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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둘레길,반야사,월유봉<부경합동산행>(2015.11.1)

청산신남석 2015. 11. 22. 01:40

 

▒ 구수천 4탄-탕탕 기세좋게 내닫는 물길에서 포착한 왜가리▒ 

 

여기에서< 석천>과 <구수천>의 명칭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석천(石川)은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형도에 오랫동안 기명된 강이름인데 반해 구수천(龜水川)은 상주에서 천년 옛길을 조성하면서 근래에 등장한 묻혀있던 강이름이다.

 

석천은 보문사터 맞은편에 수십 미터나 되는 절벽이 있는데, 조선중엽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가 이름 지었다.상주시 모동에서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으로 흐르는 강물이 바로 석천이다. 맑은 계류가 약 6km 정도에 이르는데, 이 석천계곡에는 기암절벽과 괴석이 많다.아울러 울창한 숲과 폭이 꽤 넓은 강물이 어우러져 천혜의 경관과 빼어난 절경을 만들어 낸다. 특히 충북 영동과 경북 상주,경계를 이루는 석천의 반야사 위 상류는 강물 양안이 천길 바위벼랑을 이루고 있다. 이 일대는 굽이굽이 벼루를 이루고 있는 곳이 많아 그야말로 별천지다.

 

석천이란 이름 외에도 구수천(龜水川), 금천(錦川), 금계천(錦溪川), 금천(錦川), 중모천(中牟川), 통천(通川)이라 불리는데 지방 2급 하천으로서 금강으로 흘러 들어간다.《‘석천(石川)’은 ‘돈다’는 뜻의 ‘돌내(回川)’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취한 글자로 본다.‘구수’는 ‘큰 물’, ‘금천’은 ‘큰 내’로 본다. ‘금’은 ‘크다’는 뜻이다.》《‘금수,구수내’는 ‘큰 물’이나 ‘큰 내’를, ‘석천’은 ‘물이 돌아 나간다.’는 뜻의 ‘돌 내’를 ‘돌(石)’로 옮긴 것이다.

 

석천이나 구수천은 같은 강물을 달리 부르지만 달리 부른다고 해서 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나는 굽이굽이 산태극물태극 휘어져 도는 강물이 맘에 들어 석천을 선호하는 편이다.

 

 

▒난가벽(欄柯壁)▒  

 

출렁다리에서 반야사로 되돌아가기 전 나는 이 일대에서 빼어난 경치로 이름난 난가벽을 카메라에 담아본다.난가벽(欄柯壁)에서 강물따라 좀 더 내려가면 임천석대(林千石臺)다.

 

난가벽은 구수천 천변에 병풍을 두른 듯이 서 있고 물 흐르는 소리가 제일 요란하다.‘백화팔경(白華八景)’에다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가 ‘백화동대벽기(白華洞㙜壁記)’에 “옛 사람을 조문하고 막히고 쌓인 것을 토로해보지만 다 할 수야 있겠는가? 늙은이가 겉으로 드러내어 감당할 바가 너무 많구나? 오직 두 가지만 여기 남긴다. 그러므로 전하기를 그 벼랑을 일러 난가(欄柯)라 하고 그 대를 일러 아양(峩洋)이다.” 하여 난가벽(欄柯壁)으로 전해진다. 아양(峩洋)은 곁에 접한 임천석대를 가리킨다.

 

 ▒난가벽 파노라마▒

 

 

난가벽을 살피는 동안 동기들은 벌써 떠나버리고 아무도 없다.뒤늦게 나는 걸음을 재촉하여 호젓한 오솔길로 들어서서 구수정으로 발품을 판다.

 

▒저승골 들머리표지석▒

 

저숭골 들머리에 다다랐다. 난가벽 맞은편 진불암 폐사지터를 거쳐 몽고군이 패퇴하여 방성통곡하며 퇴각했다는 방성재로 닿는 옛길이 나오고 임천석대에서 구수천 팔탄을 따라가면 몽고군이 섬멸된 저승골, 저승폭포에 이른다.

 

▒석천의 때묻지 않은,15년 전과 흡사한 강변 풍경-둘레길 우측 강변으로 가녀린 소롯길이 열려 있다.▒

 

『강변을 따라 무성하게 자란 갈대 위로 황금빛 햇살이 쏟아져내린다. 오후의 소담스런 황금 햇살이 내 얼굴에도 흘러내린다. 눈이 부시다. 강 건너 산기슭의 검푸른 거대 암벽이 둘러쳐진 사이로 짙푸른 이내가 서려 장관을 이루 고 있었다. 강물은 한층 짙푸른 쪽빛을 띄며 유유히 흘러간다. 석축을 쌓은 흔적이 연이어 나타났다.

 

세 번째 물을 건넜다. 강물을 징검다리로 느릿느릿 건너 강안으로 기어드는 중에 도취된 마음은 계속 끓는 물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몸 안으로 강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다.』

 

15년 전 두번째 돌다리가 있는 곳에 오기 전 강변 풍경을 기억에 떠올리면서 다리를 건너간다.

 

 

 

▒두번째 돌다리 건너 숲 오른편에 저승골이!!! ▒ 

▒만경봉에서 뻗어내린 저승골 오른편 산줄기의 가을빛 ▒

 

『300미터쯤 내려간 지점에서 네 번째 물을 건너 오른쪽 강변으로 붙었다. 물길을 건널 때는 물살이 상당히 빠른데다 수심이 깊어 몸이 버드나무처럼 휘청거렸다. 강변에는 갈대와 말풀, 사초 그리고 마디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자 길이 사라진다. 날카로운 잡목이 앞을 막아 돌아가란다. 나는 막힌 길이 안겨주는 모종의 암담함에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리 인생의 어떤 길일지라도 용기 있게 돌아서기만 하면 길은 끝없이 펼쳐진다. 그러나 여기서 돌아간다는 행위는 최악의 패배를 뜻한다. 성가시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잡목을 들추어 길을 살핀다. 가시가 무성한 덤불을 헤쳐나가면서 아랫도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다. 드디어 오솔길이다. 제법 반듯하면서도 그윽한 소나무 오솔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자주 들락거린 듯 반질반질 윤이 나 있다. 오솔길이 끝나자 앞이 훤하게 열리면서 거대한 직벽이 다가온다.』

 

저승골에서 문수전으로 가는 길을 되돌이켜보며 아련한 추억에 잠긴다.

▒망경대 문수전과 반야사 천변의 모습▒

 

우리가 점심을 들었던 숲을 벗어나 돌확길을 걸어 너덜지대로 가는 대신 왼편 편안한 길을 택하니 그곳에 망경대 위에 치솟은 문수전이 나온다. 잠시 뒤 작은 돌무더기를 쌓은 소원탑이 즐비한 곳을 지난다.이어서 석천을 건너 반야사 경내로 들어가는 시멘트 징검다리가 나온다.그런데 이 다공 징검다리는 주변 풍광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운치라곤 찾아보기 힘들어 아쉬웠다.

 

▒반야사 경내 가는 길-예전에는 등섬듬성 징검다리 였는데▒

 

반야사는 천변(川邊) 사찰이다.만경봉 서릉과 건너편 백화산 남릉이 석천에 뿌리를 담그는 발치에 절묘하게 터잡은 반야사. 문수전 아래,영천을 지나는 물줄기가 백화산 남릉의 지세에 막혀,반월처럼 휘어지는 천변에 위태롭게 터를 잡아 흡사 연꽃의 중심에 있는 형국이다.

 

창건설화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기록에 따르면 무염국사(無染國師)(800-880)가 황간 심묘사에 주석할 때 사미승 순인을 보내 못의 악룡을 몰아내고 못을 메워 절을 창건하었다고 전해진다.

 

대웅전 좌우로 극락전 지장전이 있으며 약간 떨어져서 관음전과 문수전이 있는데 특히 문수전은 70여미터나 되는 절벽 끝에 위치하고 있어 정말 장관이다. 반야사란 절이름은 세조가 문수동자를 만나 병이 낫고 감격하여 문수보살의 지혜를 상징하는 반야(般若)를 어필로 하사한데서 비롯되었다.

 

 

▒대웅전 마당에서 보는 웅장한 기상을 지닌 백호▒

 

반야사 건너편 백화산 중턱에는 돌무더기가 흘러내리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호랑이> 모양이 신비한 자태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다.백호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신록이 우거진 5월이 제격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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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년이 된 배롱나무 2그루▒

 

▒보물1371호 삼층석탑-반야사 동쪽 모동면 탑골에서 옮겨왔다.▒

 

 

▒징검다리 건너 갈숲에서 바라본 백호▒

 

▒산태극물태극 휘감아도는 천변사찰 반야사-연꽃 형상의 중심에 터잡고 있다-출처(반야사 홈피)▒ 

 

반야마을에서 산행 뒷풀이를 하러 산수미(山水美)의 극치라는 월유봉으로 간다.

 

잠시 뒤 월유봉에 다다르자 낙타의 등혹 여섯 개를 나란히 이어 붙인 것 같은, 월유봉이라는 이름의 묏부리가,거기에서 미어져 나온 검푸른 거대 암괴가,제각각 초강천을 거울 삼아 그 멋들어진 면상을 비춰보고 있었다. 강물,산,바위,백사장이 이루어낸 완벽한 조화미,강렬한 개성....하나의 완전한 성취,자연의 완벽한 구도가 여기에서 재현되고 있는 듯했다.

 

월유봉 일대의 절묘한 풍치를 일찍이 옛사람들은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 이름짓고 찬미했다.월유봉을 비롯,산양벽(山羊璧)이니 용연대(龍淵臺)니 하는 여덟 곳의 경승을 표나게 내세웠던 것이다.

 

우암 송시열도 한때 이곳에 머물러 공부를 하는 한편 신선 취미를 마음껏 즐겼다고 한다.강가의 한천정사(寒泉精舍)는 우암이 거처했던 옛터에 훗날의 유림들이 세운 기념물이다.하늘을 여행하던 달덩이조차 그곳에 머물고 싶어한다는 월유봉이 빚어놓은 초강천의 풍경은 가인(佳人)처럼 빼어났다.

 

우리들은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아름다운 월유봉의 경관을 핸폰에 담기도 했다.픙광이 아름다우면 말이 필요 없는 법,월유봉은 보름날 밤에 찾아보는 것이 환상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월유봉을 배경으로▒

 

 

 

 

 

 

 

 

 

월유봉을 감상하고 인근 감나무가든으로 걸음을 옮긴다.영동은 감고을로 유명하다,청주의 프라타너스 길,담양의 소문난 메타쉐쿼이어 가로수 길과 더불어 충북 영동의 감나무 길도 이 땅의 대표적인 가로수 길로 정평이 나 있다.

 

이에 이름도 걸맞은 감나무가든에서 메기매운탕으로 뒷풀이를 했다.서울과 부산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어 월유봉 앞에서 교가를 부르고 후라 갱고를 외치며 내년을 기약했다.

 

 

▒구수천 팔탄 길라잡이▒

 

1) 구수천(龜水川) -1灘<白玉亭에서 물탕골>

* 백옥정(白玉亭) 헌수봉獻壽峰에서 뻗어내린 옥봉(玉峰) 위 시인묵객의 주선으로 백년 전에 지은 정자.

* 세심석(洗心石)

백옥정 서쪽 약 300m 지점구수천변에 있다.둘레 20m, 높이 5m로 숙종 42년(1716년) 白華齋 黃翼再와 密庵 李栽등이 玉峰에서 함께 유람하며 이 돌을 세심석이라고 명명하면서 ‘이 돌과 같이 변함이 없고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염원으로 새겼다.후손 黃浩善, 黃源善 형제가 돌에 세심석이라고 刻字하였다.

* 사담소(沙潭沼)와 산택정(山澤亭) 터

물탕골 건너편에 있는데 구수천의 물결이 남북으로 分流하면서 북쪽 편으로 흐르는 물줄기에 沼가 형성되었다. 이 沼를 常山 金씨 弘敏이 사담소(沙潭沼)라 명명하고 자기의 호를 사담(沙潭)이라고 했다. 이 沼위에 산택정(山澤亭)을 짓고 벗들과 교유하였다.

 

2) 구수천(龜水川)-2灘

물탕골에서 방성재까지 구수천을 둘러싼 절벽과 기화요초가 장관을 이룬다.

*물탕골(藥水터 )세심석(洗心石)에서 구수천 따라 약 400m 내려가면 절벽이 15m 정도의 높이로 형성된 곳에 있는데 그 절벽 밑에 물탕이 있어 약수로 널리 애용되었다.

 

3) 구수천(龜水川)-3灘

방성재(放聲재)에서 송골까지 경관이 우수하다.

 

4)구수천(龜水川)-4灘

송골에서 보장골까지 이곳에는 난가벽이 있는 곳으로 구수천의 물결이 세게 흐르는 곳으로 주위가 아름답다.

*난가벽(欄柯壁)

절벽이 구수천변에 병풍을 두른듯 산을 의지하고 서있다. 물 흐르는 소리가 제일 요란하다.

 

5)구수천(龜水川)-5灘

보장골에서 전투갱변까지이며 진불암터와 임천석대가 있는 곳으로 옛 선인들의 맑은 정신이 서린 곳이다. 곳곳마다 경치가 수려하다.

*진불암(眞佛庵) 터

임천석대 건너편에 있으며 수목이 울창해 그 터를 찾기 어렵다.

*임천석대(林千石臺)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은 고려 말에 거문고를 안고 상주(尙州)의 백화산(白華山)에 들어가 매일 높은 바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탄식하다가 혁명한 소식을 듣고는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고 그 기록이 이조실록 정조편에 남아 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이 표리부동한 현실에서 귀감이 된다.

 

6)구수천(龜水川)-6灘

전투갱변에서 저승골까지이며 전투갱변은 넓고 편편하며 수목이 무성하고 저승골은 깊고 경사도가 급경사이며 한 폭 산수화를 방불케한다.

*저승골

몽고의 6차 침입 때 차라대군을 저승골로 유인하여 협공을 하였다는 구전이 있으며 저승골, 전투갱변에서 몽고대첩을 이룬 곳이다.

 

7))구수천(龜水川)-7灘

저승골에서 明鏡湖까지이며 산세가 수려하고 옆산이 명경호 물속에 비쳐 그 아름다움이 형언할 수 없다.

*명경호(明鏡湖)시냇물이 거울과 같이 맑고 호수와 같이 잔잔한 데 유래되었고 주위의 울창한 나무와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룬다.

 

8)구수천(龜水川)-8灘

명경호에서 충북 영동 般若寺까지이며 망경대(望景臺)가 있고 경북과 충북 영동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다음은 구수천 팔탄을 욺은 시 한 편을 소개 한다.

 

八節鳴灘 여덟 구비의 여울

 

非竹非絲折折鳴 퉁소도 거문고도 아닌데 굽이굽이 울리니

自然聲樂石間生 자연의 聲樂이 돌 사이에서 생겼다.

浮泡飛沫雖渠使 뜬 거품, 나는 물방울은 비록 네가 시킨 것이나

停則淵澄亦性情 멈추면 맑은 못 되는 게 또한 너의 性情이다.

 

만성 김재륜(1776-1846)

 

 

※에필로그※

 

이번 합동산행에 참여한 43명의 동기가운데 사모는 세분(서울2,부산1)이 참여하여 산행을 빛내주었다.내년부터는 더 많은 사모들이 함께 하여 활기찬 분위기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덧붙여 1개월 전 답사을 다녀온 서울의 순길,윤득,성모 부산의 익희,금구,일곤,김정 동기의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그리고 이 산행기를 쓰면서 사진을 건네준 드가 윤득 ,가제트 기환, 홍인 일곤,그리고 호성이한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끝으로 이날 산행에 참여한 서울과 부산 동기들과 집행부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하며 가정에 행복이 충일하고 내내 강건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