을 갈래쳐나간다.그러나 영취산 어디에도 그런 안내판이 전혀 없어 서운했다.단지 전북산사랑회에서 설치한 백두대간 이정표가 이곳이 영취산임을 알리고 있었다.

 

[영취산에서 바라본 대간마루금]

영취산 정상에서 우리가 밟아야 할 대간 마루금을 조망한다.5번째 하늘금을 그리는 높은 봉우리는 깃대봉(1,014.8m)이고,그 너머가 육십령이다.4번째 하늘금을 긋는 봉우리는 961봉.3번째 봉우리는 977.1봉.그 앞에 덕운봉 갈림봉이 보인다.대간마루금은 이렇게 이리 꿈틀 저리 꿈틀 용트림치며 나우리친다.대간이나 정맥을 종주하면서 마루금을 조망하다 보면 우리 산줄기가 흘러가는 그 맥을 짚어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게 된다.그럴 때 우리의 산들은 동떨어진 독립산이 아니라 서로 유기체로 연관되어 있으며,살아 숨쉬는 생명체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영취산에서 바라본 덕유서봉과 중첩된 산줄기]

이번에는 시야를 넓혀 덕유서봉과 남덕유 일원,우리가 밟아야 할 대간마루금을 조망한다.맨뒤 하늘을 가르며 우뚝 솟아 있는 산줄기는 남덕유 능선인데 황소 뿔처럼 보이는 왼쪽 봉우리가 덕유서봉이며 그 오른쪽 봉우리는 남덕유(1,507.4m)이다.그 앞의 능선이 깃대봉,남덕유와 깃대봉 사이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고 있는 봉우리는 합미봉이다.3번째가 977.1봉이며 맨앞이 덕운봉(983m) 능선이다.
 

[슬픈 전설을 간직한 며느리밥풀꽃]

옛날 외동아들 집에 며느리를 맞게 되었다.자식처럼 연인처럼 아들을 길러 온 홀어머니는 처음엔 잘 대해주다가,아들을 빼앗긴 듯한 느낌에 점점 심하게 박대를 했다. 어느 날 밥을 짓던 며느리는 밥이 다 익었는지 알아보려고 밥알 몇 개를 씹어 보다가 들켰다.미운 놈은 미운 짓만 보인다고,눈엣가시 같은 며느리에게 트집을 잡았다.시에미보다 먼저 밥을 먹었다고.(일설에는 조상에게 올리기도 전에 먼저 먹었다고 트집 잡았다는 얘기도 있다.) 당연히 습관처럼 오락처럼 사정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당연히 분통이 터지고 상처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변명도 못해 보고...그게 원통해서 속앓이 병으로 끝내 죽고 말았다.동네 사람들이 불쌍해서 정성껏 묻어주자,그 무덤에서 꽃이 피었다.마치 밥알을 안 먹고 입에 넣고 씹어만 봤다는 듯이 말없는 시위처럼 혓바닥에 밥알 두 개를 물고 있는 듯이 보였다.그래서 며느리밥풀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영취산에서 대간을 조망하고 덕운봉 갈림길로 떠난다.조릿대군락이 간간이 나타나는 숲은 발품을 팔기에는 좋은 길이었다.바위가 없어 속도를 한껏 낼 수 있었다.그러다가 갑자기 눈앞이 훤히 열리면서 억새숲 구간이 나타난다.후미의 기환이와 현기가 어깨까지 드리운 억새풀을 헤쳐나오고 있다.

 

[덕운봉 갈림봉]  

이제 덕운봉 갈림봉이 눈에 들어온다.대간 마루금은 북동쪽으로 흘러 덕운봉으로 올라붙는다.덕운봉은 대간에서 오른편(동쪽)으로 슬쩍 비켜나 있다.

 

[뒤돌아본 백운산]


억새밭에서 우리가 지나온 백운산을 뒤돌아본다.저 멀리 구름 비낀 봉우리가 그 이름 그대로 백운산(白雲山)이고,그 앞쪽을 가로지르는 영취산 줄기가 서상면 상부전으로 뻗어내린다.
 

          
백운산을 뒤돌아보고 덕유서봉을 바라본다.장수덕유산이라고도 부르는 덕유서봉이 멀리 스카이라인을 그으며 그 뒤로 붉으스레한 일출이 오로라처럼 장엄하게 피어오른다.

 

[덕운봉으로 가다 뒤돌아본 영취산과 장안산]

덕유서봉을 조망하고 다시 발품을 판다.그러다 뒤돌아보니 우리가 대간마루금을 잇기 시작한 영취산과 그 뒤에 구름 덮인 금남호남정맥의 장안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백운산과 영취산을 함께 조망한다.왼쪽 제일 높은 봉우리는 백운산이며 그 오른쪽 산줄기가 영취산으로 이어지는 대간마루금이다.

 

[980봉에서 남덕유를 등지고]

 
덕운봉(德雲峰 983m) 분기봉인 980봉에 올라서서 남덕유를 배경으로 종주팀이 포즈를 잡았다.4구간 끊어타기 때,반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우리는 가시덤불에 어찌나 혼쭐이 났는지,오늘 기환이는 난데없이‘토시’를 껴 눈길을 끌었다.

 

[덕유서봉과 남덕유로 중첩되는 산줄기]


덕운봉으로 갈라지는 분기봉을 지나 6분쯤 발품을 파니 988봉에 이른다.이 봉우리에서 깃대봉과 덕유서봉,남덕유 그리고 무룡산을 바라보는 조망은 이번 구간 가운데 최고였다.맨앞에 보이는 초록색 능선 한가운데가 928봉이며,그 앞 잘룩이가 옥산리 갈림길이다.그곳에서 오른쪽으로 휘어지면서 대간마루금이 이어지고,삼각형으로 돋올한 봉우리가‘북바위’로 유명한 961봉이다.961봉에서 그 다음 914봉을 넘어서면 민령(870m)이다.민령 뒤에 보이는 봉우리는 깃대봉(1,014.8m).맨뒤에 스카이라인을 그리는 장중한 능선은 남덕유산이다.
서봉(장수덕유산 1,510m),동봉(남덕유 1,507.4m),중봉(1,363m) 세 덩치를 뭉뚱그려 남덕유산이라 일컫는다.그러나 북덕유 향적봉에 대칭의 의미로 남덕유라 할 때는 동봉만을 뜻한다.남덕유산 세 봉우리는 왼쪽부터 서봉(장수덕유산),동봉(남덕유) 그리고 중봉이며,중봉 오른편 잘룩한 고개가 함양군 서상면 영각사에서 거창군 북상면 황점으로 넘는 남령(900m)다.1082번 도로가 지나는 남령(藍嶺) 뒤로 고개를 삐죽내민 희미한 봉우리가 무룡산(1,491.9m)이다.
 


전기환 원장이 짙푸른 대간마루금을 배경으로 포즈를 잡았다.

 

 

현기와 재화가 짙푸른 산그리매가 중첩된 대간마루금을 뒤로 하고 잠시 포즈를 취했다.

 


988봉에서 15분 가량 발품을 팔아 전망바위가 있는 978봉에 이르렀다.이 봉우리에서 건너편 977.1봉 너머 남령과 월봉산을 바라보았다.남덕유(1,507.9m)에서 중봉(1,363m),남령을 거쳐 월봉산~은신치~거망산~황석산으로 이어지는 9시간이 넘게 걸리는 장쾌한 능선 종주는 억새가 지천인 가을철이 제격이다.

 


7시 50분,978봉 바위전망대를 지나면서 대간은 거의 북동진하게 된다.다시 5분 가량 발품을 팔면 동쪽 50미터 지점에 물이 있다는 비닐안내문을 지난다.여기서부터 산죽밭이 옥산리 갈림길까지 이어진다.그 구간을 종주하는 도중 기환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대간 길의 야생화-잔대]


모싯대는 전국의 산과 들에서 흔히 자라며 농가에서 재배하기도 하는 도라지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다.흰꽃이 피는 것을 흰모싯대라 한다.꽃은 비록 크지는 않지만 작은 종(鐘)모양으로 여러 개씩 매달려 귀엽게 보인다.화단에 촘촘히 심고 버팀목을 세워 옆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줄을 매어 주면,여름부터 가을까지 아름다운 꽃이 많이 핀다.
 
모싯대를 비롯하여 도라지,잔대,초롱꽃 따위의 도라지과의 풀들은 꽃이 아름다워서 대부분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모싯대와 비슷한 잔대는 우리 고유의 식물로 본종(本種)이 아주 많은 식물이다.잔대보다 꽃이 크고 아름다운 것은 도라지과의 더덕(沙蔘)으로 잔대보다 뿌리가 굵다.또 도라지과에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초롱꽃 계통이 많다.금강초롱은 우리나라 특산 식물이며 희귀식물로 중부.북부 지방의 금강산,설악산,오대산,대암산 등지에서 매우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모싯대는'모시나물'이라고도 하며 널리 알려져 있는 봄의 대표적인 산나물의 하나다.
 
모싯대는 잎이 살구나무 잎과 닮았고 뿌리는 더덕이나 잔대 같아서 중국에서 杏葉菜(행엽채),또는 杏葉沙參(행엽사삼)이라 한다.그러나 모싯대는 뿌리를 제니라 하여 한방에서 거담제,해독제로 귀히 여기는 약제이며,멧돼지가 독 화살에 맞으면 얼른 모시대 뿌리를 파 먹고서 스스로 해독하는데 사람이 그 지혜를 갖지 못했다고 고대의 중국 명의가 개탄했다고도 하는 약재다.

 

[북바위에서 바라본 민령과 깃대봉]


지겹도록 이어지는 산죽밭을 지나 바위전망대가 있는 943봉을 지나면서 대간은 거의 북진(北進)한다.8시 23분, 977.1 봉 아래 갈림길에 다다랐다.갈림길 이정표에는 육십령(6.5km),함양군 서상면 옥산리(3.5km),논개 생가(장수군 장계면 대곡리(2.0km)라고 적혀있다.또 하나의 바위전망대와 977.1봉을 지난다.종주길은 기복이 심하지 않고 부드러워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드디어 8시 47분,‘북바위’가 있는 961봉에 다다랐다.사진은 북바위에서 바라본 민령과 깃대봉이다.

 

[기우제를 지내던 북바위에 올라]


영취산(1,075.6m)에서 갈라져 섬진강과 영산강을 싸안고 돌아 광양 백운산(1,218m)까지 뻗어나가는 462km 호남정맥이 백두대간과 북쪽 골짜기에 처음으로 빚은‘큰골’대곡리.여기에는 성곡,주촌,지승 세 개의 마을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임란왜란 때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충절의 여신' 주논개가 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주촌(朱村)은 400년쯤 전에 논개의 부친 주달문(朱達文) 진사가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마을이 이루어졌고,주논개가 살았다고 해서 주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하지만 이 주촌이 저수지 물에 잠기면서 사라지자 주씨의 선산이 있는 궐촌이라는 바로 윗마을에 논개 생가를 복원하기로 하면서 마을 이름도 주촌으로 바꿔버렸다.
주촌마을의 동쪽 '산바라기 날망',즉 백두대간 능선의 북바위는 가뭄을 물리치는데 영험이 있는 바위로 알려져 있다.무논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가뭄이 계속되면 마을사람들은 이 북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개을 잡아서 북바위 '대가리'에 붉은 피칠을 하고 하늘에 기원하곤 했다.이렇게 하면 제사가 끝나기도 전에 비가 내리고,늦어도 하루만에 흡족한 양의 빗줄기가 쏟아졌다고 한다.이 신령한 북바위에 종주팀들이 올라가 포즈를 잡았다.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개 형상을 하고 있는 북바위 아래로 주촌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민령으로 가는 억새숲 속의 의선]


북바위에서 조망을 끝내고 육십령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여기서부터 민령까지는 간간이 숲속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억새풀이 무성한 구간이 었다.사진은 북바위를 떠나 10분 가량 발품을 팔았을 때 만난 억새밭-의선이가 어깨춤까지 자란 억새를 헤쳐나오고 있다.가을이 오면 깃대봉을 비롯한 이 일대는 억새천국을 이뤄 장관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민령 가는 길-억새숲에 든 재화와 황세]


선두에 선 의선이가 지나가고 다음에는 재화와 황세가 억새밭을 헤쳐나 온다.

 

[대간 길의 야생화-여로] 


여로는 백합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우리나라 어디든지 산속 나무 밑이나 풀밭에서 자란다.특히 고산지대의 물기 있는 풀밭에 무리 지어 자란다.

 
키는 40~100cm쯤되고 줄기는 곧게 자라고 털이 있으며 잎은 줄기 밑에서부터 번갈아서 난다.잎은 버들잎 모양으로 줄기를 감싸듯이 나며 잎에 세로로 많은 주름이 있다.7~8월에 자줏빛이 도는 붉은 꽃이 줄기 끝에 피고 열매는 9~10월에 익는다.생김새가 난초를 닮아 정원에 관상용으로 심기도 한다.

 
사슴이 병이 생겼을 때 먹는 약이라 하여 녹총이라고도 하고,늑막염에 신효하다 하여 늑막풀이라고 하며,뿌리 모양이 파를 닮았으므로 산파,또는 산총이라고도 한다.여로는 맛은 쓰고 매우며 성질은 차갑다.간과 폐에 작용한다.여로 뿌리에 있는 게르메린,네리딘,루비예르빈,프세우도예르빈,콜키친,베라트리딘 등의 알칼로이드 성분이 혈압을 내리고 토하게 한다.잎에는 120mg 의 아스코르빈산이 들어 있다.

 
민간이나 한방에서 토하는 약,알코올 중독을 고치는 약,두통,복통,간질,황달, 인후염,정신병을 고치는 약으로 쓴다.가을에 뿌리를 캐서 물에 씻어 햇볕에 말려 쓴다.약리실험에서 물우림액이 혈압 낮춤작용,간 보호작용,쓸개즙 분비작용을 나타낸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로가 간질,정신병,늑막염,속앓이 등을 고치는 것은 강한 최토작용 덕분이다.간질이나 정신병은 위벽에 끈적끈적한 가래 같은 담이 붙어 있어서 발병하는 경우가 많은데,여로가 이 담을 깨끗하게 토해 내게 하므로 병이 낫는 것이다.
 
뱃속의 기생충으로 배가 아플 때에는 이 기생충을 모두 죽이므로 배 아픔이 낫는다.늑막에 물이 고이는 늑막염 또한 여로가 강력한 역삼투압작용으로 늑막에 고인 물을 위장으로 끌어들여 토하게 함으로써 병이 치료되는 것이다.뿌리를 물로 달여서 소말,개 등을 목욕시키면 피부에 기생하는 진드기,벼룩 같은 나쁜 벌레들이 다 죽는다.또 이 물을 농작물의 해충을 방제하는 농약으로 쓸 수 있다. 

 

[민령 지나 억새밭을 걷는 현기]


9시 10분,깃대봉 아래 민령(870m)에 다다랐으나 무성하게 자란 풀이 고갯마루를 뒤덮고 있어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뻔 했다.민령에서 오른쪽 성주골로 빠지면 서상면 금당리에 이른다.민령을 지나면서 억새밭은 계속된다.현기가 억새속에 파묻혀 걷고 있다.
 


민령(870m)을 뒤로 하고 깃대봉으로 오른다.첫 봉인 943봉 오름길은 완만한 억새터널이 이어지다가 솔숲이 나오더니 또다시 억새숲길이다.9시 50분,마침내 깃대봉(1,014.8m)에 올라섰다.깃대봉 정수리도 억새천지였으며 백두대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깃대봉을 사이에 두고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는 조선 여인의 절개와 충절의 표상인 논개의 생가가,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에는 논개의 묘가 있다.주논개(朱論介)는 1574년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그런데 태어난 때가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즉,개해,개월,개일,개시라 사람이 아닌 개를 낳았다고 해서 논개라 했다.
어린 논개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로 뛰어났고 이미 열 살 때 고상한 기품을 갖추었다고 한다.논개가 13살이 되던 해 부친 주달문(朱達文)이 세상을 떠났다.주색잡기에 빠져 있던 논개의 숙부 주달무는 당시 토호 김풍헌을 찾아가 자신의 행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김풍헌은 백치불구인 자식을 장가보내기 위해 논개를 민며느리로 사오는 대가로 주달무에게 좋은 논세 마지기와 엽전 삼백냥,당백초 세 필을 주었다.김풍헌은 시종들을 보내 논개를 데리고 가려 했지만 논개 모녀는 완강히 반대했다.이렇게 되자 주달무는 논개 모녀를 상대로 장수 현감에게 소장을 올렸다.그 결과 "죄없는 사람을 무고해서 괴롭히는 처사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결이 나고 논개 모녀는 무죄 방면됐다.
이때 장수 현감이 훗날 논개의 부군이 되는 최경희였다.오갈 데 없는 논개 모녀는 현감 부인의 병수발을 하면서 머물렀다.하지만 현감 부인은 곧 세상을 뜨고,결국 이게 인연이 돼 부부의 연을 맺었다.몇 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경상우병사가된 최경희는 진주성으로 들어갔다.이후 일어난 진주성 싸움에서 민관은 힘을 합쳐 싸?지만 결국 성은 함락당하고 말았다.전쟁에 패한 최경희를 비롯한 장수들은 촉석루에 모며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남강물 파도가 마르지 않으면 우리 혼도 죽지 않았다."라는 시를 읊고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에 논개는 승전 축하잔치를 연 왜군들 틈으로 기생을 변장하고 들어가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10여일간 내린 비로 넘실대는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진주성이 괴멸되자 야음을 틈타 탈출한 장수지역 의병들은 최경희와 논개의 시신을 찾아 옮겨 주씨 문중과 장사 지낼 것을 상의했지만,왜적의 추적과 보복이 두려운 주씨 문중은 이를 거절하였다.결국 이들의 시신은 육십령을 넘지 못하고 백두대간 육십령 동남쪽 10리,즉,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뒷산에 묻히게 되었다.의병들의 후손에 의해 설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던 이 묘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5년,순절한 뒤,382년 만의 일이다.
깃대봉을 오르는 등산로는 서상면 금당리에서 민재골,성주골,옥산골이 있으며 장계면 대곡리에서는 오동저수지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그 가운데 민재골을 거쳐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정상에 올라 성주골로 회귀하는 코스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능선을 실컷 즐기고 싶다면 영취산을 향해 능선을 타고 가다 옥산골로 하산하는 것이 좋다.

 

[패장(敗醬)이라고도 하는-마타리]


코스모스가 푸른 가을 하늘을 이고 한들거리면 산에서는 유난히도 노란 마타리꽃이 실바람에도 살랑거리며 가을을 푹 익게 한다.코스모스,국화,구절초,쑥부쟁이,곰취,단풍,산수유,맨드라미 등과 함께 가을을 장식하는 자생화이다.
 
늦여름부터 가을이 저물 때까지 계속 꽃을 피운다.다른 풀과 어울려 자라지만 꽃이 필 때 꽃대가 1~1.5m까지 크게 자라 다른 풀보다 돋보인다.여기다 꽃대도 노란색을 띠고 있어 꽃과 더불어 더욱 눈에 잘 띈다.꿀이 많아 갖가지 가을 곤충들이 즐겨 찾아 든다.딴 곤충을 잡아 먹는 사마귀란 놈이 꽃 속에 숨어 있다가 즐겨 사냥을 하는 목이 되는 곳이다.

 
한방에서 마타리의 뿌리를 캐 그늘에서 말린 것은 패장근(敗醬根)이라 한다.흰꽃이 피는 마타리과의 뚝깔(뚜깔)을 백화패장(白花敗醬),석남엽(石南葉)이라 한다.뚝깔의 어린싹은 생으로 콩가루에 묻혀 국거리에 쓰면 좋다.부드러워 먹기 좋다.옛 농업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는 뚝깔의 약효가 제일 좋다고 했다.그러나 한방요법으로는 마타리를 한 수 위로 친다.
 
뚝깔이 막 돋아날 때 싹을 뜯어 끓는 물에 데친 후 찬물에 담궈 쓴 맛을 뺀다.이것을 밥솥의 밥이 한 번 끓었을 때 그 위에 얹고 뜸을 들여 한데 섞어서 푸면 뚝깔밥이 된다.마타리나 뚝깔을 데쳐 나물 반찬으로 할 때는 식초를 한두 방울 떨어뜨리거나 식성에 따라 마요네즈,토마토케첩 또는 겨자를 조금 섞어도 맛이 있다.봄철 돋아나는 어린싹을 나물로 하지만 8월에는 뚝깔이나 마타리 같은 산나물을 뜯어 묵나물로 할 때이다.꽃대가 올라 온 밑에는 다음 해에 돋아날 어린 싹이 있다.이런 것들을 뜯어 데쳐 말리면 훌륭한 자연식이 된다.
 
메취역,황화용아(黃花龍牙),여랑화(女郞花),뿌리를 약재로 쓰는데 간장썩는 냄새가 난다고 하여 패장(敗醬)이라 한다.동의학에서는 피를 잘 돌게 하고 국소 자극작용이 뛰어난 약초라 했다.염증 치료제,배농약,부스럼,산후 복통 등에 쓴다.민간약으로는 코피,피를 토할 때,위장염,폐결핵에 좋고,황달과 몸이 부었을 때 뿌리를 달여 마신다.마타리와 함께 뚝깔도 비슷한 약효를 갖고 있다.나물로 했을 때 맛도 비슷하다.마타리꽃은 깃대봉(1,014.8m)과 첫 봉우리인 1,010봉 사이의 초원을 지나며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민산초나무]


산초나무는 운향과에 속하는 낙엽성 나무이고 다 자라도 키가 3~4미터를 넘지 못한다.산초나무는 함경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의 그리 높지도 않고 그다지 깊지도 않은 곳에서 자라며,초피나무는 남쪽지방에 주로 많이 분포하고 중부내륙지방에서는 볼 수 없으나 해안을 따라서는 중부지방까지 올라온다.
산초나무와 초피나무는 식물학적으로는 엄격히 구분된 서로 다른 종이지만 일반인들이 부르는 데는 거의 구분이 없다.산초나무는 분지나무.상초.산추나무라고도 부른다.산초나무의 학명은 잔토실럼 쉬니폴리zanthoxylum schinifolium이고 초피나무의 학명은 잔토실럼 피페리텀 zanthoxylum piperitum 인데 여기에서 두 나무가 유사한 형제라는 것을 말해준다.향신료로 쓰이는 것은 초피나무이고 기름을 짜서 먹는 것은 산초나무이다.
초피는 봄에 꽃이 피는 데 비하여 산초는 6월부터 9월초까지 개체별로 꽃이 피는 시기가 다르다.초피나무는 잔 잎이 9~11개로 1~3cm크기의 잎가에 파상거치가 있고 잎 중앙부에 연한 황록색의 무늬가 있고 엽액 밑으로 굽은 가시가 대생 하고 있으며 잎이나 열매의 향기가 좋다.산초나무는 잎의 수가 13~21개로 많으며 크기도 5-5cm로 크고 가시가 1개씩 떨어져 엇갈려 있다.
 
초피나무나 산초나무는 익으면 과피가 벌어지고 검은 씨가 나오는데 매운 맛은 없고 향기가 있는 정유가 함유되어 있어서 식용유의 자원이 된다.산초나무와 형제로 가시가 없는 것이 민산초,가시가 작고 잎이 둥근 것은 전주산초,잎이 좁고 작은 것을 좀산초,산초와 사촌간으로 잎이 크고 수가 적으며 자루에 날개가 있는 개산초,초피나무보다 털이 많은 것을 왕초피라고 한다.특히 왕초피나무는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데 이제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어서 환경부에서는 특정 식물로 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예로부터 초피나무는 톡 쏘는 매운 맛,그러나 매우면서도 상쾌하고 시원한 맛 때문에 향신료로 이용해 왔다.지금도 추어탕을 끓이는 데는 초피가루가 필수적으로 들어간다.산초 열매의 껍질을 천초라 하여 이용한다.향신료로는 덜 익은 파란 열매를 따서 쓰지만 약용은 열매가 익어 갈라질 무렵에 채취한다.건위 정장.구충 해독작용이 있으므로 소화불량.식체,위하수,위확장,구토,이질, 설사,기침,회충구제 등에 쓰인다.또한 매운 맛을 내는 성분 산시올(sanshol)에는 국부 마취 작용이 있어 살충 효과까지 겸한다.생선 독에 중독 되었을 때 해독제로 이용된다.
제피나무,젠피,산초(山椒)라 불리는 초피나무는 남부지방과 중부 해안지대에 퍼져 있다.꽃은 황록색으로 5-6월에 개화한다.높이는 3-4m에 이른다.식용,약용,조미료로 쓰인다.추어탕을 먹을 때 향신료로 넣어 먹는 이 초피나무는,식물에 대해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산초'로 잘못 알고 있어서,종종 서로 맞다고 우기는 작은 다툼이 일어날 만큼 혼동이 심하다.심지어 한자 표기와 공식 명칭조차 헷갈릴 정도다.그러나 추어탕 향신료로 쓰는 것은 초피나무이며,오향장육에 향신료로 쓰이는 것은 산초나무다.
 
가을에 피는 녹색의 산초꽃과 달리 초피나무의 꽃은 봄에 황록색으로 피며,나뭇잎의 개수도 10개를 넘지 않고,잎이 길쭉하지 않고 좀 둥근 편이며 가시가 마주난다는 점이 초피나무의 특징이다.그런데 이 나무는 스트레스가 심하여,잘 가꾸지 않으면 몇 년 안돼서 수확이 반으로 줄고 가지도 엉성해진다 한다.그래서 대량재배가 어렵고 야생종의 무분별한 채취가 이루어지다 보니 점점 열등한 나무만 남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깃대봉을 떠나 1,010봉에 올라선 뒤 제법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오자 잘 다듬어진 샘터와 만난다.이 샘은 수량이 넉넉하고 물맛도 좋아 대간을 종주하는 이들에게는 고맙기 그지 없는 감로수였다.

영취산에 오를 무렵부터 울산에델바이스 산악회 대간종주 회원들과 만나기 시작하더니 샘터에 이르러 갈증을 축이는 그들과 다시 만났다.(사실 울산 에델바이스 산악회는 우리가 지리산 종주를 할 때 화개재에서 처음 만난 이후,4구간종주 때 중재에서 만나기도 했다.이들은 새벽 3시 중재에서 산행에 들어 오늘은 육십령에서 구간종주를 마친다고 한다.우리와 같이 매월 첫째,셋째주 대간을 종주하고 있다.) 이들 외에도 깃대봉 산행을 하는 산객들,육십령에서 백운산을 거쳐 중재로 대간을 종주하는 부산의 백두산산악회 회원들을 만났다.
이 샘터에서 오른쪽 민재골로 하산하면 논개 무덤이 있는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로 내려가게 된다.이제 육십령이 지척이다.샘터를 지나자 종주길은 산마루를 따르지 않고 왼쪽 산허리를 돌아간다.대간길은 멋진 숲터널을 이루고 있어 시원하면서도 상쾌했다.
10시 38분,마침내 육십령 고갯마루 주차장에 내려섰다.무쇠가마 같은 뙤약볕이 그대로 육십령에 내려꽂히고 있었다.육십령 빗돌 근처 등나무 그늘에는 울산에델바이스 대간종주팀이 땀을 식히고,휴가철을 맞은 행락객들은 더위를 피해 전망대에 몰려 있었다.장계 쪽 육십령 휴게소에 들러 식수를 찾으니 화장실로 가란다.그런데 화장실은 관리가 소홀해 지저분할 뿐만아니라 물도 졸졸 나와 실망스러웠다.
기묵이를 만나 함양 쪽 육십령식당으로 걸어갔다.아! 그곳엔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고 화장실도 너무나 정갈했다.다같은 육십령휴게소인데 어찌 이렇게 다를까.일행은 식당에 배낭을 풀어 놓고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었다.기묵 후배가 미리 시켜놓은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들었다.그곳에는 기장에서 울산에델바이스산악회 대간종주에 참여한 산꾼들 4명이 맥주를 들고 있었다.작년 덕유산 종주 때 이곳에 머물며 신세를 많이 져 아지매한테 고맙다는 인사차 들렀다고 했다.백두대간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박하고 훈훈한 인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점심을 들고 뜨거운 열기를 식힐 겸 식당 바깥의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40분 가량 낮잠을 즐기기로 했다.
 

 

영남 선비들의 본 고장이라는 함양과 너무도 오지라 울고왔다 울고간다는 장수 두 고장을 이어주는 고개가 백두대간의 남쪽에 있는 육십령(六十嶺 734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풀기를,"신라적부터 요해지였으니,행인이 이 곳에 이르면 늘 도적에게 약탈당하므로 반드시 60명이 되어야만 지나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고 하였다. 

 
육십령의 이름 내력으로는 고갯길 60구비에서 비롯되었다는 말도 있고,경상도를 따르는 육십령 마을의 촌로들은 안의현에서부터 60리 밖의 고개라는 뜻으로도 푼다.그러나 오래 묵은 옛글이 이미 분명히 새겼으니'60명이 모여 넘는 고개'라는 종래의 내력을 올곧게 믿어도 좋을 듯 싶다.육십령은 북쪽의 추풍령이나 남쪽의 팔량치처럼 나라에서 관리하던 고개는 아니었지만 가령,옥구의 소금이 전주를 지나 영남 내륙으로 들어가던 길목이었고 보면 그만한 이야기쯤은 족히 품고도 남음이 있었다. 
 
또한 험준한 고성(古城)들은 세상을 등진 산적들의 소굴로는 더없이 안성맞춤했을 터이다.산적의 화를 피하고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산아래 주막에서 며칠씩 묵어가며 육십명의 장정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떼를 지어 넘어야 했다는 것이다.근처에는 당시 장정들이 모인 주막이 있던 곳이라는 장군동(壯群洞)이 있고,산적들을 피해서 살다가 이룬 마을인 피적래(避賊來)란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다.
 
육십령 고갯마루에는 함양군 서상면 쪽과 장수군 장계면 쪽에 각기 식당을 겸한 휴게소가 있다.대간 종주꾼들은 장계면 쪽 육십령휴게소보다 대부분 함양 쪽 육십령식당에서 숙식을 한다.사진은 함양 쪽 육십령휴게소에서 낮잠을 자고 장계 쪽에 세워진 육십령 빗돌을 중심으로 종주팀이 기념사진을 찍었다.12시 15분,우리는 남덕유로 가기 위해 오후 수업에 들어갔다.
 

[육십령 앞 봉우리에서 바라본 합미봉]
 
12시 15분,육십령 빗돌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고 오후 수업에 들어갔다.육십령에서 합미봉까지 1.5km,할미봉~덕유서봉 4.8km,서봉~남덕유 1.2km,남덕유~삿갓골재 3.4km,삿갓골재~황점 2.7km-오후에 우리가 걸어내야 할 거리는 모두 13.6km다.이 거리는 평지가 아니라 오르내림이 심한 구간이라 7시간이 넘게 걸릴 듯하다.
 
땡볕이 내려쪼여 대지의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점심을 먹고,낮잠을 잔 끝이라 몸이 천금처럼 무겁고 숨길은 거칠어진다.그런데 육십령에서 합미봉 가는 길은 숲속길이라 햇볕을 바로 받지는 않아 다행스러웠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술을 마셨다는 재화-새벽 2시경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배낭을 챙겨나왔다며,마음 같아서는 오후 수업에는 빠지고 싶다는 넋두리를 한다.새벽 3시에 만나다 보니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건 비단 재화뿐만이 아니었다.기환이도,현기도 힘들어한다.

 
그러나 그런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앞으로 이보다 더 험하고 힘든 대간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좌절해서는 안 된다.스스로를 다독거려 잠시 흩어진 전의를 불태워야 한다.땀이 비오듯 쏟아져 눈 속으로 들어가고,다리 힘이 스르르 풀린다.평소 땀을 많이 흘리기로 소문난 의선이는 "이렇게 땀을 많이 흘리기는 근래 처음이야...."하며 혀를 끌끌 찬다.12시 49분,헬기장이 있는 915봉에 다다랐다.이 봉우리에서 합미봉 동릉 위의 암릉을 카메라에 담았다.합미봉 정상은 사진 왼쪽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다.

 

[합미봉 동릉 위의 바위군]


915봉에서 잠시 다리를 풀고 합미봉으로 향한다.오후 1시 2분,합미봉 아래턱에 다다랐다.저 가파른 합미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여기서 잠시 갈증을 축이고 숨을 골라야 한다.그런 다음 단숨에 합미봉 정수리까지 치고 오르는 게 상책이다.1시 20분,합미봉 정상에 올라섰다.정상에 오르니 덕유서봉과 남덕유는 구름에 가려 전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사진은 합미봉 정상 바로 밑 전망바위에서 합미봉 동쪽에 우뚝 솟은 암릉을 찍었다.

 

[합미봉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동릉의 바위군]

합미봉 전망바위에서 숱한 사연을 간직한 육십령을 조망한다.사진 가운데 작은 봉우리 뒷쪽이 육십령휴게소가 있는 고갯마루.그 봉우리 오른쪽 산허리를 따라 구불텅거리며 뻗어내리는 26번 도로는 전북 장수군 장계로,왼쪽 도로는 경남 함양군 서상으로 이어진다.

 

[합미봉 전망바위에서 뒤돌아본 육십령]


합미봉 전망바위에 종주팀이 다 모였다.동릉의 암장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종주팀 뒤로 길게 뻗어나간 산줄기가 남덕유-남령-월봉산 능선,그 한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월봉산(月峰山 1,279.2m)이다.

 

[합미봉 정수리에 올라]


합미봉에는 정수리를 중심으로 허물어진 성터 흔적이 보였다.일행은 5분쯤 다리쉼을 하고 합미봉에서 하산했다.가파른 암릉길이었다.세 차례나 밧줄을 잡고 조심스럽게 발을 디딘 끝에 합미봉을 빠져나왔다.까탈스런 할매처럼 우리를 곱게 내려보내지 않고 장난질을 치는 듯했으니.그렇다고 그리 위험한 구간은 아니지만 눈이 내리거나 비가 쏟아질 때에는 매우 조심을 해야 할 것이다.
 
[월간 산에서 발행한 신산경표의 저자 박성태 씨는 '할미봉'은 잘못된 지명으로 "합미봉"으로 써야 한다고 말한다.1961년 국토지리정보원 지명일람표에 합미봉이라 고시돼 있고,옛날 한 도승이 이 산속에 우리나라 군사가 수년 먹을 쌀이 쌓여 있는 격이라 하여 합미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유래까지 붙어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나는 할미봉을 합미봉으로 고쳐 적는다. ]
 
1시 30분,합미봉을 내려서면서부터 다시 숲길이 시작되고 등산로는 평탄했다.2시 25분 덕유교육원 갈림길에 다다랐다.갈림길에는 육십령 5.2km,서봉 2.13km,서봉-남덕유 1.51km,남덕유-월성치 2.2km 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이제 동료들은 지열에 더위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재화가 "여기서 그만 빠지는 게 어때.."하며 기환이한테 슬쩍 말을 건네자 "그래도 올라가야지...." 라고 말하며 기환이는 웃음으로 받아넘긴다. 
 
이 갈림길에서 2시 45분까지 휴식을 취하고 덕유서봉으로 올라간다.덕유교육원 갈림길이 해발 950미터이니 1,510미터의 서봉에 닿으려면 표고 560미터를 톺아올라야 한다.마사토길을 걸어 2시 52분 헬기장에 다다랐다.이 헬기장에서 구름이 가려 어슴프레한 합미봉을 뒤돌아보았다.합미봉 동릉의 암봉이 쭈볏거리며 하늘로 불끈 치솟았다.
 

[헬기장에서 뒤돌아본 합미봉]

헬기장에서 일명,장수덕유산이라고도 부르는 덕유 서봉으로 오른다.황세와 내가 앞장서고 그 뒤에 재화,의선이 기환이와 현기가 뒤따른다.오르막길은 언제나 힘이 든다.그 길을 한발 한발 내딛어 산을 밀어내리며 오른다.땀이 억수같이 쏟아진다.무릎이 뻐근해지고 가슴은 답답하다.안개가 앞을 가려 시계(視界)도 좋지 않으니 더 답답하다.그러다가 오름길 곳곳에 핀 노란 원추리를 본다.이 청순하고 예쁜 원추리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벌써 주저앉고 말았을지도 모른다.그렇게 허위단심 발품을 팔아 3시 20분,1,260봉 전망바위에 다다랐다.여기서 나는 구름에 갇힌 황세를 카메라에 담고,동기들을 기다렸다.이 전망바위가 나중에 문제의 바위가 될 줄은 그땐 미쳐 몰랐으니.....

 

[짙게 드리운 구름을 등지고 전망바위에 앉은 황세]


페르시아의 여왕은 욕심이 아주 많았다.특히 보석을 좋아해서 이 세상의 보석이라는 보석은 모두 모아들일 결심을 했다.그래서 페르시아로 들어오는 모든 장사꾼들은 통행세로 보석을 내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지요.이 방법으로 많은 보석을 얻었지만,욕심 많은 이 여왕은 마음이 흡족하지 않았다. 
 
여왕은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묘안을 하나 생각해 내고는 무릎을 탁 쳤다." 옳지, 온 백성에게 보석을 한 개씩 바치도록 하는 거야." 온 나라에 이 명령이 전해지자,페르시아 국민들은 모두 근심에 쌓이게 되었다. 대체 어디 가서 그 비싼 보석을 구해다가 여왕에게 바칠 것인가 하구요. 
 
이때였습니다.동쪽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열 두마리의 코끼리 등에 열 두 상자의 보석을 싣고 페르시아 여왕을 찾아와 말했다." 보석 한 개와 백성 한 사람씩을 맞바꾸시지 않겠습니까? " 보석에 눈이 먼 여왕은 쾌히 승낙을 하였지요. 곧 상자의 보석과 페르시아 사람의 숫자를 서로 계산하기 시작하였는데 신기하게도 보석이 꼭 한 개가 더 많았다." 이것은 내가 가져야겠군." 보석을 가지고 온 사람이 남은 보석을 호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그러나 보석은 너무나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에,여왕은 그것마저 갖지 않고는 배기어 낼 수가 없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줄테니 그것도 나에게 주시오." 그는 오히려 여왕에게 물었다." 여왕님 자신과 바꾸시겠습니까? " 여왕은 그저 보석만이 탐이 나서 선뜻 그렇게 하자고 대답하고는 빼앗듯이 그 보석을 받아들었다.그 순간,꽝하는 소리와 함께 열 두 보석상자가 일제히 터지면서 모든 보석들은 사방으로 날아 가서 저마다의 빛깔로,장미석은 분홍꽃을,루비는 붉은꽃을,자수정은 자주꽃을,오팔은 크림색꽃을,그리고 다이아몬드는 흰꽃을 피웠다.이 꽃들이 모두 채송화 꽃이다.
 

[대간 길의 야생화-바위채송화]
 
1,260봉 전망바위에서 5분쯤 쉬고 황세와 나는 암릉을 내려간다.이 암릉에서는 직벽을 타고 내려가는 길과 왼쪽으로 돌아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 두 길이 있었다.직벽길 아래는 깎아지른 낭떠러지라 다소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우리는 밧줄을 잡고 왼쪽으로 돌아 내려섰다.전망바위 위에도 위험표지판이 있고 암릉 밑에도 위험 표지판이 있었다. 
 
우리는 쉬지 않고 발품을 팔았다.30분쯤 오르니 등산로에서 떨어진 암릉 근처에 원추리 군락이 펼쳐진다.장관이었다.지대가 낮은 곳보다 1,000미터가 넘는 지대의 원추리는 더 샛노랗다.나는 철쭉과 산죽밭을 헤치고 그 군락지로 닥아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원추리 꽃은 하루살이 꽃이다.사진에 보이듯이 꽃이 벌써 말라 비틀어진 것도 있고 이제 막 활개를 치며 피어 난 꽃도 있으며,꽃봉우리가 아직 벙으러지지 않는 꽃도 있었다.꽃이 아름다울수록 그 수명은 길지 않은 것은 어쩌면 우리네 삶과 그토록 비슷할꼬.!!!
 

 

 등산로에서 기다리던 황세를 원추리 군락지대로 불렀다.원추리 꽃 사이에 기댄 황세의 모습-꽃보다 아름답구나.

 


황세와 나는 원추리 군락지대를 벗어나 등산로로 내려왔다.조금 오르자 잡목지대가 나온다.원추리와 구름,그리고 바위가 조화를 이룬 풍경이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지유,적지유라는 약명의 오이풀은 잎을 뜯어서 코에 대어 보면 오이 또는 수박냄새가 물씬 나는데,진짜 오이보다 오이 냄새가 더 진하게 난다.장미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로 양지 바른 산이나 들에 흔히 자라는데 특히 높은 산 바위틈 험한 곳에 무리 지어 자란다.


오이풀은 꽃 모양이 독특하다.마치 젖꼭지처럼 생긴 자주색 꽃이 긴 꽃자루 끝에서 둥글게 뭉쳐서 핀다.대개의 꽃들이 아래서부터 위로 피어 올라가지만 오이풀은 위에서부터 피는 것이 특징이다.오이풀의 꽃은 화려하지는 않으나 그 생김새가 독특하여 꽃꽂이 재료로 흔히 쓴다.뿌리는 굵고 딱딱하며 줄기는 곧게 서고 털은 없다.긴 잎자루 끝에 작은 잎이 5~13장이 난다.잎 모양은 긴 타원형으로 끝이 무디고 가장자리는 거친 톱니가 있다.꽃은 7~10월에 피어 8~11월에 씨앗이 익는다.


오이풀은 설사,대장염,출혈,악창,화상 등에 중요하게 쓰는 민간약이다.특히 지혈작용이 강하여 갖가지 출혈에 피를 멎게 하는 데 많이 쓴다.오이풀 잎에는 탄수화물,단백질,지방,무기질이 고루 들어 있으므로 나물로 먹으면 좋다.상큼한 오이 향이 일품이다.봄철 새로 돋아난 부드러운 잎을 나물로 무쳐 먹거나 생즙을 내어 먹는다.칼슘,철,구리,아연 등의 미량원소가 많이 들어 있다.오이풀은 아무 데나 흔하며,산오이풀,가는잎오이풀,큰오이풀 등 비슷한 식물이 여러 가지 있으며 어떤 것이나 같은 효과가 있다.


오이풀은 화상에 최고의 명약이다.오이즙을 화상에 바르면 신기한 효과가 있듯 오이 내음이 나는 오이풀의 잎이나 뿌리 줄기를 짓찧어 붙이면 신통하다 싶을 만큼 잘 낫는다.오이 냄새가 나는 정유성분에 화상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손이나 발에 생긴 습진에는 오이풀 뿌리,줄기 등을 깨끗이 씻어 솥에 넣고 약한 불로 천천히 달여 농축시킨 것을 하루에 5~6번 발라주면 잘 낫는다.오이풀은 피를 맑게 하고 피나는 것을 멈추며 설사를 멎게 하고 토하는 것을 멈추게 하며 새살을 잘 나오게 하는 등의 약리작용이 있다.

 


전망바위에서 20분 가량 기다리자 의선이가 올라왔다.의선이한테 "재화는?"하고 물었다."재화는 나보다 먼저 올라갔는데..아직 오지 않았어?" 금방 뒤따라 와야 할 재화가 오지 않자 의선이에게 재화의 행방을 물었던 것이다.참 이상한 일이었다.재화의 주력으로 볼 때 벌써 도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바로 황세와 내 뒤를 따라왔는데...이때 시각이 4시 20분.그래서 후미의 기환이와 현기가 올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다시 10분을 기다리자 기환이와 현기가 도착했다.


그러나 재화는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낭패였다.일이 이렇게 되자 서봉 정상 오르기는 아예 단념했다.배낭을 의선이한테 맡기고 나는,예의 그 전망바위로 쏜살같이 뛰어내려갔다.연신 목이 터져라 재화를 불러댔다.안개는 자꾸만 엄습해오고 서서히 어둠이 몰려들고 있었다.밧줄을 타고 전망바위로 올라갔다.4시 50분이었다.그러나 재화는 거기 없었다.의선이와 현기에 따르면,기환이와 현기가 전망바위에서 재화를 부르자 바위 밑에서 재화의 응답이 들려왔다 한다.그렇다면 재화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아니면 실족을 했을까? 온갖 생각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5시 10분,황세와 의선이를 비롯,일행이 전망바위에 모였다.나는 다시 밧줄을 타고 전망바위 아래로 내려가보았다.거기서 서봉으로 오르려면 왼쪽으로 돌아 산등에 붙어야 한다.그런데 서봉 반대쪽으로 산길이 열려 있고 붉은 리번 하나가 달려 있었다.나는 그 길을 따라 올라보니 웬걸 전망바위 들머리가 나온다.


간밤에 한 숨도 못잔 데다,체력이 떨어진 재화가 이 길을 따라 덕유교육원으로 내려간 것으로 추론했다.그래서 우리는 덕유교육원 갈림길로 내려가기로 단안을 내렸다.덕유교육원 갈림길로 내려오면서 기묵이한테 황급히 휴대폰을 날려,재화가 행불이 됐으니 봉고를 덕유교육원으로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다.23회 동기회 산행대장이며 노련한 기묵이한테 덕유교육원 갈림길까지 올라와달라는 주문도 곁들였다.


덕유교육원 갈림길로 내려와 교육원 길로 들어서자 땅바닥에 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재화는 평소 하산길에 스틱을 즐겨 쓰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국을 재화의 것으로 생각했다.한가닥 희망이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조금 내려가자 기묵이 혼자 올라왔다.그런데 그는 재화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눈 앞이 캄캄했다.의선이는 "전망바위로 다시 올라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그러자 기묵이는 교육원 조금 위에 마을로 빠지는 갈림길이 있으니 거기까지 가보자고 했다.20분 넘게 걸어 그 갈림길에 다다라 마을로 빠지는 길을 가며 살펴보니 여전히 스틱 흔적이 나타났다.현기가 앞장서서 달려나갔다.


15분쯤 걸었을까? 현기한테서 휴대폰이 왔다.재화가 이 길로 내려간 것 같다는 메시지였다.그리고 조금 더 가자 별장같은 집 앞 개울가에서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30~40분 전에 키 큰 산꾼이 지나갔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준다.그러는 사이 기묵이한테서 재화의 위치를 대충 알았으니 영각사 아래 영각교 다리 밑에서 목욕이나 하며 기다려달라는 휴대폰이 날아 왔다.그때 재화는 우리가 내려오기로 황점에 가 있었다.


기묵이가 재화를 봉고에 싣고 영각교로 와 오후 6시경,우리 일행과 다시 만났다.휴대폰을 봉고에 놓고 산행을 한 재화는 우리와 통화가 되지 않았고,영각교 삼거리 덕유민박집에서 전화를 빌어 의선이한테 전화를 했지만 의선이도 휴대폰을 봉고에 놓고 와 불통이었으니...그뿐이랴.재화는 내 휴대폰 번호마저 단축다이얼로 해놓아 전화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재화는 자신도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다."며 계면쩍어 했다.그러나저러나 우리는 아무 탈없이 재화와 다시 만난 것을 자족(自足)하며 안의에 있는 목욕탕으로 직행했다.

 

 

[종주정보]

 

06:21 무령고개(930)---0.7---06:36 선바위고개(1,040)...0.4...06:45 영취산(1,075.6)...1.9...덕운봉 갈림길(980)...2.6...07:53 978봉...08:47 북바위봉(961)...2.3...09:10 민령(870)...2.3...09:52 깃대봉(1,014.8)...10:05 샘터(우->민재골 갈림길 870)...2.5...10:38-12:15 육십령(700)...12:49 헬기장(915)...1.5...13:20-13:30 합미봉(1,026.4)...2.5...14:27 덕유교육원 길림길(950)...14:50 헬기장(1,070)...1.6...15:50-16:50 전망바위(1,260봉)...1.6...17:15 덕유교육원 갈림길(950)---2.5---17:55 영각교(600)

 

*도상거리/종주시간:19.2km/10시간 39분

*진입 및 탈출거리/산행시간:3.2km/55분

(무령고개->선바위고개:0.7km/덕유교육원 갈림길->영각교:2.5km)

*휴식시간:3시간 47분

*총산행거리/시간:22.4km/11시간 3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