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그리움으로 걷는 백두대간 33구간 끊어타기<미시령-진부령>

청산신남석 2008. 3. 28. 21:36

  [미시령에서 텅스턴 모드로 찍은 속초항 영랑호와 청초호가 푸른 이내에 잠겼다.]                


[동 트기 전의 미시령]


 미시령-신선봉-대간령-마산-눈물고개-진부령 14.17km(2005년 9월 4일)


 

7번 국도에 비가 내린다.부산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우중충한 날씨였는데 포항을 거치면서 빗방울이 듣더니 울진을 지날 무렵에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진다.


오늘은 서울 동기들의 산행클럽인 산사랑과 함께 대간 마지막 구간을 종주하기로 한 뜻깊은 날.그래서 쾌청한 날씨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비가 쏟아지니 한가닥 불안감이 고개를 든다.

 

당초 계획은 진고개에서 구룡령(22km)까지 끊어탈 참이었으나 산사랑 회원들을 위해 남은 네 구간가운데 제일 짧은 미시령~진부령 구간(약 14km)으로 코스를 바꾼 것이다.말하자면 남녘 대간의 마지막 종주를 미리 앞당기는 셈이다.


우리를 실은 기묵 아우의 봉고는 속초 시내로 들어선다.옛날의 속초는 양양도호부를 따르는 작은 갯마을이었지만 일제시대 속초항이 개발되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명산 설악을 등에 업고 푸른 동해를 더불었으니 아쉬울 게 없고,아래위로 청초와 영랑같은 호수까지 거느렸으니 더 부러울 게 없는 곳이다.속초는 경주,김천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으례 차례를 다툰다고 택리지는 말한다.


속초의 모든 길은 미시령으로 통한다.속초 시내에서 차머리를 울산바위 쪽으로 돌려 미시령 길로 들어서면 금세 노학동의 학사평과 고성군 토성면의 원암리로 나뉜다.원암(元岩)은 조선시대 원암역(元岩驛)에 뿌리를 두었으니 아마 울산바위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지금의 원암은 설악의 콘도마을이 돼버렸다.콘도 역시 나그네가 잠시 묵어가는 곳이니 고개 아래 원암 땅은 예나 지금이나 그런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지난해 환갑을 넘긴 나이에 부부 함께 백두대간을 완주하여 매스컴에서 화제를 뿌렸던 하영수 선배(17회) 부부가 원암의 하나콘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9월 3일(토) 항공편으로 양양에 먼저 도착한 영수 형이 머물고 있는 하나콘도에 봉고가 멈춰서자 비옷 차림의 영수 형이 콘도 입구로 걸어내려온다.

 

경남중고 총동창회 산행클럽인 용마산악회 수석부회장인 영수 형과 우리는 지난해 속리산 구간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일정이 엇갈려 못내 아쉬웠는데 오늘 미시령~진부령 구간에 다시 만났으니 우정 반갑고 기뻤다.서울 산사랑회 동기들과 하영수 선배 내외까지 마지막 구간에 동참해주었으니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하영수 선배,서울 산사랑 회원들과 함께 미시령휴게소에서]

 

영수 형과 함께 종주들머리 미시령으로 오른다.미시령으로 오르는 구불텅 56번 지방도로엔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다.9월 4일 새벽 4시,미시령 고개마루에 올라서서 미시령휴게소 쪽으로 차를 부렸다.휴게소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던 서울 동기들 11명은 부산 종주팀 9명이 들어서자 환호성과 함께 뜨거운 박수세례를 퍼붓는다.우선 지난해 형수와 함께 백두대간을 완주해낸 하영수 선배님을 모셔 격려의 메시지를 들은 다음,오뎅국으로 허기를 달랬다.

 

서울 산사랑 동기들은 최재권 회장을 비롯,지성환 총무,고윤득,김광철,김성집,김종관,배해구,이충구,조덕준,최민석 동기와 손의선 11명,부산 이일산우회 종주팀은 김익수,김현기,김황세,송원경,신남석,이재화,전기환,최금구 동기,그리고 낙남정간 종주팀이었던 강호철 9명이었다.

 

그런데 새벽부터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장비도 시원치 않은 서울팀의 면면을 살피니 우리와 함께 종주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일 성싶었다.아니나 다를까 최 회장은 백담사 일원을 탐방하겠으니 나중 진부령에서 만나는 게 좋겠다며 정중하게 사의를 표한다.이 궂은 날씨에 강권할 일도 아니어서 우리끼리 종주키로 방침을 바꿨다.우리의 장도를 축하해주기 위해 서울 동기들이 미시령까지 와서 진부령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또한 하영수 선배님도 진부령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마지막 구간종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미시령에서 1km 지점,신선대 암릉이 올라오는 산줄기와 만나는 샘터]
 

예전에 소로길이었던 미시령(彌矢嶺)에 고갯길이 열린 것은 조선 성종24년(1493년)무렵이었다.그전에는 한양에서 관동으로 넘는 나라의 고갯길은 대관령과 소동라령(지금의 한계령)이었다.소동라령(所東羅嶺)이 좁고 험해 미시파령(彌時坡嶺)을 열러 양양,간성의 역로로 삼았다,그 미시파령의 간성 쪽 들머리가 원암역으로 지금의 원암리였다.그러다가 미시파령은 1632년부터는 이미 나랏길의 쓰임새를 잃고 다시 풀섶에 파묻혔다고 기록에 전한다.

 

그렇게 잊혀졌던 미시령에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길이 뚫린 것은 1960년이었다.그러나 워낙 험준한 탓에 미시령 찻길은 이내 망가져 방치되다가 1989년에 들어 다시 열렸다.미시령길은 한계령이나 진부령과는 달리 폭이 좁고 경시가 심하여 지금도 폭설이 내리는 겨울철에는 으레 서너 차례씩 길이 끊겼으니 예전에는 오죽했으랴.

 

미시령만큼 다양한 이름의 고개도 드물 것이다.조선 시대,나랏길인 관로(官路)였을 적에는 미시파령(彌時坡嶺),또는 미시령(彌時嶺)으로 불리다가 영조 때에는 지금의 이름인 미시령(彌矢嶺)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그렇지만 세간에서는 미시령보다 연수파령(延壽坡嶺,대동여지도),연수파령(連水坡嶺,증보문헌비고),여수파령(麗水坡嶺,증보문헌비고)또는 연수령(延壽嶺,택리지)으로 더 많이 불렸다.

속초에서 미시령으로 오르는 길은 내내 울산바위와 함께 오른다.먼 옛날 조화옹이 금강산을 빚을 적에 울산에서 금강산으로 가다 그만 설악에서 멈추었다는 울산바위.옛이름이 천후산(天喉山)이니 이름 그대로“하늘이 우는 산”이다.울타리를 두른 듯하여 울산(鬱山)이라고도 하지만 여름철이면 벼락과 천둥이 쳐 마치 하늘이 우는 듯 산이 울기 때문에 울산이라 하였다는 설이 옳을 성싶다.


그 미시령(770m)에 새벽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세찬 바람이 불어댄다.3시 40분,서울 동기들의 격려를 뒤로 하고 미시령휴게소 옆 가파른 절개지를 오른다.첫 봉우리에 올라서자 이번에는 짙은 안개가 스멀거려 대간 길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으니 그저 등산로를 따라 오를 뿐이었다.5시 25분,신선봉 상봉 아래 샘터에 다다르니 자그마한 옹달샘이 물줄기를 흘리고 있다.일기가 저기압이서서인지 이마엔 벌써 땀이 흥건하다.오늘 종주가 순탄치만은 않을 듯했다.물 한 모금을 떠서 목을 축이니 그나마 상쾌하다.그리고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쓸어내렸다. 

 

 [전망바위에 올라 용대리를 배경으로]

 

샘터에서 8분간 머물다 5시 33분,신선봉 상봉으로 오른다.15분가량 발품을 파니 전망바위가 나타난다.전망바위에 올라서자 서서히 어둠이 사위고 저 아래 미시령이 희부윰하게 내려다보인다,그리고 빗줄기도 한결 잦아들면서 가랑비로 바뀐다.


전망바위에서 용대리를 등진 대간팀의 모습을 담았지만 시계가 좋지 않은 탓에 선명하지 않다.맨 뒤 능선은 대청봉에서 뻗어내린 서북릉이며,그 산자락 오른쪽으로 용대리가 희미하다.그리고 사진 왼쪽 바위봉에서 용대리 앞쪽으로 치닫는 산줄기는 황철봉 서릉.이 황철봉 서릉과 동기들 뒤로 보이는 고샅이 창암계곡인데,56번 지방도가 미시령에서 이 계곡을 따라 진부령 갈림길인 용대교를 거쳐 용대리로 이어진다.

 

 [너널겅 오르기-왼쪽 위로 상봉의 돌탑이 우뚝하다.] 

 

 

전망바위에서 왼쪽으로 열린 대간 길을 따라 5분쯤 오르니 상봉 아래턱 너덜겅에 이른다.사진 오른쪽 맨 위로는 상봉의 돌탑이 치솟았다.

 

너덜겅을 딛고 6분 뒤,6시 16분 상봉(1,244m)에 다다르니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세차게 불고 운무가 가려 시계가 좋지 않았다.상봉 아래 전망바위에 올라섰을 때만 하더라도 비도 그치고 안개도 서서히 걷혀 멋진 조망을 기대했는데 상봉에 다다르자 홀연 안개가 사위를 에워싸 조망은커녕 음산한 분위기였다.상봉 근처에는 안개에 휩싸인 고사목만 보일뿐 아무 것도 조망이 안 되었다.

 

[감투바위를 지나며]


상봉에서 사진을 찍고 서둘러 하산길에 들었다.잠시 뒤엔 소금바위 같은 감투바위를 지나자 또 다시 암장이다.이 암장을 배경으로 최금구,전기환,김익수,그리고 강호철 회원이 함께 했다. 

 

 

화암재로 내려가는 길은 군데군데 로프가 매여 있는 가파른 돌확길.4번이나 로프를 잡고 내려서야 했지만,로프에 의지할 만큼 험하지는 않았다.다만 비가 온 뒤라 미끄러울 뿐이었다.화암재로 내려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막을 찢을 정도로 날카로운 그 소리는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였고 매우 불길한 느낌마저 들었다.나는 그 순간 내 머리 위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를 포착하여 카메라에 담았다. 

 

 [군데군데 로프를 잡아야 하는 화암재 내리막길]

 

[첫 로프를 타고 내려서다 만난 까마귀]

첫 로프를 잡고 내려서면서 그 불길한 까마귀 울음소리와 만난 뒤,2번째 로프 구간으로 닥아서는데 또 운무에 휩싸인 고사목이 나타난다.흡사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했다.

 

 

화암재 내려서는 로프 구간이 거의 끝날 무렵,대간 길에는 아주 색다른 꽃이 눈길을 사로잡는다.진범이었다.진범의 꽃은 오리가 무리지어 하늘로 오르는 듯한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진범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키는 보통 무릎 높이 정도까지 자라는 듯 하지만,바로 서서 자라기도 하고 비스듬히 누워 자라기도 하므로 줄기의 길이로 치면 훨씬 더 길다. 뿌리 근처에 달리는 잎은 잎자루가 길고 전체적으로는 둥글며 어른 손바닥보다 훨씬 크게 자라기도 하는데,전체적으로 크게 5~7갈래로 갈라져 있다.


단연 돋보이는 모습은 꽃이다.투구꽃과 같은 속(Aconitum)이어서 꽃잎의 모양이 마치 투구를 얻은 것 같지만,총총이 꽃들이 달리는 모습이나 꽃송이 하나 하나도 좀 더 길쭉하고 야무지게 달려 투구꽃과는 금새 구분이 된다.여름에 피어 비교적 오래 볼 수 있는 꽃이다.


뿌리가 흑갈색으로 아주 깊이 들어 가는데,약으로 쓴다.한방에서는 흔히 ‘진교’라는 생약명을 달아 이용하기 때문에 진범보다는 진교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많다.보통은 진범 이 외에 흰진범이나 줄바꽃같은 식물을 이 생약명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식물체내에 알카로이드 성분이 있어 중추 신경을 진정시키고 혈관을 넓혀 주므로 혈압을 강하시키는 효과가 있다.그래서 보통 한방에서는 열을 내리거나 통증을 없애 주고,관절염이나 팔다리 마비 등 여러 증상에 두루 쓴다.문제는 이 성분이 잘 쓰면 좋은 약이 되지만 독성이 있는 것이므로,절대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한방에서 이 식물을 사용할 때에도 주기를 주어 사용해야 하며,숨찬 증세등의 부작용을 가져 올 수 있다.특히 일반인들은 약초라고 그냥 먹어서는 절대 안 된다.

 

[오리가 무리지어 하늘로 오르는 듯한 형상의 진범]

6시 50분,상봉(1,244m)과 신선봉 정상(1,214m)사이의 고개인 화암재(1,050m)에 다다랐다.화암재(禾岩峙)는 오른쪽 계곡 아랫쪽,즉 울산바위 맞은편에 자리잡은 화암사(禾岩寺)에서 따온 고개이름이다.

 

[화암재에 다다라]  

 

화암재(1,050m)에서 7시 2분까지 머물고 신선봉(1,214m)으로 오른다.12분쯤 더터 오르니 신선봉으로 직등하지 않고 왼쪽으로 열려 있다.지름길을 따라 조금 가니 해묵은 헬기장이 나오면서 오른쪽으로 희미한 갈림길이 나타난다.신선봉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워낙 짙은 안개 때문에 우리는 신선봉 오르기를 접고 대간 길 따라 걸었다.7시 20분 ’큰바위’에 이르니 우리보다 먼저 미시령을 출발했던 대간꾼들이 바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목례를 하고 큰바위를 돌아 대간 길을 간다.대간 길은 암봉을 왼쪽으로 비켜 내려간다.완연한 숲길이 이어지다 잠시 바위지대를 거쳐 다시 숲속으로 빠져든다.


7시 32분,대간분기점인 1,094m 지점에 다다르니 대간 길은 오른쪽(북)으로 열려 있고 왼쪽(서) 길은 능선으로 갈래쳐나간다.바위가 있는 이곳에서 아침을 들기로 했다.우리는 배낭을 내려놓고 후미가 오길 기다린다.후미의 기환이가 도착했으나 정작 와야 할 후미대장 현기가 보이지 않았다.기환이한테 물어보니 신선봉 갈림길에서부터 현기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우리는 현기가 곧 도착하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기환이와 내가 현기를 찾으러 오던 길을 거슬러 오른다.기환이는 암릉 아래쪽 숲길을 따라 가고 나는 암릉을 타고 큰바위 쪽으로 올라갔다.우리는 연신 현기를 소리쳐 불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암봉 오른편 아래로 열린 대간 길은 숲길인 반면,암릉길은 매우 험하고 가파른데다 로프도 군데군데 걸려 있었다.나는 큰바위 근처 암봉에 올라서서 현기를 불러보았으나 허사였다.뿐만아니라 암릉 주위를 휘감은 짙은 안개는 더욱 답답함을 더했다.대간분기점을 떠난 지 20여분이 훌쩍 지났다.나는 암봉에서 숨을 고르고 큰바위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대간분기점에서 현기를 찾으러 거슬러 오른 암릉을 뒤돌아보며 한 컷트했다.이 암릉에서 신선봉 갈림길로 내려가는 길은 비가 온 뒤라 몹씨 미끄러웠다.날이 밝다면 또 모르겠으나 나는 무모하게 바위를 타는 대신 내가 올라왔던 그 암릉길로 다시 내려갔다.

 

[큰바위 지나 암봉 오르면 만나는 내리막길 너덜겅]

 

거친 너덜지대를 이루고 있는 암봉 오름길-너덜 중간에는 로프가 걸려 있고 바위 아래 큰 소나무 사이에서 대간 길과 만난다.빛 바랜 리번이 붙어 있는 걸로 미루어 대간꾼들이 더러 이 암릉을 거쳐 간 듯했다.

 

너덜겅을 내려와 대간분기점 반대방향인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큰바위가 있는 신선봉 갈림길로 간다.그런데 조금 발품을 파니 뜻밖에도 대관령산악회의 최능규 씨 일행과 현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벌써 30분 넘게 현기를 찾아다닌 나는 "어떻게 된 거야.?"하며 놀란 표정을 짓지 "뭐가 어떻게 돼,신선봉에 올랐다가 길을 잃어버렸지."하며 현기는 퉁명스럽게 대꾸한다.그러자 최능규 씨는 "신선봉에서는 종종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지."하며 또 다시 우리와 만난 것을 반긴다.


최능규 씨와 우린 오늘이 3번째 만남이었다.따로 약속한 것도 아닌데 대간을 타면서 세 번이나 만났으니 우린 보통 인연은 아니었다.아마 최능규 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현기는 길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빠졌음이 분명해보였다.최능규 씨는 일행가운데 한 회원의 마지막 구간 벌충을 위해 길잡이를 하러 왔다고 했다.정말 반가웠다.

 

그들과 함께 대간분기점으로 갔다.대관령 구간을 종주하면서 횡계에 사는 최능규 씨한데 연락하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럴 틈이 없었던 게 못내 아쉬웠는데...다시 만나고보니 미안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집사람은 어떠신지요.?하며 안부를 묻자 "몸을 다쳐 산에 오지 못한다."며 말끝을 흐린다.

 

8시 11분,대간분기점에 다다른 우리는 최능규 씨를 동기들에게 소개했다.구면의 익수와 금구는 물론 다른 동기들도 최능규 씨와 만남을 반겼다.싱거운 소릴 잘 하는 익수는 신선봉에서 길을 잃고 헤맨 현기한테 "신선이 되어 눌러 앉지 뭐 하러 내려온 거야?"하며 일침을 놓자 "안 그래도 신선이 될 참이었어...아직 때가 안 되었는가베."하며 맞장구를 친다.최능구 씨 일행 세 분은 대간분기점에서 우리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대간 길로 총총 사라졌다.

 

 

 

대간분기점에서 아침을 들고 출발에 앞서 동기들이 배낭을 꾸린다.숲과 바위가 어울린 대간분기점 주위로 안개가 배회하고 겉옷을 꺼내 입을 정도로 날씨는 서늘했다.

 

[대간분기점(950m)에서 행장을 꾸리는 종주팀]

 

출발에 앞서 배낭을 챙기는 동기들 오른편으로 열린 산길이 대간령으로 가는 대간마루금이며 동기들 왼편으로 열린 산길은 능선길이다.자칫하면 능선길로 들어서기 쉬운 지점이다.

 

 

오늘 구간가운데 대간분기점은 여러모로 뜻 깊은 장소였다.현기가 길을 잃고 헤맬 때 기다리던 곳이며,대관령산악회의 최능규 씨를 만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그런데다 미시령에서 이곳까지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마뜩한 장소도 없었으며 아울러 오랫만에 대간 끊어타기에 동참한 김황세 동기와 강호철 회원이 함께 했으니 우리는 이곳 대간분기점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8시 48분 대간령(650m)으로 내려간다.내리막 숲길은 드문드문 바위가 보였지만 완만해서 걷기에 좋았다.10분 쯤 내려가서 860봉에 이르렀을 때,아주 소중한 우리의 꽃,금강초롱꽃이 무리 지어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바위틈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서서 아무도 흉내내지 못하는 고운 보랏빛의 초롱을 닮은 꽃을 피우고 있는 금강초롱의 모습을 보노라면,이 식물의 역사와 의미를 구태여 따져보지 않더라도 감탄사와 함께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함초롬히 아침이슬 머금은 흰금강초롱꽃]

 

금강초롱은 깊은 산에 사는 여러해살이 풀이다.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이다.이 식물 한 종만이 특산 식물인 것이 아니고 금강초롱이 속한 속(屬) 즉 집안 전체가 우리나라 특산인 우리 식물중에 우리 식물이다.게다가 분포역 자체가 좁으니 세계적인 희귀식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금강초롱"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밤에 불을 밝히는 초롱을 닮은 꽃이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꽃을 한번 보면 그고운 이름이 아주 딱 어울린다.우리 이름은 이렇게 고운데 세계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쓰는 학명은 우리 말이 아니다.이 식물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나까이라고 하는 일본인 식물학자였다. 그가 자신을 촉탁교수로 임명하고 우리나라의 식물을 조사하도록 지원해준 한일합병의 주역이며 조선총독부의 초대 공사인 하나부사에게 보은의 뜻으로 이 소중한 우리의 특산 식물 속명을 하나부사야로 정한 것이니 참으로 치욕적인 사연이 아닐 수 없다.북한에서는 그러한 학명은 쓸 수 없다고 하여 금강산이야(Kumgangsania)라고 하는 다른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학명이야 국제적으로 함께 약속하여 쓰는 것이니 국제식물명명규약에 의해 싫다고 우리 마음대로 버릴 수는 없는 형편이다.

 

 

 

금강산에 두 오누이가 살았다.부모를 여의어 어려서부터 힘들게 살았지만 형제간의 우애는 누구나 부러워 할만큼 사이가 좋왔다.그런데 어느 날 누나가 아파서 눕게 되었다.집이 가난한 그들에게 약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남동생은 말로만 들었던 약초를 찾아 금강산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꽃들이 남동생에게 속삭였다.그 약초를 구하기 위해서는 달나라까지 가야한다고 남동생은 누나를 살리기 위해 달나라까지 갔다.한편 집에서 남동생을 기다리던 누나는 아무리 기다려도 동생이 돌아오지 않자 동생을 찾아 초롱불을 들고 늦은밤 집을 나섰다.몸이 좋지 않았던 누나는 얼마 걷지도 못해 금강산 한 구석에서 죽고 말았다.그 누나가 들고 있던 초롱불이 금강초롱꽃이 되었다.

 

 

아침 이슬을 함초롬히 머금은 금강초롱꽃은 은은한 자주색이나 짙은 자주색 꽃을 피워올리는데 보면 볼수록 청초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대간 길에서 우리는 흰색의 금강초롱꽃 개체도 발견할 수 있었다.이날 우리는 자주색과 흰색의 금강초롱꽃을 모두 보았으니 정말 행운이었다.자주색 초롱꽃에 대하여 흰색 금강초롱꽃은 "흰금강초롱꽃"이라고 한다.

 

 [황세야! 저 봉우리만 넘어서면 샛령인데...] 

 

금강초롱꽃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한참이나 금강초롱꽃을 살피다가 황세와 나는 대간 길을 재촉한다.종주 첫 해에는 열심히 대간을 타던 황세는 둘째 해부터 내리 불참하고 말았다.허리에 무리가 온 탓에 종주를 멀리 하게 되었는데 장거리 산행을 자제해오던 그가 모처럼 대간 길에 합류했다.평소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준족이다.그의 이름대로 나는 듯한 걸음걸이를 따라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그런데 갑자기 허리가 좋지 않아 하산길에 애를 먹다가 끝내 장거리 산행을 자제해온 터였다.그러나 꾸준히 산행을 하면서 이제 많이 회복되었다고 했다.산행은 역시 산행으로 풀어야 한다.그런 황세가 대간령과 운무 비낀 대간의 산들을 배경으로 자세를 잡았다.

 

 [샛령 앞 860봉에서 조망한 고성의 산줄기]


다시 10분쯤 다리품을 팔아 860봉에 이른다.이곳에서 구름이 반쯤 걷힌 고성 쪽 산줄기를 조망한다.제1선은 대간령 바로 앞봉우리에서 뻗어내린 산줄기l,제2선은 대간령 지나 바위봉우리인 890봉의 산줄기이며,제3선은 마산(馬山 1,051.8m)에서 뻗어내린 북동릉이다.


 

간성 쪽 산줄기를 조망하고 2분 뒤,860봉에 다다르니 해묵은 헬기장이 나온다.대간령이 코앞이다. 여기서 후미가 오길 기다려 9분간 다리쉼을 했다.그런데 반쯤 걷히던 구름은 삽시간에 대간 쪽으로 물밀듯이 몰려든다.운이 좋다면 대간마루금을 볼 수 있을 듯했다.참으로 변화무쌍한 날씨였다. 
 

9시 47분 대간령(大間嶺 샛령 650m)에 다다르니 풀섶에 커다란 돌무지가 흩어져 있다.성황당이었다.대간령은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있는 옛길로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진부령과 미시령보다도 사람들의 왕래가 더 빈번했던 고개였다.경사가 완만한 데다 거리도 지금의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까지 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던 탓이다.예전에는 석파령(石坡嶺)이라고도 했고,한때 사자원(獅子院)이 있어서 원기령(院基嶺)이라고도 했다는 대간령,지금은 대간꾼 외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다.소간령(小間嶺 작은샛령)은 진부령 아래서 샛령을 향해 골짜기를 거스르다 만나는 고개인데 오름길이 된비알이라 이곳 사람들은 "된박재"라 부른다.

 

해방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샛령 정상 성황당에서는 매년 인제군수와 양양군수가 성황제를 지냈다고 한다.그러나 옛 모습은 간데 없고 돌무더기는 여기저기 돌담을 짓느라 흩어져 있었다. 대간을 남북으로 이어 걷는 대간꾼들이 하룻밤을 머무느라 그랬을 것이다. 나뭇가지에는 온통 빨갛고 노란 표지기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대간 종주가 끝나면 작은샛령을 거쳐 샛령에 올랐다가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로 이어지는 이 그리운 옛길을 걸어보고 싶다.

 

대간령 돌무지에 앉아 쉬고 있는데 젊은 남녀 대간꾼들이 들이닥친다.오늘 진부령에서 대간 종주에 첫 발을 들여놓아 미시령까지 간다고 한다.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대간 종주가 부러운 듯,"우리는 이제 시작인데 언제 지리산까지 갈꼬.?"하면서 걱정을 한다.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며 하면 된다고 우리는 그들을 격려했다.우리는 한 구간에 평균 20km 가량 걸어 36번 만에 종주를 끝내게 되었다고 하자 젊은이들은 "대단하네요.젊은이들도 하기 어려운 종주를 그 연세에 해냈군요.축하드려요." 하며 오히려 우리를 격려해준다.

 

[샛령 성황당터 돌무지에 앉아-예전에 이 길을 넘던 이들을 그려본다]

 

9분 가량 대간령에서 시간을 보내고 9시 56분,발품을 팔기 시작했다.대간의 산들이 허물을 벗듯 안개는 차츰차츰 사라진다.840봉에 가까워지자 암봉이 나온다.10시 16분,840봉에 올라서서 후미가 오길 기다렸다.840봉은 전망도 괜찮고 쉬어가기에도 좋은 봉우리였다.대간령에서 20분 가량 치올라 840봉 전망바위에 올라섰다.

 

[840봉으로 올라서는 후미대장 현기]

 

[840봉 전망바위]


840봉에서 우리가 오를 890봉을 바라본다.안개가 반쯤 드리운 890봉은 남쪽 사면에 거대한 암장을 품고 있는데 대간 길은 암장 왼편으로 돌아올라야 한다.

 

[구름 비낀 890봉 암장]


840봉에서 890봉쪽으로 가다 오른편(동) 도원저수지와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 일대를 조망한다. 대간령에서 도원저수지로 흘러드는 문암천의 물길이 빛나고,마산(馬山 1,051.8m)의 북동릉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는 도원저수지를 감싸듯 꼬깔봉(죽변봉 竹弁峰 630.9m)과 구름에 아스라한 운봉산(286.1m)을 아우르며 동해로 잦아든다.

 

[샛령의 영동 쪽 들머리였던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


890봉 아래 암장에 다다라 암장 왼편 너덜지대를 거슬러 오른다.새벽녘에 상봉으로 올랐던 그 너덜과 흡사하다.


 

890봉 너덜지대를 거의 다 올라서서 840봉과 대간령을 뒤돌아본다.


[890봉 너덜겅을 오르다 뒤돌아본 샛령과 840봉]


890봉 너덜을 벗어나 병풍바위로 가는 대간은 원시림을 방불케하는 숲길이다.

 

[병풍바위 가는 길-원시림을 방불케한다.]

 

원시림 같은 숲속을 정신없이 헤쳐나간다.890봉에서 북동진하던 대간은 820봉에 이르자 왼편(서남서)으로 급격하게 꺾이고 10분 가량 더 발품을 팔자 홀연 안개가 엄습하면서 우리는 꼼짝없이 그 속에 갇히고 말았다.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되었다.그런데 보이는 것이라곤 오른쪽 아래로 수십길 절벽뿐.지형도를 놓고 살펴도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잡아낼 길이 없었다.그때 안개가 슬그머니 걷힌다.아! 이곳은 병풍바위가 있는 1,060봉이 아닌가.

 

대간은 여기서 오른편(북)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마산(馬山 1,051.8m)으로 이어진다.하마터면 그 반대방향인 병풍바위 남릉으로 내려갈뻔 했다.원경이 오른쪽으로 천애만애한 병풍바위 절벽이 위태롭다.그때 마산(馬山)에 사는 현기가 합류했다.우리는 현기더러 "여기는 마산이 아니고 진영이라네."하며 우스개소리를 하자 그는 피익 웃으며 "아직도 마산이 아니야?"라며 정색을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벌써 와 있어야 할 재화가 보이지 않는다.현기에게 물으니 무릎에 심한 통증이 와서 뒤로 쳐졌다고 했다.

 

 

11시 27분,병풍바위를 뒤로 하고 오른쪽 대간 길로 접어들어 25분 뒤인 11시 52분,마산(馬山 1,051.8m)에 다다랐다.마산은 전에 군대 초소가 있던 곳으로 막사가 있던 자리에는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가 널려 있고,참호도 군데군데 있었다.조금 있으니 재화가 아픈 다리를 끌며 나타났다.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무릎이 아파 걸음을 떼기가 어렵다고 했다.그 주력 좋던 재화는 평소에도 이따금 무릎이나 발목이 좋지 않다고 하소연하곤 했는데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웬만해선 물러설 그가 아닌데 설설 길 정도니 알만했다.우리는 서둘러 마산 정수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산(馬山 1,051.8m) 정수리에 올라]


"얼린 통조림 황도"를 꺼내 갈증을 축이고 스키마을로 유명한 흘리를 내려다본다.흘리는 시계가 좋지 않은 탓에 오락가락했다.가까스로 흘리의 모습을 잡을라치면 구름이 화인더를 가려 흘리의 전모는 그림의 떡이었고 그리운 금강산의 모습은 커녕 분단의 상징,향로봉(1,296.3m)도 감감했다.다만 진부령 건너 칠절봉(1,172m)에는 구름자락이 휘감기고 있었다.

 

[하늘 아래 첫동네,흘리(屹里) 전경]


이제 진영이 아니라 진짜 마산에 왔다며 좋아하던 현기가 마산 정수리 암장에 올라 한 컷트했다.그런데 또 다시 안개가 마산으로 몰려와 시계가 불량했다.

 

 

12시 8분,마산을 뒤로 하고 흘리마을로 내려간다.마산 안내판 오른쪽 군막사터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엉뚱한 곳으로 빠지니 반드시 안내판 왼쪽(서) 대간 길로 하산해야 한다.이따금 바위를 돌아내리고 조릿대 숲을 지나 12시 25분,대간분기봉인 880봉에 이르니 발 아래 880봉 사면으로 알프스스키장의 스키슬로프가 전개된다.말하자면 880봉은 알프스스키장의 정점이었다.

 

대간은 880봉 오른편 철조망을 따라 참나무 숲길로 내려간다.12시 43분,’스키리프트’장에 이르러 잠시 다리쉼을 했다.이어서 억새풀이 무성한 대간 길을 따라 내려가니 낙엽송지대다.오후 1시 5분,백두대간 안내판이 있는 환화콘도 뒷마당으로 내려섰다.잠시 뒤 원경이와 금구가 환화콘도 뒷마당으로 내려오고 황세와 기환이,익수가 내려온다.33구간의 종주는 사실상 여기까지라고 해도 무방하다.왜냐면 눈물고개에서 진부령까지 대부분의 대간마루금에는 펜션과 목장이 들어서는바람에 종주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환화콘도 3동 뒷마당으로 내려오는 대간팀]

 

환화콘도 뒷마당에서 후미를 기다리고 있는데 기묵 아우의 봉고가 미시령에서 헤어진 영수 형을 태우고 왔다.영수 형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며 "수고했네,수고 했어."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재화가 마지막으로 합류했다.사진은 환화콘도 3동 뒷마당에 도착한 대간팀과 하영수 선배의 모습을 기묵 아우가 찍었다.환화콘도 마당 너머 전봇대가 서 있는 곳이 "눈물고개"다.

 

[후배들의 마지막 구간 종주에 마중나온 하영수 선배(좌)]


 재화는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며 호철이와 함께 기묵이의 봉고를 타고 진부령으로 떠났고 영수 형의 안내로 우리는 눈물고개로 갔다.안흘리로 가는 포장도로가 눈물고개(625m)를 가로지른다.지형도를 놓고 독도를 해보니 대간마루금은 눈물고개에서 조금 내려선 뒤,자그마한 동산을 통과한다.그러나 그 동산은 숲이 우거졌고 사람들이 출입한 흔적이 묘연했다.그래서 그 동산 오른쪽 아래 농로를 따라 비닐하우스를 돌아나가니 너른 초지인 개활지가 펼쳐진다.비가 오면 진흙탕으로 변모할 정도로 고도가 낮았다.개활지를 거치면 도로가 나오고 그 곁에는 군부대가 버티고 있다.우리는 이 개활지에서 영수 형과 함께 마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산을 배경으로 선 동기들과 하영수 선배(우)]
 

개활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도로로 올라서니,군부대가 삼엄하게 버티고 서 있다.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가면 흘리 삼거리.본디 대간은 군부대를 관통하여 올라야 하지만 그게 어디 당찮은 일인가.부대 옆 철조망을 따라 오를 수밖에.곤혹스럽게 짓누르는 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길에는 진범,투구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고 추자나무에서 떨어진 추자가 땅바닥에 딩굴고 있었다.오후 1시 30분,자그마한 봉우리에 올라서니 두 갈래 길로 열려 있다.이곳을 종주한 영수 형에 따르면 대간 길을 가더라도 진부령까지는 목장과 펜션 따위 사유지가 가로막아 속절없이 마루금이 끊기므로 마루금 타기를 고집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간 길을 버리고 왼편 능선을 따라 가니 이내 도로가 나오고 도로가에 제철이 아니라 텅텅 빈 스키장비점이 즐비하게 늘어선 흘리 스키마을에 다다랐다.사진은 스키마을을 지나치면서 뒤돌아본 마산(馬山 1,051.8m)과 알프스리조트의 모습이다. 사진 맨 뒤 높은 봉우리는 마산이며 그 오른편 능선 위로 돋올한 봉우리가 병풍바위의 1,058봉이다.마산 앞쪽으로 알프스 리조트의 스키 슬로프와 리프트,그리고 전망대가 보인다.전망대에서 왼편 산허리를 비스듬히 따라 내리는 대간 길도 바라보인다.

 

이곳 흘리(屹里)는 이름 그대로 하늘 아래 첫동네로 고원지대에 이뤄진 넓은 평원이다.이 넓은 평원은 "안흘리"와 "밖흘리"로 나뉘는데 꿈과 낭만의 슬로프라는 알프스 스키장은 밖흘리에 있다.밖흘리 사람들은 하나같이 스키장에 기대어 생계를 꾸린다.길 가에는 스키장비대여점이 즐비하고 북구의 양식으로 지은 화려한 건물들이 딴 나라에 온 듯한 이국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흘리는 본래 화전(火田)으로 따비밭을 일구어 옥수수와 감자 따위 잡곡이나 겨우 먹고사는 산꼭대기 오지마을이었다

 

그 흘리에 스키장이 생기고 어언 30여년이 흐르는 동안,토박이들은 대부분 이 땅을 뜨고 이제는 스키장을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새로 도회지 닮은 마을을 이루며 산다."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말은 영락없이 여기를 두고 하는 말이 되었다,

 

 [흘리 스키마을에서 돌아본 마산,알프스스키장]

 

흘리 스키마을을 지나 2차선 도로 따라 가다 작은 구릉을 넘어서면 종주 날머리 진부령이 내려다보인다.도로 오른편 절개지에는 대간꾼들의 종주 리번이 붙어 있다.군부대를 지나 대간마루금을 따라 종주한 사람들의 표지기다.우리는 곧장 도로를 타고 "U"자 형태로 꺾이는 지점에서 한국통신 건물 옆 계단을 내려선 뒤,부흥식당 오른쪽으로 빠져나오니 남녘 백두대간의 날머리,진부령(陳富嶺 525m)이다.도착시간은 오후 1시 50분,종주를 마감하고 진부령 오른편 도로 따라 걸음을 옮기자 서울 산사랑 동기들과 다리가 아파 먼저 온 재화,그리고 하영수 선배 내외가 맥주로 입가심을 하다 박수를 치며 우리를 맞이한다.이렇게 종주는 끝났지만 서운하면서도 어쩐지 서글퍼졌다.

 

그 옛날 동서를 잇는 오솔길이었던 진부령은 "1632년 간성 현감이던 택당 이식이 인근의 승려들을 동원해 좁은 길을 넓혔으며,1930년 일제가 신작로를 내면서 차가 다니기 시작했고,1987년 2차선 도로로 넓혔다."는 고개마루 빗돌의 글은 진부령의 유래를 어렴풋이 전해주지만,정작 진부(陣富)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진부령 빗돌에 기대어 선 종주팀과 그리고 영수 형 내외,

                                      종주 내내 우리의 손발이 되어준 오기묵 후배]


 [더 이상 갈 수 없는 남녘 대간의 종착지,통곡의 금줄,

                                            민통선이 시작되는 진부령 빗돌을 중심으로]
 

진부령은 한계령,미시령과 더불어 설악을 대표하는 고개다.그러나 두 고개와 달리 진부령은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고 험준하지도 않다.고갯마루에 주차장이 있는가 하면 가게들이 마을을 이루어 백두대간의 고개로는 통 믿기지 않는다.고갯마루가 마을을 이루었으니 예로부터 부르기를 ’조쟁이’라 하였다.지난날,영동의 해산물과 영서의 곡물이 마주 올라와 ’이른 아침부터 장이 선다.’는 뜻으로 얻은 이름이다. 요즈음 부르는 이름으로 흘3리(屹三里)이며 고성군 간성읍을 따른다.

 

고성과 간성이 분단선을 사이에 두고 그만 남북으로 갈라졌다.고성은 북녘 땅이 되고 간성은 남녘 땅이 되고,남녘 땅에 붙여진 고성군의 명칭은 창졸간에 코앞의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향수를 달래는 이름이다.진부령 길은 이제 46번 국도로 바뀌어 제법 오가는 이의 발길이 늘었지만,알고 보면 마치 몸뚱이의 절반을 쓰지 못하는 반신불수의 운명처럼 아주 가엽고 애처로운 길이다.

 

사람들은 그저 이름도 그럴싸한 알프스의 추억으로,스키장의 낭만을 떠올리고,겨울이면 으레 눈이 키보다 높게 쌓이는 고산지대의 설원을 그리며 마음이 들뜨지만,정작 그 고갯길로 말미암아 저 통곡의 금줄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이 시작되고 있음에는 관심이 없다.더더구나 남도의 끝자락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물경 1천6백80리를 거슬러 오르다가 분단선에 가로막혀 그만 속절없이 주저앉은 백두대간의 슬픔은 더욱 모른다.아니다.너무나 잘 알아 애써 외면하는지도 모른다.그렇다.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늘과 땅이 갈리고 세상과 세상이 나뉘어 오른팔과 왼팔이 서로 마주보며 닿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녘의 백두대간! 저 통곡의 금줄 앞에 서서 발길을 되돌려야 하는 우리의 서글픔을!

 

 

[종주정보]

 

 

03:40 미시령(770m)...1.0...05:31샘터...1.0...06:16 신선봉 상봉(1,244m)...0.75...06:50-07:02 화암재(1,050m)...0.5...07:20 신선봉(1,214m)...0.75...1,094봉...07:32-08:50 대간분기점 850m 지점...1.67...09:47-09:56 대간령(샛령650m)...10:39 890봉...1.0...820봉...1.75...11:24-11:27 병풍바위(1,060m)...1.0...11:52-12:04 마산(1,051.8m)...0.8...12:25 880봉...13:06-13:12 환화콘도...0.82...눈물고개(625m)...3.13...13:50 진부령(525m)

 

도상거리 14.17km

 

[후기]


백두대간은 이제 3구간이 남았다.진고개~구룡령,구룡령~조침령~점봉산~한계령,그리고 한계령~미시령구간이 그것이다.이들 3구간은 어쩌면 꽃 피는 내년 봄이 되어야 마무리될 듯하다.금년에 마치려던 종주는 뜻하지 않은 회원들의 변수로 말미암아 내년으로 미루어질 것 같다.산보다 사람이 우선이며 산행보다 우정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더군다나 대간을 타면서 더욱 더 끈끈해진 서로의 우정과 동지애는 그 무엇과 바꿀 수 없을 것이다.빠르고 늦음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지금 못하면 나중에 하면 될 것을...산이 우리를 피해가지 않는 한,우리는 그리움으로 저 백두대간을 걷고 있을 것이리니.


끝으로,우리의 대간 끊어타기에 성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동기들과 동문 여러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아울러 대간팀의 안사람들한테도 너무 많은 빚을 졌음을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한다.아울러 마지막 종주에 다시 동참해준 강호철,이 길을 먼저 밟고 후배들과 함께 하며 격려를 아끼지 �은 하영수 형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