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 향해 비상하는 공룡의 날개짓-강진 덕룡산(07/7/22)<상>
[산행날머리,수양리 보리밭에서 본 침봉(針峰)같은 덕룡산 주릉]
남도행각(南道行脚)을 결행할 때마다 내 삶의 권태와 환멸을 잊게해주었던 3월의 강진과 4월의 해남.강해남(강진과 해남을 통째로 이르는 이름)에 들어서면 나는 그런 삶의 편린을 떠올리게 된다. 어찌 잊으랴! 이제 그곳엔 진초록의 보리가 웃자라는 싱그런 들판 위로 강렬한 햇살 내려쬐고 남녘 특유의 그윽한 풍치가 사위에 펼쳐지리라.
강진에 들어서면 조용히 흔들리는 탐진강의 잔물결,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바다와 만(彎)의 허연 물이랑과 물고랑,해풍이 실어나르는 상쾌한 공기.아울러 땅끝마을에서 도암면으로 차를 몰고 가노라면 왼쪽 산등으로 거대한 침봉들이 쭈볏쭈볏 줄지어서 용트림하는 장관,저물녘 짬조롬히 스며드는 석양빛 노을...이렇게 가슴으로 스며든 풍경의 수려함과 안온함에 흠뻑 젖어들게 된다.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정보화된 세상에서 향토색이나 향토문화는 나날이 마멸되고 있다.도회의 풍속과 세태가 향토를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강진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풍속과 세태에도 불구하고 전통사회 속에서 생성된 고유의 향토적 개성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데에서 이 지역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시간이 음각하고 역사가 양각하면서 전달된 강진의 문화적인 모습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강진에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다산초당,고려청자 도요지,월출산 무위사와 만덕산 백련사,전라병영성과 하멜 억류지,영랑 생가...이같은 문화유산들을 통해 우리는 강진이 세계가 찬탄하는 저 아름다운 고려청자의 메카였고,위대한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이 유배 18년을 산 다산학의 발원지였으며 '오매 단풍 들것네' 같은 시어를 구사함으로써 남도 정서를 멋들어지게 표출한 시인 영랑 김윤식의 고향이라는 점을 알 수 있고,오늘을 사는 강진 사람들의 자부심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다산의 삶과 사상이 일테면 '강진정신'이라고 일컫을 만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을 법한데,이 고장 사람들은 강진의 민중적 도탄,그리고 그에 따르는 토속 정서와 다산 사상이 굳게 결합함으로써 다산학이 개진되었다고 보고 있다.
한편,강진은 과거 '부자고을'로 손꼽았다.이젠 엔간히 빛 바랜 풍설이긴 하지만,대체로 널찍한 농토를 보유한 고장이었기에 그런 별칭을 들을 수 있었다.옛날에 병마도절제사영이 있었던 유력한 군사지구 병영면에서 발달된 상업도 부잣골 명성을 불러들이는데 이바지�다.'북엔 개성상인,남에는 병영상인'이란 말이 돌아다닐 정도였다.요즘에도 강진의 기민하고 영리한 상업적 풍속이야말로 인상적이라고 평하는 이들이 많은데,이것의 연원을 '병영의 전성시대'에서 찾기도 한다.
어쨌든 농사와 장사의 번창으로 비교적 원만한 경제를 영위할 수 있었던 강진은 독특한 지역성이 착색되었다.가진 이들의 자식들은 일찌기 너른 바닥으로 진출하였고,결국 지식인들을 수두룩히 배출,타 지역에 비할 바 없는 개화와 문화수준을 형성하였다.일제 때만 하더라도 강진의 많은 청년들이 서울 또는 동경 유학길에 나섰다.그들중 많은 이들이 마침내 우국충정을 내어 이 지역 독립운동의 선봉장이 되었다.삼일운동 때에는 3천여명의 강진 사람들이 봉기함으로써 호남지역 항일운동에 들불을 지폈으며,이는 강진의 민중에 스민 올차고 여문 기개가 표출된 사례로 간주된다.이같은 전통과 역사의 화면이 각인되면서 아울러 강진의 토박이 정서가 이루어졌다.
[소석문에서 현란한 기암괴석의 석문산을 등지고]
강진의 외곽도로를 따르다 옛길의 자취를 살피러 강진 읍내로 들어간다.누차 발을 들여놓은 곳이지만 거의 변한 게 없다.부산하기는커녕 한적한 소읍,거기서 조금 가다 2번 도로를 따르다 해남행 18번 지방도로로 스며들었다.계라리 갈림목에 이르러 다시 왼편으로 꺾는다.석문교를 지나 남창으로 가는 55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니 잠시 뒤 경치가 수려한 협곡이 나온다.
대석문(大石門)이다.그 밑으로는 도암천의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벌써 물놀이를 즐기는 어린이들도 보였다.석문은 왼편으로 백련사를 품고 있는 만덕산(409m) 줄기와 오른편으로 석문산(272m)이 만나 이뤄놓은 협곡이다.석문은 다산초당으로 드는 들머리이다.반면 과거 강진 사람들이 이진항으로 갈 때 꼭 지나가야 했던 곳이기도 했다.기암협곡 사이로 난 석문은 꽃이 피면 만덕리 귤동에 은거하던 다산이 묘치재를 넘어 달려와 봄바람을 쐬던 곳이라 한다.
다산초당 갈림길을 지나 도암중앙초등학교를 오른편으로 끼고 1km쯤 들어가면 소석문이다.소석문(小石門)은 덕룡산과 석문산 사이의 협곡을 이른다.여기서 북동쪽으로 연이어진 석문산과 만덕산 사이를 대석문이라 부른데서 유래했다.협곡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양립한 덕룡산과 깎아지른 암벽을 이룬 석문산은 그 이름 만큼이나 현란하게 치솟아 있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찾은 건 3년 전이었다.다시 만난 소석문,그 아래로 흐르는 봉황천이 우정 반가웠다.당시는 초봄인 3월 7일이었다.잔설이 남아 있던 덕룡산 주릉의 바윗길을 더터 오르내리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하지만 오늘은 푸르름이 깊어가는 초여름.덕룡 1봉에서 8봉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당시는 차가운 해풍이 간단없이 불어 귓볼이 얼얼했는데,오늘은 섭씨 25도를 넘나드는 뙤약볕이 가당찮다.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참여해준 동기들에게 고마음을 전한다.이일산우회 전기환 회장,이성집 총무,산행대장인 나를 비롯하여 권용효,김유건,김익수,김창민,김한규,김현기,박병진,박순양,박현두,이재화,정길영,조현영,전우성,최금구 동기,객원으로 홍일점 최점자 씨가 참여했다.
그런데 김유건,김한규 동기는 친구가 좋고 마냥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해 왔을 뿐이었다.늘상 그렇듯 세칭 베이스캠프에 남아 주변의 문화유적과 먹거리를 탐사하기로 했으니 내 수고를 덜어준 진정 고마운 친구들이다.산행할 친구들은 16명.하지만 문제는 103kg에 이르는 거구의 전우성 동산병원장에 있었다.줄곧 산행을 해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과연 저 몸집으로 덕룡의 산줄기를 타고 넘겠는가 하는 염려가 없을 수 없었다.몸은 비록 짙어도 가벼운 운동은 거르지 않고 또 운동신경이 남다른 전 원장인지라 웬만하면 괜찮을 성싶었다.나중에 후회했지만 그것이 오판이었다.
덕룡산,주작산 타기를 흔히들 날개종주라고 한다.이는 소석문에서 덕룡산(德龍山)과 주작산(朱雀山)을 거쳐 오소재까지 12km에 이르는 종주산행을 이르는 말이다.산이름을 통해 보면 두 산의 이름이 각각이지만 지도를 놓고 보면 산의 모습이 한 마리 주작이 날개를 펴고 나는 형상이다.그러고보니 덕룡 줄기는 왼쪽 날개,오소재 쪽 주작 줄기는 오른쪽 날개,주작 주봉은 머리,첨봉은 꼬리다.따라서 소석문에서 오소재까지는 주작의 날개를 타는 셈이다.산행만 8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덕룡만 끊어타기로 했다.그중에서도 덕룡산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8봉까지만 밟을 것이다.덕룡8봉을 내려서면 이내 초원지대가 첨봉을 거쳐 수양리재(작천소령은 잘못된 표기)까지 이어지므로 아무래도 뙤약볕에선 무리일 것 같아 코스를 줄여버렸다.
봉황의 날개를 오른다.아니 덕룡의 꼬리를 밟는다.소석문에서 산행안내도를 옆에 끼고 징검다리 놓인 봉황천을 건넌다.들머리부터 경사가 높다.묘지를 지나 좀비비추와 멋진 모습의 버섯에 눈길을 맞춘다.숨 돌릴 틈도 없이 가파른 산길이 밀려온다.15분쯤 올랐을까.암릉이다.여기서 뒤돌아보는 봉황천 건너 석문산의 웅장한 모습이 장관이다.소금강이란 말이 그럴 듯해보였다.그리고 석문산 아래로는 우리를 실어나른 15인승 대절버스가 성냥갑만하게 보였다.
[봉황천 징검다리를 건너]
[좀비비추]
[화려하고 기이한 생김새의 독버섯]
[덕룡1봉 산사면을 수놓은 암릉]
[생사의 고비를 극복한 의지의 사나이,박현두-그가 첫번째 바윗길을 오른다]
[덕룡1봉 동쪽 봉우리에서 조망한 숲으로 덮인 덕룡1봉]
[첫번째 바윗길에서 돌아본 석문산-기암괴석이 장관이다.]
[첫번째 바윗길을 오르는 권용효 동기]
첫번째 로프를 잡고 콧김을 씩씩 불며 암릉을 돌아 자그마한 봉우리에 올랐다.덕룡1봉에서 동쪽으로 갈래친 능선에 있는 봉우리였다.도암중학교 뒷편에서 이 봉우리로 오르는 길이 열려 있다.
잡목과 숲이 터널을 이루었지만 길은 한 사람 지나갈 만큼의 여유를 두고 있다.단숨에 오를 것같이 가볍게 보였던 길은 잠시 완만하다 금새 비탈을 이루며 장단지에 심한 자극을 가져온다. 경사면이 가파를수록 사용하는 근육은 아래로 내려가기 마련이다.몸이 더위지면서 다들 겉옷을 벗어버린다.나도 반바지에 반팔 차림으로 갈아 입었다.나중에 바위를 오르고 숲속을 헤쳐나가면서 온통 상처 투성이가 된 팔등이 따끔거려 반팔이 된 것을 후회하고 말았다,그래도 반팔에 반바지가 훨씬 상쾌했으니.
[첫 봉의 암릉-도암중학교 뒷편에서 오르기도 한다.]
[첫 봉에서 바라본 도암면 일대의 평야]
[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덕룡1봉의 칼날능선]
덕룡1봉으로 열린 등산로를 따라 잡목 숲을 헤치고 바위틈을 비집고 바위에 설치한 굵직한 로프를 타며 한참 오르고 내려섬을 되풀이 하여 이제 겨우 1봉에 섰다.사실 덕룡1봉은 석문산의 맥이 봉황천으로 잦아들었다가 곧장 일으켜세우는 지점에 솟아 있지만 그리로 오르는 등산로가 없어 왼쪽 동릉을 타고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1봉 정수리에 있는 잡목 숲을 헤치고 칼날같이 예리한 칼바위에 올라섰다.봉황을 빼다 닮은 봉황마을이 오른쪽으로 내려다보이고 앞에 놓인 봉황저수지 또한 그대로 봉황이다.
[1봉에서 건너다본'소금강'이라 일컫는 석문산]
닐씨는 청명하여 가까운 거리는 잘 보였으나 먼 거리는 뿌옇게 낀 가스로 인해 출렁이는 남해의 망망대해가 보이지 않음이 아쉽다.하지만 강진만 뒤로 솟구친 산세들이 다도해의 섬들처럼 가스 위에 아스라히 드러난다.웅장한 암봉들이 남서쪽을 향해 도열하고 햇빛에 그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가슴 뭉클하게 한다.뒤를 돌아다 보면 봉황천 건너 석문산이 거대한 장벽처럼 치솟아 있다.
[2봉으로 가다 돌아본 1봉과 석문산,만덕산]
1봉 갈림목에서 동기들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땀을 식힌다.하마 도착했어야 할 전우성 원장이 5분 넘게 기다려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갈증을 참지 못하고 연신 물을 들이키는 친구들.협곡에는 산죽이 군락을 이루며 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찾아온다.대나무 이파리 시퍼런 그늘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애 흐르는 땀을 식히던 친구들은 '바람이 더 세차게 불었으면..." 하며 바람타령을 한다.아니 소나기라도 한 줄기 쏟아졌으면 이 열기를 한 방에 날려버릴 텐데...
[2봉으로 향하는 영주댁 뒤로 1봉과 석문산,만덕산이 너울거린다.]
1봉 갈림목 숲속에서 땀을 식히던 동기들과 어울려 전 원장을 기다렸지만 깜깜 무소식이었다,선두의 재화는 그 빠른 주력으로 벌써 2봉을 넘어갔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무성한 잡목 탓에 마루금을 조망하기가 쉽지 않았다.3월 초순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벌거벗은 바위뿐이었는데 지금은 푸른 갑옷으로 치장을 해 드센 강기를 감추고 있는 덕룡산!
1봉 갈림목에서 2봉으로 가는 등산로에는 회갈색 돌가루가 보여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러다 2봉을 지나 내려오니 굉음이 산언저리에서 들려온다.저 아래 만덕광업소에서 흩날리는 돌가루들이 뿌옇게 광업소를 뒤덮는다.주변으로 바위들은 무참히 절개되어 참혹하게 파헤쳐졌고 그나마 덜 훼손된 암석들은 곪은 상처를 드러낸다.문명의 이기는 그 수단을 이용해 공룡의 살점을 뜯어내며 피를 빨고 있었다.바로 그 광업소를 뒤덮은 돌가루가 바람을 타고 오른 것이었다.덕룡산은 땅끝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몸부림으로써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오르락내리락 하던 주릉은 진달래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선 비탈을 올라 2봉에 도착하니 11시 38분이었다.소석문에서 산행을 시작한 지 40여분이 걸렸다.덕룡 주릉은 봉우리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크고 작은 봉우리가 많다.
[등산로 곳곳에 눈길을 끌어당기는 바위군]
[2봉에서 당겨본 1봉과 석문산,만덕산]
[3봉 가는 길의 칼바위 구간]
[3봉 가는 길,날카로운 암릉도 지나고]
[공작 깃털을 연상케하여 합혼목(合婚木)라 부르는 사랑목-자귀나무]
[숲길을 걷다 바위를 타고 넘기도 하며 허위단심 발품을 파는 친구들]
[3봉 가는 길의 부드러운 숲길]
[3봉과 4봉,5봉(동봉)이 바라보이는 바위에 오른 용효]
[3봉으로 가며 조망한 강진평야와 도암만]
[도암초등학교와 도암면 일원]
[덕룡3봉(우)과 바위띠를 이룬 4봉]
3봉에 올라 작은 봉들을 넘어 4봉으로 짐작되는 봉우리가 머리를 치켜들고 그 너머로 한참이나 멀리 좌우로 5봉(동봉)과 그 곁에 또 하나의 비슷한 높이로 솟아 있는 6봉(서봉)이 4봉 머리 위에 비춘다.그리고 3봉에서 우리가 밟은 주릉을 뒤돌아보니 1봉과 석문산,그 너머로 만덕산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덕룡3봉 하산길]
3봉에서 내려가는 길에는 로프를 타고 내려서야 한다.3봉에서 나는 후미의 현기한테 휴대폰을 넣는다.기환,익수와 함께 전 원장을 채근하며 발품을 팔고 있었다.현기는 "이제 1봉을 지나 2봉으로 접근한다."고 했다.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날씨는 무덥고 주력은 바닥나고,이러다가 8봉까지 완주는 고사하고 중도에서 탈출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그렇지만 후미에는 노련한 산꾼 현기를 비롯하여 기환이와 익수가 있으니 잘 해낼 것이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3봉 정수리의 암릉]
[3봉에서 바라본 4봉]
[만덕광업소 전경]
[3봉에 선 이성집 총무]
[4봉으로 가며 돌아본 3봉-정수리엔 아직도 성집이가...]
[4봉으로 가며 뒤돌아본 덕룡 주릉과 석문산,만덕산을 잇는 중첩한 묏부리들]
[덕룡4봉,5봉(동봉),6봉(서봉)]
[4봉 가는 길에 만난 이정표]
[4봉 오름길의 민탈(슬랩)]
[4봉의 민탈을 오르는 용효]
3봉을 내려서니 만덕광업소로 빠지는 하산길이 보인다.그러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탓인지 들머리는 풀섶에 가려 희미했다.곤두서며 길게 늘어선 바위를 균형을 잡고 올라서니 4봉이다.
[4봉에서 바라본 5봉(동봉)]
[4봉 하산길에 돌아본 부처손바위와 암릉]
4봉을 내려서자 구멍이 숭숭 뚫린 부처손(?) 형상의 바위를 지난다.올망졸망한 봉우리를 넘어서 동릉 아래턱 숲속에 다다랐다.그곳에 재화가 있었다.무려 40여분이나 하염없이 우리를 기다리는 통에 되레 몸이 식어 겉옷을 걸쳐 입었다고 한다.
땡볕 내리쬐는 동릉에서는 점심을 먹기가 마뜩하지 않아 이렇게 바람 불고 쾌적한 숲속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산중에서 식사터 명당을 찾는데 일가견이 있는 재화를 우린 식당 지관이라 부른다.잠시 뒤에는 창민이와 순양이가 왔고 한참 뒤에 후미 4인방을 빼고 모두 함께 자리를 잡았다.
점심을 들며 후미가 궁긍하여 현기에게 휴대폰을 넣었다.아니나다를까 2봉 너머 언저리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나는 현기한테 전 원장을 잘 보살펴달라는 주문을 빠뜨리지 않았다.그리고는 친구들에게는 앞으로 다소 험난한 바윗길이 기다리고 있으니 술은 가볍게 들라고 귀뜀을 해줬다.
[앞쪽 바위 아래 숲속에서 점심을 들고-동봉 오름길에 돌아본 전경]
[동봉(5봉)에서 돌아본 덕룡 주릉과 석문산,만덕산 그리고 봉황저수지]
점심을 끝내고 나 홀로 동릉으로 오른다.정수리 아래에서 로프를 타고 동봉에 올라서니 눈 앞에 그야말로 절경이 펼쳐진다.동릉에는 금릉산악회에서 세운 빗돌이 있고,그 오른쪽 숲을 헤치고 나아가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거기서 우리가 밟아온 덕룡 주릉을 조망한다.저멀리 만석산에서 석문산을 거쳐 4봉까지 뭇 봉우리들이 한 줄로 도열해 물결치듯 밀려온다. 그리고 동봉 빗돌 앞에 설치된 산행안내판엔 소석문 3km,서봉 0.28km라 적혀 있다.
[서봉,7봉,8봉이 그리움으로 나우리친다.]
[동봉에서 본 주작의 머리(482m)와 수양리 마을-보리밭이 산행날머리다]
[동봉 들 틈에 핀 찐빵을 빼닮은 독버섯]
[덕룡 주릉 왼편의 봉황저수지와 산그리매]
[동봉에 있는 산행안내판]
[동봉에서 신전리로 뻗어나간 암릉]
[동봉에서 바라본 서봉과 7,8봉 그리고 주작의 묏부리]
[로프를 타고 동봉으로...]
뙤약볕의 열기는 여간 아니었다.덕룡은 바위로 무장한 등껍질을 그대로 드러냈다.산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3시간이 가까워온다.덕룡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다.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쁨이 용솟음친다.눈이 열리고 가슴이 열린다.강진평야의 초록 보리밭 그 너머로 도암만이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반쩍거린다.덕룡의 바람이 가슴을 훑는다.산과 산행은 삶에 어떤 깨달음을 주곤한다.우린 얼마나 사소한 일에 화내며 앞만 보고 달려왔던가?
[동봉에 모인 동기들-후미 4인방은 3봉쯤 오고 있을 테지...]
[동봉에서 조망한 공룡의 등지느러미 같은 덕룡본색]
도암면에서 바라볼 때 더욱 높고 우뚝 선 산이 동봉(420m)이라고 한다.덕룡산의 최고봉인 서봉(432,9m)이 아니었다.키 높이만을 따지는 서양의 합리주의 관점에서는 벗어나지만 오랜 세월을 살며 그곳을 터전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부르던 명칭이 의미가 있으리라.
호남정맥 월출산에서 이어진 산줄기는 다산초당을 품은 만덕산(409m)을 지나 석문산(272m)을 일구고,덕룡산,주작산을 거쳐 두륜산(673m),달마산(481m),도솔봉(421m)에서 땅끝 사자봉(145m)까지 나우리친다.이 도도하게 굽이치는 산줄기는 그 어떤 산에서도 보기 힘든 기세와 강기를 지녔다. 그런 모습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동봉에서 서봉을 거쳐 7봉과 8봉까지일 것이다.덕룡본색은 바로 이곳이다.
*하편에서는 동봉~서봉~7봉~8봉~묘지~수양마을까지의 산행기를 만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