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무제치늪으로 가는 길-운흥동천과 운흥사지<중>

청산신남석 2007. 3. 27. 16:17

 

[무제지1늪인 용늪의 이른봄 풍경] 

 

 

봄, 엄나무 가시 사이 부풀어 오르는

 

화려하게 꽃 피우는 것만이

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온 몸에 가시 달고 섰는 엄나무

은현리 엄나무도 봄을 기다린다

잘린 가지 끝이나 가시와 가시 사이

거칠고 좁은 황무지 같은 살결에

화상 입은 듯 스스로 붉은 상처 내며

엄나무는 진실로 봄을 기다렸다

예쁜 봄꽃들 꽃 피우고 새잎 내밀 때

엄나무 제 아픈 상처 찢고

착하고 푸른 새순 밀어 올릴 것이다

향기로운 꽃은 독이 될 수 있지만

가시 가진 것들이 피우는 어린순은

생명을 살리는 약이 된다 했느니

엄나무 가시 사이 부풀어 오르는 봄처럼

가장 엄격한 자세로 겨울을 견딘 것들에게

가장 뜨거운 봄은 찾아온다

 

-정일근[무제치늪 아래 은현리에서 은현시사를 열어 詩作을 하는 중견시인]   

 

무제치늪으로 가는 길은 길고도 멀었다.적어도 내게 무제치늪은 그랬다.은현리 엄나무의 준엄한 모습처럼 쉽사리 속살을 보여주지 않았다. 세 번의 답사를 거친 끝에 겨우 봄이 오는 길목에서 무제치늪으로 들어설 수가 있었으니...


지난 2월 11일,청마산우회와 함께 내원사 앞 용연교에서 정족산을 거쳐 무제치늪의 한 귀퉁이를 보고 은현리 서리마을로 내려섰고. 그 다음은 3월 18일 나 홀로 웅상의 백동마을에서 원적골로 올라 천성2봉을 거쳐 정족산 아래,운흥사지가 있는 반계마을로 내려왔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오늘(3월 25일)은 친구들과 함께 무제치늪을 찾는 3번째 탐사 날이다.울산시 웅촌면 고연리,반계계곡을 거슬러 운흥사터를 보고 정족산 아래 낙동정맥의 마루금에 올라 무제치늪을 살피고 은현리 서리마을로 내려오는 코스를 잡았다.


이렇게 하여 정족산과 무제치늪 일원은 거의 밟은 셈이지만 정작 무제치늪의 진면목을 보기에는 아직도 이른 편이었다. 늪은 아직도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억새와 진퍼리새가 황량하게 뒤덮여 있을 뿐이었다.  

 

 

[천성산 원적골 금수굴 곁에 핀 생강나무]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반계마을에서 이른바 "운흥동천"으로 불리는 운흥골을 거쳐 운흥사지, 정족산 삼거리, 무제치늪을 돌아 웅촌면 은현리로 내려오는 코스.이 코스를 등산하면 한발한발 내딛는 흙마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고, 곳곳에 보이는 돌 하나에도 실타래같은 전설들이 서려 있기도 하다.


산행들머리는 반계마을.마을 어귀에 서있는 거대한 고목이 눈길을 끈다.이 나무는 갈참나무인데, 둘레가 3.7m, 높이는 19m다. 그동안 수령이 2천년이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돼 왔으나 임업연구원이 실제 측정한 결과 400여년(?)으로 결론이 났다.

 

마을 옆에 새로 만든 저수지를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본격적인 산행로로 접어든다. 산행로 왼쪽으로는 한창 불사를 일으키고 있는 "시적사"가 있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계곡의 가파른 낭떠러지 바위에 희미하지만 "운흥동천(雲興洞天)"이라고 세로로 크게 쓰인 글귀를 찾을 수 있다.


"동천(洞天)"이란 산천이 둘러있고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때 비로소 붙이는 것.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청도의 운문산과 울산의 원적산은 아울러 연해진 봉우리와 겹쳐진 묏부리에 골이 깊숙하다. 승가에서는 천명의 성인이 세상에 나올 곳이라 하며, 능히 병란을 피할 복지라 한다"고 적혀있다. 여기서 "원적산"은 지금의 천성산과 정족산 일원을 말한다.

 

이후 경종 1년에 울산도호부사로 있었던 홍상빈이란 사람은 택리지의 내용을 참고해 "운흥동천"이란 글귀를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그렇게 훌륭했던 경치도 지금은 식당 등이 들어서면서 옛모습을 많이 잃었다.


계곡을 따라 10여분, 마침내 포장도로는 끝나고 옛 등산로가 나머지 길을 잇는다.왼쪽 등산로를 버리고 개울을 건너 대숲 우거진 축대를 따라 100미터쯤 올라가면 운흥사지다.

 

 

[운흥동천이라 불리는 반계계곡 상류]  

 

운흥사는 창건주가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아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7 년 전 범어사의 고서 소장본에 [운흥사 사적기]가 발견되면서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밝혀졌다.통도사에 버금가는 대찰이었던 운흥사는 한 때 2만여평의 경내에 59개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1천명의 승려들이 여기서 수도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때는 사명당이 이곳에 머물면서 서생포 왜장 가토와 4차례의 담판을 가졌고,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득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절터 곳곳에는 스님들이 바가지로 물뜨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대형 수조와, 발자국 소리 사뿐사뿐했을 석축들이 즐비하지만 그 위로 뚫고 올라온 나무들과 겹겹이 쌓인 흙, 그리고 억새들은 지나온 오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운흥사지 안내판 인근에서 바라본 운흥사터-봄날의 햇살만 가득하다.]

 

 

[부스러진 기왓장 무더기가 옛 영화를 전해줄 뿐...]

 

 

[완벽한 모습의 대형수조-스님들이 바가지로 물 뜨는 소리가 들릴 듯...] 

 

 

[대형수조를 살피는 친구들] 

 

 

 

[운흥사지 건너편 산자락에 들어선 신운흥사-불경을 인쇄하던 장격각터라 한다.] 

 

 

[운흥사지 들머리인 고목 아래 너른 반석으로 돌아가는 친구들] 

 

쓸쓸한 빈터에 상륜부가 떨어져나간 석탑, 주춧돌과 쓰다 남은 유물들이 한 두 점 뒹구는 절터를 돌아보며 역사를 체험한다.번성했던 절이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고 또한 끝까지 살아남은 절들을 본다.이런 윤회 속에 내가 있음을 느낄 때 사고의 확장은 점점 넓어지는 것이다. 걸어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역사는 만들어지고 있다.


운흥사는 구름처럼 신도가 많이 모였다는 곳이다.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이 절은, 19C까지 문헌에 보이다가 갑자기 없어졌다고 한다.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은 이 절은 수많은 암자와 사하촌이 어느 절보다 많았던 대가람이었으나, 지금은 부도 6기만이 두 곳에 모아져 있다. 수조와 기타 장대석 따위가 금당지에 그대로 남아있다.경판을 많이 찍어낸 절이라 골짝엔 넓적한 닥돌이 많은데, 옛날 장경각 자리엔 한 선승이 폐사지와 더불어 운흥사를 지키고 있다. 

 

해인사가 나라에서 불경을 간행하던 호국가람이라면,운흥사는 오로지 승려들에 의해 경판이 만들어진 매우 뜻 깊은 산지가람이다.정족산 너머 통도사에는 400여년 전 당시에 조성된 불경의 강의초인 경판이 보관돼 있기도 하다.정족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운흥사지 앞뜰에 이르면 제법 큰골을 이루며 계류를 형성한다.바위에 운흥동천이라 새겨놓을 만큼 아름다운 이 골짝에 봄이면 봄대로, 겨울은 겨울 나름대로의 비경이 살아난다.


원효가 이곳에 절을 지을 때 요석공주가 지아비를 못잊어 왔다는 일화도 있다.어떻든 공주가 오는 길에 편편한 바윗돌을 깔아 놓은 이 길에 어느 날 페이브먼트가 나그네를 반긴다. 갑자기 눈물이 날 지경이다.모처럼 시내를 벗어나 흙을 밟고 싶어 나왔는데 콘크리트 길 이라니.태풍에 떠내려간 징검다리는 나무나 돌을 이용한 예쁜 무지개 다리를 만들면 될 것이다. 나머지 길은 잔 자갈을 깔거나 흙 길을 그대로 두면 될 것을 시멘트 포장을 한 것이다. 시적사 주차장까지는 할 수 없이 그렇게 하더라도 그 이상은 좀더 예쁜 오솔길을 만들었으면 한다. 폐사지와 저 산 너머 누가 산다고 그렇게 포장길을 해야 하는지. 이 곳 주민들이 편편한 바윗돌을 깔아 공주가 흙을 밟지 않도록 배려한 길을 재현해 내면 더없이 좋겠지만, 있는 오솔길이라도 살렸으면 한다. 반계마을 위의 저수지 동쪽으로 나있는 길에서 선자바위로 가는 오솔길은 환상적이다.

 

운흥사터를 둘러보고 다시 등산로 갈림목으로 내려오면서 육중한 페이브먼트가 깊고 깊은 폐사지까지 따라오는 이유가 뭔지. 좀더 많은 오솔길로 그대로 두었더라면 우리의 정서는 훨씬 부드러워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저 봄기운에 갑자기 사라져버린 운흥사의 모습 또한 자꾸만 발길에 채여 걸음이 지체된다..

 

 [운흥동천 상류 페사지 아래 개울에 핀 생강나무] 

 

 

[등산로 들머리에서 운흥사 부도군으로 오르는 친구들]

 

 

[연록색 대숲이 에워산 부도군-뒤로 낙동정맥이 물결치듯 너울거리고...]

 

 

[운흥사 부고군을 등진 친구들] 

 

 

 

개울 왼편으로 열린 등산로를 따라 작은 언덕을 올라서면 홀연 눈앞이 열리면서 대숲으로 둘러싸인 운흥사 부도군이 나온다.

 

운흥사 부도(浮屠)는 모두 7기가 있었다던데 한기는 반계(盤溪) 마을 입구에 있고 또 한기는 절터로 올라가는 중턱에 반은 매몰된 채 있다. 이 부도(浮屠)는 관음사(觀音寺)에 있는 두기의 부도(浮屠)로 모두 운흥사의 것이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이 부도는 본래는 다른 곳에 허물어져 있었던 것을 옮겨 왔다는 것이며 부도 앞에는 「扶宗樹敎 鶴山堂碩寬大師 崇禎後再 己卯九月 立」이라고 한 석비가 있으나 이 비 또한 옮겨온 것으로써 부도와는 직접 관계가 없다.부도(浮屠)의 양식은 지대석(地臺石)이 없고 고사리무늬의 대석(臺石) 위에 앙연화대좌(仰蓮華臺座)를 받쳐 탑신을 얹었는데 탑신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앙연화대좌를 받치고 있는 대석은 연화대보다는 적어 안전감을 잃고 있으나 본래는 이 하부에 기대석 같은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진다.세워진 연대는 조선조로 보이며 석종형 부도인데 지정문화재로는 되지 못하였다. 

 

 

[덩그러니 님은 탑의 기단석과 부도의 연화대좌] 

 

 

[운흥골 산등에는 조릿대와 푹신한 낙엽이 지천으로..]

 

 

[생강나무 움트는 그 너머로 대운산이 아련하고...]

 

 

 [정족산 아래 660봉에서 굽어본 운흥사터와 반계저수지]

 

 

[정족산 동쪽 660봉에서 바라본 정족산]

 

 

 [660봉에서 천성산 2봉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마루금] 

 

 

*산행기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낙동정맥으로 떠납니다.

 

여러분들께 양해의 말씀 드리며 토요일 늦게 인사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