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봉산 용소골(07/10/14)<4>
2용소 전경(14:25:07)
2용소는 좌측의 암벽을 타고 내려서야 한다.일단 밧줄을 잡고 암벽 턱으로 내려선 다음 조도(鳥道)같은 에움길을 조심해서 돌아내려야 한다.2용소는 8m쯤 되는 정사각형 모양의 소(沼)로 내리쏟는 직폭도 8m 높이다.직폭 물받이는 타원형의 탕인데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니 탕 안은 소름이 돋을 만큼 검푸른 빛깔을 띄고 있다.폭포 위에서 건너다 뵈는 오른쪽 지계곡이 큰다래지기골인데 그 골 안으로 거슬러 오르면 20미터 폭포가 또 숨어 있다.
2용소 오른편으로 치솟은 벼랑(14:24:51)
큰다래지기골 들머리-저 위에 20미터 폭포가 있는데...(14:25:58)
2용소 에움길을 내려와 옆에서 본 2용소(14:26:51)
80년대 말,내가 용소골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안전시설이나 철 구조물이 거의 없었다.그런데 용소골의 비경이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용소골의 험한 곳에는 철 구조물과 밧줄이 놓이기 시작했다.2000년 10월 이곳을 왔을 때도 2용소에서 로프공사를 하던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그들은 1용소의 절벽을 가로지르는 밧줄하며 그 아래 방축소의 철 사다리도 자신들이 설치했다고 했다.그때 나는“용소골은 자연 그대로가 좋은데,왜 사다리를 놓고 밧줄을 설치하는 거죠?.”“이러다간 용소골도 조만간 유산객(遊山客)들로 북새통을 이루겠네.”남한 땅에서 마지막 남은 비경(秘境)이라는 용소골의 훼손을 불을 보듯이 뻔해 그들에게 던져본 질문이었다.“하긴 그래요. 웬만하면 자연은 그대로 지켜야 하지요.하지만 용소골에서는 해마다 크고 작은 사고가 10여건이나 발생한답니다.작년에도 저 아래 마을의 70대 할아버지가 이 골짝을 오르다가 실족해 돌아가셨어요.사체를 운구할 길이 없어 산 능선을 타고 마을로 옮겠는데 13시간이나 걸렸어요.그러니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하다고 봐요.”
용소골이 이나마 보존되고 있는 것은 접근이 어렵기 때문일터.그런데 휴양림을 만들고 도로를 넓히기 시작하면 차량이 홍수를 이뤄 1~2년 사이 유원지로 변모해버릴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용소골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대로 두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밧줄을 놓는다,안전장치를 설치한다 하면 계곡은 만신창이가 된다.그런 시설물을 설치하는 명분이야 사람들을 편하고 안전하게 해준다는데 있지만 사실은 상업적인 저의(底意)가 더 짙게 깔려 있을 것이다.
14:28:00
산행이란 본래 길이 끝나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이미 나 있는 등산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 산행의 본질이라는 것이다.이를 서구의 알피니스트들은 등로주의(登路主義)라 하는데 일테면,같은 에베레스트라 하더라도 남들이 오른 루트를 따르는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루트를 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들이야 전문 산꾼도 아니요,더구나 암벽과 빙벽을 타는 알피니스트도 아니지만 좁은 의미의 등로주의는 산행의 깊이와 폭을 넓히는데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아무도 가지 않은 산길을 가보라. 그러면 거기서 전혀 새로운 세계와 자아(自我)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용소골의 특징가운데 하나인 둥근 암반과 무수한 너울들(14:28:31)
14:28:39
예전엔 없던 로프를 잡고(14:28:58)
발길을 멈추고 풍광에 취한 박승훈 대장(14:31:56)
요강소 가는 길(14:32:34)
요강소 지나 용소골 최고의 비경(秘境)-1용소
애당초 계획보다는 다소 늦었지만 그런대로 시차가 나지 않아 다행스럽다.2용소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긴다.간간이 산판길의 흔적이 나타났다.일제는 이 험난한 계곡에 산판길을 내고 많은 나무들을 베어 내갔다고 한다.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이따금 레일조각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구불텅대며 휘어지는 골짜기는 햇살을 받아 은빛물결이 번진다.그 물결이 암반을 타고 흐르다가 샛고랑을 이루기도 하고 더러는 크고 작은 너울을 만들기도 한다.
14:34:38
철난간을 돌아서(14:35:35)
14:37:56
철난간을 지나 물길을 건넌 황선정 회장(14:38:02)
물가에서 다리쉼을 하는 33산우회 회원들(14:42:00)
공룡 지느러미같은 벼랑과 그 위에 돋아난 소나무(14:42:49)
14:45:53
요강소(14:47:01)
요강소(14:47:44)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걷다보니 잠이 쏟아져 눈앞이 아른거린다.새벽잠을 설친 여진(餘震)이 이제야 몸 속에 녹아드나 보다.나 혼자라면 너른 암반에 벌렁 누워 한바탕 늘어지게 잤을 텐데...그러나 우린 아직도 가야할 길이 남아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콸콸 쏟아지는 빠른 물살에 얼굴을 씻어 잠을 내쫓는다.
2용소에서 20분쯤 내려오자 용소보다는 작지만 둥그렇게 패인 소가 눈에 띈다.요강소다.예전에는 이 소가 정말 요강처럼 둥글기만 했다고 한다.오른편으로 산판길의 흔적이 또 나타났다.암반 위를 흘러가는 물을 두 번 건너 마지막으로 왼쪽 물을 건너갔다.4시 40분,마침내 용소골 최고의 비경이라는 1용소에 다다랐다.
요강소를 굽어보는 박 대장(14:48:04)
14:52:15
1용소 왼편 벼룻길을 로프를 잡고 가는 청마 황 회장 일행(15:00:43)
용소골의 비경,1용소로 쏟아지는 물줄기(15:01:11)
[3용소 품은 용소골의 첫 번째 용소.바위벽으로 막힌 정면이 남향이어서
하지 무렵 며칠만 빛이 든다.오른쪽 벼랑을 깎아내지 않았다면 지나갈
수 없는 막장이다.올려다보면 대롱 속 하늘보기이다.](15:02:23)
아슬아슬한 벼랑을 딛고 서서 용소를 굽어본다.20미터 지름의 반달형 소와 4미터 짜리 폭포가 길을 막았다.바위벽으로 막힌 정면이 남향이어서 하지 무렵 며칠만 빛이 드는 먹물빛 깊이다.예전 기우제가 행해졌다는 용소.그 시꺼먼 심연(深淵)에 용이라도 숨어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한 번 빠지면 살아나지 못할 소.더 나아갈 데 없는 막장이다.그렇지만 왼쪽 절벽에 아슬아슬한 벼룻길이 보일 듯 말 듯 걸려있다.손 연장으로 벼랑을 깎아 잔도(棧道)로 만들었던 산판길의 자취다.그것 없었다면 감히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을 터다.
1용소를 등진 33산우회 회원(15:02:52)
뒤돌아본 1용소(15:04:24)
녹음 우거진 1용소-대롱속 하늘보기인 막장이다.
바위벽 중간에는 하켄을 박고 슬링까지 걸어 밧줄을 가로질렀다.내려갈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고 오금이 저렸다.우리는 차례대로 밧줄을 부여잡고 바위벽 벼룻길을 조심조심 돌아 내린다.밧줄을 잡고 벼랑을 돌아서다 하늘을 본다.치올려다보는 하늘은 꼭 용소만한 크기,마치‘대롱 속 하늘보기’다.
수량이 많았다면 벼랑 끄트머리를 내려올 때 거의 물에 텀벙하기 마련인데 오늘을 수량이 미미하여 그럴 염려는 없었다.용소골에 올 때마다 동행했던 이들 가운데 꼭 한두 명은 그렇게 물속으로 빠지곤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물 이랑이 나우리쳐 오는 용소 가장자리,바위에 걸터앉아 마지막 휴식을 취했다.이제 덕풍마을까지는 한 마장 더 발품을 팔아야 한다.
후미의 김법영 부총무 일행이 1용소를 빠져나오고 (15:04:54)
오후 3시 4분. 아주 빠른 속도로 1용소를 빠져 나왔다.2분쯤 발품을 팔자 철난간이 나온다.철난간 왼쪽 암벽에서 중년의 부부들이 석이버섯을 따고 있었다.아무 장비도 없이 손이 닿을 만한 지점의 바위에 붙은 석이를 채취하는 중이었다.작은 비닐봉지에 가득 석이를 채웠다.
15:06:33
15:06:39
15:08:05
15:08:44
15:10:24
철난간 왼쪽 바위에서 석이버섯을 따던 중년 일행(15:12:39)
방축소를 지나(15:14:42)
계곡은 90도로 물꼬를 틀고(15:16:04)
철난간을 지나(15:17:43)
용소골 들머리로 향하는 회원들(15:19:37)
용소골 들머리-농로(15:22:39)
그들과 헤어져 3분쯤 정신 없이 내닫으니 용소골의 마지막 난관인 방축소가 보였다.방축소는 둥근 담이 목욕을 해도 될 정도로 넓고 넓다.방축소를 지나자 계곡은 90도 서쪽으로 물꼬를 튼다.용소골 들머리에 이르자 골 안은 점점 더 헤벌어진다. 드디어 농로가 나오면서 덕풍마을이다.풍곡에서 시오리쯤 들어간 덕풍,거기서 다시 이십리 용소골,한마디로 그것은 신의 괭이로 판 샛고랑이다.하여 셀 수 없이 많은 폭포의 너울을 펼치고 있었다
용소골 들머리에서 지도를 살피는 김법영 부총무(15:26:34)
3시 27분 이희철 반장집에 닿았다.3년만에 찾아온 이희철 반장댁,이젠 덕풍산장이란 어엿한 이름으로 바뀌어져 있었다.이 반장은 나를 보더니 이제 기억이 난다며 몹씨 반가워했다.그는 예전의 깡마르고 그을린 얼굴은 찾을 수 없으리만큼 살이 쪄 보기에도 좋았다.(아마 전처럼 송이다,약초다 해서 산을 훑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가보다).그리고 그동안에 둘째와 셋째 딸도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이날은 마침 셋째가 어머니를 도와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아주머니는 나를 보더니 부산에서 온다해서 누군가 했다며 신대장이었네! 하며 반색을 한다.이전의 황토집을 없애고 신식 산장으로 고쳐 지었다며 지내기는 전보다 나아졌다고 한다.
우리는 세수를 하고 황선정 청마 회장 일행이 미리와 음식을 주문해놓은 닭백숙으로 뒷풀이에 들어갔다.이 반장은 올해 송이가 흉작이라 내놓을 게 없단다.그래도 신 대장이 왔으니 자신이 꼬불쳐놓은 송이를 조금 맛이나 보라며 내놓는다.'응봉산 송이~'하며 노래를 불렀던 내 체면을 살려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닭백숙으로 출출함을 달래고 소주로 용소골 완주를 자축한다.특히 33산우회 후배들의 동참을 진심으로 환영했다.어지간히 취기가 들자 갈 길이 먼 우리는 5시,이 반장과 헤어지기로 했다.내년에 다시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우리는 배낭을 짊어졌다.
「풍곡」주차장으로 나가기 위해 이 반장의 세렉스 뒤칸에 몸을 실었다.덕풍마을 이 반장댁에서 풍곡까지 6km 거리-칼등모리교,새비리교,부추밭교,칼등모리교,성황교라 부르는 다리 다섯 개를 거쳐 풍곡주차장으로 가야 한다.봉고 정도는 통행이 가능한 이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덕풍계곡에도 수량이 줄어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달리는 차안에서 덕풍계곡의 명소라는 퉁퉁소와 찍소를 가늠하고 지나친다.그런데 어휴~ 아직도 비포장 돌길을 지날 때는 엉덩이가 하늘로 들렸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바람에 고리뼈에 충격이 오고 덜컹거렸다.
새비리교-다리 폭이 좁아 큰 차는 통행이 안 된다.(17:02:31)
새비리교 부근(17:02:51)
달리는 차안에서 잡은 덕풍계곡(17:03:49)
덕풍계곡(17:06:52)
덕풍계곡(17:08:33)
덕풍계곡의 맑은 물-수량이 줄어 아쉬울 뿐(17:10:46)
덕풍계곡(17:11:10)
덕풍계곡 아래 풍곡주차장에서 산행을 마치고(17:20:58)
걷는 것만큼 사람을 경건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길을 걸음으로써 사람은 비로소 삶의 바른 길을 찾게 된다.오늘 우리의 삶이 혼돈으로 점철되고 있는 것은 길을 걷지 않음에서 오는 자연의 형벌이다.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차들이 종횡무진 하는 길이 아닌 진정 사람이 주인인 길,우리는 그런 길을 헤쳐 나왔다. 이십 리 용소골의 길 없는 길을! 그 길에 동참해준 회원 여러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