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지리산 중봉골-<그때 그산>

청산신남석 2006. 4. 6. 20:41

산을 찾는 이들에게 장쾌한 지리산 종주는 꿈이요,가슴 설레는 일이다.그런데 천성이 게을러서인지 워킹산행의 백미(白眉)라는 지리산 종주는 여직 엄두도 못내고 있다.기껏해야 십수년 전에 치밭목으로 해서 천왕봉을 다녀왔고 중산리서 바로 천왕봉을 오른 것도 96년 6월 청마산우회 창립 2돌 산행에서였다.그러나 청마와 함께 지리산 북쪽 자락,삼정산이나 어름터,벽송사 그리고 칠선계곡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나는 그곳의 수려한 풍광에 매료되곤 했다.그래서 지리산은 언제 어느 때 찾더라도 내게는 황홀한 기쁨을 선사했으니 과연 지리산은 명산다운 풍모를 지녔다 하겠다.


그 중에서도 10년 전,청마산우회 2돌 지리산 산행에 함께 한 것은 내겐 커다란 행운이었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산행이었다.6월 8일.우리 일행은 저녁 늦게 순두류자연학습원에 짐을 풀고 두 돌맞이 기념식을 치뤘다.이날 참가자 47명은 청마산우회가 탄생한 뒤 가장 많은 인원이었으니 그 뜨거운 열기와 환호는 실로 대단했다.깊어 가는 여름밤, 하늘에는 황금빛 별빛이 쏟아지고 서늘한 지리산 기운은 일상에 찌든 속내를 말끔히 씻어내주었다.


이튿날 아침,장혁표 전부산대총장과 이희문 교장 내외,김창수 교수의 어린 딸을 비롯,1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청마 회원들이 순두류를 출발,로타리 산장에 다다랐다.밤새 술추렴을 한 주당파들은 '앉은자리'가 정상 아니냐'며 거기에 눌러 앉고야 만다.나도 그 유혹을 억누르며 갈증을 축인 뒤 천왕봉으로 향했다.어제 저녁 그렇게 청명하던 날씨는 간 곳 없고 새벽부터 잔뜩 찌푸리던 날씨는 법계사에 올라설 즈음,안개비를 뿌리기 시작했다.간밤에 퍼마신 술기운에다 가뜩이나 숨이 차오르는 그 된비알 오르기는 무척 힘들었다.그래도 사람들은 순례자의 행렬을 방불케하듯 꾸역꾸역 잘도 올라간다.나도 그 인파에 떠밀리다시피 하여 천왕봉에 올라섰다.12시를 조금 넘어섰다.정상에는 한치 앞도 어림할 수 없이 안개가 뒤덮고 있었다.3대가 적선해야 본다는 일출이야 늦었으니 그렇다 쳐도 천하의 전망터인 천왕봉은 우리에게 전혀 조망을 허락하지 않아 씁쓸했다.


그런데 신남석 대장이 올라온 길을 되내려가지 말고 중봉골로 하산할 것을 제의했다.천왕봉서 점심을 들고 중봉골로 내려갈 지원자를 헤아리니 8명이었다.나머지 회원들은 법계사길로 되내려 갔다.난생 처음 중봉골(?)을 들어본 터지만 사람들이 잘 다녀 훤히 열린 산길이려니 생각했다.그런데 그건 중봉골 들머리에 들면서부터 오산이었음이 드러났다.

 

천왕봉서 내려와 중봉으로 오르기 전 잘룩이에 다다르자 신 대장은 갑자기 오른쪽 골짜기로 내려서는 게 아닌가.들머리부터 길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이따금 빛 바랜 표지기가 사람들이 은밀히 다닌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빗줄기는 차츰 드세지기 시작했다.가파른 비탈길에 서 있는 구상나무 아래로는 발목까지 빠지는 이끼가 덮여 원시림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잔뜩 긴장하며 30분 가량 길 없는 길을 헤쳐 내려오자 10미터쯤 되는 폭포가 앞을 막아선다.우리는 폭포 오른쪽으로 조심스레 돌아 내려와 계곡으로 들어섰다.걸음을 멈추고 치올려다보는 폭포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천왕봉과 중봉 사이에서 남쪽으로 급격하게 비탈을 이루며 쏟아지는 골짜기가 순두류(順頭流)까지 이어지는 인적 드문 중봉골은 비경(秘境) 그 자체였다.웬만큼 지리산을 더듬은 산꾼들도 잘 찾지 않는다는 말이 빈발을 아닌 듯했다. 이렇게 때묻지 않은 골짜기는 처음이었다. 비가 와서 더욱 푸르름을 뽐내는 신록(新綠)과 수정같이 차고 맑은 계류가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1시간쯤 계곡을 타고 내려가자 골안은 더 헤벌어지고 수량은 더욱 불어났다.

 


     [중봉골 폭포 사진:http://www.sansan.pe.kr]

 

우리는 써레봉으로 오르는 갈림목 언저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사과 몇 쪽을 입에 물어보니 빗물인지 사과 맛인지 모를 정도다.사방이 너무나 적요해 정말 사색하기에 더 없이 좋은 코스였다.일행이 걸음을 재촉하여 산죽밭이 시작되는 길목에 이르자 온 산을 뒤흔드는 폭포소리가 들렸다.윗용소였다.이제 산길은 골짜기와 멀어지면서 오른편으로 이어진다.발치 저 아래로 용추폭포의 굉음이 또 다시 울린다.신선너덜을 지나면서 뚜렷한 등산로가 반긴다.20분쯤 걸어 법계사 오르는 길에 닿았다.출렁다리를 건너 해발 900미터에 터잡은 순두류 자연학습원에 닿은 시각은 4시였다.


3시간이 넘게 걸린 빗속의 중봉골 산행-천의 얼굴을 지닌 지리산이 또 다른 모습으로 내게 심어져 있다.그리운 중봉골이여,지리산의 위대한 품이여!

 

청마산우회 박현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